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08:56 수정 : 2014.06.09 17:18

6월은 월드컵의 달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거센 함성은 세월호 참사와 사회적 의제들을 휩쓸 것인가? 한국 축구 대표팀이 5월28일 튀니지와의 평가전에 앞서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해 묵념했다. 방송은 곧바로 ‘다시 일어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주의 구호를 전파했다. 구조화된 비극을 망각의 늪으로 밀어버렸다. 또 다른 위기의 징후다. 뉴시스
세월호 이후,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그런데… 어디로?

세월호의 아이들은 일상이 아니라 그 무슨 비극의 스펙터클을 위해 재난의 어드벤처에 몸을 실었단 말인가. 학교에서 공부하고 소풍 가고 그러다가 모처럼 친구들과 수학여행을 가는 것은 아주 평범한 일상이다. ‘아이들의 죽음’ 때문이나 때로 잊혀지기도 했던, 수많은 어른들은 어쩌면 비행기를 탈 형편이 되지 않거나 크고 작은 화물과 함께 배를 타고 제주도로 일하러 가야 했던 일상의 사람들 아니었던가. 그 뒤로도 큰 사고들이 연거푸 터졌다. 지하철은 자주 멈춰섰고 쇼핑몰에서는 불이 났으며 주택가나 공단에서도 사고가 터졌다. 이 모두 일상의 공간들이다. 돌아가라니? 과연 돌아갈 만한 일상, 안전한 어떤 공간이 달리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말, 혹은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권유에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날카로운 저의가 스며들어 있다. ‘가만히 있으라’는 저의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다. 5월28일 현재, 여전히 실종자 16명이 바닷속에 있고, 전남 진도의 팽목항에는 그 가족들이 시퍼런 바다를 눈물로 응시하고 있으며 경기도 안산의 분향소는 애도하는 추모의 정념에 의해 무거운 침묵에 사로잡혀 있는데, ‘대~한민국’이라는 거센 함성이 혹시나 이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지 않을까, 나는 우려한다.

어떤 관점이냐 하면, 솔직히 그동안 나는 월드컵 열기가 당대의 많은 사회적 난제들을 덮어버린다는 지적에 반대해왔다. 지방선거와 월드컵의 주기가 공교롭게도 4년마다 겹치고 더욱이 6월이라는 엇비슷한 시기에 열리기 때문에 당대의 사회적 이슈가 월드컵 열기에 묻힐 수 있다는 지적이 있어왔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른바 ‘3S(Screen·Sport·Sex) 정책에 의한 우민화’라는 프레임은 낡은 것이며 설령 권력이 그것을 시도해도 ‘3S’ 안에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어서 결국 권력은 ‘3S’를 검열하고 차단하는 방식으로 끝맺는다고 주장해왔다.

여전히 그런 관점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이후 몇 차례의 월드컵과 올림픽을 지켜보면서 스포츠를 통한 어떤 가능성이란 전혀 불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회의에 사로잡히곤 했다. 월드컵에서 개인의 열정을 발견하고 올림픽에서 공동체의 연대를 확인한다는 것은 희망 사항일 뿐이며 어쩌다 발견된 작은 현상에 열광하는 것조차 지극히 표피적인 ‘정신 승리’였다는 생각 말이다. 대규모 스포츠 제전은 언제나 국가주의의 향연이었고 그 전리품은 온전히 자본과 방송사의 이득으로 치환됐고, 어린 학생이나 선수들이 패악적인 폭력과 군사적인 위계질서 안에 속박된 현실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하나 되는 대~한민국’?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대~한민국’이라는 익숙한 구호가 방송을 통해 강력하게 전파되고 있다. 이런 과잉 열기가 세월호 참사와 그 구조화된 비극을 망각의 늪으로 밀어버릴 것이라는 우려를 나는 침통하게 재확인하고 있다.

5월28일 저녁, 국내에서 치르는 마지막 평가전 중계를 MBC가 맡았는데, 이 방송사는 경기 전에 화려하게 꾸민 <월드컵 응원쇼 뜨거운 함성! 가자 브라질로!>를 특별 편성했다. 화면에는 윤도현의 YB밴드를 비롯해 박정현, 엑소-K, AOA, 김연우, 오렌지캬라멜, 에이핑크, 걸스데이 등이 연신 무대를 오르내린다. 진행자와 출연자들 중에 더러 ‘세월호 유가족에게 위로’를 보낸다는 의미의 발언도 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알리바이처럼 느껴졌다. 걸그룹 AOA는 화이트 핫팬츠에 배를 노출한 민소매 셔츠를 입었고, 또 다른 걸그룹 에이핑크는 흰색 플레어스커트에 빨간색 상의로 치어걸 코스프레를 했다. 윤도현의 YB밴드도 <오 필승 코리아>와 <나는 나비>를 불렀는데, 그들의 무대 뒤로 큼직하고 화려한 태극기가 펄럭거렸다. 김연우가 응원가를 부를 때는 많은 출연진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무대를 꽉 채웠다. 이 화려한 응원쇼가 끝난 뒤 튀니지와의 평가전이 중계됐는데, 어김없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국민들에게 치유가 되는 경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 나온 다음, 곧바로 ‘다시 일어서는 한국, 하나 되는 대~한민국’의 분위기로 흘러간다. 흡사 ‘세월호 참사’는 어떤 말을 하기에 앞서 의례적으로 꺼내보는 인사말처럼 들린다. “세월호 유가족들 힘내시고요, 자 다음 무대는….”

나는 화려한 무대에 출연한 연예인이나 경기 중계를 한 캐스터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발언에 진정성이 없다고 단정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다. 다만 ‘당대의 지배 문화는 지배권력의 문화’라는 오랜 경구를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한 명의 개인으로서 진행자, 출연자, 담당 PD 등은 틀림없이 세월호 비극에 깊은 애도의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총합한다고 해서 결코 구조되는 것은 아니다. 구조는 역사적으로 누적돼 따로 존재하는 행성이다. 방송은, 더욱이 권력의 눈치를 보는 거대 방송은 한 개인의 도덕적 연민을 완전히 장악한다.

게다가 월드컵 아닌가. 4년에 한 번 오는 대목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열기를 막대한 수익으로 환전해야 하는 방송사와 하루빨리 ‘다른’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바라는 권력의 이중주는 결국 ‘스포츠 국가주의’라는 화려하면서도 견고한 바리케이드를 치는 중이다. 국가와 자본과 방송은 일치된 구조적 이해에 따라 순화된 기억, 정돈된 기억,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같은 표적 없는 성찰,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희뿌연 감상적 언어로 사태의 본질과 비극의 핵심을 희석시킨다.

씁쓸하게도 월드컵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스포츠는, 축구는, 그리고 월드컵은 여전히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축구장에 다양한 계급의 욕망이 스며들고 더러 상충되는 욕망들이 갈등을 일으키며, 자연스럽게 더 나은 사회 상태로 진전돼온 유럽의 경우와 달리, 한국 사회에서 스포츠는 고립된 섬에 지나지 않았고 더욱이 축구와 월드컵은 ‘국위 선양’ 이데올로기의 깃발로 휘날렸기 때문에, 세월호와 월드컵의 거리가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중이다.

유럽의 축구장과 그 문화

이를테면 2013년 4월,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사망했을 때를 기억해보자. 유럽의 축구장에서는 종종 누군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의식이 열린다. 대개는 세계적인 저명인사지만 때로는 경기장 관리인이나 구단 가족을 추모할 때도 있다. 그런 관례에 따르면 대처 전 총리를 의례적으로라도 추모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포함해 영국 전역의 프로축구 기관이 모인 영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고심 끝에 대처 전 총리에 대한 추모식을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맥락을 짚어보자.

19세기 중엽, 근대적인 시민 양성을 위한 학교 체육의 일환으로 시작된 영국의 축구가 20세기를 넘어서면서 철강·항만·탄광·제철 등의 공장 도시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장외 문화로 발전한 것이 영국 축구의 유전자다. 비슷한 시기에 축구가 노동자와 시민의 대중적인 놀이문화로 정착한 스페인·네덜란드·프랑스·독일 등 유럽 곳곳에서도 이 유전자는 동일하게 계통 발생을 한다.

독일의 경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이 해당한다. 독일 산업혁명의 근간이 된 이 지역에는 철·아연·납·구리·석탄 같은 광물자원이 풍부한 루르 탄전이 펼쳐져 있다. 패전 이후 ‘라인강의 기적’이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축구 클럽 ‘샬케04’는 축구가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문화로 정착해 그들의 연대와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축구 유학을 한 수원 삼섬의 서정원 감독은 “샬케04의 힘은 대다수가 광산 노동자인 서포터스로부터 나온다. 인구 25만 명 정도의 쇠락한 광산 도시에서 샬케04는 노동자들의 자랑이다. 클럽은 선수들이 고된 노동을 경험해보고 팬의 고마움을 느껴보라는 의도로 매년 체험행사를 진행한다”고 말했다. 폐광의 여파로 홍역을 치를 때 샬케04의 선수들은 지역 팬들의 시위에 연대를 표시했고 구장을 과감히 개방해 집회 장소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니까 ‘축구 종가’ ‘전차 군단’ 같은 표현을 쓴다면, 그것은 엄밀히 말해 ‘노동자계급의 강렬한 하위 문화’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 ‘축구 종가’ 영국을 보자. 1980년대 초반 영국 사회가 탄광노조의 파업으로 몸살을 앓을 때,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강압적으로 탄광지역의 노조원(곧 축구팬)을 탄압했다. 한국에 거주하면서 동아시아 축구를 비범하게 관찰하고 있는 영국인 축구 저널리스트 존 듀어든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축구팬들은 벌레처럼 취급받았다. 내 두 눈으로 목격한 일이기에 잘 기억하고 있으며 여전히 끔찍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신자유주의의 원조이자 보수 강경파인 정치인과 민영화와 구조조정에 밀려 생존의 벼랑에 몰린 노동자계급(곧 축구팬)의 팽팽한 긴장은 1985년에 터진 끔찍한 참사에 의해 파국에 이르게 된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 <풀 몬티> 같은 작품들이 기억하고 있듯이, 이 무렵 영국 사회에선 격렬한 시위와 강력한 진압의 이중주가 벌어졌고 특히 1984년에는 잉글랜드 북부 도시들, 그러니까 뉴캐슬·선덜랜드·위건·셰필드·블랙번·리버풀 등의 산업도시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대처 정부는 이를 제압하기 위해 고도의 미디어 전략을 구사했다. 시위 현장과 축구장의 거친 함성을 다양한 시점과 방식으로 오버랩시키면서 ‘저런 광팬들은 축구장에서 쫓아내야 해’ 하는 감정과 ‘시위꾼들도 이참에 몰아내야지’ 하는 정념을 교차시켰던 것이다.

그 격렬한 꼭짓점에서 이른바 헤이젤 참사가 터지고 말았다. 1985년 5월29일, 벨기에의 브뤼셀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이탈리아 팬 39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비극이었으나 잉글랜드 팬들의 과도한 행동이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에 대처 정부는 자국의 팬들을 ‘문명사회의 수치’로 지목하면서 축구팬에 대한 강압적인 정책, 이를테면 ‘축구 관중법안 1989’를 제정해 ‘신분증 제출 의무제’까지 도입했다.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신분증을 제출하면서 ‘나는 국가의 통제를 잘 따르는 얌전하고 순수한 팬’이라고 비굴하게 웃어야 했던 상황이다. 이 강력한 제재는 단지 축구팬에 대한 조처가 아니라 축구장, 파업 현장, 그리고 도심지 등에서 수많은 사람들이(축구 응원이든 파업 구호이든 간에) 우르르 몰려다니며 함성을 지르는 행위 자체를 엄단하고 그 ‘주동자’를 발본색원하려는 조처였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의 ‘순수 유가족’ 발언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역사적 맥락이 있는 발언이다.

그 와중에 또 하나의 참사가 벌어진다. 1989년 4월15일, 96명이 사망한 힐즈버러 참사가 그것이다.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이 열린 셰필드의 힐즈버러 경기장 입구에 수많은 팬들이 한순간에 몰리면서 참사가 벌어졌다.

대처 정부는 헤이젤 참사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곤봉을 휘둘렀다. 경찰은 술에 취한 훌리건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몰아세웠다. 이 시기에 대해 존 듀어든은 대처가 “축구에 대해 좋은 말을 하기는커녕 축구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며 축구팬들을 핍박했다. 모든 축구팬을 통째로 죄인 취급하던 대처 시대의 분위기는 분명히 잘못됐던 것”이라고 썼다.

23년이 흐른 뒤, 2012년 9월13일 영국 언론은 일제히 힐즈버러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힐즈버러 참사를 재조사해온 ‘힐즈버러 독립 패널’(Hillsborough Independent Panel)의 보고서가 발간됐기 때문이다. 45만 쪽 분량에 달하는 이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164건이 진술을 임의로 조작해 참사의 책임을 전적으로 축구팬에게 전가했음이 밝혀졌다. 당시 경찰은 ‘예외적이고 공격적이며 예상치 못했던 관중들의 행동’을 기록했지만, 이 보고서에 따르면 관중의 ‘공격적이며 예상치 못했던 행동’이란 표현은 과도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입증하려 한 사례들은 근거가 희박하거나 심지어 조작된 것이었다. 진실은, 왜곡과 은폐로 얼룩진 경찰의 무능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경찰이 규정에 따른 적절한 응급조치만 했어도 희생자의 절반 이상을 살려낼 수 있었다. 최소한 41명은 사태가 발생한 3시15분 이후에도 충분히 생존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서는 적시했다.

이 보고서에 따라 2012년 당시 영국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피해자들이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점, 진실 규명이 제때 이뤄지지 못한 점, 이 때문에 기나긴 세월 동안 고인들이 모욕을 당하고 유족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받아왔음을 인정하면서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밝혔다. 존 듀어든은 2013년 4월 대처가 사망했을 때 “축구팬을 모욕한 사람을 경기장에서 추모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고 썼는데, 이러한 기억이 일반적인 듯, 영국프로축구연맹 역시 같은 이유로, 즉 대처 전 총리는 축구팬을 모욕했으며 결코 그것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경기 직전 추모식을 열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최소한 기억의 공간만큼은 지켜낸 것이다.

월드컵, 권력, 국가주의

오늘날 축구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고 월드컵은 황금알 그 자체가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74년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된 브라질의 운송, 투자, 보험 및 무기 판매상 주앙 아벨란제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정념이 월드컵이라는 블루오션의 엔진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개최지 결정권, 미디어 중계권, 공공 전시권 등 월드컵 3종 세트는 FIFA를 국경 없는 초국적 권력기구로 만들어냈다. 한국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식민지를 경험한 신생 독립국가들은 FIFA의 굴욕적인 계약서에 사인해서라도 자국의 정치적 상황이나 경제적 난제를 타개하기 위해 개최권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이때 민족주의 깃발은 더 힘차게 펄럭거린다.

2002년, 우리가 경험했던 광장의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시선이 있는데, 첫째는 국가와 자본의 이해를 ‘스포츠 민족주의’로 포장하는 방식. 이를테면 우파 민족주의자 이어령은 “세계 최고의 정보대국이 된 한국이 세계를 향해 그 문명-문화를 발신하는 월드컵”이라고 썼다. 이에 비해 좌파 민족주의는 광장의 열기에 주목했다. 당시에는 좌파 민족주의자였던 김지하는 붉은 악마 응원단의 치우천왕 깃발을 유목적 코드로 읽어내면서 광장의 열정과 시민적 합창의 문명적 일체감을 찾아내고자 했다. 세 번째 시선은, 좀더 차분한 성찰을 시도한 김명인과 도정일이 있다. 김명인은 “‘태극기’ ‘애국가’라는 기표들과 애국주의, 국가주의라는 기의 사이에 일정한 ‘미끄러짐’, 즉 불일치”에 주목하면서 “애국가와 태극기는 최대 상징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집합행동을 묶어주는 최소 상징물”이라 평가했고, 도정일은 ‘집단 정체성’이 불가능한 환상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토록 정체성 추구의 욕구와 욕망이 폭발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물음표를 던졌다.

그 이후, 한국의 스포츠를 압도한 것은, 물론 세 번째의 성찰적 자세가 아니라 민족주의를 깃발로 한 국가와 자본과 방송의 패스플레이였다. 국가가 보증을 서고 거대 기업이 전략을 세우며 추진된 수많은 국제대회들은 ‘2002 학습 효과’를 국가와 기업 차원에서 전면화한 과정들이었다. 그것이 압도했기 때문에 스포츠를 통해 개인의 자유의지를 발현하거나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찾아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 되었다.

그 때문에 스포츠에 내재된 힘, 스포츠 선수들이 펼친 우애와 연대의 투쟁 등이 전혀 주목받지 못한 것도 한국 스포츠의 비극이다. 예컨대 프랑스 우파 인종주의와 오랫동안 싸워온 지네딘 지단은 그저 박치기를 끝으로 은퇴한 선수로 기억될 뿐이며, 브라질 축구는 물론 세계 축구까지 쥐락펴락했던 아벨란제와 싸웠던 펠레도 국내에서는 문어보다 경기 결과를 못 맞히는 코믹한 이미지로 통할 뿐이다. 브라질의 부패한 축구계 권력집단(협회 수뇌부, 구단주, 조직폭력과 연계된 클럽 간부 등)에 맞서 싸우며 때로는 비열한 인신공격과 암살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던 펠레가 브라질에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체육부 장관이 되어 거대한 축구 마피아를 개혁하고자 했던 일도 국내에서는 그저 축구를 잘하다보니 장관까지 된 사람 정도로 알려졌을 뿐이다.

기억 그리고 민주주의

집단과 구조 대신 개인에게 문제를 덮어씌우고, 그 개인의 도덕성이나 이념이나 능력의 결함을 문제 삼는 한국형 기억투쟁 양상은, 한국 현대사의 누적된 경험이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 국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희생자와 유족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치유했는지 생각해보자. 오랫동안 그 희생자와 가족들은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었다. 적어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일정한 노력이 있기 전까지 국가는 완강한 태도로 20세기의 기억을 단독으로 점유했다. 그 기억의 공간에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끼어들 만한 틈은 없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그 공간마저 훼손돼 국가폭력에 대해 전혀 무지하거나 오히려 옹호하는 사람들이 무단으로 점유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말을 하되 우회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 김원일의 <어둠의 혼>, 윤흥길의 <장마> 같은 문학작품들은 전쟁과 그 후유증을 스펙터클로 재현할 수 없는 자, 희생자, 그 유족의 발언이다. 전쟁 이후에 오히려 더 강고해진 반공주의와 국민 동원 체제는 이 최소한의 발언조차 적개심을 갖고 의심했기 때문에 꽤 많은 소설과 영화들은 샤머니즘 형식 안에 ‘이념도 그 무엇도 모르는 불쌍한 영혼’으로 위무해왔다. 희생자에 대하여, 그가 한 줌의 이념이라도 가진 인간이었음을 주장한다면 되레 ‘빨갱이 집안’이 되고 요즘 말로는 그 저열하고 조잡한 ‘종북 좌빨’ 논란에 휩싸이기 때문에 희생자와 그 유족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희생된 망자의 넋을 진혼’하는 샤머니즘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광주항쟁을 다룬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오멸 감독의 <지슬>, 고 노무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 등에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기억과 망각의 익숙한 서사로 굳어졌다. 이 영화들에서 희생자들은, 심지어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웠던 학생운동 참여자들마저 ‘아무것도 모르고 죄 없이 고통받고 숨져간 불쌍한 사람들’로 기억된다.

이것의 확대된 형태가 한국 사회 전 분야에 걸쳐 확인되는 집단과 개인 간의 기억투쟁 양상이다. 집단은, 그러니까 국가를 비롯해 거대한 기업, 조직, 단체, 기관, 학교 등은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특히 그것이 인명 희생과 관련된 사건일 때) 우선 개인을 지목하고 그에게 책임을 묻고 그것으로 상황을 정리해왔다.

과연 월드컵 열기에 의해 세월호 비극과 그 뒤의 강렬한 사회적 의제들이 묻혀지고 말 것인가. 현상적으로 완전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골을 넣거나 승리를 한 선수들은 먼저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기억할 것이고 방송 또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것이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서는 대~한민국, 하나 되는 대~한민국’이 울려퍼질 것이다. 국가와 자본과 방송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화석화된 기억, 관제화된 언어에 의한 망각이 이로울 것이다.

바로 그 지점이 로도스다. 축구공을 향한 강렬한 몰입이 인간적 존중과 연대를 향한 열망과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체험하고 나누는, 첫 월드컵. 그곳이 우리의 일상이다. 그 강렬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글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문화평론가. 문화·예술, 일상 문화, 스포츠 문화 등 현대 문화와 삶의 여러 분야에 대해 연구와 비평을 하고 있다. <축구장을 보호하라> <클래식, 시대를 듣다> <인공 낙원-현대 도시 문화와 삶에 대한 성찰>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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