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2:10 수정 : 2014.07.03 11:16

‘스노 폴’(Snow Fall).

눈이 내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2012년 2월19일 미국 서부 워싱턴주 첼런카운티와 킹카운티 언저리에 자리한 터널 크리크의 산자락에서 쌓인 눈이 수직하강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스키·스노보드 전문가 16명이 그때 그곳에 있었다. 신나게 내달렸을까? 그러지 못했다. 재미로 시작한 일로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됐다. 부상자를 비롯한 생존자는 운이 좋았다. 짐 잭, 크리스 루돌프, 존 브레넌 등 3명은 결국 목숨을 잃었다.

숱한 언론이 이 사건을 다뤘지만, 이듬해 퓰리처상 피처 부문을 수상한 것은 <뉴욕타임스>였다. 2012년 12월 지구촌 언론계를 들썩이게 했던 이 신문의 인터랙티브 멀티미디어 콘텐츠 ‘스노폴’ 말이다. 사진과 동영상, 기사와 그래픽을 맞물린 ‘스노폴’은 온라인 저널리즘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버드대 우등생 에이브럼슨 승승장구

이후 전세계 수많은 매체가 앞다퉈 비슷한 형태의 보도물을 쏟아냈다. ‘스노폴’이란 말 자체가 ‘멀티미디어 보도를 하다’는 뜻의 동사로 쓰일 정도다. 그래서다. ‘스노폴’을 만들어낸 일등공신 질 앨런 에이브럼슨(60) <뉴욕타임스> 편집국장이 지난 5월14일 전격 해고됐다는 소식이 생뚱맞다.

질 에이브럼슨은 1954년 3월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노먼 에이브럼슨은 의류용 리넨을 수입하는 부유한 유대계 사업가이자, 민주당 진보파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집안의 또 다른 우상은 <뉴욕타임스>였다. 에이브럼슨은 “신문에 난 내용은 ‘신성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거의 종교에 가까웠다”고 말한 바 있다. 맨해튼의 사립 초·중·고교를 졸업한 에이브럼슨은 명문 하버드대학에 입학했다. 역사와 문학을 전공한 그는 1976년 우등생으로 대학 문을 나선다.

언론계에 발을 디딘 것도 대학 시절이다. 교내 주간지 <하버드인디펜던트>의 문화면 편집자 노릇을 하던 그는, 1973년 우연찮은 기회에 시사주간지 <타임>의 스트링어(취재보조요원)로 일할 기회를 얻는다. 그가 언론 경력 대부분을 탐사취재에 집중하게 된 것도 이때의 경험이 컸다.

대학 졸업 뒤 법률 전문지 <아메리칸로이어>와 <리걸타임스> 등을 거친 그는 1988년부터 10년간 <월스트리트저널>에서 탐사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1997년 마침내 <뉴욕타임스>에 입성한 그는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의 혼돈기에 워싱턴 지국장에 오르며 취재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2003년 에이브럼슨은 고향 뉴욕으로 복귀했다. 신임 편집국장에 임명된 빌 켈러가 그를 수석 부국장으로 발탁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유료독자가 급격히 떨어지고, 광고 매출마저 사상 최저치 경신을 멈추지 않았다. 적자가 산처럼 쌓였다. 자존심을 세울 기운도 없었다. 세계적 부호인 멕시코 통신재벌 카를로스 슬림에게 손을 벌린 것도 이 무렵이다.

8년여간 묵묵히 2인자 역할을 했던 에이브럼슨은 2011년 9월 퇴임해 칼럼니스트로 돌아가는 켈러 국장의 후임자로 발탁된다. 40년 가까운 기자 생활의 정점이었다. 1851년 9월18일 창간한 <뉴욕타임스>에서 꼭 160년 만에 나온 첫 여성 편집국장이다. 당시 그는 여러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언제까지 최초의 여성 타령이나 할 거냐. 내가 국장이 된 것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그 일을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적임자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자료로만 보면, 에이브럼슨은 꽤 성공적인 편집국장이었다. 2년7개월 남짓한 재임 기간에 <뉴욕타임스>는 흑자로 돌아섰다. 모든 신문이 아우성을 칠 때 흑자 폭을 더욱 키웠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분기에만 3억9천만달러의 매출을 올려 2200만달러의 순익을 거뒀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2.6% 늘어난 규모다.

에 부와 명성 안겼는데… 갑작스런 해고

미국기업연구소(AEI)가 최근 내놓은 자료를 보면, 미국 종이신문의 광고매출은 2000년 658억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하락세로 돌아서 지난해엔 236억달러까지 떨어졌다. 그나마 온라인 매출을 뺀 순수 종이매체 광고수익은 173억달러에 그쳤다. <뉴욕타임스>의 선전은 분명 ‘예외적 현상’이다. 켈러 국장 말기에 온라인 유료화를 재추진한 <뉴욕타임스>는 에이브럼슨 국장 아래서 온라인 유료독자가 80만 명을 돌파했다. 공세적 디지털화 전략이 불러온 성과였다.

수익성뿐 아니라 보도에서도 성가를 높였다. 에이브럼슨의 지휘 아래 <뉴욕타임스>는 ‘스노폴’을 비롯해 모두 8개의 퓰리처상을 거머쥐었다. 이 정도면 출중하다. 그가 뛰어난 기자이자 편집국장이라는 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니 궁금해진다. 에이브럼슨 국장은 왜 해고됐을까? 세 가지 요인이 거론된다.

첫째, 에이브럼슨이 해고된 뒤 <뉴욕타임스> 역사상 첫 흑인 편집국장이 된 댄 배켓 전 수석 부국장과의 갈등설이다. 인터넷 매체 <복스>는 두 사람을 ‘저돌적인 힐러리 클린턴’(에이브럼슨) 대 ‘온화한 이미지의 버락 오바마’(댄 배켓)에 견줬다. 2011년 에이브럼슨이 편집국장에 임명될 때도, 배켓은 그의 최대 경쟁자였다. 최근 에이브럼슨은 온라인 담당 수석 부국장직을 신설하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재니 깁슨 영입을 추진했다. 배켓은 자신과 상의 없이 이를 추진한 에이브럼슨의 독단적 태도를 문제 삼아, 사주인 아서 슐츠버거에게 강력히 항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둘째, 성별에 따른 임금 차별에 항의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설이다. 해고 뒤 <뉴욕타임스> 쪽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에이브럼슨의 편집국장 초임 연봉은 47만5천달러(약 4억8천만원)였다. 전임자인 빌 켈러보다 8만5천달러 적은 액수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안 에이브럼슨이 항의했고, 해고 직전엔 52만5천달러(약 5억3천만원)까지 높아졌단다. 에이브럼슨은 최근 변호사를 통해 임금·연금 차별 문제에 대해 사주 쪽에 공식 항의했고 이 때문에 슐츠버거의 눈 밖에 나게 됐다는 얘기다.

셋째, 영국 방송 사장 출신인 마크 톰슨 사장과 갈등을 빚어온 것도 해고를 앞당긴 원인으로 꼽힌다. 에이브럼슨은 이른바 ‘네이티브 광고’(기사처럼 작성된 광고) 확대를 요구하는 톰슨 사장과 대립각을 세워왔다. <뉴욕타임스> 내부에선 이를 ‘교회(광고) 대 국가(기사) 논쟁’이라고 부른다.

공식 입장은 뭘까? <뉴욕타임스>는 5월14일치 1면 사고를 통해 “갑작스러운 해임 소식에 편집국이 온통 충격에 빠졌다”고 전했다. 신문은 이어 “발행인 겸 사주인 슐츠버거와의 갈등, 극단적이고 변덕스러운 일처리 방식에 대한 편집국 내부의 불만, 배켓 부국장과의 갈등 등이 해고 원인”이라며 “사 쪽과 에이브럼슨 전 국장 사이에 이와 관련해 함구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조금 뜻밖이다. 떠나는 사람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 대신, 인신공격성 표현이 가시처럼 박혀 있다. 칼럼니스트로 회사에 남은 전임자 켈러와 달리 에이브럼슨은 아예 회사를 떠났다. 인터넷 매체 <슬레이트> 등이 에이브럼슨을 해고한 이유보다 그 처리 방식을 짚고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매체는 “전례 없이 신속하게, 이·취임식조차 생략한 채, 체면치레를 할 겨를도 없이 무참히 쫓겨난 모양새”라며 “사담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쌓아놓고 있다는 거짓 보도로 사실상 이라크 전쟁을 촉발했던 주디스 밀러 전 기자를 해고할 때도 이렇게까지 명예를 짓밟지는 않았다”고 꼬집었다.

언론단체 ‘미디어매터스’가 낸 자료를 보면, 에이브럼슨이 해고되면서 미국에서 발행되는 10대 일간지 가운데 여성이 편집국장을 맡은 매체는 단 1곳도 없게 됐다. 지난 15년 동안 25대 일간지 가운데 8곳이 여성을 편집국장으로 임명했지만,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뉴스데이>와 <휴스턴크로니클> 등 2곳뿐이다. 에이브럼슨의 해고 소식에 미국 언론계 안팎에서 ‘성차별’이란 지적이 들끓은 것도 이 때문이다.

파장이 커지자 사주 슐츠버거는 각종 매체에 직접 출연해 해명에 열을 올렸다. 그는 “에이브럼슨은 화합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편집국 동료들의 신뢰와 존경을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잃었다”며 “그를 해임한 것은 성차별과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엇비슷한 주장은 에이브럼슨이 편집국장에 취임한 이래 여러 차례 거론돼왔다. 정치 전문 인터넷 매체 <폴리티코>는 지난해 4월 ‘<뉴욕타임스> 편집국의 혼란’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에이브럼슨을 “무례한데다, 고집이 세고, 거들먹거리는 태도에, 퉁명스럽기까지 하다”고 평했다. 이 때문에 “일선 기자들은 물론 편집국 간부진까지 그와 함께 일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게 핵심이었다.

“자질 문제” vs 언론계 “성차별”

반론이 왜 없을까? <폴리티코>의 보도가 나온 직후 <가디언>은 장문의 칼럼을 통해 “무례하고, 고집 세고, 거들먹거리고, 퉁명스러운 것은 에이브럼슨이 신문쟁이이기 때문이다. 왜 여성 편집국장에게만 품성의 잣대를 들이대느냐”고 질타했다. 그의 해고 뒤 조디 캔터 <뉴욕타임스> 기자는 트위터에 “편집국의 젊은 여기자들에겐 에이브럼슨이 전부였다”고 썼다.

“오늘의 유일한 뉴스거리는 여러분이 이 훌륭한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일 텐데, 이 많은 취재진이 몰려온 걸 보면 여러분이 이룬 성과가 정말 대단한 모양이네요.” 지난 5월19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윈스턴세일럼에 자리한 웨이크포레스트대학 졸업식장. 에이브럼슨 전 국장이 해고 뒤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1분 남짓한 짤막한 축사에서 그는 실패를 견뎌내는 ‘강인한 생명력’을 강조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해본 모든 이들에게 말한다. 그토록 원했던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을 때, 바로 그때가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줄 때”라고 말했다. 몰려든 기자들이 듣고 싶은 얘기는 정해져 있었을 텐데 그는 이렇게만 언급했다. “어젯밤 도착해서 몇몇 학생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내 등에 새긴 문신에 대해 아는 학생도 있더라. ‘뉴욕타임스 문신은 제거할 거냐’고 묻던데,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에이브럼슨은 등과 어깨에 4가지 문신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향 뉴욕의 지하철 토큰 모양과 모교인 하버드대학교와 남편 헨리 그릭스를 상징하는 영문 ‘H’, 그리고 <뉴욕타임스>를 상징하는 영문 ‘T’다. 지하철 토큰 문신은 2003년 뉴욕으로 복귀한 뒤 새겼는데,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단다.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는 2011년 9월 편집국장 취임 뒤 <뉴요커>와 한 인터뷰에서 “토큰의 문구가 내 인생철학과 같다”고 말했다.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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