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7 20:18 수정 : 2013.12.12 15:07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예.”

사진을 보자마자 얼굴을 흔들고 고개를 숙였다. 단호한 말투였다. 필요 이상으로 단호했다. 하얀 야구모자 아래 숨은 눈빛은, 사진을 보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똑같이 답한 수십 명의 시장 상인들이 내비쳤던 의아함과 달랐다. 당혹감이었다. 곧 두 눈이 촉촉해졌고,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러자 호기심에 사진을 보기 위해 모인 상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흩어졌다. 이제 그녀만의 시간이 남았다. 상인들은 개입할 수 없었다.

2007년 12월 2일 한국방송 TV에 한 청년이 출연했다. “진짜로, 살려주이소”라고 말을 꺼냈다. 17분 동안 연설했다. 그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다고 했다. “2002년 치른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찍은 어머니는 차가운 시장 바닥에서 좌판을 하고 있고, 친구는 지 손모가지를 탁 잘라버리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청년백수’라고 칭한 이영민(34)씨였다. 찬조연설에서는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나라, 일자리 넘치고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를 약속한 이명박 후보, 전 당신의 약속을 믿습니더. 제발, 살려주이소”라며 말을 맺었다. 그에게는 대통령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메시아였다.

인터넷에는 이명박 후보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이씨에게 실은 비난 글이 폭주했다. “주섬주섬 뻔한 스토리 엮어놨다. 연설자도 위장이니…”, “부산에, 저 나이에, 저런 사투리 쓰는 사람이 있나? 연기하는 듯”이란 의혹이 제기됐다. “저렇게 징징대니 취업이 될 리가 없다”는 냉소도 나왔다. 가족에 대한 비난도 쏟아졌다. 방송 다음 날 아침 이씨는 이명박 후보 선거캠프에서 만든 인터넷 블로거 기자단 ‘엠비포터’(mbpoter)와 인터뷰했다. “제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가족 이야기까지, 제 콤플렉스까지 꺼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잠적했다.

잠적은 의혹을 배가했다. 2008년 12월 한 누리꾼이 블로그에 “1년 전, 전 국민을 상대로 하여, 품질이 기준 이하인 정치인을 팔아먹어 나라를 고통에 빠뜨리는 데 기여한 뒤 잠적한 이영민을 공개 수배합니다”라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됐다. 동명이인이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이명박 응원하더니 결국 조선일보에 입사했다”는 잘못된 사실이 진실인 양 흘러다니기도 했다. 2009년 11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는 부산이 지역구인 이진복 한나라당 의원이 찬조연설 동영상을 틀고 청년실업 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이 의원도 이씨를 찾는 데 실패했다. 인터넷 보수 매체 <데일리안>과 진보 성향 주간지 <시사인>도 “수소문했으나 이씨를 찾지 못했다”는 기사만 내보냈다. 사진 한 장과 이름 석 자만 있으면 그 사람의 주소와 가족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자동차번호는 무엇이고, 어떤 헤어숍에 다니는지까지 개인 신상이 모조리 ‘털리는’ 시대에, 그의 잠적은 신기한 일로 인식됐다. 그러자 번듯한 회사에 취직한 뒤 이름을 바꾸고 잘 살고 있을 것이라는 설이 일반화했다.

“뽀삐 언니네 집 아들 아이가?”

“아이다, 가는 얼굴이 더 퉁퉁하지. 이렇게 이쁘게 안 생겼지.”

“맞다니까. 그 집 아들이 몇 번 여기 와서 내가 봤다 아이가. 딱이구만.”

“아이고, 아이라니까. 가는 이제 대학 졸업할랑말랑하는데…. 몇 살이랍니꺼?”

“당시 서른 살이라 했으니, 지금 서른다섯쯤 됐겠네요.”

“거 봐라, 내 말이 맞다 아이가. 뽀삐 언니네 집 아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잖아.”

“아인데, 억수로 얼굴이 마이 익은데. 안면이 있는데….”

지난 7월 17일 부산 ○○시장. 좌판 상인 둘이 사진 한 장을 두고 고성이 오갔다. 이영민씨가 출연한 방송을 캡처해 프린트한 사진이었다.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 어머니가 이 시장에서 반찬 좌판을 한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혹시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상인들은 때론 고개를 바로 저었고, 때론 “안면이 있는데…”라고 말끝을 흐렸으며, 때론 누구네 아들이라며 논쟁을 벌였다. “이 사람이 무슨 사고 났습니까? 우짜노”라며 지레 울상을 짓는 상인도 있었고, “경찰이에요?”라며 의심 담은 눈초리로 되묻는 상인도 있었다.

이씨를 찾는 과정은 지난했다. 이씨를 섭외해 찬조연설에 내세운 새누리당에서도 이씨의 현재 소식을 아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새누리당 관계자가 알려준 이씨의 011 전화번호는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답만 들려줬다. 그의 어머니가 있다는 시장을 무작정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꼬박 사흘을 물어보고 다녔다. 그만하고 서울로 돌아가자 싶을 때쯤, 시장 좌판 골목 끝에서 이씨 사진을 보자마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와 마주했다. 이씨의 어머니였다. 끝이 살짝 처진 눈매, 짧은 콧대와 둥근 콧날, 좁은 입매와 두꺼운 입술에 이씨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사진을 들고 온 시장을 돌아다니며 영민씨를 ‘수배’한 사실에 이씨 어머니는 강한 분노를 드러냈다. “정말 불쾌하네예, 왜 우리 아들 사진을 가지고 다닙니까. 기자라 하지 않고 그냥 친구라 카던지. 시장에 얼마나 말이 많은데…. 얼른 가이소.” 그 분노가 기자를 향한 것인지, 대통령을 향한 것인지, 세상을 향한 것인지 가늠이 안 되었다.

이씨 어머니는 계속 손사래를 치다, 결국 리어카 뒤 1평(3.3㎡) 정도의 구석 공간으로 몸을 숨겼다. 시장 상인들은 그곳에다 못쓰게 되어 버리는 상자를 가져다줬다. 반찬 장사만으론 수입이 모자라 헌 종이를 모아서 한 달에 한 번씩 판다고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터뷰는 7월19일과 9월10일 두 차례에 걸쳐 모두 5시간가량 이어졌다.

이영민씨 아버지는 부산 경남 지역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했다. 영민씨도 아버지 일을 도왔다. 영민씨가 지역의 한 4년제 대학에 입학한 1997년 이전까지 가족의 삶은 풍요로웠다. “넘 부럽지 않게 귀하게 키웠”고, “메이커 옷만 사 입혔다”고 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지역의 건설회사가 속속 무너졌다. 아버지 회사도 견디지 못했다. 등록금 낼 돈이 없어 학교에서 제적당해, 군에 입대해야 했다. 찬조연설에서 “신검 때 행여 탈락할까봐 뭘 하나 물어도 목청껏 대답했다”는 영민씨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제대 뒤에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당뇨병과 고혈압이 심해졌고,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쳤다. 몸을 요양하기 위해 홀로 시골의 고향 마을로 옮겨 앉았다. 2002년 대통령 선거는 세상이 바뀔 수 있는 신호로 여겨졌다. 절망에 처한 영민씨 가족에게 대통령은 갈증을 해갈해줄 메시아였다. 영민씨 어머니는 “이제 세상 좀 뒤집어질 거다. 없는 사람들 숨통 터주는 그런 세상이 올 거다”라며 영민씨와 네 살 아래 여동생을 데리고 함께 노무현 후보를 찍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2004년께 시장에 반찬 좌판을 깔아야 했다. 어머니의 고모가 시장에서 30년 동안 장사한 인연으로 겨우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회 장사와 붕어빵 장사에 이은 장사였다. 볶은 오돌뼈, 무친 깻잎, 양념한 젓갈 등이 리어카에 빼곡히 있었다. 영민씨와 여동생은 입버릇처럼 “우리가 이렇게 컸는데, 엄마를 이런 데 앉혀놓는 게 너무 부끄럽다”고 했다. 공사장 막노동을 하던 영민씨는 바뀌지 않는 세상에서 대학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가장’ 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전문대를 입학했다.

2007년 2월 졸업했지만, 취직이 되지 않았다. 그는 “(디자인) 전공 분야에선 남자라고 밀리고, 사무직에선 지방 전문대라고 밀리고, 자존심 버리고 지원한 생산직에선 나이가 많다고 밀렸다”고 했다. 원서 낸 곳만 100군데 정도다.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에 하소연 글을 올렸다. 그때만 해도 ‘독채 전세’에 살던 때였다. 2007년 11월, 경남의 한 한나라당 지역구 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영민씨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본 것이다. 영민씨는 오래 고민했다. 정규직으로 월 150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한 경비회사 출근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한나라당에서 “경비회사보다 더 좋은 직장을 보장하고, 더 좋은 데로 구해주면 안 됩니까”라고 말했다. 영민씨는 월 150만 원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어렵겠다 싶었다. 방송 출연을 하러 서울에 가면서도 찬조연설 출연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저 “엄마, 내 어디 좀 갔다오께. 내일 일하러 가는데, 잘 되면 다행이고예. 엄마 갔다 와서 보입시더”라고 말했다. 10년 된 단벌 양복을 챙겨 입고 먼길을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이 어머니에겐 사뭇 의아했다.

방송 며칠 뒤 영민씨는 잔뜩 풀이 죽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여동생이 방송을 봤고, 인터넷 반응도 살폈다고 한다. 방송 이후 인터넷에는 영민씨와 어머니, 여동생에 대한 욕설과 음해가 난무했다. “엄마를 왜 그렇게 얘기했나. 오빠야 정말 그라고 싶더나.” 여동생은 악다구니를 했다. 방송을 보지 못한 어머니는 그제야 사정을 알았다. 어머니 역시 단말마와 같은 분노가 튀어나왔다고 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서로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한나라당에서 소개해준 회사는 서울에 있는 이벤트 회사였다. 정직원인지도 불투명했고, 급여도 많지 않았다. 부산의 월 150만 원 정규직 경비회사 일이 떠오른 어머니는 “야, 이 쪼다 같은 놈아”라며 아들을 들볶았고, 아들은 “엄마, 그래도 나는 답답으니까, 그래도 한번 가볼게”라고 조곤조곤 답했다. 하지만 서울에 아무런 거주지가 없는 영민씨에겐 일만 덩그러니 맡겨졌다. 가족에게 거주비를 마련해줄 돈은 없었다.

이후에도 한나라당의 소개는 이어졌다. 하지만 때론 비정규직을 제안받았고, 때론 한 달 동안 일하는 것 보고 채용을 결정한다고 했으며, 때론 터무니없이 급여가 낮았다. “지 하나 벌어 먹고살라 했으면 울화통이 터져도 갔지예. 그런데 그래 방송에 가족을 다 팔고 나섰던 건, 가족을 건사하려고 나선 것 아이겠습니까. 결국 아무 데도 못 갔습니다.”

집안은 점점 더 기울었다. 전세금을 뺄 수밖에 없어 단칸방 월세로 이사했다. 영민씨는 그때부터 부쩍 술이 늘었다. 잔뜩 술에 취해 골목에서 땅을 치고 울다가도, 엄마나 여동생이 나타나면 풀이 죽어 통곡조차 하지 못했다. “엄마, 내가 어리석었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랬다”며 자책하다가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슴을 쳤다. 다시 취직 자리를 찾아다녔지만, 취업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경비직이 있다기에 “엄마, 가볼게” 하고 나섰지만 채용되지 않았다. 찬조연설 때문인가 싶어 이름을 바꿔볼까도 생각했다. “안 그렇겠습니까. 어디 가믄 이름 갖다 대기도 떳떳하지 못하제. 누가 뭐라카는 것도 아인데, 찔리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는 자꾸 화가 났고, 그때마다 아들에게 “상처를 줬다”고 했다. “아무래도 내가 아를 잡은 거지. 아무래도 내가 더 볶았지. 내가 ‘우째 인간아, 사람을 그렇게 믿었노’라고 뭐라카면 ‘엄마, 나도 떳떳하고 싶어서 그랬는데…’ 카면서 눈물만 뚝뚝 흘립니다.” 붉게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결국 영민씨는 “답도 안 나오는데, 엄마 이제 고마해라” 하며 집을 나갔다. “엄마, 내 이래 갖고 그냥 못 있겠다. 내가 한 3년 고생해가 다른 장사라도 하면…”이라며 끝을 맺지 못한 말을 남겼다. 그게 벌써 4년 가까이 됐다. 영민씨와 가족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믿었던 대통령은 10년 동안 두 번이나 그들을 외면했고, 무너진 가족만 덩그러니 남았다.

“한동안 오도 안 하다가, 엄마가 걱정되니까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저 앞에 실 이래 와가지고 옆에 서 있어예. 요즘에 와서야 한두 달에 한 번쯤 실 올 때도 있고 안 올 때도 있고 그랍니다. 뭐하고 사는지도 잘 모르겠고…. 일용직 안 하겠습니까. 술을 많이 마시는지 살이 찌고 얼굴도 퉁퉁 부었어예. 옷도 추리닝 같은 거 입고, 스레빠 끌고 옵니다. 아가 폐인이 다 됐습니다. 밥 한 그릇 묵으면서 ‘엄마, 절대 내가 사람은 안 믿는다’ 캅디다.”

“아가 하루는 머리를 빡빡 깎고 왔는데, 가가 머리 짧은 걸 안 좋아해예. 내도 글코. 근데 머리를 빡빡 완전 다 밀었어예. 지 딴에는 고통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 심정이 얼마나 어떠면…. 가가 사람을 안 믿어예.”

“내가 무식해서 잘 모르지만은, 우리 아는 그냥 희생양이지예. 그래도 지가 어떡할 겁니까. 후회하지예. 백번 천번 후회하지예. 지 인생이 이리 됐뿌맀는데.”

“이래 될 것 같았으면 누구 말마따나 돈이라도 받을걸. 그것도 아니고. 뭐를 하나 주는 것도 아니고 내 자식 인생을….”

“7월에 (기자가) 왔다 가시고 (아들이) 함 왔습니다. 넌지시 서울서 이런 사람이 찾아왔던데… 카니까 ‘엄마, 나 그런 거(인터뷰) 안 할란다’ 캐예.”

영민씨에게 먼저 연락할 방법은 없다고 했다. 신용불량자가 된 어머니에게는 휴대전화도 없고, 여동생에게 물어봐도 연락이 여의치 않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러면서 좌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장 근처에 새벽까지 장사하는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하루 마수걸이도 못 하고 들어가는 날이 많다(7월에만 19일 만에 사흘이나 됐다)고 했다.

어머니는 말했다. “시러예, 정치하는 사람. 진짜 시러예. 하다못해 대통령도, 그 아 하나도 맘대로 몬 하면서…. 지금 뭐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천하 없는 누가 돼도, 될 때 그때뿐이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는 사람 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거고, 없는 사람 더 없게 만드는 거고.”

그러고는 꼬깃꼬깃한 1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같은 시장통 음료 좌판에서 1500원짜리 복숭아 주스를 사서 건넸다. “서울에서 두 번이나 와줘서 고맙네예. 우리 아들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이래 보이 얼굴도 비슷하네. 그래도 이제 더는 오지 마이소.”

이재훈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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