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7 21:15 수정 : 2012.12.27 21:59

구조조정의 전도사 혹은 구조조정의 저승사자, 용병 소방대장, 야생마 조련사….

이헌재 1944년 4월 17일생. 미 보스턴대 경제학 석사. 행정고시 제6회 합격. 박정희 정부 청와대 경제비서실 근무. 재무부 재정금융심의관. 대우반도체 대표이사. 한국신용평가(주) 대표이사. 김대중 정부 금융감독위원회 초대 위원장. 금융감독원 초대 원장. 제3대 재정경제부 장관. 국무총리 직무대행. 노무현 정부 제4대 재정경제부 장관 겸 부총리. 현 김앤장법률사무소 비상임고문. 저서 (로도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스스로가 밝힌 자신의 별칭들이다. 이 별칭들은 그가 1997년 외환위기 직후 비상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과 금융감독원장, 재정경제부 장관 등을 지내는 동안 구조조정과 재벌 개혁 등 위기 수습을 위해 소신 있게 일을 추진한 과정에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시험만 치르면 수재 소리를 듣던 그는 행정고시에 합격해, 1969년부터 10년 정도 주로 재무부에서 근무하다, 1980년대 초 대우그룹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관계·재계·금융계를 두루 거쳐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경제 전문가로 꼽힌다. 그러나 경제관료 사회를 제외하고 일반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그가 국내외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주요 인사로 등장하는 계기와 인연은 그의 관료 생활에서 비롯됐다.

막후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고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자민련(박근혜의 4촌 형부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충청권 인사를 중심으로 창당) 부총재를 지낸 김용환(1932년생)씨가 1974년 재무부 장관으로 일할 때 이헌재는 금융정책과장을 지냈다. 이때 인연으로 김씨가 ‘DJP 연합’으로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시절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한시적으로 설치된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을 때 그를 실무기획단장으로 발탁하면서 그의 인생은 또 한 번의 전기를 맞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한테서 일 잘한다는 평가도 받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대선 캠프에 합류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변신이 빠르다고 해야 할까? 변화를 읽어내는 능력이 빠르다고 할까?

이헌재가 무소속 안철수 후보 캠프에 합류한 과정이나 연결고리 등에 관해서는 아직 별로 알려진 게 없다. 다만 최근 그가 펴낸 두 권의 책을 보면 많은 궁금증이 풀린다. 그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금융감독원장, 재정경제부 장관과 경제부총리 등을 잇따라 지내며 국가부도 위기를 극복한 경험 등을 2011년 12월부터 넉 달 동안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이를 묶어 <위기를 쏘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저작에서 ‘안철수 현상’ 해석

이어 지난 9월에는 <경제는 정치다-이헌재의 경제특강>이라는 책도 냈다. 두 번째 책은 그가 4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어느 공부모임에 나가 실물경제에 관해 강의한 내용 등을 중심으로 엮은 책으로, 한국 경제의 전망, 글로벌 금융위기,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한 제안 등을 담고 있는데, 이른바 ‘안철수 현상’의 의미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의 생각을 옮겨본다.

“우리나라에서 구시대와 새로운 흐름의 충돌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안철수 현상이다. 그는 정치를 해본 적이 없다. 어느 정당에 속한 것도 아니고, 그저 교수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젊은이들은 그를 시대의 멘토로 받아들이며 그가 그들의 시대정신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중략) 안철수 현상은 하나의 시대적 흐름이다. 사회 저변에서 꿈틀대는 새로운 가치관의 상징이다. 안철수 현상은 과거의 인물들은 더 이상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기존 정당들도 해법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과거의 정치 시스템 자체를 통째로 부인하는 현상이다. 이미 시대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시스템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적극적 시장주의자

이헌재는 이 책들을 통해 지금의 2030세대가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 등을 거론하며 우리 젊은 세대가 ‘닫힌 취업, 닫힌 공부, 닫힌 인생’을 살고 있다며, 한국 사회가 하루빨리 열린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쯤 되면 그는 윤여준 등이 떠난 안철수의 ‘새로운 멘토’로 불릴 만하다. 그가 안철수 교수의 대통령 출마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두고 언론들이 안철수의 핵심 경제참모로 소개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이자, 안철수 캠프 관계자는 안철수 후보의 경제공약 개발 등 실무작업은 홍종호(1963년생)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가 중심이 되어 담당할 것이라고 이례적으로(?) 즉각 공개하고 나섰다.

이헌재의 어떤 점이 부담스러웠을까?

그는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이회창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후보의 경제자문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런 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헌재의 생각과 말, 인적 네트워크 등을 좀더 짚어보자. 그는 자신이 쓴 책에서 스스로를 ‘적극적 시장주의자’로 소개하면서, “시장의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한다. 아울러 자신이 ‘약간의 개혁 성향이 있지만 전반적 보수(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부실기업의 정리와 구조조정, 기업 맞교환(빅딜)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적 관계로 특혜를 주거나 배려한 적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한때 언론에 ‘이헌재 사단’이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 것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두 권의 책에 드러난 그의 생각과 발언은 비교적 진솔해 보인다.

인생의 주요 고비에서 그에게 전기와 변화를 가져다준 인연과 인적 네트워크에 대해서 솔직히 밝힌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만약 안철수의 멘토를 자처한다면 더욱 의미가 있을 법한 대목이다.

3명의 멘토 김용환·남덕우·김우중

이헌재는 자신에게 3명의 멘토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멘토가 앞에서 소개한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이다. 자신은 ‘관료인생의 멘토’인 그로부터 “일하는 법을 배웠다. 그가 쓴 보고서는 한 장을 넘지 않았다. 어떤 사안이든 종이 한 장에 요약했다”고 말한다. 김용환씨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놓고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 신경전을 벌였던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동서지간이다.

그의 두 번째 멘토는 1970~80년대 ‘서강학파의 대부’로 불리던 남덕우 전 국무총리다. 그에게서는 ‘경제를 큰 틀에서 보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김종인씨도 서강대 경제학 교수를 지냈다.

세 번째 멘토는 한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전세계를 상대로 기업활동을 펼치다 그룹이 해체된 대우의 김우중(1936년생) 전 회장이다. “나는 그를 통해 세상을 봤다. 김우중 회장은 내게 세상을 보는 렌즈였다.”

이헌재의 경력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아시아 최대 법률사무소인 김앤장의 고문을 세 차례나 지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또한 외환은행 헐값 매각과 관련해, 각종 구설과 책임 논쟁에 휘말린 바 있으며, ‘검은 머리 미국인의 실체’를 둘러싸고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가 밝힌 자신의 선조는 이렇다. 전주 이씨 효령공파인 이헌재의 할아버지 형제는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사업을 해 번 돈으로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다가 할아버지는 일본인 의사에 의해 독살당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헌재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장인은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을 졸업하고 해방 후 상공부 관리 등을 지내다 보건사회부 장관 등을 지낸 진의종(1921~1995) 전 국무총리다. 그의 장인은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 8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신민당에 입당해 9대 국회의원 선거(신민당, 고창·부안)에서 재선했다가 11, 12대 때는 집권당인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신학림 : 전 <코리아타임스> 기자, 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2003~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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