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8 18:32 수정 : 2013.02.13 18:49

 노자안지 붕우신지 소자회지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영화 ‘공자, 춘추전국시대‘의 공자(저우룬파 분).
 

 1. 무차별의 공자 학당

 공자 일행을 따라 궐리에 온 나는 공문(孔門)의 일꾼이 되었다. 학당 안팎을 청소하고 문도들의 신발을 정리하는 한편 공자와 주요 제자들의 수발도 거드는 일이었다. 공자의 주유천하 시절 나를 짐꾼으로 채용했던 자공(子貢·공자의 제자, 이름 단목사, 기원전 520?~456?)이 오갈 데 없는 내 처지를 딱하게 여겨 특별히 배려해준 일자리다. 나는 학당에서 부지런히 몸을 놀려 금세 새 문도들에게도 성실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었다. 쉬는 시간엔 귀동냥으로 들은 공부를 문도들에게 질문해 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친숙해진 젊은 문도들은 이런 나를 특별히 이생(李生)이라 불러주었다. 떠돌이 이방인 출신인 나로서는 과분한 호칭이었다.

 사실상 제2의 개교를 맞이한 학당에는 가르침을 청하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공자는 이미 맹희자(孟僖子·노나라의 대부, 공자의 제자 남궁경숙의 아버지)와 같은 귀족 계층으로부터 자식 교육을 맡길 만한 훌륭한 교사로 인정받은(<사기> ‘공자세가’) 사람이다. 그런 일급 교사가 유수한 제자들을 이끌고 귀국했다는 소식이 전국에 퍼지자 노나라는 물론 이웃나라에서도 천리길을 마다치 않고 학생들이 궐리의 학당으로 몰려든 것이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교문 앞을 쓸면서 죽간 보따리를 짊어지고 손에는 정성스레 준비한 예물을 든 청운의 젊은이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이처럼 찾아오는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자, 학당의 부교장이자 학생회장 격인 자로(子路·공자의 수제자, 이름 중유, 기원전 542~480)는 신이 나서 온 궐리가 떠나가도록 소리치기도 했다.

 “누가 노나라에 현자가 없다고 하는가? 천하의 준재들이 모두 궐리에 모이고 있지 않은가!”

 일찌기 공자는 “육포 한 꾸러미를 들고 오는 정도의 예를 갖춘다면 모두 가르치겠다”(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술이’편 7장)고 했다. 이러한 공자의 계급을 초월한 교육 방침은 신분의 굴레에 묶여 있던 많은 젊은이들을 자극해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 공문의 명성이 높아지자 하루는 미개하여 말조차 잘 통하지 않는 호향(互鄕)이란 마을에서 한 소년이 찾아왔다. 그때 몇몇 제자들이 이 야만족 소년을 내쫓으려 했으나 공자는 그를 만나 따스한 말로 격려해주었다. 제자들이 호향 풍속의 야만성을 들어 공자의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옳은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그 선함을 받아들이고, 옳은 길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사람은 그 불선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뿐인데, 굳이 사람에게 심하게 할 필요가 있느냐.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다가오면 그 깨끗함을 받아들이고 과거의 허물은 따지지 말자.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潔己而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술이’편 28장)

 유가(儒家)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 최종적인 사상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공자 사상의 보편성에 있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다른 문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고, 스승에 대한 믿음도 그 어떤 학파보다 강했다. 그런 유능하고 충성스런 제자들이 공문에서 많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교무류(有敎無類)라는 시대를 앞선 공자의 혁신적 교육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승, 공자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진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기준으로 이끌어주셨다.”

 

 2. 만세사표(萬歲師表)의 첫 출발

 공자는 30살 무렵 본격적인 전업 교사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서른에 자립(三十而立)한다고 하는 공자의 말은 실제로 그 무렵 학인으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독립적인 행보를 본격화했던 자신의 체험을 직접 술회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미래에서 온 속인(俗人)으로서 나는 무려 2500여 년 전에 어떻게 공자가 전업 교사를 할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것도 철저한 귀족 중심의 신분사회에서 일반 서민계급을 상대로 한 교육을 말이다. 설사 민중을 대상으로 한 교육시설을 구상한다 해도, 집단으로 사람을 교육하려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 내용과 교수 방법, 시설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부유한 귀족이 아닌 가난한 사(士) 계급의 20대 젊은이가 사실상 최초로 그것을 실현시켰다는 것이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느날 나는 공자의 가장 오랜 제자로서 젊은 시절의 공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로를 붙잡고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자로님, 저는 이 학교의 일꾼이 된 것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중국에 나라가 세운 관학(官學) 말고 이렇게 큰 사학이 또 있을까요?”

 “단언컨대 없다.”

 “우리 선생님은 어떻게 젊은 나이에 이런 멋진 학교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요? 자로님은 오래전부터 선생님과 함께 하셨으니 잘 아시겠지요?”

 자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선생님은 공경대부(公卿大夫)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셨기 때문이다.”

 “?”

 “선생님은 부유한 귀족이 아니라서 정식으로 관학에 들어가 배울 수 없었다. 선생님은 배움을 원하고 배울 능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학교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이 가지셨다.”

 “그런 차별을 선생님만 겪은 건 아닐 텐데요?”

 “선생님은 홀어머니 봉양을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일하는 틈틈이 예악과 역사, 시를 공부했다. 선생님은 모르는 게 있으면 각 분야의 여러 전문인들을 찾아가 예를 갖춰 질문하기를 누구보다 즐기셨다.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단지 옛것을 좋아해 배우기를 누구보다 부지런히 했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술이’편 19장)는 선생님의 회고는 이때의 학구열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이처럼 열심히 공부해 점차 선생님의 학문이 깊어지자 이번에는 거꾸로 선생님에게 질문하러 오는 전문인들이 생겼다. 선생님은 이들과 효율적으로 문답하기 위해 날과 장소를 정해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에 학문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약간의 예물을 가지고 참석하기를 청하면서 자연스레 학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 그것이 선생님이 전업 교사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겠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사람들이 선생님에게 예물을 바친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세금을 걷으러 갔었으니까. 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자 자로가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말했다.

 “이보게 이생.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괜히 나의 옛 과거를 들춰보고 싶은 건가?”

 자로의 과거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는 속이 뜨끔했지만, 자로의 입을 통해 공자의 젊은 시절을 듣고 싶었다.

 “세금을 걷다니요? 정말 몰라서 묻습니다.”

 3. 자로초견(子路初見)

 자로는 직정적이면서 용감하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자의 애제자 안연(顔淵·이름 회, 기원전 521?~482))과 마찬가지로 최하층 출신이었다. 집안이 가난해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야인(野人)으로 생활했다. 자로는 돈이 모이면 쌀을 사서 백리 길을 짊어지고 가서 부모를 봉양했다고 한다.(<설원> ‘건본’편)

 자로는 10대 후반에 곡부 시장의 무뢰한이 되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동네 건달 두목쯤 되었는데, 자로 자신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호자를 자임했다. 그는 훗날 사마천이 <사기열전>에 담은 유협(游俠·완력과 무공을 갖춘 자로서 의리와 정의를 중시하는 협객)의 원형질 같은 인물이었다.

 자로는 어느날 궐리에 사는 한 남자가 자기 초옥에 학당 간판을 내걸고 사람 가르치는 일로 먹고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아보니 공구라는 장인(長人·키다리)인데, 나이가 자기보다 불과 9살 밖에 많지 않았다.

 “어떤 놈이 내 허락도 없이 이 동네에서 영업을 하는가?”

 자로는 부하들을 이끌고 공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겁을 줘서 이른바 ‘세금’을 뜯을 작정이었다. 자로는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대뜸 칼을 뽑아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떠냐? 키만 뻘쭘하게 큰 위선자야. 내 칼춤 솜씨에 기가 팍 죽지?”

 자로가 의기양양하게 공자를 노려보며 칼춤을 끝내자, 공자는 태연하게 한번 웃은 뒤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 그대가 잘 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그렇다. 긴 칼이었다면 더 잘했을 거다.”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닙니다. 칼 솜씨에 학식을 갖춘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우습게 여기겠습니까?”

 “네 눈엔 내가 우습게 보이냐? 공부? 그딴 거 없어도 날 우습게 여기는 놈은 이 바닥에 아무도 없다.”

 “사람은 가르쳐주는 친구가 없으면 들은 것조차 잃게 됩니다. 나무도 먹줄을 받은 뒤라야 비로소 반듯해지고(木受繩則直), 사람도 간하는 말을 받아들여야 성스러워지는 법입니다(人受諫則聖). 그러므로 무릇 공부에는 묻는 것이 중요하며(受學重問), 군자라면 배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君子不可不學).”

 무식해서는 골목대장 노릇조차 쉽지 않다는 걸 체험으로 알고 있는 자로는 공자의 말에 번개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라, 이건 뭐지? 저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고, 굽은 듯하면서도 탄력 있게 뿜어나오는 저 강기(剛氣)는? 앎이란 저런 기품을 얻기 위함인가? 머리는 이리저리 안갯속인데 말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나간다.

 “웃기고 있네. 남산의 대나무는 아무도 잡아주지 않아도 저절로 곧고, 그것을 잘라 쓰면 물소의 가죽도 뚫을 수 있다. 굳이 배워야 할 필요가 무엇이람?”

 자로의 퉁명스런 대답에 공자는 이미 자로의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시겠습니까? 화살 한 쪽에 깃을 꽂고 다른 한 쪽에 촉을 갈아서 박는다면 깊이가 더욱 깊어지지 않겠습니까? 굳이 배움을 마다할 게 무엇입니까?”(<공자가어> 자로초견)

 자로는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거 참, 번지르르하게 말은 잘하네.” 휑하니 돌아서서 나오고 말았다. 그날 이후 한동안 자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저잣거리에서는 자로가 좀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길을 가고 있는 공자 뒤에서 웬 젊은이가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뒤따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주먹대장 자로였다.

 “그날 이후 나는 한시도 선생님 곁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중유(仲由)는 나의 수제자요, 경호대장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암, 수석 자리가 아니면 누가 우리 선생님을 지킬 것인가? 어떤 놈도 하늘 같은 우리 선생님의 털끝 하나 손대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랬지, 그때는. 하하하.”

 나는 예순이 코앞인 할아버지 자로가 어린아이처럼 으스대며 옛일을 추억하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고 부럽기도 하던지, 슬그머니 그를 좀 골려줘야겠다는 심술이 일었다. 자로의 유협 기질이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래도 제가 볼 때는 안연님이야말로 공자님의 수석 제자인 것 같습니다만.”

 나는 자로가 무슨 소리냐고 되받을 틈도 주지 않고 잽싸게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이 안연님을 보실 때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연인을 보는 듯 합니다. 어떨 때는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모를 것 같은 눈빛으로 안연님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로님이 수석 자리를 자처하셔도 선생님의 마음속에는 안연님이 으뜸 제자가 아닐까요?”

 자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 이놈. 네가 나를 시험하려 드는구나, 허허. 이생아. 너는 내가 회(回)를 질투하는 것 같으냐? 그래, 말해주마. 사실 나는 회가 싫을 때가 있다. 나는 회처럼 어디 하나 허물할 데가 없는 그런 완벽한 사람은 솔직히 정이 안 간다. 그러나 나는 회를 미워할 수 없다. 이유는 한 가지, 네 말대로 선생님이 그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선생님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를 내가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느냐?”

 

 4. 스승과 제자

 해가 바뀌어 궐리 학당에 봄꽃이 만발할 무렵, 자로에게서 전갈이 왔다. 안연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다과를 나눌 테니 준비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얼마 전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공자의 아들 리(鯉)의 자)가 병으로 죽었다. 자로는 스승이 아들처럼 사랑하는 제자 안연을 앞장세워 아들을 잃은 스승을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위안의 자리가 은근히 기다려졌다. 모처럼 선생님을 가까이서 뵈며 세 군자가 나누는 대화를 직접 들을 기회가 어디 흔한가 말이다! 나는 다과는 물론이고 선생님을 위해 지난 가을 빚어서 고이고이 모셔둔 술을 꺼내 따뜻하게 데워 놓았다.

 세 사람은 학당 후원의 누각에 나란히 앉았다. 연지 옆에 세워진 이 대(臺)에서는 학당 안의 여러 교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스승과 두 제자는 서로 차를 따라주며 학교 일에 관해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과에 이어 준비한 술상을 내어가자 공자께서는 미소로 반기시며 “자네가 빚은 술은 특히 맛이 좋으이. 조선의 술인가?”라고 물어보셨다. 이윽고 자로가 선생님을 위해 거문고를 연주했다. 자로의 연주 실력은 별로였지만 공자께서는 즐겁게 들으셨다. “자로의 금(琴) 실력은 언제나 늘꼬? 허허.” 뒤이어 안연이 특유의 섬세함으로 거문고를 켜자 숲의 새들도 지저귐을 멈추고 연주를 듣는 듯했다. 

 “오랜만에 너희들과 함께 금을 연주하니 연못의 잉어들도 춤을 추는 듯 하구나.”

 연지를 내려다보면서 혼잣말 하듯 하는 공자의 목소리에서 문득 처연함이 묻어났다. 자로는 ‘아차’ 싶었다. “공리의 이름 ‘리’는 잉어라는 뜻이 아닌가. 백어를 잃은 슬픔을 위로하는 자리가 하필이면 잉어가 헤엄치는 연지라니, 나도 참 한심한 사람일세….” 자로가 울상을 감추며 안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회야, 네가 좀 분위기를 바꿔보려무나.’ 안연이 자로의 뜻을 눈치채고 공자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 마당 맨 앞 교실을 보십시오. 신입생 교실인데 어느해보다 글 읽는 소리가 청아합니다.”

 자로가 거들었다.

 “저들이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불원천리한 인재들이 아닙니까! 으하하!”

 공자께서도 웃으시며 말했다.

 “자로는 늘 들통날 아첨만 하는구나.안 그러냐, 회야?”

 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안연은 더욱 진지하다.

 “선생님. 사형의 말이 지당합니다. 선생님이 아니 계시면 노나라, 아니 천하에 어찌 저런 소리가 울려 퍼지겠습니까? 들어보십시오. 제가 처음 선생님께 배우러 왔을 때 해주신 바로 그 말씀이 아닙니까?”

 안연이 선창(先唱)한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어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자로가 흥에 겨워 큰 소리로 화창(和唱)한다.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안연이 단정하게 무릎 자세로 고쳐 앉아 공자에게 읍(揖)하고, 자로는 일어서서 읍한 뒤 오른팔을 공손하게 앞으로 펼친다. 가운데 앉은 공자께서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제자들에게 답례하신다. 세 사람이 미소 가득한 얼굴로 합창(合唱)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함이 없으니 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이상‘학이’편 1장)

 

 5. 가장 이상적인 사람

 감격에 겨운 듯 자로가 공자 앞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선생님, 제게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신입생들이 공부하는 교실 이름을 지금부터 학습당(學習堂)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들어가는 문은 학이문(學而門)이라 하고, 나오는 문을 시습문(時習門)이라고 하고요. 하하, 그러면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을 어찌 잊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자로의 말이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하지만 배움이란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교실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유야, 회야, 나는 이제 늙었으니 저 학생들의 교육을 너희 제자들에게 맡기고 싶구나. 너희들은 우리를 찾아와 문행충신(文行忠信)을 연마하고자 하는 저 갸륵한 젊은이들을 장차 어떻게 이끌어줄 생각이냐?”

 자로가 먼저 대답한다.

 “외람되지만 제가 저자의 왈패에서 조그만 고을의 읍재까지 해봤습니다만, 사람은 일정한 물산(物産)이 있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물질은 선비로서 구할 바가 못됩니다. 그래서 저는 저들에게 먼저 이런 모범을 보일까 합니다.

제가 타고 다니는 수레, 제가 입는 좋은 관복이나 예복을 저들과 나눠 써서 그것이 낡고 헐어서 못 쓰게 되더라도 하나도 아쉬워하지 않겠습니다.(願車馬 衣輕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선생님께서 그 말씀을 듣고 흐뭇해하셨다.

 “훌륭하다, 나의 유. 자고로 자기 가진 것을 남과 나누면서 조금도 아쉬움이 없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로는 물질로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구나.”

 안연의 차례다.

 “저는 가난해 나눌 재산이 없습니다만, 지식이 약간 있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솔선할까 합니다.

  저는 남들보다 학문이 높아져도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깔보지 않겠으며, 공로와 업적이 넘치도록 쌓여도 그것을 함부로 자랑하지 않겠습니다.”(願無伐善 無施勞)

 선생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흡족해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나의 회. 높은 경륜과 지식을 갖고도 오만하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다. 회는 지극히 겸손하여 지식으로서 남을 차별하지 않는구나.”

 공자는 두 사람의 대답을 들으시고는 내가 올린 술잔을 또 비우셨다. 이윽고 자로가 공손히 말했다.

 “선생님,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가르침이 없으니 뭔가 빠진 듯합니다. 선생님이 저희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연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형과 더불어 감히 가르침을 청합니다.”

 “유야, 회야. 내가 무엇을 더 새롭게 말하겠느냐? 나는 그저 저들에게 이런 사람이면 족하다.

  윗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친구들에게는 믿음직하며 아랫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이상‘공야장’편 25장)

 정적이 흘렀다.

 뭔가 특별한 말씀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자로는 순간 화살을 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두 눈을 감은 채 듣고 있던 안연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말씀을 마친 공자께서는 글 읽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학당 쪽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셨다. 몇 초의 정적이 더 흘렀을까,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일어나 스승에게 절을 올리고는 한참을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스승이 전하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가르침 속에서 두 제자는 자신들의 전 생애를 두드려오는 깊고 깊은 울림을 들었던 것이다.

  

 6. 열락대 아래서 귀를 세우다

 나는 누각 아래서 술을 데우며 세 사람의 말씀을 잇따라 들었다. 진리란, 아름다운 사제간이란 과연 저런 것이 아닐까? 물질로서도 지식으로서도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이상(理想), 윗사람에게는 편안한 사람, 친구들에게는 신의로운 사람, 후배들에게는 진실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도대체 더 이상 무슨 말로 사람의 도리를 요약할 수 있을까? 이 간명한 명제가 실은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던가….

 훗날 자로와 안연에게서 이날의 말씀을 전해 들은 여러 제자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스승의 어록에 담은 것은 이 문답이 내포한 인(仁)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한 결과였다. 현장을 지켜본 나로서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밖으로 드러나는 인(仁)과 안으로 깊이 감추는 인(仁)의 화음을 그들도 분명 들었던 것이라고.

 나는 그날부터 연지의 누각을 열락대(說樂臺)라 불렀다. 이날의 대화를 기념하고 그것을 직접 들은 기쁨을 자축하는 의미였다.그리고 그날 밤 나는 도필(刀筆)을 갈아 죽간에 선생님의 말씀을 새기고 먹을 넣었다.

 孔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小者懷之

 子路顔淵聞說樂臺 下臺李生立耳溫酒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배나 윗사람에게는 뭘 맡겨도 안심이 되는 사람

 친구와 동료에게는 뭘 같이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

 후배와 부하들에게는 진심으로 이끌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한다.

 자로와 안연이 이 말씀을 열락대에서 듣다.

 이생, 대 아래에서 술을 데우며 귀를 세우다.

  

이인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장

李生自序 이생자서

나 이생(李生)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하늘에 감사드린다. 미천한 몸으로 태어나 한 위대한 인간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나는 본래 노(魯)나라 사람이 아니라 조선 남부에서 온 동이(東夷)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공자 사거 2400여 년 뒤에 태어났다. 어느 깊어가는 가을 밤 공원 그네에 앉아 불 꺼진 집들을 무연히 바라보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보니 지금의 중국 땅이었다.

 이생은 졸지에 미지의 과거에 떨어져 낯선 공간을 유랑했다. 오로지 내가 왔던 시공으로 돌아가는 통로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대륙을 헤매다가 천하를 주유하고 계시던 공자 일행과 조우하여 그 무리의 말단에 끼게 되었다. 이후 일행의 짐꾼으로 일하면서 그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얼마간의 동행이었을까. 나는 미래에서 막연히 알던 공자라는 사람과 그 제자들의 이상을 향한 열정,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교감했다. 그 순간의 경이로움이란 무슨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뜻밖의 천운을 얻은 기쁨에 젖어 집으로 돌아가려는 열망조차 잊었다.

 만년에 고국에 돌아와 후학을 키우시던 공자께서 돌아가시고 3년상을 마친 제자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자기 나라와 고향으로 흩어졌다. 눈 밝은 몇몇 제자들은 훗날 <논어>(論語)라고 불리게 될 스승의 위대한 말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 나 이생은 학교 마당을 쓸고 문도들의 신발 간수하는 일을 하던 어눌한 이방인에 불과하지만, 먼 미래에서 와서 한 위대한 사람의 생애를 목도하게 한 천명의 무거움을 피할 수 없어 내가 보고 들은 바를 감히 기록하려 한다. 부디 하늘의 도움으로 이 죽간들이 만고풍상을 견뎌내어 우리 선생님의 말씀과 뜻이 만세에 퍼지는 데 티끌만 한 보탬이라도 될 수 있기 간절히 바란다.

 내 나이도 어느덧 이순(耳順)을 향하고 있으니 살아 있을 날이 많지 않다. 부디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딸들을 다시 보기를 소망하지만, 이뤄지지 않더라도 슬퍼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만, 하늘의 큰 보살핌이 있어 언젠가 내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먼저 아무 서점이나 달려갈 것이다. 그곳에서 나 이생이 전한 선생님의 흔적을 단 한 조각이라도 보게 된다면, 비록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흔쾌히 기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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