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6:05 수정 : 2014.03.30 14:17

한재권 감독이 이태원으로 온 건 아이 때문이었다. 남들은 아이 교육을 위해 강남으로 갈 때, 그는 아이 인성을 위해 강남에서 이태원으로 이주했다.
인파(人波), 사람의 파도가 골목마다 일렁이는 서울 명동에 들어섰다. 이태원 인근을 쏘다니는 남자를 항시 관찰해주던 남산 서울N타워가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원과 소작농을 거쳐 공장과 컴퓨터 앞에 앉아- 걸어다니는 21세기인들로 가득했다. 자동응답기는 ‘미드’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쏟아지고 업그레이드되는 새로운 기기들 중에서 사실 10분의 9는, 없어도 된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 흔들어 깨운 탓에 잠결에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와 몽롱한 눈빛으로 앉아 있는 모양새다. 등에 내비게이션과 최신식 태블릿PC, 신작 영화가 다운로드되는 스마트폰 등을 잔뜩 이고 산길을 오르는 당나귀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꼬리에는 ‘태그’가 붙어 있을 것이다. 테크놀로지가 선사한 찬란한 빛의 기적 덕분에 통제의 암흑시대가 된 오늘, 우리는 스머프로 금을 만드는 연구에 열중했던 연금술사 가가멜의 음습한 실험실에 입주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테드 카진스키처럼 기술문명을 향해 폭탄테러를 감행할 생각은 없다. 물론 그와 같은 수학 천재도 아니고.

이러한 잡념에 사로잡혀 명동을 찾은 이유는 이태원 주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명동예술극장에서 일본 작가의 작품을 위해 음악을 제공하느라 테크니컬 리허설로 바쁜 한재권 음악감독을 만났다. <기막힌 사내들>(1998), <간첩 리철진>(1999), <킬러들의 수다>(2001), <피도 눈물도 없이>(2002), <묻지마 패밀리>(2002), <실미도>(2003), <범죄의 재구성>(2004),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 <공공의 적 2>(2005), <박수칠 때 떠나라>(2005), <이대로, 죽을 순 없다>(2005), <국경의 남쪽>(2006), <한반도>(2006),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2006),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모두 한재권 음악감독의 손길이 보태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제천국제영화제 집행위원도 맡고 있다.

음악의 꿈을 품은, 조용한 아이

그는 1968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외무고시 1기를 패스해 외무부에 들어갔지만 당시 공무원의 급여는 가난한 살림에 충분치 않았다. 그나마 급여가 낫다는 상공부로 자리를 옮겨 일본 대표부에 부임했고, 그곳에서 한재권은 1남3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76년 부친이 미국 시카고로 발령이 나자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1980년 아버지가 과로로 작고함으로써 가족은 두 번 다시 함께 모여 살지 못하게 되었다.

학교 음악교사였던 어머니는 4남매를 홀로 키워야 했다. 중학교 1학년에 가게 된 첫 봄소풍 때 한재권 학생은 남들처럼 ‘김밥과 사이다’가 아니라 그냥 맨밥에 밑반찬을 도시락으로 싸갔고, 왠지 서러워 구석에서 몰래 울어야 했다. 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낯선 환경에 의한 외로움으로 채워졌지만, 공부도 곧잘 하고 말썽도 피우지 않는 학생이었다. 어머니는 세 누나들에게 각각 첼로와 바이올린 그리고 피아노를 가르쳤지만 한재권만은 가르치지 않았다. 은연중 아들의 장래에 대한 기대를 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진로였다. 정작 음악에 꿈을 품은 사람은 악기를 배운 누나들이 아니라 막내아들 한재권이었다. 누나들이 배우던 악기들을 어깨너머로 모두 익혔고, 혼자서 음악 만들기를 즐겼다. 집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작곡하는 걸 취미로 삼고는 막연히 작곡가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음악대학에 진학하겠다는 한재권 감독의 생각은 어머니에게는 폭탄선언과도 같았다. 갈등 끝에 ‘재수는 없다’는 조건으로 공부할 수 있었는데, 어머니는 입시를 위한 레슨을 지원해주었다. 그리고 1987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에 합격했다.

“됐어”와 “원래 그래”의 나라를 떠나다

다시, 문제는 대학이었다. 이번에는 그의 머릿속이 ‘대학이 왜 이러지?’ 하는 의문으로 채워졌다. 음악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찾아갔지만, 쓸데없어 보이는 교양과목과 교련수업까지 있었고, 대학은 학생을 지원하는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전공수업으로 작곡 과제를 받아 반가워하며 열과 성을 다해 곡을 만들어 제출했으나, 그의 8쪽짜리 악보는 두툼한 과제 더미 위에 보태어졌을 뿐이다. 한두 번 쓱 훑어보더니 다른 과제물 위에 그냥 올려놓는 교수에게 연주를 해보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은 “됐어”였다. 그나마 “악보를 깨끗이 그려라”는 조언 한마디가 더해졌다. 한재권은 충격에 휩싸였다.

6월항쟁의 1987년, 대학생 한재권이 어렵게 선택한 음악대학 생활은 최루탄 연기처럼 맵고 씁쓸해지고 있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 임종석의 학교인 한양대학교의 교문은 걸핏하면 폐쇄됐고, 학교 안에는 공부하는 학생보다 감시하는 전투경찰이 더 많았다.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이때부터 그의 발길은 종종 이태원으로 향했다. 같은 학과 선배의 부모가 이태원에서 음악카페 ‘비바체’를 운영하던 터였다. 이태원은 한국의 어디와도 비교가 불가한 특색 있는 공간이었다. 비바체는 라면까지 끓여 먹을 정도로 친숙한 장소가 되었고, 유명한 클럽과 공간들이 하나둘 나타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결심이 필요했다. 학교를 자퇴한 한재권 청년은 MBC 음향실에서 음향효과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소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젊은 그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선배들에게 어떤 원리로 이런 소리를 만드는지 묻곤 했지만, 돌아온 답은 “원래 그래”였다. 볼륨을 조절하는 콘솔에는 청테이프가 상한선을 표시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그 이유를 물었을 때도 돌아온 답은 “원래 그래”였다. 한번은 <우정의 무대>에서 군인들의 함성 소리가 작은 것 같아 감히 청테이프를 살짝 걷어내고 조정하다가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았다. ‘원래 그런 것’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방황하는 그에게 앞서 유학을 떠났던 선배가 음향을 공부해보라고 조언했다. 외국에선 음향도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 한재권은 선배를 통해 관련 자료를 얻어서 볼 수 있었다. 독일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다른 국가들과 달리 학비가 무료였기 때문이다. 1988년 10월, 한재권은 베를린으로 떠났다. 음악을 그만두고 음향을 배우기 위해 베를린공과대학에 들어가 음향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음악에서 멀어지고자 떠나 진짜 음악을 만나다

그런데 음악을 그만두기 위해 떠난 독일에서 음악을 제대로 만났다. 1990년 여름에 갑자기 결원이 생겨 대타로 들어간 현지의 아이리시 펍하우스 밴드 ‘프로-퓨전’의 멤버가 되어버렸다. 잠깐만 도와주기로 하고 시작한 밴드 활동은 6년이나 지속됐다. 휴가철에는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공연했다.

“브뤼셀의 작은 가게에서 공연한 적이 있지요. 손님들이 돌아가고 난 뒤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건반으로 연주했거든요. 사람들이 묻기에 한국의 대중음악이라고 했더니 다들 놀라더라고요. 아이리시 음악과 정말 통하는 선율이었던 겁니다. 제가 멤버들에게 가르쳐서 우리 밴드가 종종 연주하는 곡이 되었죠.”

아이리시 음악의 특성상 피들·바이올린·백파이프 등 다양한 세션 악기와의 협연을 경험하면서 ‘살아 있는 악기로 공부할 기회’도 얻었다. 부전공으로 작곡까지 공부한 한재권 감독은 일부러 음악을 외면하기 위해 떠난 길에서 음악을 만나 돌아왔다.

1995년 11월 귀국할 때는 음악 인생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맥이 중요한 한국에 8년 만에 돌아온 한재권은 맨손이나 다름없었지만, 수년간 연극과 독립영화 그리고 케이블 방송을 오가며 관련된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밥과 차비를 주는 곳은 어디든지 갔을 정도다. 윤상과 손무현 등 동갑내기 친구들이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하자며 권했지만 그가 이미 내린 결론은 “오래 할 수 있는 음악”이었고, 그것은 영화와 연극 등 ‘매체음악’이었다.

“한 선배의 말이 결정적이었죠. 내게는 우상 같은 형이었고 ‘들국화’에서도 활동했던 분인데 호프집을 운영하고 있더라고요. 자기 음악을 했어야 했는데 유행음악에 몸담다보니 결국 유행이 지나가면서 자신도 지나가 있더랍니다. 덜컥 겁이 났죠.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결국 매체음악을 선택했습니다.”

<유리>(1996) 이후 20여 편에 달하는 영화음악을 맡다보니 해야 할 공부도 많았다. 다양한 장르와 제3세계 음악까지 두루 섭렵해야 했다(그의 작업실에는 2만6천 장의 음반이 쌓여 있다). 또한 음악인뿐만 아니라 배우와 학생까지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장진 감독과는 장편영화 말고도 단편영화와 연극 등 다양한 작업을 함께 했다.

“영화는 시각매체가 아니에요.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지만 사실 보고 들으러 가는 거죠. 1927년 토키(유성영화)의 등장 이후 영화는 소리의 예술이 되었어요. 영화에서 음악의 비중은 대사보다 크지요.”

그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음악은 뇌리에 남는 음악이 아니라 뇌리에 남는 영화의 음악이다. 그만큼 음악가에게도 작품을 선택할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가 음악 공부보다 다양한 경험과 공부를 강조하는 이유다. 음악가에게 필요한 건 음악 교육이 아니라 영화와 책, 그리고 인문학 공부라는 것이다. 어쩌면 직접 음악활동을 했거나 하고 있는 이병우와 방준석의 영화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와 통할지 모른다.

“가슴속에 남는 멜로디보다는 존재감이 없을지언정 좋은 영화의 곡으로 존재하는 음악이 좋은 영화음악입니다.”

아이를 위해 이태원으로

한재권 감독이 강남에서 이태원으로 이주한 이유는 순전히 아이를 위해서였다. 보통 아이 교육을 핑계로 강남에 눌러앉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계기가 있었다. 한재권 감독이 작업을 위해 중국에 머물고 있을 때 아내와 아이가 그를 찾아왔다. 유치원을 다니던 아이가 호텔에 들어서며 몇 성급인지를 따지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부의 척도인 자동차의 배기량에 관심을 갖는가 하면 재래시장 골목을 다니면서 10분 이상 걷는 것을 못견뎌했다. 적어도 유년기에는 강남에서 살아선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는 이태원에서 앤티크 숍을 운영하고 있었고, 때마침 한재권 감독과 함께 상명대에 재직 중이던 교수가 이태원에 있는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았다. 바로 지금 그가 살고 있는 34년 된 이태원의 한 아파트다.

아이의 변화는 놀라웠다. 이태원에 살면서 아이의 관심사도 달라졌고, 사람과 걷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이뿐만이 아니다. 사람들도 한재권 감독이 이태원에 산다고 하면 다들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였다. 지방에라도 가면 그곳 사람들 역시 이태원에 관심을 보였다. 젊은 제자들도 이태원에 사는 한재권 교수를 부러워한다. 이태원은, 막상 자세히 설명하라면 힘들어하겠지만, 많은 이들에게 막연한 동경의 대상인 것이다. 그는 말한다. 이태원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물론 이태원은 변하고 있다. 1995∼97년께 이태원의 1차 급변이 있었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임대료가 상승하고 소비문화가 이태원의 축을 차지했다. 처음 이태원을 일군 상인들은 돈이 더 많은 이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러한 변화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한재권 감독의 시선은 그의 삶 그리고 음악관과 연결돼 있지 않을까.

현대인이 더 예뻐지고 살이 찌고 키가 커졌다고 인간성까지 격상되진 않았다. 소똥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쇠똥구리들을 바라보는 우리를 또 누군가는 키득대며 지켜본다.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도 원숭이만이 아니어서 코끼리는 나뭇가지를 집어 이마를 긁고, 까치도 식사를 위해 도구를 사용한다. 수중생물의 기술 수준은 세운상가를 방불케 하며, 조개와 게처럼 서로 다른 종들의 공생관계는 오히려 사람보다 나아 보인다. 거미는 훌륭한 직공이자 건축가이며, 또 다른 위대한 건축가인 개미들 중에는 애벌레에서 실을 뽑아 사용하는 종도 있다. 두루미는 일과를 마치고 세수까지 하며, 까마귀와 돌고래 그리고 코끼리와 하마는 장례의식을 치른다. 파푸아의 재주꾼인 바우새 수컷은 수집품들로 집과 정원을 꾸민다. 북극곰과 썰매개가 종을 뛰어넘어 우정을 나누는 유명한 사진은 알려지지 않은 사연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만 제외하면 동물과 다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가장 외로운 종일지도 모른다. 이태원은 그 외로운 ‘나들’이 서로를 찾고 만나는 공간이다.

*그동안 ‘이태원 연대기’를 아끼고 사랑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태원 연대기’는 언젠가 더 특별한 모습을 갖춰 색다른 소식을 전하게 될 겁니다.

글·사진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이매진어워드 선정위원,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준비위원장, 노동당 문화예술위원장이다. <결국, 음악> <시공간을 출렁이는 목소리, 노래>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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