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08:55 수정 : 2014.05.08 13:35

드라마 〈밀회〉 속 오혜원의 관능미는 엄격하고 절제된 블랙 의상에서 그 진가가 발휘된다. 우아해 보이지만 실은 진흙탕 같은 권력 세계에서 살아남은 여자 혜원에게 블랙은 최적화된 컬러다. JTBC 제공
블랙은 매우 엄격한 색이다. 그 말은 잘 관리된 몸과 피부톤을 가진 사람이 가장 질 좋은 소재와 물 흐르듯 날렵하게 재단된 실루엣으로 입을 때만 그 어떤 색과 비교할 수 없는 진가가 발휘되는 색이란 말이다. 연봉 1억원의 예술재단 기획실장 오혜원처럼 말이다.

그녀는 주로 블랙 컬러의 군더더기 없이 세련된 오피스룩을 입는다. 이를테면 화이트 셔츠에 블랙 슬림핏 코트를 입는다든지, 올 블랙 니트 원피스에 목걸이로 포인트를 주는 식이다. 아마도 제법 고가의 브랜드일 거다. 프라다는 아니고 르베이지 정도는 되겠지. 그녀는 정확히 상류층이 아니고 예술을 둘러싼 상류층의 어두운 비밀을 관리하는 중간계급이니까. 그러고 보면 블랙은 예술로 이미지를 관리하며 비자금을 조성하는가 하면 예술재단을 둘러싼 권력자들의 이전투구 속에서 살아남은 여자 오혜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의미심장한 컬러다.

그런 그녀가 한 남자아이를 만난다. 가난하지만 음악에 순수한 열정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 그러나 절대 어린애 같지도 않은 아이. 천재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이 없는 그 청년은 선생인 오혜원의 위신과 자존심까지 지켜줄 수 있을 만큼 속이 깊다. 참으로 보기 드물게 잘 자란 청년. 그런 남자아이가 얼핏 완벽하고 우아한 듯 보이지만 실은 진흙탕처럼 지저분한 세계의 ‘다중 첩자’이자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중년 여성 오혜원을 사랑한다. 의심할 수 없는 순수와 진심으로. 심지어 연정을 품은 연상의 여자이며 스승인 오혜원에게 ‘기습 키스’를 할 수 있을 만큼 저돌적이다. 순수하면서도 진실되고 섹시한 젊은 남자라니….

그 남자 이선재를 만나고 오혜원의 옷차림이 달라진다. 이선재와 오혜원이 처음으로 기습 키스와 백허그를 했던 날, 여자는 화사하게 밝은 레드 블라우스에 레드 하운드투스 체크 패턴의 재킷을 입고 있었다. 이제 막 젊고 순수한 남자와 격정 로맨스에 빠진 연상의 여자는 빨간색 옷을 입어야 한다는 공식이 어딘가에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아이 앰 러브>에서 아들의 친구(순수하고 진지한 젊은 요리사)를 사랑하게 된 엠마(틸다 스윈턴)가 처음으로 스탕달 신드롬에 가까운 사랑의 도취적 맛을 음미할 때도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레드 컬러가 마치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여기, 여자가 있답니다. 순수한 관능에 활짝 열리는 태초의 여자가….”

가면의 블랙, 사랑의 레드

요즘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JTBC 드라마 <밀회> 얘기다. 정확히 낼모레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의 여배우 김희애가 연기하는 마흔 살의 여자 오혜원 이야기. 정말 대단한 여배우다. 1984년에 데뷔했으니 무려 30년 경력이다. 그런데도 오혜원을 연기하는 이 여자, 김희애는 여전히 신선한 느낌이다. 매끈하게 올려 묶은 머리 모양하며 그 빛나는 이마, 군살 하나 없는 날씬한 몸매와 그 몸을 돋보이게 하는 스타일링 감각까지. 하지만 그녀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왠지 더 끌린다고 할까?

첫 등장부터 그랬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오혜원이 사무실에 와서 코트를 벗었는데 어처구니없이 하의 실종 상태다. 미니스커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슬립 차림.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이 ‘실수로 스커트를 챙겨 입지 못했다’며, 스카프를 이용해 최첨단의 아방가르드 스커트를 만들어 입는 노련미를 보여준다. 상류층의 온갖 여우와 늑대들을 상대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예술재단 기획실장다운 고단수의 재치랄까? 그런 그녀가 정말 섹시해 보인다. 같은 여자가 봐도 설레도록. 결핍과 실수를 재치와 지성, 야망으로 메우는 관록 있는 중년 여자의 관능미 앞에서 유아인이 연기하는 순수 청년 이선재가 “겁나 섹시해요” 감탄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윽고 이어지는 그들의 첫 베드신 장면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선재의 누추하지만 정갈하게 정돈된 아파트에서였다. 혜원이 방금 샤워를 했는지 긴 머리가 약간 젖어 있다. 선재의 큰 니트를 헐렁하게 입고 있고. 그런데 그 모습이 참 예쁘다. 그렇다. 선재 말마따나 ‘겁나 섹시하다’. 초고가 브랜드로 알려진 21드페이의 리본 달린 트위드재킷을 입었을 때보다 100배쯤 섹시하고 등쪽에 페이즐리 프린트가 가미된(그 때문에 오혜원의 ‘반전 패션’이라고 널리 알려진) 랑방의 니트와 스커트를 입고 있을 때 못지않게 고혹적이었다.

그런데 자꾸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생각해보니 <아이 엠 러브>의 엠마가 아들 장례식 뒤 궁궐 같은 집을 떠나 젊은 연인에게 갈 때 입은 옷도 연인의 가장 허름한 옷이었다. 럭셔리 브랜드임이 틀림없는 검은색 상복 원피스를 잽싸게 벗고 값비싼 반지며 목걸이를 빛의 속도로 빼버리고는, 젊은 애인의 집에서 가져온 남루한 남성용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는 엠마의 모습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다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상류층 여자의 옷이 ‘추리닝’이라니.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던지 혼자 두고두고 곱씹은 장면이다.

모르겠다. 마흔 살의 여자가 스무 살 남자아이의 뺨을 움켜쥐고 키스하는 이 드라마의 끝이 어떨지…. 엠마와 오혜원의 또 다른 공통점은 눈부시게 ‘럭셔리’한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본명도 가짜’일 정도로 위장된 ‘거짓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거다. 아니 그걸 인식하게 된다. 진실되게 순수한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그렇다면 엠마처럼 혜원도 다 버리고 선재에게 가게 될까? 아니 그렇게 단순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

엠마는 이탈리아 최고 상류층 집안의 안주인이었지만 혜원에게는 일이 있다. 서한예술재단 권력의 삼각구도를 형성하는 서 회장(김용건), 서영우(김혜은), 한성숙(심혜진)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어두운 비밀을 관리하는 ‘삼중 첩자’로서의 일. 선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일을 빈틈없이 잘해 차기 아트센트 대표가 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선재를 만나며 혜원은 달라졌다. 오직 성공을 향해 달려온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비참한지 알게 됐다. 상류층 상사들에게 흉잡히지 않기 위해 블랙이나 그레이 같은 모노톤의 단조로운 옷차림을 고집하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위장된 삶이었는지도.

특별히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8회에서 서영우에게 모욕을 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들킨 뒤 선재에게 혜원이 스스로 ‘우아한 노비’에 비유하며 비웃었던 장면. 영우는 혜원의 친구이지만 그녀의 뺨을 때리고 마작패를 집어던져 얼굴에 상처를 내는 인물이다. 친구 사이지만 ‘돈이면 뭐든 다 된다’고 믿는 ‘마귀’. <밀회>가 그리는 상류사회의 이면은 그토록 더럽다. 혜원은 그 더러운 것들을 우아하게 처리해주는 일을 하고 있고. 그게 ‘아트’는 없고 온갖 ‘비리’만 넘쳐나는 아트센터 기획실장의 일이다. ‘갑질’은 일상이고 ‘오입질’ 또한 스스럼없는 세계. 혜원은 그 더러운 것들을 치워주는 대가로 살아가는 마귀의 포로다. 그 때문에 선재만은 음악으로 성공해서 자신과 같은 취급을 받지 않기 바란다. “부자들 돈으로 먹고살면서도 얼마든지 제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 …다 까불지 말라 그래, 음악이 갑이야”라며 선재와의 레슨에 더욱 열을 올리는 혜원의 말이 내 마음속에서 쟁쟁 울린다. 한편 슬프고 한편 통쾌하게….

바로 그 장면에서 오혜원이 입었던 옷과 구두도 생각난다. 오버사이즈의 화이트 셔츠에 펜슬 스커트를 입은 혜원이 선재와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피아노 아래 함께 발을 맞추고 있는 두 사람의 다리에 카메라의 시선이 머물며 혜원이 신고 있는 클래식한 T스트랩 구두가 부각됐다. 그 구두를 보며 생각했다. ‘구두 참 예쁘다. 마치 채털리 부인이 산지기를 만나러 숲으로 산책 갈 때 신었던 그 구두만큼이나.’

한국 드라마에서 이토록 복합적이고 세련된 캐릭터를 본 일이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 오혜원과 그 ‘연주자’ 김희애 모두 굉장히 프랑스적인 데가 있다. 언젠가 프랑스에 살고 있는 미국인 작가 레이먼드 화이트의 책에서 읽었던 말이 떠오른다. “프랑스 여자는 집을 나서는 순간 무대에 오른 것이다.”

오혜원이 보여주는 우아한 여자

마흔 살의 오혜원이 스무 살 청년에게 겁나게 섹시한 여자일 수 있었던 건 오혜원 스스로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설사 ‘우아한 노비’의 삶이라 해도 언제든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준비 말이다. 오혜원을 연기하는 김희애도 마찬가지다. 서른 살에 시작한 결혼과 육아로 7년간의 공백기가 있었던 그녀다. 그때 거의 중독적이다 싶을 정도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다만 이때도 그녀는 쉬지 않고 2시간씩 운동했다. 여배우로서 언제든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다. 물론 육체적 준비뿐만이 아니었을 거다. 복귀 이후 수시로 속옷 차림이 되어 친구의 남편을 빼앗는 매력적인 악역(<내 남자의 여자>)에 도전하는가 하면, 무려 스무 살이나 어린 남자와 불륜에 빠지는 ‘오혜원’ 역할까지 무리 없이 해내는 걸 보면 말이다.

<밀회>에서 김희애가 오혜원을 통해 선보이는 옷이며 구두며 가방, 시계 얘기가 거의 매일 인터넷 지면에 올라오고 있다. 그 많은 기사를 챙겨 보며 나는 또 코코 샤넬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새 드레스를 입는다고 해서 저절로 우아해지는 건 아니다.’

그래? 그렇다면 뭐가 중요하지? 묻고 싶을 거다. 프랑스에는 ‘우아함은 나이가 주는 선물’이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김희애와 오혜원을 보고 있으면 고맙게도 그 말이 진실처럼 여겨진다. 진정 우아한 여자는, 저속함에 둘러싸여 있어도 저속함이 건드릴 수 없는 여자라는 걸 알게 한다고 할까? ‘돈’이 아니라 음악이 진정한 ‘갑’이라고 말하는 여자, 음악에 대한 열정과 순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여자. 저속한 세계 한복판에서 그 ‘은밀한 사랑’으로 자기 인간됨을 회복하는 여자. 무엇보다 이제 그만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지고 싶은 여자. 그게 아니라면 김희애와 오혜원이 보여주는 저 고무적인 관능성은 ‘헛것’일 거다.

글 김경 패션지 에디터로 17년을 살았다. 2003년부터 <한겨레21>에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를 연재했고, 칼럼니스트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지금은 강원도 평창에서 살며 생애 첫 번째 소설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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