등록 : 2014.01.05 18:18 수정 : 2014.02.04 10:50

1997년 외환위기 뒤 부동산 붐과 함께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고, 대구에도 주상복합건물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지지부진하던 재개발 계획이 3년 만에 취소된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빚만 2억원이 남았다. 대구의 한 주상복합아파트 건설 현장.한겨레 자료
어머니는 신혼 초부터 꾸준하게 기록해온 가계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기록은 어머니의 기억 속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어머니가 들려준 저축의 개인사를 옮겨보려고 한다.

어머니는 1952년생이고 친구의 소개로 아버지를 만났다. 1969년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1976년 말에 결혼할 수 있었다.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험난했다. 아버지는 1967년 집에서 독립해 경북 포항의 한 운수업체 정비 공장에 들어가 정비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일을 배우는 동안은 월급을 받지 못했다. 6개월 수습이 끝나고 조수가 되자 첫 월급이 7천원이었다. 아버지는 1969년 대구에 본사를 둔 다른 운수회사로 옮겨 대형 버스 조수로 일했다. 포항에 사는 어머니와는 버스 노선이 이어주는 장거리 연애를 했다.

200만원 곗돈 타 마련한 부모님 신혼집

1972년, 아버지는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지입용 택시를 100만원에 계약했다. (지입제도란 개인이 차량을 구입·등록하고 사용에 대한 권리금과 매월 일정한 관리비를 납부하며, 그 운송회사에 소속된 차량처럼 영업행위를 하는 형태다. 택시 같은 여객 업종은 이를 일찍부터 금지해왔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편법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신진자동차가 일본 도요타를 통해 들여온 코로나 택시였다. 30만원을 계약금으로 주고 나머지 70만원은 벌어서 갚기로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때 결혼을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외의 사고가 터졌다.

아버지는 택시를 마련하느라 진 빚을 하루빨리 갚고자 잠을 아끼며 일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대구 서문시장으로 포목을 떼러 가는 사람들을 태우고 가던 새벽길에 그만 사고가 난 것이다. 승객 5명이 합쳐 18주 진단이 나왔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는 당시 무면허로 운전했던 것이다. 아예 무면허 운전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면허시험에 합격하고 운전면허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이었으나, 잠을 아끼는 마당에 하루를 허투로 허비할 수 없다며 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사고는 면허증이 나오기 불과 이틀 전에 벌어졌다. 아버지는 구속돼 5개월20일을 복역했다. 이 일을 치르느라 변호사 비용과 여기저기 뒷돈을 대다보니 출소한 아버지를 기다린 것은 빚 30만원이었다.

다시 운수회사로 돌아온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기 위한 계획에 들어갔다. 둘은 방 하나 얻을 돈만 모으면 바로 결혼할 생각이었다. 당시 아버지의 기본급이 3만원, 따로 받는 숙박비와 그 외 부수입 등을 동원하고 어머니의 수입을 합쳐 돈을 모았다. 돌파구는 계에 있었다. 계는 목돈이 급한 사람이 먼저 돈을 타고 마지막 계원이 돈을 탈 때까지 이자를 낸다. 돈 타는 순위가 뒤로 밀릴수록 고리의 이자를 받는 원리다. 어머니는 한 달에 5만5천원씩 20개월을 부어 총 200만원을 만들었다.

이 200만원으로 부모님은 결혼했다. 우선 대구 효목동에 방 하나, 점포 하나 그리고 부엌 하나 있는 집을 2년 계약으로 전세 60만원에 구했다. 약 10평(33.1m²) 되는 방과 7평(23.1m²)짜리 점포에 화장실은 두 집이 함께 썼다. 분식집을 하고 있던 점포는 시설비와 권리금으로 3만원을 더 주었다. 결혼비용으로 70만원을 쓰고 10여만원을 비상금으로 남긴 채 가전제품 등은 나머지 돈으로 마련했다. 장롱은 큰고모할머니가, 살림 일부는 할아버지가 보태준 3만원으로 마련했지만 그 외엔 가족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어머니는 결혼비용으로 쓰기 위해 곗돈을 미리 받아 아직 갚아야 할 돈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점포를 빌려 장사할 생각이었다. 결혼 뒤 한 달이 지나 장사를 시작해 떡국이나 라면, 빵, 우동 등을 팔았다. 그러나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결혼 이듬해 운수회사 정비사로 정식 입사했다. 첫 월급이 2만7천원, 추석과 설에 명절 떡값을 받았다. 서울에서 대기업 사원의 월급이 20여만원, 자장면 한 그릇 값이 200원이던 시절이었다.

곗돈과 함께한 우리 집 이사의 역사

우리 가족의 이사 경력은 어머니의 계의 역사와 함께한다. 신혼살림을 시작한 동네는 아버지 직장 동료들이 함께 살았다. 자연스럽게 직장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됐다. 매일 얼굴을 보고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끼리 4부 이자인 계를 부었다. (4부 이자면 한 달 이자가 4%라는 뜻이다. 1년으로 환산하면 48%가 된다.) 어머니도 동네 아주머니들과 집을 늘려나가고 저축을 하기 위해 계를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고 한다.

1978년 신혼집의 전세 계약이 끝나자 근처 방 2칸짜리 주택으로 이사했다. 큰방은 4평(13.2m²), 작은방은 2평(6.6m²)에 화장실을 단독으로 쓸 수 있었다. 전세금은 100만원이었다. 작은방에는 대구에 유학 온 아버지의 여동생이 기거했다. 할아버지는 여동생을 맡은 우리 집에 매달 쌀 한 말을 보냈다. 거기에 조금만 보태면 우리 식구가 먹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 시절 한 달에 1만원도 안 되는 식비를 썼다. 반찬은 가장 싼 채소인 호박을 사서 고추장이나 된장과 함께 먹었다. 아버지는 호주머니에 10원 하나 넣지 않고 회사에 다녔다. 나머지는 모두 계를 통해 저축했다. 그 결과 1년 뒤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2층 단독주택을 전세 150만원에 얻었다. 방이 2칸인 13평(43m²)짜리 집에는 마루와 주방,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계로 저축하고 이자 받는 재미에는 시련도 있었다. 큰고모할머니의 딸, 아버지의 고종사촌에게 돈을 떼인 것이다. 사연은 이러했다. 어머니의 계에 참여한 고모는 어머니에게 돈을 빌렸다. 어머니가 곗돈을 부어 만든 360만원과 동네에서 우리 집과 가족보다 친하게 지낸 집에서 200만원을 빌려갔다. 역시 4부 이자를 받아준다는 명목이었다. 거기에 함께하던 계에서 미리 탄 돈까지 모두 800만원을 빌려갔다. 1982년 어머니의 생일에 돈을 떼인 것을 알았다. 돈을 빌려간 고모는 당시 섬유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상한 마음에 고모 집으로 돈을 받으러 갔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공장은 부도나고 집은 난장판이었다. 당시 220만원짜리 전세보증금이 재산의 전부였던 우리 집은 모든 것을 잃었다. 어머니 친구가 떼인 돈 200만원까지 대신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신혼 초에 잠시 하다 접었던 장사를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동네에서 슈퍼마켓을 하자는 생각으로 상가를 얻으러 다니다 할머니 혼자 꾸려가는 장사가 안 되는 횟집 하나를 발견했다. 어머니가 보기에 이 집이 곧 세로 나올 것 같았다. 장사를 처음 결심했을 때 횟집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순전히 몇 가지 실마리가 다였다. 우선 세로 나온 적당한 곳이 횟집이었고, 다음은 우리 집의 맛있는 초장이었다. 아버지는 회사 동료들과 포항에서 회를 떠다가 우리 집에서 함께 먹곤 했다. 그때마다 동료들이 우리 집 초장 맛을 칭찬했던 것이다. 1982년 9월, 9평(30m²) 상가에 1.5평(5m²)짜리 살림방이 딸린 횟집을 보증금 100만원, 월세 10만원에 계약했다. 탁자 5개와 수족관 2개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55만원을 더 냈다. 권리금은 따로 없었다. 우선 장사를 하기 위해 이웃들에게 190만원을 빌렸다. 이 돈은 살던 집 전세금 220만원을 빼서 한 달 만에 갚았다. 아버지의 월급으로 생활하고 가계에서 번 돈으로 고모가 먼저 받아 떼먹고 간 곗돈을 갚아나가기로 하고 횟집의 단칸방으로 들어갔다.

장사는 성공적이었다. 먼저 횟집을 운영하던 할머니는 부근에 횟집이 없고 선생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 한번 해보라고 권했었다. 과연 이전까지 장사가 안 되던 이유는 자리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새벽에 포항 죽도시장에 가서 갖가지 회를 떠와서 팔았다. 회덮밥을 점심 식사로 내고 찌개와 회를 팔았다. 당시 찌개는 2500원, 회 한 접시에 5천원을 받았다. 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 한 명을 고용하고도 빚을 갚아나가며 다시 저축할 수 있었다. 장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이웃과 돈을 모아 포항에 2500만원짜리 상가를 하나 마련하기도 했다. 4부 이자를 주는 계를 계속하고 재형저축을 들었다. 당시 장기저축 중 가장 유리한 재형저축(목돈마련저축)은 3년 만기 연 22.9%, 5년 만기 23.9%를 이자로 주었다. 이율이 계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계에 수반되는 위험이 없었다. 이렇게 8년을 버티고 나자 가계를 넓혀 이사할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IMF 외환위기로 시작된 대출

1990년 새 가게로 이사했다. 30평(99.1m²) 규모의 가게를 전세 4500만원에 얻었다. 저축으로 모은 돈 900만원과 할아버지의 포항 집을 담보로 마을금고에서 빌린 돈 1500만원에 함께 계를 하며 친하게 지내던 이웃들의 도움으로 가게 전세금을 마련했다. 좋은 시절이 왔다. 생활은 아버지의 월급으로 충분했고, 하루에 번 수입을 모두 은행에 넣을 수 있었다. 한 달에 순수입이 300만원도 넘었다. 1년6개월 사이에 1억5천만원 정도를 벌었다. 이제 제대로 된 집에 살 차례가 된 것이다.

1990년대 초, 대구에도 아파트 붐이 일었다. 어머니도 청약저축에 가입한 상태였다. 이웃의 소식에도 귀가 솔깃해졌다. 어머니의 친구는 대구 범물동의 한 아파트를 5700만원에 분양받았는데 입주도 하기 전에 분양권 가격이 7천만원으로 뛰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영남일보>와 <매일신문>에 실리는 분양공고를 보고 청약할 아파트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첫 시도였던 범물동 아파트는 청약 신청에서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대신 남산동의 송림아파트 34평(112.4m²)을 8900만원에 분양받았다. 장사해서 번 돈을 모두 저축한 결과, 빚 하나 지지 않고 분양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아파트는 횟집과 거리가 멀었다. 결국 입주 시기가 다가오자 아파트를 전세 놓기로 결정했다. 새 집에 들어가는 일은 포기했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경기가 좋고 장사가 잘되자 식당 전세보증금이 크게 뛰었던 것이다. 1993년 3월, 상가 주인은 4500만원이던 전세금을 1억3천만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분양받은 아파트를 전세 놓아 받은 6천만원을 고스란히 가게 전세금으로 돌려야 했다. 이때 부모님은 가게든 집이든 반드시 자기 소유의 집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사는 잘됐지만 벌어서 모은 돈이 족족 전세금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1995년 말 수성구청 옆 주택가의 2층 주택을 2억2천만원에 샀다. 대지 면적 68평(224.8m²)에 건물 면적 50평(165.3m²)이었다. 1층은 횟집을 위한 상가였고, 2층은 주택이었다. 대지 모양이 자루 형태로 좋지 못했지만 준상업지역으로 풀린 것이 선택의 결정적 이유였다. 횟집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드디어 우리 명의의 가게를 갖게 되었다. 매매대금은 이전 가게 전세금 1억3천만원에 저축을 보태 빚 없이 치를 수 있었다. 대신 횟집을 열기 위해 새로 시설을 갖추고 수리를 해야 했다. 저축 3천만원에 은행에서 대출받은 5천만원을 합쳐 집을 고쳤다. 1996년 4월, 새로운 횟집의 개업과 함께 우리 가족도 이사했다.

1997년 봄, 분양받은 아파트를 1억1500만원에 팔았다. 그리고 20년을 이어오던 어머니의 저축 시대도 종언을 고했다. 힘들었던 검소한 생활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퇴사가 뒤를 따랐다. 1998년 5월, 정비 관리자로서 과장직까지 올라갔던 아버지는 사표를 쓰고 회사에서 나왔다. 정비 관리자는 정비소에 자리가 있어야 하는데도 아버지의 자리는 본사에 있었다. 정비소로 가고 싶었지만 정작 그곳에는 자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때 이곳이 자신이 오래 앉아 있을 자리가 못 된다고 느꼈다. 회사에서 나올 때는 변두리에서 카인테리어 공장을 하나 차려 일을 계속했으면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의 공기는 차가웠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방식으로 대응해야 했다.

2002년 아버지는 큰아버지와 함께 각각 1억3천만원을 마련해 2억6천만원에 앞집을 샀다. 1억3천만원 중 1억원은 대출로 충당했다. 대지 면적 63평(208.3m²)에 건물 면적 50평(165.3m²)으로 기존 우리 집과 유사한 물건이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집은 도로에 면한 부분이 좁아 식당을 하기엔 다소 불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앞집에 새로 식당을 연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버지는 이 가게가 생기면 우리 횟집이 큰 타격을 입으리라는 생각에 급히 건물 구입을 결정했다. 이 시기부터 우리 집도 본격적으로 빚을 지기 시작했다.

취업 5년 만에 대출 끼고 마련한 내 집

새로운 기회는 위기 이후 다시 돌아온 부동산 붐과 함께 찾아왔다. 대구에도 주상복합건물을 짓는 바람이 불었다. 2004년 즈음 우리 집이 있던 큰길 건너편 블록을 두산에서 1500가구 규모의 주상복합으로 재개발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 집에도 개발업자가 드나들었다. 2006년 2월, 다른 개발업자가 와서 우리 집 부지를 30억원에 사겠노라며 계약금 3억원을 주고 갔다. 이때 받은 계약금을 그대로 묵힐 수는 없었다. 이미 은행 금리는 그 전과는 비할 수 없이 낮아져 있었다. 2006년 11월 택지개발로 조성된 땅에 지어진 45평(148.8m²)형 롯데아파트를 5억6100만원에 분양받았다. 계약금 5610만원을 내고 3년이 지나 2009년 11월에 완공됐다. 그사이 우리 집이 포함된 재개발 계획은 지지부진하더니 어느덧 식어버린 부동산 경기에 개발이 취소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실로 짧은 바람이었다. 분양받은 아파트마저 가격이 떨어져 2010년 4억9천만원을 받고 팔았다. 중도금 대출 등으로 이자를 내느라 재개발 계약금으로 받은 것을 모두 날리고도 빚이 2억원 넘게 남았다.

나는 재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한 2003년 말에 첫 직장을 얻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입사 초기에는 정신이 없어 저축을 계획할 틈이 없었다. 그저 돈 쓸 시간이 없어 통장에 돈이 남는 것이 고작이었다. 청약저축도 어머니가 들어준 것이었다. 다른 직장인처럼 재테크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던 내가 요즘 같은 저금리 상황에서 은행을 통해 저축해봐야 월급통장에 방치하는 것과 크게 다른 금액을 모으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신 저금리 기조가 계속되자 5년을 이어온 세입자 생활을 빠르게 청산했다. 2008년, 나는 집을 사기로 결심했다. 서울 영등포구에 자리한 19평(62.8m²)형 아파트를 전세보증금 8500만원에다 저축과 집에서 받은 5500만원을 보태고 대출을 받아 2억4500만원에 구입했다. 대출금 1억500만원은 연 6.8% 고정금리, 30년 매달 원리금 분할상환 조건으로 정부에서 출시해 은행이 대행 판매하는 대출상품이었다. 최근에는 더 낮은 금리의 대출로 바꾸었다.

2013년 현재, 우리 가족은 모두 대출금을 착실하게 갚아나가고 있다.

아버지·어머니 (이자를 내느라) “돈이 들어갈라 카니까, 정말 물 쏟아붓는 것처럼 들어가더라.”

아버지 “부모한테 유산받은 거 10원도 없고. 여물게 해서 자산도 불리고, 자식들도 학교 다 시키고 했다. 너거 엄마가 오봉(쟁반) 드는 것보면 내가 아직 가슴이 아프다. 우예 보면 행복하고. 자산은 있다. 경매로 팔아도 돈 10억원은 넘는다. 집 2개, 촌에 논 2개, 산소 하나. 우옜든 간에 재산은 지금 팔아도 10억원이사 넘는다. 사실 행복하다. 운동하면서 살 수 있고. 너거 욕 안 보이려고 운동도 많이 하고. 우리가 이 나이에 아직까지 병원 한 번 안 가고 산다. 잔병 없이. 너거 엄마는 간혹 한 번씩 칸다. ‘남들은 외국도 한 번 가고 카는데….’ 내가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매주 같이 산에 가고 같이 운동하고 그런다. 현금을 못 쥐니까 아버지·어머니 맘대로 쓰질 못하니까 그게 그렇지.”

어머니 “인터뷰하면서 뒤돌아보니까, 우리 식구 너이가 다 고생했잖아. 그 속에서 너거가 착하게 커줬고, 그게 젤 큰 보람이다. 남한테 짜들어 욕 안 먹고 살아왔고. 지금은 걱정이지만, 그래도 당장 쫓겨날 것도 아니고. 빚은 누가 주나? 꺼리가 있으니까 빚을 주는 거지.”

구술 김동현·정리 박재현

주택 구매 여력이 있다고?

2013년 12월3일, 정부는 또다시 전·월세 대책을 발표했다. 박근혜 정부의 최대 주택 공약인 행복주택을 20만 가구에서 14만 가구로 6만 가구를 축소하고, 2014년부터 국민주택기금에서 지원하던 근로자·서민 주택구입자금, 생애최초 주택구입자금과 주택금융공사가 취급하던 우대형 보금자리론 등 정책 모기지를 하나로 통합해 연간 11조원의 지원금을 국민주택기금을 통해 저리로 공급한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같은 날 금융연구원과 서울대 금융경제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전·월세 시장구조 변화와 가계부실 가능성’ 콘퍼런스에서 김영식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와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등은 “상당수 전세자금 대출자는 주택 구매 여력이 있으나 전세를 이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주택 구매를 위한 초기 자금 축적이 어렵지만 대출을 감당할 수 있는 40대 미만 가구주가 주택을 구매하기 용이하도록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근 발표된 ‘2013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22.6%를 차지하는 전세 거주자는 평균 2억800여만원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약 5600만원의 빚을 지고 연간 650만원의 원리금을 부담하고 있다. 전체 가구의 15.7%를 차지하는 월세 거주자는 평균 3880여만원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평균 2천만원의 빚을 지고, 연간 360만원의 원리금을 부담하고 있다. 2012년을 기준으로 전국에는 약 1800만 가구가 있으며, 주택보급률도 100%를 넘어 약 1800만 채의 주택이 있다. 주택가격동향조사를 맡고 있는 한국감정원이 2013년 7월에 발표한 전국의 평균 주택 가격은 약 2억3천만원이다. 이제 이 숫자들을 가지고 조금은 단순한 계산을 해보자.

전국에 있는 1800만 채의 주택 중에 다주택자가 전·월세 세입자에게 임대하고 있는 주택은 38.3%인 약 690만 채로, 여기에 평균 주택가격을 곱하면 임대용 주택의 시가총액은 약 1580조원이다. 여기에 세입자의 총자산은 모두 임대보증금이라고 단순 가정하면 임대보증금의 총합은 약 470조원이다. 이들 모두 임대용 주택을 매입해 자가 거주자가 되려면 1110조원이 더 필요하다. 부동산 시장의 회복을 위해 세입자 모두가 주택을 구매하려고 나설 필요는 없지만,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계산을 계속해보자.

세입자 가구가 주택을 구입하기 위해 1110조원을 부채로 조달한다고 치자. 자가주택 가구가 부담하는 원리금 비율을 이 새로운 부채에 적용해보면 세입자 가구가 부담할 연간 원리금 총액은 약 132조원, 가구당 1900만원에 이른다. 전세 가구는 평균적으로 연소득 4475만원, 월세 가구는 2713만원을 번다. 이 중에 이미 지고 있는 빚을 갚기 위한 원리금 지출액을 제하면 전세 가구는 3825만원, 월세 가구는 2353만원이 남는다. 통계청에서 작성하는 가계동향조사에서 가구당 평균적으로 지출하는 소비지출액이 한 달에 약 250만원, 1년이면 3천만원이다. 이제 이 숫자들을 조감하면서 세입자들이 주택을 구입하기 시작해 부동산 시장을 살리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뭘 망설이는가. 세입자인 당신에게는 주택 구매 여력이 있다지 않은가. 글 박재현 아파트 키드 생애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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