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4 10:27 수정 : 2013.07.04 14:18

재주술화(Reenchantment)는 ‘다시 주술화되었다’는 말이다. 베버에게서 시작된 ‘주술화·탈주술화·재주술화’ 라는 말에 영감을 얻은 후대의 학자는 적지 않다. ‘일상의 사회학’을 주창한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도 있고, 미학이란 맥락에서 이 개념을 참고한 독일 철학자 발터 벤 야민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은 그들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막스 베버에게 ‘근대’란 합리성의 지배이자 탈주술화의 세 계이지만, 그가 재주술화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탈주술화한 세계를 전혀 믿지 않는 신앙인이 현대에도 여 전히 존재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 깊은 흥미를 느꼈 다. 베버가 역겨워한 사람은 그런 신앙인들이 아니라 합리 성, 과학의 이름으로 신앙을 파는 사기꾼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와 과학이 다른 영역임을 인정하지 않고 종교와 과학 을 경합시킨다. 베버는 이들을 ‘강단의 예언자’라 부르며 경 멸했다.

이 글에서 말하려는 ‘주체의 재주술화’가 베버의 그것 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넘쳐나는 재 주술화한 주체는 비과학적이고, 때로 반과학적인 미신에 쉽 게 빠져든다. 그러나 이들을 순전한 종교인이라 할 수도 없 고, 사기꾼(또는 강단의 예언자)이라고 하기도 곤란하다. 이 들은 종교인 같은 신실성(Sincerity)을 품고서 현대과학과 기술문명을 반성하고 비판한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돈을 벌고 물건을 소비하는 일에 진심으로 지쳐 있다. 잘 교육받 은 대도시 시민일수록 ‘잘 사는 것’(Well-being)에 관심이 높고 성찰적이며, 자신의 몸을 통해 직접 대안적인 삶을 실 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돈과 시간의 여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들의 상당수가 재주술화한 주체가 된다. 자아의 깊은 이해에서 영성의 발견으로 나아가는 ‘도시의 구도자들’은 딱히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지만 너무나 종교적 이고, 맹신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도구 합리적이다.

주체의 재주술화는 복합적인 사회현상이므로 요인을 하나로 특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환경운동, 생태주의운동 일부도 재주술화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 다. 한국의 생태주의 담론이 오랫동안 동어반복을 계속하 고 있다는 비판이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최소한의 내적 정합성도 갖추지 못한 신비주의적 요설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는 반면, 지금 현장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대중적으로 설 득할 정교한 논리는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몇몇 유 명한 생태주의 에세이스트의 책을 사서 읽고, 개인 머그를 들고 다니며, 생협에서 유기농 농산물을 주문해서 먹는, 그 야말로 철저한 ‘소비형 생태주의자들’만 늘어나는 상황이 다. 몸에 대한 담론이 자족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소비되고 있지만, 정작 운동은 개인화된 담론을 사회와 이어줄 매개 가 되어주지 못한다. 여기에 더해, 정보를 탐욕적으로 축적 하는 건강·미용 덕후들과,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말이 된 다’ 싶으면 곧장 자극적인 기사를 토해내는 언론에 의해 재 주술화와 ‘깨달음의 상업주의’ 현상은 더욱 강화된다.

의료불신 권하는 사회

“물은 생명을 지켜주는 필수물이다. 하지만 H₂O는 독 극물이다. 일산화이수소와 물은 전혀 다른 물질이다.”

“열은 위험하지 않다. 인체는 40℃가 넘는 고열에도 아 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박테리아나 암세포는 40℃ 이 상에서 모두 파괴된다.”

“천연 알코올은 인체에 유익하게 작용하는 약이다. 고혈압, 심장병, 당뇨병, 간질환을 예방하는 효과를 낸다. 천연 니코틴 역시 인체 대사를 활성화하는 작용을 한다.”

“비타민 등 영양보충제는 당장 끊고 술, 담배, 섹스를 마음껏 즐겨라!”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할 81가지 이유> <의사를 믿지 말아야 할 72가지 이유>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자 허현회씨는 자칭 의학 칼럼니스트다. 그는 젊은 시절 ‘인간 종합병원’이던 자신이 두 차례 뇌수술 이후 온갖 병마에 시달리며 수많은 약을 복용했지만 건강은 악화되었고, 병은 더 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현대의학의 허구성을 지각한 뒤 모든 약과 가공식품을 끊었고, 지금은 아주 건강한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허씨는 “아직까지 책 내용에 대해 논리적·학문적으로 반박하는 댓글은 없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당연하다. ‘일산화이수소와 물은 전혀 다른 물질’이라느니 ‘인체는 40℃가 넘는 고열에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비과학적인 주장에 ‘죽자고 덤비는’ 의학 전문가가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의 책 전반에 걸쳐 명확한 이분법적 논리가 있다. ‘천연물질=자연스러운 것=몸에 좋은 것’ 대 ‘화학적 합성물=인공적인 것=몸에 해로운 것.’ 그럼 ‘복어독은 천연물질인데도 인체에 치명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런 반응 자체가 부질없어 보일 정도로 허씨의 논리는 허술하다.

문제는 이런 책이 10쇄를 찍을 정도로 팔려나가고 <주간동아> 같은 언론매체는 다분히 호의적인 저자 인터뷰(“신흥종교나 다름없는 현대의학 비판은 내 운명”)까지 실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 성향의 여성주의 인터넷 매체인 <일다>, 그리고 <오마이뉴스>까지 허현회씨의 책에 날선 비판은커녕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특히 <일다>의 평가는 거의 극찬에 가깝다. “수많은 의학 논문이나 전문서적, 의학저널을 읽고 정리하고, 꼼꼼한 취재와 추적과 철저한 논리로 무장한 글이다. 그래서 다른 애매하고 어설픈 건강 관련 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허현회씨 경우가 유독 황당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른바 ‘대체의학’이라 불리는 분야에 대한 저널리즘의 무지와 혹세무민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삼성 X파일’ 보도로 유명한 이상호 전 MBC 기자는 2010년, 영화배우 고 장진영씨를 침뜸으로 치료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쓴 <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라는 책을 냈다. 그 책에는 구당의 치료로 장진영씨의 말기암이 놀라울 정도로 호전됐다고 쓰여 있다. “두세 번의 치료만으로 복부의 종양이 3분의 1 정도로 크게 줄었다.” “시술 3개월 만에 위장 일부를 제외한 몸속 암세포가 극적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2010년 11월 3일 방송된 <뉴스추적>(SBS)이 장진영씨의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이미 4기에 이른 종양의 크기 변화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박태환 선수와 고 장준하 선생도 구당의 침뜸으로 치료했다고 책에 나와 있다. 확인 결과 박태환 선수는 구당에게 발바닥 티눈을 치료받고 3개월 뒤 일반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씨는 “디스크를 치료했다는데 부친은 평소 심장병만 앓고 계셨다”며 “같이 사는 가족도 모르게 어떻게 치료했다는 건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설상가상 이상호 기자는 논란이 분분한 구당의 침술에 거창한 시대적 의미까지 부여하고 있다. “구당의 침술은 자본주의 체제에 반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실효적 대안이다.”

재주술화의 특징 건강 정보를 강박적으로 수집하는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질문을 달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복종하는 명령은 무엇일까’라고 말이다. 크게 두 개의 지상명령이 있는 것 같다. ‘건강’(Health Care)과 ‘피트니스’(Fitness). 건강은 ‘질병 없는 건강함’에서부터 ‘긍정의 심리’, 그리고 ‘영성의 회복’까지 한마디로 몸과 마음의 건강함을 가리킨다. 피트니스는 건강에 포함된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역시 구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섹슈얼리티의 층위가 있기 때문이다. 외모를 가꾸어 외부평가 점수를 높이는 일은 갈수록 비대해지는 현대인의 자의식에 중요한 요소다.

<몸과 사회>(1984), <신체 규율하기>(1992)라는 책을 쓴 영국 사회학자 브라이언 터너에 따르면, 오랫동안 ‘자아’라는 개념은 신체 없는 모습으로 재현되어 왔다. 즉, 생물학적인 신체는 사회적 주체를 담는 물질적인 그릇이나 물리적인 조건으로서만 인식돼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체는 주체의 자아인식에서 결정적 요소일 뿐 아니라 타인과 맺는 사회적 관계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몸은 민족적·인종적·젠더적 표지일 뿐 아니라 섹슈얼리티의 공간이다. 과거에 신체는 어쩔 수 없는 태생적 차이로 인지되기 쉬웠지만, 오늘날 신체는 자기 관리·자기

통제, 나아가서 개인 역량의 적나라한 지표로 작동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자기 신체를 훈육하고 규율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몸에 대한 강박이 점점 일반화되고 있는 상황은 주체의 재주술화 현상이 왜 ‘신체를 어떻게 통제하고 개선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이렇듯 치열하게 벌어지게 되는지를 시사한다.

재주술화는 언뜻 음모론과도 유사해 보인다. 공통점도 있고, 다른 측면도 있다. 음모론과 재주술화는 둘 다 과학(정상과학)에 ‘기생적’이다. 음모론은 이 지면에서 예전에 설명한 것처럼, 단순히 주술적·비합리적인 담론으로 치부할 수 없다. 음모론을 추동하는 에너지는 실재에 대한 열정(Passion of the Real)에서 비롯한다. 음모론자들은 일관성 없이 파편화된 현실을 선악의 서사로 매끄럽게 봉합하려 하는데, 이때 신뢰를 얻기 위한 전략이 바로 과학의 언어와 형식을 차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이성에 대한 욕망이며, 뒤틀린 과학주의이다. 반면 재주술화는 ‘회개한 과학주의’이다. 과학의 한계와 폐해를 과학의 언어로 말하면서 결국은 과학에 대한 거부(반과학)로 비약한다. 양상은 좀 다르지만, 공히 정상과학 담론에 ‘기생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재주술화는 음모론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적을 상정하는 경우가 많다. 요컨대 ‘악마’가 필요하다. ‘사악하고 이기적인 기득권 세력이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약자들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힘겹게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 ‘천신만고 끝에 그 진실을 내가 밝혀냈다’는 식의 서사. 허현회씨도 그랬고, 이상호 기자도 그랬다. 거대한 시스템이 과연 문제없이 돌아가는지 의구심을 갖는 건 꽤나 자연스럽고, 그 바위에 달걀을 치는 행위를 보면 무심결에 동정하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저항담론은 주류담론보다 항상 덜 세련되고 거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설령 허황된 이야기가 좀 섞여 있더라도 대중에게는 관대하게 취급받기 쉽다. 재주술화나 음모론은 담론적 약자라는 점이 오히려 어드밴티지로 작용하기 쉽다.

신체에 대한 병적 관심

음모론과 구별되는, ‘개인화’라는 특징도 있다. “내가 병원의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이 버섯을 계속 먹었더니 암이 완치됐다”는 식의 개별적 경험담은 기묘한 실용주의가 되어 사람들을 설득한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말처럼, 이론이 말이 되든 안 되든 임상효과가 있다니 한번 해보자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그러다 한두 번의 우연, 혹은 부풀려진 풍문이 성공사례로 둔갑한다.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들고 객관화하기 어려운 개인 각각의 내면에 도사린 불안과 공포는 결국 종교적 감수성으로 이어지기 쉽다.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합리화한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필요성이 왜 대두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종교가 왜 개인화될 수밖에 없는지 탁월하게 보여준 고전이다. 제임스가 미국 실용주의의 거인이기도 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재주술화는 실용주의적 사고와 관련이 있고, 실제로 실용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재주술화되는 경우가 많다. 실용주의는 합리주의와는 다르다. 논리의 정합성이나 일관성보다 구체적 상황에서 가치가 있다면 참이라는 것이 실용주의적 태도이고,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구체적 경험을 현상학적으로 ‘열어놓고’ 최종적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쉽게 말해 ‘저 버섯이 실제로 암을 치료할지 안 할지는 먹어보고 판단해도 된다’는 식이다.

신체에 대한 관심이 거의 병적으로 심화되는 사회에서 재주술화하는 주체는 더욱 많이 출현할 수밖에 없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이념·윤리가 더 이상 개인서사의 주제가 되지 못하고 그저 냉소의 대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은 자기 신체의 건전함과 자기통제를 통해 가꿔진 섹슈얼리티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신체에 대한 강박적 관심을 그대로 놓아두고서, 과학적 사고방식을 줄기차게 계몽한다고 해서 과연 이 문제가 해결될까?

글 박권일 대학에서 사회과학학회 활동을 하면서 늘 욕구불만이었다. 결국 ‘문화이론학회’를 만들어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홍대신’을 돌며 마음껏 뛰어놀고, 시네마테크에서 ‘죽을 때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김수행판 <자본론>을 읽다가, 뜬금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욕하는 글을 쓰곤 했다. 우석훈과 <88만원 세대>를 함께 썼다. 계간 <자음과 모음R> 편집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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