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8:10 수정 : 2014.01.06 16:11

어른을 위한 어린이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다. 이 프로그램들에서 아이들은 ‘어린이다움’을 보여주도록 요구받지만, 그것은 과연 아이의 가치일까 어른의 가치일까.KBS 제공
내겐 어린 아들이 있다. 올해 11살, 초등학교 4학년이다. 땅 딛고 서지도 못하던 때, 우리 아이는 흔히 말하는 ‘신생아 배앓이’라는 걸 했다. 아이는 매일 저녁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쉬지 않고 울었다. 아이의 울음을 그칠 방법은 없었다. 이유를 알 수도 없었다. 답답하지만 그나마 울음소리를 조금이라도 잦아들게 만들 방법은 안고 달래는 일뿐이었다. 몸이 바닥에 닿지 않으면 조금 덜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산후의 지친 몸으로 그저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의사들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힘들었다. 평생 허리가 아파본 적 없던 나는 그제야 ‘요통인’이라는 인간집단이 실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의 울음은 돌잔치를 끝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내 허리 통증 또한 간헐적 재발이라는 흔적만을 남겨둔 채 사라졌다. 그러나 더 신기한 건 사라진 울음이나 요통이 아니었다. 내 몸이 그때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훨씬 더 신기했다. 힘들었다는 생각은 있지만 그때의 기억이나 느낌은 전혀 생생하지 않다. 기억하는 건 ‘힘들었다’는 언어적 껍데기일 뿐, 그 내용과 의미가 될 경험은 어떠한 흔적이나 상처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버렸다. 아내도 그렇다 한다. 기르는 동안의 고달픔은 단지 그랬다는 언어적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 결코 당시의 느낌과 경험을 상기시키지 못한다 한다. ‘그러니 아이를 또 낳아 기르나보다’고 우리는 결론 내렸다. 그 기억이 그 시간의 느낌을 상기시킬 수 있다면, 세상 어떤 부모들이 아이를 더 낳아 기를 수 있을까?

어린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부모의 얼굴은 행복감으로 충만하다. 그 행복감이란 그리고 그 즐거움이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다. ‘같은 유전자라 당긴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든 설명하려는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그 순간 이전의 모든 기억과 느낌을 무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아이와의 대면은 강력한 경험이다. 아이가 천사와 같은 까닭은 규범적이거나 도덕적인 기준에 비추어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심지어는 종의 구분까지 뛰어넘는 보편적 이미지를 획득한다. 롤랑 바르트가 언급한 ‘주이상스’(Jouissance·문화와 규범을 초월한 원초적이고 본원적인 즐거움)의 가장 적합한 사례는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이다. 아이를 향한 부모의 마음이란 어떠한 잣대로도 재거나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행복감은 쉽게 전염된다. 특히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와 같은 밑도 끝도 없는 행복감은 더욱 그렇다.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KBS)는 그런 점에서 시청자의 감정을 잘 건드렸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작동시킬 수 있는 스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낸 프로그램이다. 특히 추사랑은 우리 감정에 직결된 메인 파워 스위치다. 김구라가 2013년 11월21일 ‘KBS 연예대상’ 수상자를 예상하며 ‘추사랑을 줄 수는 없을 테니 유재석이 받을 것’(실제로는 <개그콘서트> <인간의 조건> <해피선데이-1박2일>의 김준호가 받았다)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추사랑의 파괴력은 막강하다. 많은 사람들이 추성훈이 느끼는 행복감에 공감한다. 추사랑은 그 이름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

방송에서 보인 추사랑은 어떤 면에서 어른들이 그 나이의 아이에게서 기대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잘 먹고, 잘 웃고, 순하고, 적당히 낯을 가린다. 추사랑이라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충분히 귀엽고 사랑스럽다. ‘추블리’가 ‘러블리’라는 단어를 대체하게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나 반드시 보태어 생각해야 할 점은 사랑이가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나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는 이휘재의 쌍둥이 아들처럼 너무 어리지 않고 장현성의 두 아들 준우·준서처럼 너무 크지도 않다. 아직 말을 다 배우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타블로의 딸 하루도 마찬가지긴 하다. 하지만 하루와 타블로의 소통은 주로 ‘말’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랑이보다 언니인 하루는 아빠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추성훈은 사랑이와 말로 소통하지 못한다. 사랑이는 아직 어리다. 자크 라캉식으로 말하면 하루는 상징계(아이가 자라 언어로 소통할 수 있게 되는 단계)의 문턱에 있지만 사랑이는 아직 상상계(말을 배우기 이전, 이미지로 생각하고 소통하는 단계)의 뒷자락에 머물러 있다.

상징으로 소통한다는 것은 규범과 규칙을 통해 산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 아이들은 많지만, 대부분이 추사랑과 같은 느낌일 수 없는 것은 언어 속에서 사는 큰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언어 속에서 사는 아이들은 이미 규범과 규칙을 안다. 이는 어떻게 해야 칭찬받고 보상받을 수 있는지 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주이상스’의 대칭점에 규범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행복감의 형태로 ‘플레지르’(Plaisir·문화와 규범의 잣대를 얼마나 잘 구현하느냐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지는 즐거움)가 있다고 했다. 시험 잘 보고 엄마에게 칭찬 듣는 즐거움이 가장 전형적인 플레지르다. 전국 모든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여자아이들이 크레용팝의 <빠빠빠>를 재현하고, 모든 남자아이들이 <개그콘서트>의 ‘황해’를 흉내내는 것은 모두 플레지르를 얻기 위한 아이들의 노력이다.

아이들이 따라야 할 규칙과 규범이란 어른들의 것일 뿐 그들 스스로 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들의 노력을 어른들은 매우 불공정하고 모순적인 잣대로 평가한다. 어른들의 흉내내기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잘하면 오히려 불편해하니 말이다. 수준 이상으로 잘하면 ‘천재’ 소리를 듣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당수의 아이들이 ‘징그럽다’거나 심하게는 ‘되바라졌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추블리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안티가 <일밤-아빠! 어디가?>(MBC)의 어린이들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어른을 위한 어린이 출연 프로그램들, <스타주니어쇼 붕어빵>(SBS)이나 <일밤-아빠! 어디가?> 그리고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는 분명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SBS)와는 다른 프로그램이다. 어린이를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들은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어떤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추사랑의 등장으로 더욱 분명해진 것이기도 하다.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어린이다움’이라는 가치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 ‘어린이다움’이란 대체 누구의 것인가? 어린이들에게 어린이 코스프레를 요구하는 어른들의 비뚤어진 욕망은 이제 해체돼야 한다. 일본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일본에서 미성년자는 밤 9시 이후에 일을 할 수 없다. 따라서 9시 이후에는 방송 활동도 할 수 없다.) 사랑이의 ‘KBS 연예대상’ 출연을 보며 말을 배운 사랑이가 맞닥뜨리게 될 어른들의 기대와 원망의 무게를 느낀다. 아이들을 어른들을 위한 오락 프로그램에 꼭 등장시켜야 할까?

글 박근서 대구가톨릭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나름 학생들의 좋은 친구가 되려 애쓰고 있다. ‘텔레비전 코미디’로 학위를 받았고, 요즘 주된 관심사는 비디오게임이다. 닌텐도에 우리를 구원할 영성이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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