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1:39 수정 : 2014.06.09 17:31

터프가이가 돌아왔다. 단, 하드코어하고 마니악한 터프가이가 아니라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예능 친화적 능동형 터프가이’다. 의리 하나로 그 계보를 이어받은 김보성의 인기는 철저히 도구적이고 상업적인 현실에 대한 반감과 닿아 있다. 한겨레 자료
이 시대 터프가이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미국식 액션이나 하드보일드에 등장하는 허구적 터프가이들이 아니라, 이 나라 군필자의 대표적 상징이자 그 남성성의 상징적 기호인 우리의 터프가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이 궁금함의 기원이라면 아마도 지난 시즌 를 보면서부터였다고 기억하는데, 문득 리듬앤드블루스 취향의 밀도 높고 매끈한 목소리들 속에서 거칠고 터프한 그야말로 테스토스테론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정말 즐겁고 재미있게 그리고 흐뭇하게 버나드 박의 우승을 지켜보았지만, 그 경연 뒤에 정작 내가 찾은 노래들은 시나위와 외인부대 시절의 임재범이나 해리빅버튼의 이성수의 목소리였다.

때아닌 마초 타령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문득 그들이 그리워졌다. 그 많던 터프한 ‘아’들은 지금 다들 어디서 무얼 하는지 궁금했다. 인터넷과 유튜브를 뒤져 임재범의 영상을 찾아보고, 박완규의 자료를 살펴보았으며, VOD 서비스로 <러닝맨>, <라디오 스타>(2012년 4월, 2013년 12월)와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최민수 편(2013년 2월)을 보았다. 다시 봐도 역시 부담스러운 ‘아’들이긴 했다. 그래도 왠지 꾸역거린 찐고구마 끝에 먹는 김치 한 조각처럼 오히려 시원하고 신선했다. 마침 김보성의 음료수 광고를 보았고, 무릎을 치는 순간 이미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최근 몇 년은 터프가이들의 귀환이 나름의 흐름을 이어가는 특별한 문화적 사건의 계열적 국면을 형성하고 있다. 2008년 9월24일 <라디오 스타>의 김태원 출연이 이 국면의 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라디오 방송 때문에 함께 출연한 김흥국이 일찍 자리를 떠난 탓으로 그 시간은 온전히 김태원의 것이었고, 그렇게 그는 공중파 예능에서 자기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의 등장은 터프가이들의 귀환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로커의 자존심을 인정욕망과 경제적 필요와 맞바꾼 덕에 우리는 오랜 기억의 무덤 속에서 ‘그들’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2012년 이른바 ‘왕의 귀환’이라 칭하며 마초적 목소리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임재범이 <나는 가수다>로 귀환하더니, 이어서 박완규가 돌아왔다. 임재범이나 박완규와 다른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김도균이 <세바퀴>에 기타를 들고 나타났고, 그 뒤를 이어 가죽옷을 차려입은 유현상이 역시 같은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했다. 그리고 이른바 이태원 노인 폭행사건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최민수가 오랜 산중 칩거를 마치고 노래와 예능으로 텔레비전에 돌아왔다. 터프가이들의 귀환이 어떤 국면들로 나뉠 수 있다면 아마 여기까지가 첫 번째 국면이 될 것이다.

터프가이들의 두 번째 국면은 지난해 말 <1박2일>(KBS)에 합류한 데프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그들의 귀환이 이어져 달린다면 두 번째 국면의 첫 주자는 아마 그가 될 것이다. 데프콘이 처음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한 건 2011년 4월 <무한도전>에서라고 한다. 이후 MBC에브리원의 <주간 아이돌>과 MBC <나 혼자 산다>를 거쳐 <1박2일>에 진입했다. 그를 터프가이들의 ‘두 번째’ 국면으로 갈라 세우는 이유는 그 캐릭터가 이전의 김태원·임재범·박완규·최민수 등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와 비슷한 경향으로 생각할 만한 다른 터프가이를 이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프콘이 이전의 터프가이들과 다른 점이라면 무엇보다 예능 게스트로서 과거의 향수와 기억을 기반으로 다만 ‘출현했다는 것’으로 의미를 획득하고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거물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물론 데프콘은 힙합 신에서 ‘갱스터 랩’의 지존으로 군림하던 유명 뮤지션이었고, 그 음악적 성취와 문제의식 그리고 메시지 또한 결코 가볍지 않은 비중 있는 아티스트였다. 더구나 그 이미지는 너무나 거칠고 직설적이며 저항적이고 대담해서, 지상파 오락 프로그램에서 처음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살았던 이전의 터프가이들과 다르게 그는 처음부터 비주류였고, 그러므로 더욱 능동적으로 예능에 임하는 새로운 범주의 터프가이다.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자면 모호한 면이 있기도 하고 또 데프콘과 딱히 합동으로 포개지는 이미지는 아니지만, ‘의리’ 김보성의 귀환이 나름 예능 친화적 능동형 터프가이의 어떤 계보를 그릴 수 있게 해준다. 김보성의 음료수 광고는 그 자체로 예능은 아니나, 예능 코드를 가지고 있다. 그 광고 영상이 직접적인 연출과 연기를 통해 만들어진 콘텐츠라는 점에서 그의 예능적 귀환은 데프콘과 마찬가지로 능동형이라 할 수 있다.

데프콘의 적극적 예능이나 김보성의 ‘의리’는 분명 이전의 터프가이들에게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경향이다. 좀더 능동적으로 테스토스테론의 과다 분비에서 비롯한 거칠고 삭막하고 억세고 뻣뻣한 이미지를 벗겨내고 자신을 우습고 재미있는 사람으로 재구성하는 전략적 기획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드코어한 취미와 마니악한 추종자들에 의해 그나마 지탱되던 터프가이들의 시대가 지난 건 오래된 일이다. 우리의 대중문화 전반은 터프가이들에게 호의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걸 좋은 일이라고, 혹은 잘못된 일이라고 판단하긴 힘들다. 어떤 면에선 긍정적이고 또 다른 면에선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왜 그들이 귀환하는지, 그들의 귀환이 테스토스테론의 희석, 남성성의 거세 혹은 마초적 상징들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그들을 다시 봐야 하는가?

터프가이들의 귀환은 한편으로 재귀적인 상황이다. 희석하고 희화해서라도 다시 봐야 하는 최민수나 김보성의 ‘허세’, 전성기가 한참 전에 꺾인 로커들의 ‘자존심’은 어쩌면 대놓고 천박한, 뼛속까지 상업적이고 무차별하게 도구적인 이 시대에 대한 염증을 일시적으로라도 피해가기 위한 대증 처방일지 모른다. 소독하고 세척해서라도 ‘의리’로 바보가 되고, 자존심으로 가난에 찌들었던 그들을 통해 그나마 지금 삶의 위안거리라도 찾아보려는 심리적 동인이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있지는 않은지. 언제까지 이 명분 없는 시대를 견뎌야 하는 건지 몰라도, 하루라도 빨리 속 깊고 단단한 삶들이 ‘허세’라고 비웃는 가장된 그리움 속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안이 없는 삶은 피곤하고 고달프기 마련이다.

글 박근서 대구가톨릭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나름 학생들의 좋은 친구가 되려 애쓰고 있다. ‘텔레비전 코미디’로 학위를 받았고, 요즘 주된 관심사는 비디오게임이다. 닌텐도에 우리를 구원할 영성이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