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2 11:23 수정 : 2013.09.03 14:29

첫만남은 강렬했다. 2009년 여름 끝자락에 그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보석이다.”

그를 언급할 때 나는 항상 ‘홍순영’이 아닌 ‘농부 홍순영’이라고 소개한다. 나 역시 시골에서 살고 있으니 주변에 농부는 많다. 그럼에도 그에게만 유독 ‘농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그는 내가 알고 있는 농부들 중에서도 ‘단연 농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4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디스이즈농부’라고 표현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지만 나에게 홍순영은 여전히 변치 않는 보석 같은 농부다. 나는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

공무원 부럽지 않은 농사일

홍순영씨에게 ‘농부’는 직업이 아니라 이름의 일부다. 그는 나고 자란 곳에서 10대 때 농부가 되었고, 한 번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농사만 지었다. ‘홍순영’이라는 이름은 복수형이다. 객지에서 대학 나온 자식들이 지금 다 같이 모여 농사를 짓는다.
농부 홍순영. 1958년 전남 구례군 광의면에서 나서 지금까지 한자리에서 살고 있다. 객지생활을 한 적도 없다. 군대조차 가지 않았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슨께 그렇지요.”

그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다. 부모님도 물론 구례 사람이다. 그는 형제가 많다.

“아홉입니다.”

“아홉요? 어떻게 됩니까?”

“5남4녀지요. 저는 여덟째고요.”

부모님이 농부 홍순영에게 논 270평(893m2)을 증여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대처로 나갔다. 그는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농부일 수밖에 없었다. 열일곱 살,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마을 정미소를 운영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당연한 일인 듯했다.

“정미소는 언제까지 하셨습니까?”

“6년 계약하고 8년 정도 했지요. 그라고 2년 쉬다가 다시 2년 더 했을 겁니다. 서른 살 무렵일 겁니다.”

“왜 그만두셨습니까?”

“정부수매를 하니까 더 이상 마을 정미소가 필요 없어졌지요. 통일벼, 유신벼, 뭐 그라던 시절이었슴돠.”

“벌이는 좋았습니까?”

“정미소 딱 2년 하고 논 두 마지기 샀습니다. 제 나이 열아홉에 처음으로 땅을 샀지요. 마흔 될 때꺼정 서른 마지기(6천 평·1만9835m2) 장만하고 큰 머슴, 작은 머슴 두고 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저 일 많이 했습니다.”

정미소에서 쌀을 도정하면 읍내 장터 ‘되질하는 사람’에게 넘겼다. 경운기에 싣고 장으로 나간다. 그때는 쌀 한 가마니에 85kg이었다고 한다. 경운기에 서른 가마니를 싣고 나간다. 운반 비용으로 쌀 주인에게 가마니당 1500원을 받았다고 한다.

“서른 가마니니까 1500원 곱하기 서른 하면 수월찮은 돈이잖아요. 그렇게 돈을 모으면 땅을 샀습니다.”

1986년 1월 1일, 집 마당에서 전통혼례를 올렸다. 살림은 1983년부터 차렸다. 왜 결혼식이 늦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집사람은 중학교꺼정 나왔습니다. ‘나같이 못난 놈하고 살 거냐’ 하고 물었지요.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내게 홍순영은 한 사람의 농부가 아닌 ‘홍순영 가족’이다. 홍순영은 가족농이다. 딸 다섯에 아들 한 명이다. 그의 아내는 당연하고, 산림조경학과를 졸업한 넷째 딸 진주씨와 한국농업대학에서 과수학과를 졸업한 아들 기표씨가 함께 농사를 짓는다.

“누구 결정입니까?”

“지들이 결정하고 우리는 동의했지요.”

“도시로 나가서 돈 벌게 하고 싶지 않으셨어요?”

“농사일이 공무원 부럽지 않습니다.”

 

270평 물려받아 4만3500평으로 키워

당연하기도 하지만 의외인 것은 농부 홍순영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한다. 진주씨는 ‘곳간지기’라는 직책으로 순영농장의 농산물과 물류를 관리한다. 월급을 받고 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인 것이다. 감농장은 대략 8천 평(2만6446m2)이 넘는데, 2년 전부터 아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의 집을 방문할 때면 항상 십수 명의 ‘가족’이 함께 있다. 시집 간 딸과 사위들, 무엇보다 손자·손녀들이 생겼다. 농사철이면 시간 되는 가족은 함께 기거하고 일을 한다. 일전에 점심시간 지나서 광의면 홍순영의 집을 방문했는데 모든 가족이 일제히 오침 중이었다. 한낮 오침은 이 집안의 전통인 모양이다. 홍순영은 새벽 3시면 일어나서 들판으로 나가는 사람이다. 아무 기척도 내지 않고 조용히 마당을 벗어났다.

그를 처음 만난 2009년, 그의 농지는 감농사가 8천 평, 매실이 1500평(4959m2), 무엇보다 논농사가 3만4천 평(11만2397m2)이었다.

“한쪽이 돈을 보면, 한쪽은 써집디다. 내년부터는 농사를 좀 줄일라고요.”

그는 이미 노동의 한계상황이라고 누차 이야기했다. 그는 2010년부터 농지를 줄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몇 년간 지켜본 그의 농사는 줄어드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넓은 면적의 농사를 무농약으로 짓는다.

1997년 여름, 그는 농약 중독으로 쓰러졌다. 온몸이 가렵고 피부가 하얗게 변해갔다. 그때부터 무농약 농사법을 배우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현미식초 농사법, 우렁이 농사법 등 무엇이든 배우고 실험했다. 바닷물을 싣고 와서 논바닥에 붓기도 했다. 별의별 짓을 다 해봤다. 2000년 무렵부터 홍순영의 농법은 자리를 잡았다. ‘환원순환농법’이라고 부른다. 농약 대신 자연에서 나온 것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농법이다. 그는 경남 진주에서 ‘탄화기’를 구입해 농장에 설치했다. 주변의 산과 들에 지천으로 깔린 잡초와 식물을 베어서 잘라 넣은 뒤 고열로 태워 나오는 연기를 액체로 추출하는 기계다. 쇠비름·자리공·소리쟁이·환삼덩굴·산죽·담배나무액 등 80여 가지 식물제제를 만들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땅이다. 모든 병충해는 토양에서 온다고 믿는다.

“땅은 얼마나 해야 만들어집니까?”

“5년 정도는 작업해야 땅 본성을 찾습니다. 내년에는 감나무 밭에 호밀을 뿌릴 생각입니다. 섬유질도 많고 호밀대가 다른 풀을 방지합니다. 미생물도 투여해야 하고.”

“미생물은 어떻게 투여하는 겁니까?”

“이전에는 꼬드밥 해 가꼬 산에 가서 놔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벌레들이랑 모이지요. 그 아들이 흙 속으로 들어가서 숨을 쉬고 같은 넘을 만듭니다.”

그의 감나무 농장은 풀이 수북하다.

“풀은 뽑고 뒤집는 게 더 좋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풀을 하도 뽑으니까 땅도 습관이 생깁니다. 풀뿌리가 땅속 깊숙하게 파고들 정도 되어야 땅도 깊은 호흡을 합니다. 미생물도 더 깊숙하게 침투하고. 자꾸 뽑으니까 땅도 움직임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농장에 견학 가면 나무는 안 봅니다. 흙을 만져봅니다. 그러면 답이 나옵니다.”

그의 순환제재 가공창고 한구석에는 퇴비가 쌓여 있다. 미강(쌀겨) 60%, 축분(소똥) 30%, 깻묵 3%, 돼지뼈 6%, 기타 등등이다. 미강은 미생을 가지고 있고, 자기 양분을 자기가 생산한다고 한다. 질소 함량이 높다. 축분은 질소와 발효율이 높다. 그에게 뭔 질문을 하면 항상 구체적인 수치와 용어를 들고 나오기 일쑤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사진 권산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미술을 전공해 웹디자인과 인쇄물 디자인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부업으로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다. 7년 전 전남 구례군으로 이사했다.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디자인 일을 한다.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 <아버지의 집> <맨땅에 펀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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