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8 16:42 수정 : 2013.01.11 14:01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어느 70대 여성의 이야기다. 대부분 회고담일 것이다. 멀게는 1940년대부터 가깝게는 90년대까지. 그는 지금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정정하고 유쾌하지만, 어쨌든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이에게는 계획할 것보다 회고할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젊은 독자들에게 각별히 주문하려는 건, 21세기 감각으로 그의 삶을 바라보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젊은 날 그가 지금보다 훨씬 봉건적인 시대를 여성으로 살았다는 사실만 기억한다면, 당신의 감각은 그때그때 알맞게 그 시대의 상황에 ‘동기화’될 것이라 기대한다.

어릴 때 애순씨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그 꿈을 실현하는 데 결혼은 방해물이 될 거라 생각했다. / 박승화 기자

 처음 그의 공간을 방문하겠다고 했을 때, 김애순씨는 즉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외부 사람을 집에 잘 안 들이는데 어쩌나….”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는 망설임보다는 자존감이 묻어났다. 결국 설득 끝에 약속을 받아냈다. 2012년 12월 11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한 원룸 아파트의 문을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13평(약 43㎡)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컴퓨터가 놓인 책상과 주로 옛날 책들이 가지런히 꽂힌 나무 책장, 의자 2개를 거느린 테이블, 그리고 싱글침대 등이 오밀조밀 배치돼 있다. 원룸인데도 음식 냄새가 실내에 스며들지 않도록, 주방은 베란다 쪽으로 분리해놨다. 세월이 방 안에 묻혀놓은 건 더께가 아니라 삶의 광택이었다.

 “혼자 산다고 아무렇게나 하고 살면 안 되죠. 언제 갑자기 세상을 뜨더라도 가지런한 모습을 남기고 싶어요.”

 김애순. 2012년 12월 현재, 세는 나이로 72살. 그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건 한 편의 짧은 기사 때문이었다.

 “혼자 사는 여성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독신 여성들의 모임 ‘한국여성한마음회’가 발족됐다. (중략)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혼인 적령기를 넘긴 여성에게 가하는 가정과 사회에서의 은근한 압력이 큰 편이어서, 선배들의 경험을 나누고 가정과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푸는 동시에 자기 계발에 활용토록 이 모임을 이끌어가겠다는 것이다.”(<매일경제> 1990년 12월 20일치)

 1990년 12월 15일, 여성 92명이 서울 종로구 신문로 범한빌딩 5층에 모였다. ‘한국여성한마음회’(이하 한마음회)의 창립총회였다. 한마음회는 국내 첫 독신 여성 모임이다. 여성신문사 부설 교육문화원에서 주최한 ‘독신여성교실’을 드나들던 여성들의 의기투합으로 만들어졌다. 혼자 사는 여성에 대한 시선이 지금보다 훨씬 곱지 않던 시절이었다.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압박이 정점을 찍는 명절·연말 스트레스, 독신에겐 불리한 세제나 아파트 분양권 문제 등에 대해 속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눈 게 촉매제가 됐다.

 신문에 기사가 나자 회원 수는 순식간에 400명에 육박할 정도로 불어났다. 회원 자격은 20살 이상 독신 여성으로 정했다. 대부분 결혼하지 않겠다는 ‘싱글’(독신)였지만, 간혹 ‘돌싱’(이혼자)과 ‘결혼대기자’도 섞여 있었다. 요즘은 ‘비혼’과 ‘불혼’, ‘만혼’ 등 다양하게 구분되고 있지만, 그땐 모두 ‘독신’으로 통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회원 모임을 했다. 독신타운 건립 등 사업 계획도 세웠고, 친목 도모도 활발했다. 명절이면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이심전심으로 뭉쳐 지냈다.

 이 단체를 결성한 데는 회장을 맡은 애순씨의 공이 지대했다. 당시 49살로 큰언니 뻘인 그가 나서서 서둘렀기에 가능했다. 한 여행사의 상무이사인 그는 결혼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싱글 예찬론자’였다. 그런 그가 아직도 혼자 살고 있을까. 비혼주의 여성단체 ‘언니네트워크’가 수소문해 겨우 연락이 닿았다. 우여곡절 끝에 한마음회는 없어졌지만, 그는 아직 비혼 여성 그대로였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원룸

 “옛날에는 독신이라고 스스로 밝히는 것도 어려웠어. 그런데 1994년에 <독신, 그 무한한 자유>라는 책을 냈더니 반응이 좋더라고. 부모한테 들킬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읽었다는 독자들이 연락해오기도 했지. 한마음회는 그보다 4년 전 일인데, 기사가 신문에 나오자마자 전국 각지에서 문의 전화가 오더라고. 부산에서도 오고, 대전에서도 오고. 나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지.”

 결혼하기 싫어 독신으로 살겠다는 당찬 20대 여성들과, 일하느라 혹은 마음에 드는 짝을 찾지 못해 ‘어어’ 하다가 나이 먹은 30~40대 여성들이 모임의 주축이었다. 단체의 이름을 지은 것도 애순씨였다. 독신남의 가입을 막으려고, 단체 이름에 아예 ‘여성’을 집어넣었다. “그 전에 ‘독신클럽’이 있었거든. 남녀를 모두 회원으로 받다보니 사고가 나더래. 스캔들이 곳곳에서 벌어진 거지. 누가 누구랑 사귄다더라, 이런 게 주된 화제가 되고, 난 그런 게 싫더라고.”

 어렵사리 만든 한마음회는 만 2년을 채우지 못한 채 해산됐다. 뭔가 억울한 게 있는지, 그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창립 1주년 행사를 굉장히 크게 했거든. 단체가 점점 커지니까 자리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생기더라고. 내 고향이 호남인데, 김대중(DJ)을 위해 정치적으로 한마음회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모함을 받았어. 기가 막혀서 관둬버렸어. 그 후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정작 조직 운영은 제대로 못 하더라고. 그냥 흐지부지된 거지 뭐.”

 그의 피부는 72살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고왔다. 특별히 피부관리라도 받는 걸까. “그런 거 해본 적 없어. 아마 즐거운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럴 거야. 근데 내 피부가 그렇게 고와?” 실제로 황혼으로 접어든 애순씨의 노년은 명랑해 보였다. ‘비혼 여성의 고달픔’을 들으러 온 기자에겐 일종의 ‘반전’이었다.

 은퇴 후 그는 봉사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기초생활수급대상 가정 어린이들의 멘토 역할을 해주는 게 그의 임무다. “아이가 나중에 뭐가 되고 싶다고 하면 거기에 맞게 도와주는 일이지. 한 놈은 기자가 되고 싶어 해. 그래서 글쓰기도 가르쳐주고, 어휘력 개발하는 자료도 주고 그래. 원래 내가 아이들을 예뻐하거든. 만나면 얼굴 부비고 스킨십도 많이 해주지.”

 아이를 좋아한다는 말은 뜻밖이었다.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적은 없었는지 물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대답은 의외로 쿨했다. “아이고, 아이를 내 아이로 키우는 건 힘들어. 시간도 너무 많이 뺏기게 되잖아.(웃음)”

 아이들을 만나러 가지 않는 날엔 무엇으로 소일을 할까?

 “얼마나 바쁜데. 좋은 영화가 들어오면 꼭 봐야 하고.” 그래야 친구들이랑 이야기가 통한다는 거였다. 친구들과 자주 모임 자리를 만든다고 했다. 일흔을 넘긴 이애순씨의 친구들은 싱글, 돌싱, 가정주부 등 세 그룹으로 나뉜다. 자신처럼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아온 친구들을 각별히 ‘오리지날 독신’이라고 불렀다.

 애순씨는 “나이 들면 필요한 건 남편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했다. “나이 들면 건강과 친구와 돈이 필요한데, 딱 이 순서대로야. 돈이 제일인 게 아니거든. 난 친구들하고 노닥거릴 때가 제일 재미있어. 남편 흉보는 거 듣는 게 특히 신나고. 늙어서 성격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둥, 쓸데없는 잔소리가 늘었다는 둥, 아직도 밥을 혼자 챙겨먹지 않는다는 둥…. 이런 농담이 있더군. 집에서 남편이 한 끼만 먹으면 ‘일식씨’, 두 끼 먹으면 ‘이식놈’, 세 끼 다 먹으면 ‘삼식새끼’.(웃음)”

 ‘검사와 여선생’ 그리고 아버지의 외도

 애순씨는 왜 결혼하지 않은 걸까. 사연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북 임실이 고향인 그가 중학교 1학년 무렵의 일이다. 한창 꿈 많던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틀어준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은 이애순씨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억울한 누명을 쓴 여선생 영애를 돕기 위해 검사복을 벗고 그녀를 변호해준 어느 제자의 이야기였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선생을 변호하는 제자의 모습이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영화는 그에게 변호사의 꿈을 심어줬다. 자신의 변호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무죄로 풀려 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결혼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변호사가 되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이 결혼일 거란 생각으로까지 발전했다.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가 거의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성장기에 지켜본 가족의 모습은 애순씨가 결혼과 거리를 두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로선 흔한 풍경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러려니 하고 지나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결혼한 지 1년이 넘어서야 겨우 친정 나들이가 허락된, 4대가 모여 사는 엄한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18살의 어머니와 2살 아래의 아버지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부부가 됐다. 어머니의 고단한 삶이 시작됐다. 층층시하에 애를 업고 집안일과 농사일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김애순씨 / 박승화 기자
 어린 아버지는 타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연애하기 시작했다. 방학 때 집에 와 있으면 아버지가 사귄 여자들에게서 연애편지가 날아오기도 했다. 몰래 그 편지를 뜯어본 어머니는 혼자 가슴을 치며 울분을 삭여야 했다. 남편의 외도에 행여 질투라도 하면 칠거지악에 해당된다는 시절이었다.

 애순씨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가 도청에서 산림주사를 해서 출장이 잦았어. 며칠 만에 돌아오실 때는 낯선 여자랑 온 적도 많았지. 그러면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여자랑 아버지의 밥상을 차려주는 거야. 밤에는 아버지를 중간에 두고 생판 모르는 여자와 나란히 누워서 잔 적도 있다고 하시더라고.”

 아버지는 급기야 다른 여자에게 살림을 차려줬다. 그것도 본처가 사는 집과 맞닿아 있는 바로 윗집이었다. 애순씨가 태어나기 전이었고, 언니들만 둘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이유를 댔다. 어머니의 집안일도 동시에 늘었다. 윗집에 밥을 해다주는 일이 추가된 것이다. 커가면서 차츰 알게 된 아버지의 실체는 애순씨의 마음에 증오의 불을 지폈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남자들에 대한 거부감으로 커갔다.

 어머니는 요즘 말로 치면 동네에서 ‘퀸카’였다. 외할아버지는 전북 지역 서원의 총책임자였다. 어머니는 그 밑에서 <명심보감>을 뗄 정도로 똑똑한 여성이었다. 인물도 고와서 시집온 뒤 얼마 동안은 멀리서 이사온 새댁을 보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구경하러 올 정도였다. 애순씨는 어머니가 이런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게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속을 태우던 아버지는 결국 빨치산들에게 학살됐다. 애순씨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83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어머니는 줄곧 홀로 사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야 자식들한테 말씀하시는 거야. 아버지가 바람 피우고 다닐 때 정말 마음이 아팠다고. 평생 그런 마음을 잘 털어놓고 살지 않으셨는데, 아버지의 여자친구에게서 온 편지 내용을 외우고 계시더라고. 가슴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라 어머니랑 같이 펑펑 울었어. 그 뒤로 난 아버지 제사에 안 가.” 어머니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무렵, 그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독신 여성으로 겪은 굴곡진 현대사 

 애순씨는 건국대 정치외교학과에 60학번으로 입학했다. 일하는 여성은 그렇다치고 대학 나온 여성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홍일점이어서 겪은 일들도 적잖았다. 학생운동하던 선배들은 그에게 여성부장을 시켰다. 처음부터 학생운동을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친하게 지내던 선배들을 마냥 외면할 수 없었다.

 대학 2학년 때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틀 뒤에 애순씨는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하던 전국학생연맹 소속 간부들이 모조리 잡혀가던 때다. 두 달 반 동안 철창 신세를 졌다. 당시 종로경찰서에서 만난 고정훈 당시 통일사회당 선전국장, 김철 통일사회당 국제국장 등과는 훗날까지 인연이 이어졌다.

 겁이 없던 그는 누구 앞에서도 당당했다. “정보경찰들이 아버지가 이북에 가서 당 간부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면서 나를 막 다그쳤어.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했지. 6·25 때 학살당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따졌어. 곧바로 뺨을 얻어맞았어. 아팠지만 그래도 어떡해. 아닌 건 아닌 건데.”

 지방공무원 시험에서 영문도 모른 채 낙방했을 때의 일이다. 애순씨는 대학 4학년 때 임실군청 공무원 채용 시험에 응시했다. 상식 시험과 논문을 모두 잘 치렀는데 떨어졌다. 뭔가 이상했다. 동네엔 이미 소문이 파다했다. 시험도 보기 전에 내정자가 있었다는 거였다. 너무 기가 막혀서 행정계장을 찾아갔다.

 “시험점수를 보여달라고 하니까 안 된다고 해. 내가 하도 우기니까 이 양반이 뭐라고 하느냐면, ‘필기시험은 80점 만점에 79점을 받았지만 면접 점수가 20점 만점에 0점’이라는 거야. 기가 막혔지. 어떻게 0점을 주느냐고 했더니 미리 인사위원회에서 의견을 모았대.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학생은 합격시켜도 시골 근무 안 할 거니까 붙여주지 말자고.” 억울함을 억누를 수 없었던 애순씨는 군수를 찾아갔다. 행정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한 뒤에야, 임실군청의 별정직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이애순씨의 항의가 계속되자 군청에서도 손을 들고 만 것이다.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품어온 변호사의 꿈을 접었다. “어느 날 신문에 사법시험 시험지 유출 사건이 보도됐어. 40만 원인가 주고 시험지를 팔아먹었다고 하더군. 아, 여기도 썩었구나 싶었어. 나 같은 사람은 돈을 주고 살 수도 없을뿐더러 사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안 되겠다 싶어서 포기했어.”

 애순씨는 ‘미스 김’이란 호칭 대신 ‘김양’으로 불리며 공무원 생활을 했다. 아직 지방에선 미스라는 말이 퍼지기 전이었다. 여성이 군청에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잣대로 혼기가 꽉 찬 여성이었다. “순창군청으로 자리를 옮긴 적이 있는데, 외지에서 여성이 새로 오면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되던 시절이야. 한 지방지 기자는 글쎄 이런 말까지 했어. ‘내가 저 가시 돋힌 장미를 꺾어야 될 텐데…’라고. 내가 그랬지. 꺾을 테면 꺾어보라고. 단 자신이 있다면 말이야. (웃음)”

 사회 곳곳에 부패·부정이 만연한 시절이었다. 선거철만 되면 여당 선거운동에 동원됐다. 군수·경찰서장 등의 기관장 부인들과 일일이 접촉해가며 ‘은밀한’ 선거운동원이 되는 일이 허다했다. 이런 과외 업무는 6년 여의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로 애순씨는 잡지사 기자, 관광회사 임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으로 일한 곳은 국회였다. 대학 때 학생운동하다 붙잡혀 종로경찰서에서 함께 지낸 야당 정치인들과의 인연으로 이애순씨는 김윤덕 여성 의원(8·9·10대 국회의원, 정무2장관 지냄)의 비서관으로 오랜 기간 일했다. 여성 의원이 고작 3명뿐인 시절이고, 여성 비서관도 거의 없던 때다. “다른 여성 국회의원실에도 여자 비서관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집에 가서 살림살이 도와주는 정도였어. 나는 시작할 때부터 조건이 있다고 했지. 정책비서를 하겠다고 했어. ‘공병’ 노릇은 해도 ‘사병’ 노릇은 안 한다고 못박았지.” 공교롭게도 김 의원은 아이를 여섯이나 낳은 기혼 여성으로, 애순씨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김 의원은 가끔 “혼자 사는 김 비서가 부럽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유신체제와 10·26 사태 등 굴곡진 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그의 직장인 국회는 두 차례나 해산되고 말았다. “1972년 10월 17일, 아직도 날짜가 머릿속에 새겨 있어. 부산에 국정감사하러 갔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거야. 밤새워가며 자료 준비해서 신나게 국정감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패잔병이 된 것 같은 기분이더라고. 졸지에 서울로 올라오는데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몰라. 너무 허탈하고 황당해서….”

 애순씨는 늘 과감한 행동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1975년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으로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가 촉발됐다. 그때 학원사 잡지기자로 일하던 애순씨는 비통한 마음에 ‘민주의 깃발 동아’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동아일보사로 보냈다. 신문 문화면에 그의 시가 실리자, 그는 물론이고 다니던 회사도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결국 애순씨는 자진해서 사표를 썼다. “송별회를 하는데 간부들이 그러더라고. 자기들은 처자식이 있어서 싫은 소리도 못 하는데 용기 있다고. 40명 넘는 직원들이 한 잔씩 주는 술을 다 받아 먹고 엄청 취했어. 집에 돌아와서 이불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지.” 애순씨의 직장 생활은 그렇게 한순간도 평탄치 않았다.

 단 한 번의 사랑, 여러 번의 유혹 

 애순씨는 ‘믿거나 말거나’ 연애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믿을 수 없어서 계속 물어봤더니 “결혼을 심각하게 고려해본 적이 딱 한 번 있다”고 했다. 그럼 그렇지 싶었다. 국회에서 정책비서로 일할 때 총각 비서관들의 관심을 꽤 받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훤칠한 남자가 한 명이 있었는데 같은 층에서 일하다 보니 스스럼없이 자료 교환도 하며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됐다.

 30대 초반이었던 어느 해 봄, 이 ‘잘생긴’ 비서관은 삼청공원 부근에 살던 애순씨 집 앞에 와서 전화를 걸었다. 공원에서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애순씨는 난생처음 입술을 빼앗겼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기억이다. 그에게 호감이 있었기에 싫지 않았다. 서른이 넘은 때였지만 10대 소녀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후다닥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꼬박 이틀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결혼에 대해 고민하게 되더라”고 했다. 아쉽지만 그에게 결별 편지를 썼다. 내심 친구로라도 지내고 싶었지만 남녀 간에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았다.

애순씨의 지갑에 든 장기 및 시신 기증 카드.
 총각과 유부남을 막론하고 ‘유혹’은 여러 차례 다가왔다. 임실군청에서 함께 일하던 한 유부남 계장은 이혼할 마음도 없으면서 연애하길 바랐다. 잡지사 근무 시절엔 동료 기자가 언니와 형부에게 찾아와 넙죽 큰절부터 하고는 처제를 달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자기 딸 이름을 ‘애순’이라고 지을 만큼 애순씨를 오래도록 짝사랑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마음을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연애하면 결혼하고 싶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때 국회의원 출마까지 고려했던 그는 “혼자 산다고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닌다는 이야기도 듣기 싫었다”고 털어놨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었다. “누군가 그러더라고. 결혼은 도박이라고. 나는 그저 결혼하면 내가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던 것 같아. 내가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한 편이거든. 우리 세대 남자들은 대부분 여자를 누르고 살려고 할 텐데 그걸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어. 내가 과연 그 모든 걸 견디고 한 남자의 여자로 살아갈 수 있을지, 회의가 든 거지.”

 

 비혼이어서 불편한 것들

 ‘혼자 살면서 힘든 점은 없느냐’는 질문에 좀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대통령 후보들의 TV 토론을 보는데 좀 적적하더란다. “토론 듣다보면 웃음이 나올 때도 있고, 욕하고 싶을 때도 있잖아. 누구랑 같이 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대선 개표 방송은 꼭 친구랑 보려고 마음먹고 있지. 아, 하나 더 있네. 천장 형광등을 갈아끼워야 하는데 아직 못 하고 있어.”

 그가 남들과는 다른 삶을 선택한 비혼 여성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건 늘 주변 사람들이었다. 그도 자식이 한 명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8년 전 세상을 떠난 언니가 애순씨 명의로 땅을 산 적이 있었다. 언니가 세상을 뜬 뒤에 조카들이 이 땅을 담보로 수억 원대의 대출을 받았다. “조카들이 이자를 못 내면서 내가 그 덤탱이(덤터기)를 쓰게 됐어.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거야. 근데 조카들은 그렇게 생각하더라고. 나는 살 만큼 살았고 가족도 없으니까 자기들을 위해서 좀 희생해줘도 되지 않느냐는 거야. 그때 ‘나한테 혈육이 있었다면 얘들이 이렇게 대하지 않을 텐데’ 하고 말이야.”

 결혼을 안 하는 애순씨에게 주변에서 가장 많이 건넨 말은 “나이 들어서 혼자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거였다. 그는 이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어차피 결혼하더라도 남자의 평균 수명이 더 짧기 때문에 혼자 되는 건 마찬가지 아니야? 지금은 오히려 친구들이 내가 가장 편하겠다고 해. 손자·손녀 돌보느라 동창 모임도 제대로 못 나오는 친구들이 있거든. 외로움? 그건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겪게 되는 감정이고.”

 그래도 ‘고독사’ 뉴스를 접하는 건 그에게도 찜찜한 일이다. 이 때문에 주변의 한 지인은 혼자 살다가 딸네로 들어갔다. 그런 고민을 훌훌 털어버리려고 애순씨는 노인복지관을 찾았다. “나한테 일주일에 두어 차례 전화해달라고 했어. 며칠간 연락이 안 닿으면 문제가 생긴 거니까 찾아달라고 했지. 내가 문도 못 열어줄 정도로 아플 때를 대비해서 열쇠도 복지관 사람들 손이 닿을 만한 곳에 놔뒀어. 준비가 좀 철저한 편인가? 지갑에 장기기증서도 넣고 다니니까.(웃음)”

 자동차도 수동 기어를 고집하는 애순씨. 오토 기어를 쓰면 고속도로에서 심심하다는 게 이유다. 매일 아침 30분씩 요가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북한산에 오른다. 그의 노년은 젊은 시절의 ‘미스 김’처럼 여전히 달리고 있다.

 “출산율 증가에 기여하는 것도 좋겠지만, 일단 나 자신의 삶을 먼저 생각해야 하잖아. 우리도 일단 인간으로 먼저 태어난 거니까. 난 정부가 무조건 결혼하고 애 낳으라는 말부터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뭐든지 자기 의사에 반해서 억지로 하면 되는 게 없잖아. 소신껏 살아야지. 무엇보다 행복은 주관적인 거니까. 결혼? 내가 안 해봐서 잘 아는데 말이야. 남자를 너무 밝히는 여자들은 독신으로 살지 마. 그냥 결혼하라고!”

 참, 그의 호적 이름은 김길자였다. 아버지가 일본식 이름으로 호적에 올리기 전 엄마가 불러주던 ‘애순’이를 군청 근무할 때 법원을 통해 되찾았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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