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8 17:08 수정 : 2013.02.19 21:01

딸들아 일어나라?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 7명 중 4명이 여성이다. 여성이 과반을 넘었다. 양성평등은 초과 달성한 것인가? 박근혜 후보는 논외로 하고, 막판에 사퇴한 이정희 후보를 포함 3명의 여성은 모두 인권·노동운동 출신이고 활동의 연장에서 출마했다. 나는 이들이 우리나라 여성의 과로(過勞)를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지위가 노동과 책임이 되는 사람(계층)이 있고, 권력과 자원이 되는 사람이 있다. 성별 변수로 보면, 대개 여성은 전자다.

 현재 상황을 ‘여성 상위’라고 생각하는 남성이 적지 않다. 그 의견에 반박할 지면은 없지만, 1가지는 분명하다. 남성 중 직장 업무, 사회운동, 집안 일(육아, 식사 준비, 세탁, ‘시월드’ 챙기기, 장보기, 사계절 의류 정리), 3가지 업무를 모두 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없다. 반대로 대부분의 여성은 가사노동과 임금노동 양 영역에서 이중(삼중)노동에 종사한다.

 여성의 과잉 노동을 지위 상승으로 이해하는 착시 현상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딸들아, 일어나라>(1980년대 민중가요)에서 착시의 기본 원리를 제시한다. 노래는 성별 문제뿐 아니라 사회의 약자 전반에 대해 우리 사회의 접근 방식을 요약한다. 이 노래를 줄기차게 부르던 시대는 지났지만(?), ‘여성의 각성’으로 대표되는 주제는 여전히 작동한다.

 ‘딸들아 일어나라’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여성’이 아니라 ‘딸’이라는 성 역할 지칭은, 계몽의 주체 남성 어른의 시각을 반영한다. 여성과 딸은 다른 범주다. 남성 중심 사회의 작동 방식을 상징하는 용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목표는 남성연대다. 남성 간 연대는 강조되고, 여성은 동성인 여성이 아니라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와 연결된다. 여성이 인간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딸·어머니·누이· ‘창녀’ 등 성 역할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남성의 성 역할과 인간 개념은 일치하지만, 여성은 배타적이거나 택일의 문제가 된다.

 둘째, 이 노래는 약자에 대한 이중 메시지다. 여성이 의식화돼 ‘일어나서’ 저항하면, 곧바로 ‘꼴통 페미’(꼴통 페미지즘)로 몰린다. 성별과 무관한 글을 써도 필자가 여성이면 악플에 달리는 사회다. 이 노래의 지시대로, 딸들이 일어나도 사회가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여성이 순종하면 ‘멍청’하다며 무시하고, 저항하면 ‘재수 없거나’ 최소한 매우 불편해한다. 저항하면 덜 무시 받지만 탄압도 크다.

 셋째가 가장 중요하다. 이 노래는 성 차별의 원인을 ‘여성의 각성 부족’으로 본다. 차라리 그랬으면 ‘해결’이 간단하련만 현실은 정반대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지나친’ 각성이 ‘문제’인 시대다. 딸들아 일어나라? 실제로도, 상징적으로도 딸들은 일찍 일어난다. 남자들이 늦잠을 잘 뿐이다. 성 차별의 원인이 사회나 남성 문화가 아니라 ‘깨어나지 못한 여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가 ‘원인’ 제공자인가? 여성· 장애인·노인·건강 약자에 대한 모욕과 차별이 그들의 대응 부재 때문인가. 사회 구조 때문인가. 쉬운 예로, 현재 환경 파괴는 지구의 잘못인가? 그래서 지구가 변해야 하는가?

 이 노래는 위력적이다. 피해자가 해결사로 나서라는 메시지의 목표는, 차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고 동시에 가해자는 우아한 조정자, 시혜자(권력 배분의 관리자), 배려와 관용의 주체로서 위상을 갖게 한다. 억압 집단은 조금도 ‘데미지’를 입지 않는다.

성탄절을 하루 앞둔 24일 오후 한 누리꾼의 제안으로 서울 여의도 문화공원에 모인 %!^a솔로대첩%!^a 참가자들이 짝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각성의 불균형 - 남성의 문화 지체 현상

 왜 결혼하지 않는 여성들이 늘고 있는가. 물론, 미혼 남성도 늘고 있다. 하지만 남성은 ‘삼포 세대’(취업·결혼·출산 포기)에서 보듯, 안 하기보다 고용 불안정으로 ‘못 하는’ 경향이 큰 반면 여성의 비혼은 더욱 적극적이고 자기 선택적이다. 여성은 돈 문제보다 성별 의식의 영향, 즉 대(對) 남성관의 변화가 결혼 여부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이 글은 여성의 비혼이 남녀 간 불평등이 아니라 의식의 불균형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공사 영역에 걸쳐 여성의 노동량과 사회 경험은 이전 시대에 비해 엄청나면서도 목적의식적 변화를 보이는데, 남성의 대 여성관·대 사회관, 남성의 자아 인식은 여성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현실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인데도, 의식의 불균형 때문에 남성이 피해자라는 착시가 가능한 것이다.

 남성의 집단적 ‘문화 지체 현상’이 초래하는 (악)영향은 성별 관계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 차원에서 인간관계의 불화와 파탄, 이혼율 증가, 때론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서 고초를 겪는다. 사회적으로는 폭력 산업에 유입, 저출산, 비생산적 가치관의 혼란과 (‘조리퐁 여성부’ 같은) 황당한 논쟁을 야기한다. 이 중에서 이혼율 증가, 저출산은 국가에서 보면 단순 사회 현상이라기보다 중대 과제다.

 저출산의 원인처럼 오도된 문제도 없을 것이다. 기혼 부부의 출산율은 1.9명으로 2명에 가깝다. 저출산은 출산 기피가 아니라 결혼 기피와 만혼의 결과다. 그러나 정당, 진보·보수, 여성단체 할 것 없이 출산 기피에 해결책을 맞추고 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여성의 진보, 남성의 후퇴’가 아니라 두 집단 간 인식의 불균형이다. 개인 차원에서는 남성이 더 고통스럽다. 이유를 모르니 더욱 힘들 것이다. 자신이 왜 이혼 당하는지, 가사를 ‘도와준다’고 하면 왜 아내가 불같이 화를 내는지, 자신의 호의가 왜 성희롱인지, 왜 자기만 군대에 가야 하는지, 여성 상위 사회에 왜 여성가족부가 있는지, 왜 집에서 ‘노는’ 여자가 ‘많은지’, 왜 여자는 외모로 이득을 보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이들의 분노와 피해의식에 동의하지 않지만, 공감한다.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여성이 가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 대다수가 분노하는 ‘우먼 프렌들리’(여성 친화) 사회는 지배 계층의 남성이 만든 남성 중심 사회의 ‘부작용’ 혹은 이면이다. 동시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해하는 이유는, 남성은 성장 과정에서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정 관리에 서툴고 인간관계에 무능하게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변한 현실 앞에서 대응 또한 미숙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정확히 말하면, 피해가 아니라 여성에 비해 남성은 남을 배려하거나 비위를 맞추거나 타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획득된 능력’이다. 이제까지 이런 ‘능력’ 때문에 편하게 살았지만 갑자기 시대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남성성과 결합한 추진력을 강한 리더십으로 인식했다. 요즘 이런 캐릭터는? 실업자 되기 좋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비극과 틈새, 그리고 성별

 우리 사회의 ‘가치관의 혼돈’ 중 하나는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의 갈등이다. 그런데 이 혼란이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한다. 가부장제에 줄을 선 남성은 낙오자가 되기 쉽고, 신자유주의에 줄은 선 남성은 “약삭 빠르거나” 다소 ‘유연한’ 사고로 현실에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더 중요한 장치는 개인의 선택보다 격화되는 남성 간 계급 차이다.

 이전 세대 여성은 ‘나혜석’으로 상징되는 근대교육의 피해자다. 학교에서 배운 근대적 인간관(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 여자도 인간이다…)과 현실은 다르다. 그래서 배움과 현실을 동일시한 ‘순진한’ 여성은 시대를 앞서 간 피해자로 간주한다(여성이 시대를 앞서간 게 아니라, 시대가 여성을 억압한 것이지만).

 그러나 ‘87 체제’ 이후 현대교육의 ‘피해자’는 남성이 되었다. 여기에 몇 가지 구조적 요인이 있다. 1987년 이후 한국 경제가 글로벌 자본주의에 급속히 편입되면서, 국내의 가부장 문화보다 글로벌 스탠다드가 문화의 헤게모니를 쥐었다. 신자유주의는 매우 억압적 체제지만, 일부 여성이나 소수자에게 작은 틈새를 허용했다. 자본은 성별이나 학력과 무관하게 개인의 능력을 먼저 고려하기 시작했고, 오랜 세월 재능을 억압당한 한국 여성들의 ‘한’(恨)은 폭발적인 사회진출을 가져왔다.

 개인이 속한 정체성 범주(성별·장애·지역·인종…)보다 개인의 자원에 더 매력을 느끼는 신자유주의의 속성을 한국 여성들은 최대한 활용하고 넓혀놓았다. 80년대 초반까지 작동한 남성의 ‘병역-시민권-평생 고용’의 연속선이 끊어지면서, 병역은 차츰 젠더 문제에서 남성 간 계급 문제로 변하고 있다. 군대에 (끌려)가는 남성과 ‘어둠의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는 부모를 둔 남성들 간의 차이가 남녀 차이보다 부각되기 시작했다(군 가산제 논쟁은 이 현상의 맥거핀에 불과하다).

 성 차별은 여전하다. 임금 격차만 해도 2012년 3월 현재 100대 61.3이다. 다만, 변하는 상황에 남녀가 다르게 대응함으로써, 특히 하층 계급 남성들이 자기만 피해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김중배와 심순애’ 스토리로 대변하는 남성 심리, 여자는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생각은 통념-이데올로기-자격지심의 3중 합작품이다. 남성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많은 여성들은 남편이 돈벌이가 시원찮아도, 가사나 육아에 적극적이고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하면 얼마든지 자신이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사회적 자원과 경제력이 없을수록 열등감 때문에 시간 많은 남성이 더욱 가사를 안 한다는 것이다. 남성의 이런 상태는 여성이 결혼을 기피하는 가장 결정적 이유이자 성 차별 현실을 요약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사노동을 얼마나 천시하는지(‘솥뚜껑 운전’ ‘집에 가서 애나 봐라’…), 그리고 가사노동 전담 여성을 얼마나 비하하는지, 마지막으로 남성 문화는 가사노동을 ‘루저’(Looser)의 상징으로 삼는다는 사실. 여성들은 이 구조를 간파했다. ‘외모와 능력’을 모두 갖춘 여성들이 많아지자, 남성의 눈은 높아졌고 배우자 구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비혼

 비혼 - 명예남성, ‘아줌마’, 슈퍼우먼 사이의 선택

 결혼이 ‘조건 만남’(성매매)과 뭐가 다르냐는 질문에 기분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이 제일이면 결혼이고 조건을 따지면 성매매인가? 이 질문에 답은 없다. 단지, 결혼의 본질은 사랑, 친밀성, 신뢰 같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정치경제학을 형성하는 핵심적 사회 제도라는 사실이다. 결혼과 결혼 제도는 다르다. 이를 풀어 쓰면,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다.

 중·고교 사회탐구 시간에 배우는 내용. 이동 중심의 수렵 사회에서 농경 정착 사회로 넘어가면서 재산(잉여 곡식)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를 빼앗거나(전쟁) 후대에 물려주려는 계급이 생기고, 가족은 난혼에서 일부일처제로 변한다. 재산 상속을 위해 자녀가 자기 자식으로 증명돼야 하는데 이는 생물학적으로 여성만 안다. 이때부터 남편이 여성의 성을 통제했고, 여성의 순결은 계급 재생산의 도구가 됐다. 결혼 제도는 계급 사회의 토대이자 산물이고, 자본주의는 성역할 이데올로기를 확고히 추가했다.

 축첩 제도는 남성의 문란한 성생활 측면보다, 남성이 자원을 독점한 사회에서 가난한 여성을 구제하는 일종의 복지 제도다. 간혹 TV 다큐멘터리 등에서 일부다처제 사회의 아내끼리 자매애로 사이좋게 지내는 경우를 본 적 있을 것이다. 평생 1대 1의 배타적 관계를 강제하는,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일처제의 각종 요지경을 생각해보자. 어느 쪽이 더 평화로운가.

 일부일처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규범일 뿐, 인간 본성이 아니다. 물론, 이조차 여성에게만 강요된 이중 규범으로, 실제 일부일처제는 인류 역사상 어느 사회에서도 실현된 적 없다. 중산층 남성 위주의 사회는 성 구매, 오피스 와이프, 정부(情婦) 등 일부일처제를 보완, 대체하는 다양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

 비혼 여성의 증가는 자본주의의 가장 의미 있는 파생이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은 말할 것 없이 남성과의 관계를 재고하는 기회다. ‘서구 선진국’에서 이미 저출산과 함께 70년대부터 시작된 현상이다. 어느 사회나 일부일처제 결혼의 가장 큰 동기는, 남성은 가사노동자를 구하는 것이고, 여성은 원가정(Original Family)에서 독립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가사노동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성에게 여전히 결혼은 필요하다. 게다가 남성에게 결혼 여부는 능력 문제로 간주된다. 미모의 중산층 여성과의 결혼은 남성에게 계층적 지위를 상징한다. 반대로 여성은 고학력·고소득층일수록 싱글이 많다. 여성이 ‘딸들아 일어나라’는 가부장제의 지시대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정치적으로 각성했으니, 결혼의 필요성은 성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제 여성은 보호자가 덜 필요하거나, 가정폭력에서 보듯, 보호자가 바로 폭력자라고 깨닫는다. 남성의 박력이 실상 폭력이고 남성의 과묵은 무식의 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사회생활에서 만난 남성들을 통해서다. 태어나 가족 이외 남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결혼 이후 남편이 인생의 전부인(좋아서가 아니라 다른 세계가 없었던) 이전 시대의 여성과 달리, 공적 자아(Public Self)를 갖게 된 것이다.

 200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5~40살 여성 중 20% 이상이 법적으로 배우자가 없는 상태다. 서울시 가구의 4분의 1 이상이 1인 가구다. 여성의 비혼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기보다 생존 전략에 가깝다.

 ‘일과 사랑의 조화’. 모든 TV 드라마나 로맨스 영화가 표방하는 ‘기획 의도’인데, 이는 남성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남성들은 성 역할(아버지·남편 되기)과 시민권(노동권)이 비례해 순기능적이다. 결혼한 남성은 안정되고 가족 수당이 지급된다. 반대로 여성은 어머니·아내로서의 성 역할과 노동자로서 역할이 정면충돌한다.

 이제까지 이런 상황에 대한 여성의 선택은 3가지였다. ‘인간’을 포기하거나(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됨) ‘여성’을 포기하거나(가족을 포기한 명예 남성, 이혼…) 2가지를 완벽히 수행하는 울트라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시달리다 과로사하거나. 3가지 중 하나를 선택했지만 결국 ‘노 초이스’다. 모든 선택이 고달프고 비난받기 때문이다.

 비혼은 노동권을 잃을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 결혼 제도가 주는 압박과 노동에서 자유로운 선택이다. 연애-결혼-임신의 연결 고리는 점차 느슨해지고 경제력 있는 미혼모는 광고에 나와 여성의 독립을 강조한다. 외로움? 결혼한 여성은 외롭지 않은가?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문제는 어떤 조건에서 외로울 것인가이다.

정희진 여성학·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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