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5:18 수정 : 2014.03.02 14:25

김광석은 그가 부른 노래 가사처럼, 불꽃 같은 인생을 살았다. 대중은 ‘서른 즈음’에 ‘먼지가 되어’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한 그를 기억한다. 그의 고향인 대구 방천시장에 그려진 김광석 추모 벽화(왼쪽)와 생전 김광석의 공연 모습.독립문화단체 인디053, 예술기획 성우 제공
어떤 죽음은 너무 선명한 탓에 시간이 지날수록 모호해진다. 바로, 이 죽음처럼 말이다. 내 시대의 가객이 아니었던 탓에 그 죽음을 특별하게 기억하진 못함에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북한 병사 송강호처럼 전혀 연결되지 않는 어떤 순간에 종종 그의 죽음이 떠오른다. 홀로 당황스럽고 겸연쩍게.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서울 강변북로 막히는 길 위로 찬란한 볕이 떨어지던 어느 오후, 경기도 과천에서 서대문으로 차를 몰고 있는데 강물 위로 그가 떠올랐다. ‘정말 그는 대체 왜 죽었을까?’ 라디오에선 김C와 이적이 미운 마흔 살을 말하며 나이듦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또 어떤 때는 혼자 꽈리고추멸치볶음에 소주를 마시며 예능프로 <세바퀴>(MBC)를 보고 있는데 ‘자동차는 두 바퀴로 가고, 포수에게 잡혀온 잉어만이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난데없이 그가 마주 앉는다. 희한하게도 한살 한살 더 먹어갈수록 점점 더 세상 모든 ‘서정’의 순간에, 나는 그렇게 김광석에게 사로잡히고 있다.

김광석은 1996년 1월6일 떠났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초실재적(Hyperreal) 명사다.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실재는 상상적인 것을 위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을 위해 사라지는 것이라면, 그의 죽음이야말로 딱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996년 사춘기의 절정에서 허공으로 질주하던 시절, 듀스에 열광하던 나는 당시 김광석이란 알듯 말듯 한 가수의 죽음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부른 노래 몇 곡을 알고 있었지만, 그게 뭐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나마 그의 죽음을 시기적으로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 건, 그보다 한 달 보름 남짓 앞서 듀스에서 솔로로 데뷔한 김성재가 죽었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은 김광석의 죽음을 두고 ‘베르테르 효과’란 문구를 달아 보도하곤 했는데, 그 두 죽음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던 아직 어렸던 나는 ‘베르테르 효과’가 김광석이 부른 노래 제목인 줄 알았다.

비로소 김광석을 진지하게 만난 건 그로부터 몇 년 뒤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20대는 누군가 <이등병의 편지>를 절창으로 불러젖히는 것을 지켜봐줘야 지나간 뜨거운 밤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생략된 것이 확실해 보이는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로 끝나는 그 노래는 뭔가 비관적이지만 절망할 수 없는, 그렇게 희망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무거움이 확실히 버겁기만 한 한국 사회의 청춘에 대한 가장 보편적 이해이자, 가장 보통의 넋두리다. 벌써 10년째, 오늘 밤에도 어디선가 불리는.

그러고는 또 몇 해가 지나 <서른 즈음에>에 빠졌다. 또 하루 멀어져 가는 것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그의 노랫말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어떤 헛헛함에 빠져들 때, 김광석의 노래는 가장 확실한 위로이자 든든한 공감이다. 김C와 이적은 김광석 시대의 서른이 요새 마흔이라는 말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서른 즈음에>의 생명력은 앞뒤로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

김광석(1964년생)과 동시대인이고, 지구 전체에서 가장 성공한 동년배였을 마이클 조던(1963년생)은 그러나 어느 인터뷰에서 “선수 생활을 통틀어 빗나간 슛이 9천 개가 넘고, 패배한 경기도 300번에 이른다. 경기의 승패를 가르는 순간, 맡겨진 슛 기회를 날려버린 것도 스물여섯 차례나 된다”며 “삶 속에서 끊임없이 실패를 맛보았다”고 말한 적 있다. 마이클 조던이 김광석을 알 리는 없고, 김광석이 마이클 조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상상하는 것도 뜬금없지만, 이 둘에 적절하게 동조해오고 또 동경했던 입장에서 마이클 조던의 이 언급이 흡사 김광석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진 적도 있었다. 김광석의 노래가 마이클 조던이 말한 바로 그 빗나간 슛, 패배한 경기, 날려버린 기회에 관한 읊조림은 아니었을까. 마이클 조던처럼 세상에 있는 축복 없는 축복 다 받은 이는 그 실패를 딛고 성공해 그걸 담담하고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대체로 그 좌절의 반복 속에서 상처만 받고 끝나는 범인들에게 김광석은 누구나 그렇게 나이를 먹고, 조금씩 넘어지고 아파하면서도 그걸 부여잡고 ‘강물 위를 뜻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 없어질 때까지 같이 일어나자고 권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이제 벌써 18년이 지났지만, 이 죽음은 너무 모호하고 그 의미는 점점 더 선연하다. 우리는 아직 김광석의 마음, 그가 구축했던 정서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 생애주기적 고민은, 처연함은 영속한 것일 테다. 그는 단순히 좋은 노래를 남긴 요절한 포크가수가 아니다. 그는 전 시대에서 동시대를 살았고, 동시대와 다음 시대를 잇는 이름이다. 대중문화의 전위를 구성한다는 평가를 받는 <무한도전> ‘무한상사’ 시리즈(MBC)에서 그의 노래를 활용한 뮤지컬을 선보이고, 그의 정서가 핵심 요소로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시도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인 것은 여전히 그가 살아 있단 걸 말해준다.

대중문화의 흐름이 급박해지고, 생산과 유통의 볼륨이 커질수록 역설적이게도 초실재적 명사들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대중문화의 컨베이어벨트가 단타 상품만 찍어낼수록 점점 더 짙어질 이름이 있다면, 그게 바로 김광석이다. 몇몇 곡밖에 인용하지 못했지만,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18년이 지났지만, 한국인은 아직 그보다 더한 감정의 페르소나를 갖지 못했다. 어떤 슬픔, 반드시 거쳐야 할 절망의 순간에 김광석의 노래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처방이다. 그 갈대밭 송강호의 질문처럼, “광석이 형, 정말 왜 그렇게 빨리 가셨나요?”

글 김완 서울 청량리에서 태어나 청량리에서 자랐다. 충무로영상센터 ‘활력연구소’를 학교 삼아 다녔고, 이후 문화연대에서 ‘변두리’를 메인 이슈 삼아 활동했다. 현재는 매체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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