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2 17:42 수정 : 2014.01.07 10:49


세 번의 항복과 거절

공자가 서른다섯 살 때인 서기전 517년, 노나라 소공 25년 9월 무술일 아침, 일단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임금 소공이 궁이 아닌 공실의 재화 창고인 장부(長府)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궁궐의 친위대가 교대로 장부로 나와 임금을 숙위하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궁으로 향하던 친위대가 담을 끼고 방향을 트는 사이에 어디선가 나타난 다른 군사들이 소리 없이 합류하더니 궁성의 동쪽에 자리잡은 계환부가 가까워지자 다시 몇 갈래로 흩어지면서 계환부를 바람처럼 에워싸기 시작했다. 계환부는 계씨의 사가이자 노나라 정령(政令)의 중심인 막부(幕府). 군사는 세자 공위와 계평자의 서삼촌 공해가 직접 이끌고 있었다. 두 사람과 후소백 등 친위 쿠데타 주도자들은 임금 소공이 궁궐을 비우고 있고, 재상 숙손소자(叔孫昭子)가 곡부에 없을 때를 거사일로 잡았다. 소공은 기우제를 지낸 뒤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고, 숙손씨의 수장이자 노나라 재상인 숙손소자는 공실(公室) 묘역이 있는 감(闞)읍에 시찰을 나가 있었다. 임금이 보물창고에 틀어박혀 있으니 숙위하는 병사들의 궁궐 밖 교대가 의심을 사지 않고, 재상이 곡부에 없어 사태에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타이밍이었다. 주도자들은 전광석화처럼 계평자를 타도한 뒤 삼환 일족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숙손소자와 맹손씨의 추인을 이끌어낸다는 계획이었다.

아침 준비에 부산하던 계환부 가복들의 귀에 말발굽 소리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계평자의 동생으로 계환부의 총관인 공지가 급보를 받았다.

“장부에서 나와 궁으로 가던 군사들이 갑자기 우리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임금이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계환부에 들르려는가? 고개를 갸우뚱할 새도 없이 연이어 보고가 들어왔다.

“선두에 갑옷을 입은 세자와 공해 어른이 보입니다!”

침실을 박차고 나온 공지는 가신들을 이끌고 대문 앞으로 나왔다. 임금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공지가 문 앞에서 행렬을 향해 외쳤다.

“임금께서 누추한 사가를 방문하시면 예로 맞이해야 한다. 시간을 주시기 바란다고 전하라!” 공지가 말을 마치고 대문 안으로 몸을 숨기려는 순간, 복수심에 불탄 공해가 공지를 불러세웠다. “네 이놈! 새파란 놈이 감히 숙부를 능멸했겠다!”

공해의 손짓에 화살이 공지를 향해 쏟아졌다. 그것을 신호로 친위대가 일제히 계환부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계평자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다.

“공산은 어디 있느냐? 양호는 어디 있느냐?”

계평자의 총애를 받는 가신인 공산불뉴(公山不扭)는 이때 계씨의 근거지인 비(費)읍을 관리하러 가 있었고, 중진급 가신인 양호(陽虎)가 숙직하고 있었다. 양호는 마흔이 약간 넘은 사족 출신으로 지식과 권모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양호는 공지가 죽었다는 소식에 공황 상태에 빠진 계평자 일족을 계환부에서 가장 깊숙한 후원의 누대(樓臺) 위로 피신시킨 뒤 정예 가병들로 하여금 후원을 에워싸게 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숙손과 맹손의 도움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양쪽이 서로 대치한 상태에서 공위가 누대 위를 향해 외쳤다.

“의여(계평자)는 홀로 내려와 임금께 끼친 죄를 씻으라! 일족의 안전은 보장하겠다!”

시간을 끌기로 작정한 계평자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종친들이여, 내가 아직 젊어서 잘못한 점이 있다면 다 국가를 위하려다 생긴 일이니 용서하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 노나라가 사직을 잃지 않은 것은 나의 조상들이 노심초사한 덕분임을 그대들도 잘 아는 바이다. 나 또한 해마다 몇 차례씩 진(晉)나라에 뇌물을 바쳐가며 대국의 후원을 유지하는 데 전력을 다해왔다. 그럼에도 임금께서 관리를 보내어 신을 무기로 공격하시니 이는 누군가 내 충정을 잘못 고해바친 탓인 듯하다. 그러니 그대들은 속히 임금께 고하라. 나는 이 길로 도성 남쪽의 기수(沂水)가로 가서 임금께서 내 죄를 살펴주시길 기다리겠다.”

계평자가 유혈 저항 대신 항복을 택한 것으로 판단한 공위 등은 전령을 장부로 보내 소공의 재가를 청했다.

“기수가라니, 여차하면 진나라에 구원을 청할 심산이구나.”

소공이 코웃음을 치자 계평자가 다시 청했다.

“신은 이 길로 정계에서 은퇴하겠습니다. 비읍에 가두어주시면 거기서 여생을 마치겠습니다.”

계평자가 비읍에 연금될 것을 자청한다는 보고를 받자 공자들이 반대했다.

“이 자가 아직도 우리를 바보로 아는군요. 비읍은 계씨의 본거지입니다. 얼마 가지 않아 반란군을 이끌고 들이닥칠 겁니다.”

소공이 연금도 거절하자 계평자는 진짜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좋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겠습니다. 수레 다섯 대만 허락하시면 그것에 의지해 나라를 떠나겠습니다.”

소공 진영은 비로소 쾌재를 불렀다. 수레 다섯 대면 수행자가 기껏해야 50명 남짓이다. 피 흘리지 않고 계씨를 외국으로 내쫓고 가산을 몰수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총신 자가자(子家子·이름은 자가기 또는 자가구이며, 자는 의백(懿伯)이다)가 소공을 설득했다.

“임금께서는 이번 의여의 청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정령(政令)이 계씨에게서 나온 지 오래이고, 많은 가난한 백성들이 계씨에 의지해 먹고살아왔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그들이 들고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으면 뜻을 같이하는 자를 찾아 규합할 것이니 이는 임금께서 반드시 후회할 일이 될 것입니다.”

그때 후소백이 자가자를 막아섰다.

“말도 안 됩니다. 포위한 수괴를 풀어주다니, 다 잡은 맹수를 놓아주는 격입니다. 후환을 남기지 말고 지금 그를 죽이소서!”

소공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가 맹손씨의 수장인 맹의자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했다. 삼환의 큰집이면서도 세력이 가장 약해 일가로부터 하대의 수모를 당하던 맹손이었다. 소공은 옳다 싶어 후소백에게 맹의자를 불러오도록 했다.

‘1일천하’로 끝난 친위 쿠데타

계환부와 장부는 전령이 잠깐 사이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므로 소공의 명이 현장에 전해지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한낮이 지나도록 결판이 나지 않으면서 사태는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단초는 양호의 숨은 활약이었다.

양호는 이른바 ‘주군이 현명하면 마음을 다해 섬기어 함께 영화를 누리고 임금이 시원찮으면 일을 꾸며 시험해본다’(<한비자> ‘외저설 좌하’편)는 모험주의적인 출세주의자였다. 하급 사족 출신으로 일찍부터 권력을 좇아온 양호는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동향 및 동문들과 맹약한 적이 있었다.

‘각자 자기 주군의 총신이 될 때까지 서로 돕자. 우리 가운데 대부를 능가하는 세력을 얻는 이가 나오면 서로 잊지 말자.’

소공 진영이 계평자의 망명 허용을 놓고 세 번이나 결정을 미루는 동안 양호는 숙손씨의 가신으로 들어가 있는 당우(黨友)에게 밀서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밀서에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다. 계씨가 망하면 다음은 숙손 차례다. 당우여! 환난에 처하면 서로 돕자던 맹세를 잊지 않았겠지? 주군의 위기는 곧 가신의 기회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득세할 때다!

양호의 편지를 받은 당우가 숙손씨의 사마(司馬·가병대장)인 종려에게 순망치한의 뜻을 은밀히 전했다. 숙손소자가 없을 때 변란을 당해 황망하던 차인 종려가 가신과 가병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우리는 대부의 가신일 뿐이니 국가 대사는 관여할 바가 아니다. 다만 계씨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중 어느 쪽이 우리 숙손에게 유리한가?”

이때 양호의 당우 쪽에서 동조하는 소리가 쏟아졌다.

“계씨가 없어지는 것은 곧 숙손씨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모두의 뜻이 그러하다면 이는 곧 주군의 뜻이다. 가서 계씨를 구원하자!”

숙손의 가병들이 조용히 계환부 서북쪽 모퉁이를 뚫고 들어갔다. 한나절이나 작전이 종료되지 않자 쭈그려 앉아 ‘상황 끝’만을 기다리던 계공해의 가병들은 낯익은 숙손의 가병들이 들이닥치자 뿔뿔이 달아나버렸다.

숙손의 군대가 계환부 안으로 속속 진입하고 있을 무렵, 맹환부의 맹의자는 속이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어느 쪽에 붙느냐에 우리 맹손의 명운이 달렸구나.’

이때 후소백이 맹환부의 대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후소백이 왔다고?”

“집정께서 망명을 요청해 임금이 우리 쪽 의견을 듣고자 한다고 합니다.”

“의여가 제 발로 출국을 하겠다고? 그렇다면 사태가 공실 쪽으로 기울었다는 뜻? 어서 후소백을 모셔오너라!”

그때였다. 정탐병에게서 계환부 안에 숙손의 정기(旌旗)가 올랐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숙손의 깃발들이 속속 계환부 안으로 진입 중입니다. 사태가 역전되고 있습니다!”

가신들이 맹의자를 재촉했다. “더 늦기 전에 삼환의 일족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셔야 합니다. 주군은 속히 결단하소서!”

맹의자가 직접 망루로 달려가 계환부 안의 담과 지붕 사이로 숙손의 깃발이 이동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가신들에게 명했다.

“나는 후소백을 만난 적이 결코 없다!”

맹의자의 가신들은 후소백 일행을 맹의자에게 안내하는 듯하다가 남문에 이르러 이들을 모두 죽이고 가병들을 계환부로 출동시켰다. 계평자의 투항 의사를 들으며 기세를 올리던 친위 쿠데타군은 숙손과 맹손의 협공을 받으면서 오히려 역으로 포위되고 말았다. 공위와 공해 등은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계환부를 빠져나왔고, 지휘부를 잃은 군사들은 도륙을 당하거나 항복했다. 곧이어 궁성도 삼환의 가병에게 접수되었다. 소공이 머물고 있는 장부만이 섬처럼 남았다. 사태는 역전되었다. 자가자가 덜덜 떨고 있는 소공의 소매를 붙잡고 결연히 말했다.

“이번 일은 어리석은 신하들이 임금을 겁박해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 신하들은 그 죄를 지고 이 길로 망명할 터이니 임금께서는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협박을 받아 어쩔수 없었노라고 하시면 계씨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옥체를 보존하고 계시면 언젠가 수모를 씻을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소공은 천성이 미욱하고 겁이 많았다. 일찍이 아버지 양공의 장례식 때 19살의 나이임에도 상복 맵시가 안 맞는다며 세 번이나 옷을 갈아입어 주위의 비웃음을 산 위인이었다.(<좌전> 노소공 원년) 소공은 궁에 혼자 남기가 두렵고 싫었다.

“아니다. 나도 데려가다오. 더 이상 계씨의 참월과 모욕을 견딜 수 없다. 자가의백은 더 이상 과인을 말리지 마라!”

소공은 그길로 양공의 묘당으로 가 하직 인사를 한 뒤 장소백과 종친들, 그리고 자가자 등 소수의 신하들과 함께 제나라로 도망치고 말았다. 계평자로부터 정오가 되기도 전에 세 번씩이나 투항의 구걸을 받았던 소공으로서는 참담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곡부를 휩쓴 검거 선풍

변란의 급보를 받고 돌아온 숙손소자가 계평자에게 임금이 출국하게 된 경위를 따졌다.

“신하로서 임금을 쫓아낸 것은 자손대대로 이어질 오명이오.”

“저도 압니다. 그러니 제발 수습에 나서주십시오.”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겠소?”

“저, 의여가 다시 임금을 모실 기회만 만들어주신다면 생사육골(生死肉骨·죽은 사람을 살리고 마른 뼈에 새살을 돋게 함)의 은혜로 알겠습니다.”

당장 죽여버리고 싶은 임금이 막상 국외로 나가버리자 계평자는 임금을 쫓아낸 신하의 입장이 되고 말았다.

‘임금을 축출했다는 오명을 지고서는 진나라 조정의 지원을 받기 어렵고, 진나라 없이는 삼환의 권세도 없다.’

계씨에게 임금의 존재는 허수아비이자, 동시에 외풍을 막아주는 바람막이였던 것이다. 계평자가 분노의 와중에도 숙손소자에게 빌다시피 중재를 요청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숙손소자는 그길로 소공이 머무는 제나라 양주로 갔다. 숙손소자는 장소백 등 주전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소공에게 귀국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곡부에선 계평자의 마음이 바뀌어 있었다. 임금 쪽이 임금을 공격한 자들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맹손과 숙손씨 일족이 소공의 귀국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숙손소자는 임금에게 약속한 복위 계획이 무산되자 죽음을 각오했다. 노년의 숙손소자가 곡기를 끊은 채 계평자의 마음을 바꾸어보려다 7일 만에 숨을 거둔 것은 무술일의 친위 쿠데타가 실패한 지 꼭 한 달 뒤였다. (이상 <좌전> 및 <공양전> 노소공 25~26년, <사기> ‘공자세가’ ‘노주공세가’ 등에 기록된 사실(史實)을 얼개로 각색하였음.)

임금이 하루아침에 적성국이나 다름없는 제나라로 망명하고, 숙손소자마저 사실상 자살의 길을 택하자 곡부는 공포의 거리로 바뀌었다. ‘선(先) 정권 안보, 후(後) 임금 복위’로 정국 수습의 가닥을 잡은 계씨는 대대적인 반대파 숙청과 색출 작전에 들어갔다. 계씨 타도 선봉에 섰던 후소백의 가문이 일벌백계의 본보기가 됐다. 이 사건 뒤 후씨가에 대한 기록이 노나라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면 혈통마저 단절되는 처참한 최후였을 것이다. 장소백이 임금을 따라 망명을 선택한 장씨가는 계씨의 2중대가 되는 조건으로 종주권이 장소백의 사촌동생 장회에게 넘겨졌다. 계씨 정권에 반대하여 망명한 쪽에서도 무력으로 맞서는 일이 빈발했다. 사실상의 내란이었다. 곡부 조정의 관리 출신과 지식인 그룹은 숨죽인 채 납작 엎드렸다. 계씨의 의심을 사는 것은 곧 목숨이 달린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공자의 선택

회오리는 공자의 학당에도 불어닥쳤다. 학당의 붕우들 중 공실 및 대부의 자제들 몇몇은 벌써 임금이 있는 제나라로 넘어갔고, 일부는 검거 선풍을 피해 도성 밖으로 몸을 숨겼다.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공자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삼환의 가신으로 종사하지 않은데다, 학자와 교사로서 상부 지식층 사이에 점차 높아지고 있던 공자의 명성이 반체제 분자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던 계씨의 눈에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안로(顔路·공자의 초기 제자로, 안회의 아버지이다) 등 공자의 외가 쪽 친척들은 공자에게 피신을 권유했다.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입니다.”

공자의 고향 후배이자 집안끼리 가까운 사이로 훗날 공문(孔門)의 일원이 된 진상(秦商·공자 아버지 숙량흘의 군대 동료인 진근보의 아들이다) 등도 유학을 권했다.

“이젠 조정에 출사할 명분도 없어졌습니다. 울고 싶을 때 뺨을 때려준 격이라 생각하고 이 기회에 넓은 세상을 돌아보십시오.”

붕우들은 이런 이유를 내세워 잠시만이라도 공자가 곡부를 떠나 있을 것을 권유했다. 장소백 등 노나라를 떠난 유력 인사들은 공자와 같은 유망한 신진들의 망명 후원자를 자처했다.

사실 공자도 서른 살을 넘어서면서 내심 새로운 지식과 세계에 대한 동경과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존경해 마지않던 정나라 재상 자산(子産)의 서거 소식을 들은 뒤로는 부쩍 더했다.

광란의 비상시국에 곡부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도 현실적으로 그리 현명한 처신일 것 같지 않았다. 곡부에 남아 있는 한 계씨가에 종사하라는 압력을 받을 것이고, 그것을 계속 거부하는 한 호랑이 아가리 속에서 사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특히 이번 변란을 통해 계평자의 오른팔로 등장한 양호는 같은 사족으로서 친분 있는 후배인 공자에게 계씨를 위해 장차 조정에 출사해줄 것을 강권하고 있었다.

“중니, 자네가 조정에 출사만 해준다면 우리 둘은 각자 한쪽 날개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가 될 걸세. 나는 계환부에서, 자네는 조정에서 손발을 맞춘다면 노나라 정치는 장차 우리 두 사람이 주무를 수 있네.” 이것이 양호의 암시였다. 하지만 공자는 임금을 축출한 상황에서 계씨 정권에 협조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금이 바로 떠날 때일까?

이제껏 참주에게도 봉사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공위(空位·임금의 자리가 비어 있음)의 때를 당해서랴….

숙손소자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당분간 임금의 복위가 불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기정사실로 되어가던 어느 날 공자가 자로에게 말했다.

“이보게 중유, 우리 모처럼 태산에나 올라볼까?”

철이 든 뒤 생각을 가다듬을 일이 있을 때마다 공자는 태산에 올랐다. 서른다섯, 뜻하지 않은 선택의 기로에서 공자는 다시 태산을 향했다. 안개 속에서 공자를 맞이한 겨울 태산은 비장했다. (계속))

글 이인우 <한겨레>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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