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06 02:33 수정 : 2013.03.06 20:17

오노 요코, 전위적인 예술가로 시인이며 음악가이다. 무엇보다 존 레논이 사랑한 여인이다. 오노 요코가 80살 생일을 맞았다. 그녀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뉴욕,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오노 요코와 존 레논 / 한겨레 자료
오노 요코를 생각할 때면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우리 모두 존 레논이 사랑한 이 여인에 대해 얼마나 많은 험담을 했는지. 머리를 성성히 풀어헤친, 못생기고 눈이 째진 년!

예전에는 사람들이 그녀를 나쁘게만 봤다. 하지만 요즘 오노 요코를 보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를 것이다. 작년 봄 그녀가 오스트리아 빈 극장 무대에 까만 바지 정장에 까만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등장해, 평생해온 작업에 대해 수여하는 코코슈카 상(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어 코코슈카의 이름을 딴 상)을 받는 순간을 본 사람이라면, 그녀를 요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때론 재미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여름 런던에서 전세계를 상대로 벌인 퍼포먼스 <스마일필름>(Smilefilm·웃는 모습을 보내주세요)을 소개할 때 그러했다. 그때는 밀짚모자를 썼다.

최근 뉴욕 필름 보관소의 시사회에서 그녀가 제작한 전설적인 플럭서스(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내건 전위적인 예술운동) 영화들을 상영했다. 그녀의 작품으로 여성의 몸 위를 돌아다니는 파리들이나 5분 30초간 벌거벗은 엉덩이들의 행진을 보여줬다. 마지막에는 오노 요코가 무대 뒤에서 등장했다. 또 검은 정장을 입고 큰 선글라스를 쓴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이때 그녀는 마치 안아줘야만 할 것처럼 작게 보였다. 안아주고 싶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반응이라는 걸 안다. 오노 요코는 우리의 보호도, 서투른 사과도 필요없을 것이다. 그녀는 모든 비방에도 살아남았고, 그녀의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한 평가절하와 존 레논의 죽음으로 받아야 했던 증오도 견뎌냈다. 그녀는 플럭서스 운동의 마지막 남은 예술가이다. 2월에 프랑크푸르트 미술관은 그녀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2012년 3월 1일 코코슈카상을 받는 오노 요코. / 만프레드 베르너

운명처럼 다가온 존 레논

오노 요코의 삶에 대해 설명해볼까 한다. 오노 요코라는 이름은 ‘바다의 아이’라는 뜻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시를 쓴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글을 썼다.

탄생 새의 해에 태어나다.

아동기 하늘을 모았다.

청춘기 해초를 모았다.

청춘기 후반 그레이프푸르츠를 낳았다. 달팽이와 구름과 버려진 상자들을 모았다. 이 분야에서 많은 학위를 땄다.

진술 사람들은 돌멩이 하나만 남을 때까지 내게서 모든 것을 잘라냈다. 그 돌멩이는 바로 나였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만족하지 않았고 돌멩이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했다.

PS. 만일 나비들이 배에서 죽는다면 친구들에게 노란 부고를 보내세요

출처: <약력/ 진술>·1966

너무 모호한가? 그러면 사실을 정확히 짚어보자. 1933년 일본 도쿄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고, 일본과 미국을 오가면서 성장했다. 성악과 철학을 공부했다. 1956년 음악가 이치야나기 도시(미국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의 제자)와 결혼했다. 퍼포먼스와 영화, 설치예술 작업을 했다. 조지 마치우너스 주위에 형성된 플럭서스 그룹에 영감을 주는 역할을 했다. 예술과 삶, 미술과 하이쿠(일본 고유의 단시)의 즐거움 사이를 자유롭게 흘러가는 플럭서스 같은 삶을 살았다. 1963년 딸 교코가 태어났다. 다음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그레이프푸르츠>를 발간했다. 1969년 존 레넌과 재혼했다. 1975년 아들 션이 태어났다. 1980년 미망인이 됐다. 평화운동을 하고 있다. 마지막 평화운동은 2012년 가을에 프래킹(셰일가스를 채취하기 위해 지반을 뚫는 수압균열법으로, 지하수 오염의 위험이 크다)을 반대하는 운동을 했다. 시민들 앞에서 오노와 션은 외쳤다. “뉴욕주지사 쿠오모에게 말합시다! 뉴욕주 지반을 뚫지 말자고! 오노와 션과 함께 점심을 먹으면 TV에 나올 겁니다. 지금 함께하세요.”

오노 요코의 삶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녀가 체험한 특별한 색채의 순간들을 떠올려보라. 이를테면 요코라는 소녀가 혼자 방에 남겨진 순간 말이다. 부모님은 밖으로 나갔다. 다시 돌아온 어머니에게 소녀는 속상함과 반가움으로 울면서 달려갔다. 하지만 아름다운 어머니는 자신의 옷이 눈물로 얼룩질까 봐 아이를 선뜻 안아주지 않고 팔을 뻗어 어루만질 뿐이다.

또 다른 어린 시절의 순간. 소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아버지가 그 옆에 서 있다. 아버지는 집을 자주 비웠고, 소녀는 3살이 돼서야 아버지와 친해졌다. 아버지나 소녀나 한때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의 바람에 따라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은행에 입사했다. 아버지는 손에서 느껴지던 긴장감을 그리워했다. 소녀도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좋은 목소리를 타고났다. 음표 하나하나를 목소리로 바꾸어낼 줄 알았다. 후일 그녀의 숨쉬기, 한숨쉬기, 소리지르기, 속삭이기는 전위적인 소리가 되었다.

다른 순간을 보자. 1958년 교토에서 <조각내기>(Cutting Piece) 퍼포먼스를 할 때이다. 오노 요코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다리를 왼편으로 꼬고 무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관객들에게 가위로 자신의 원피스를 잘라내라고 말했다. 젊은 남자들과 한 여성 관객이 다가와 싹둑싹둑 가위질을 했다. 창백한 피부가 조명을 받으며 드러났고 하얀 브래지어가 보였다. 그리고 한 남성이 마지막 가위질을 했다. 이 모든 것을 가만히 견디고 있던 오노 요코는 몇 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손을 올려 가슴을 가렸다.

가장 특별한 순간은 영국 런던의 인디카 갤러리에서 1966년 그녀의 설치작품을 전시했을 때다. 전시작에는 <못박기 회화>(Painting to hammer a nail in. 망치와 캔버스로 만든 작품) 등이 포함됐다. 그해 11월 9일, 존 레논이 찾아와 하얀 사다리를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돋보기를 들고 작은 글씨로 쓰인 단어를 들여다봤다. 그 단어는 ‘YES’였다. 이는 존 레논이 새로운 삶에 “예스”라고 대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열정적이고 공생적인 사랑, 예술적으로 정치적으로 생산적인 결혼이 펼쳐졌다. 신혼여행으로 떠난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에서 5일간 ‘베드 인’(Bed in)이라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리고 둘이 함께 한 첫 앨범 표지에 나체 사진을 실었다. 허걱.

다음 순간은 1980년 12월 8일 22시 50분. 존 레논이 뉴욕의 집 앞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969년 3월 5일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의 \'베드 인 피스\' 퍼포먼스. / www.gaheten.nl
미군 공습, 순식간에 사라진 존재들

이제는 오노 요코 삶에서 중요한 장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도쿄의 왕실 소유 건물에서 요코는 일본 왕손들과 놀았다. 이런 일이 매우 특별한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장소는 요코의 어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미군 공습으로 파괴된 도쿄를 떠나 피신한 작은 마을이다. 그때 공습으로 10만 명이 숨졌다. 얼마나 빨리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고 무(無)가 되어버렸는지. 이런 것이 그녀의 예술관을 형성했다. 영상 작품 <라이팅 피스> (Lighting Piece)에서는 성냥개비에 불이 붙고 밝게 타오르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시간과 파괴와 빛에 대한 명상이다. <반의 방>(Half-a-Room)은 의자와 탁자와 램프를 이용한 설치 작품이다. 각각은 다 반으로 잘려 있고, 나머지 반은 관객들이 머릿속으로 상상해야 한다. 플렉시 글라스로 만들어진 작품들. 판타지에 불과했던 예술이 희망과 동경과 유토피아로 바뀌었다.

오노 요코의 삶에서 마술 같은 장소 중 하나는 당연히 맨해튼 챔버 스트리트의 회색 집일 것이다. 1956년 그녀는 난방도 안 되는 건물 위층을 빌려 갤러리로 변신시켰다. 여기는 존 케이지, 페기 구겐하임, 조지 마치우너스, 막스 에른스트 등이 영감을 얻어가는 장소였다. 이 집은 현재 버림받은 거리 한가운데 있으며, 창문은 가려지고 간판은 녹슬었다. 뉴욕의 새 타워들 그늘에서 시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념물 같은 건물이 될 것이다. 오노 요코는 이런 것이 맘에 들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장소로 맨해튼 72번가의 다코타 1W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73년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이 이사온 집이다. 첨탑과 흉벽을 가진 단단하고 화려한 건물이다.

다코타 건물 앞에서, 현재는 오노 요코 혼자 살고 있는 이 건물의 맨 위층을 올려다 보려면 고개를 뒤로 젖히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위층을 보려면 길 건너 센트럴파크 입구에서 바라보아야 하는데, 센트럴파크 입구 바로 그 자리에는 수많은 장사꾼들이 레논의 말이 새겨진 배지를 팔고 있다. ‘죽을 일도, 서로 죽일 일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세요’, ‘당신이 원한다면 전쟁은 끝날 것입니다’라는 글이 새겨 있다. 인터뷰를 하러 오노 요코 집에 들어가려면, 일단 다코타 건물 앞에서 출입 허가를 기다려야 했다. 1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오노 요코와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거부되기도 하고, 다시 허가되기도 한다. 나는 약속보다 15분 정도 일찍 갔기 때문에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담장에는 용이 새겨 있고, 제복 입은 사람이 철문을 지켰다. 날이 너무 추워서 ‘지금은 여름 아침 나절이고, 손에는 뜨거운 커피를 들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마호가니로 만들어진 골동품 같은 엘리베이터가 삐걱대며 위로 올라갔다. 요코가 사는 층에는 모두 똑같은 문들이 달려 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 층에는 영화배우 주디 갈런드와 로렌 버콜도 살았다. 우리는 어떤 밝은 방으로 안내됐다. 난이 곳곳에 놓여 있어 방 안 가득 달콤한 향이 가득했다. 크림색 소파, 존 레논의 하얀 그랜드피아노.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회백색으로 보였다. 창가에는 돌로 만들어진 회색 고양이 조각이 앉아 센트럴파크의 나무 꼭대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복도를 통과할 때 우리는 방 하나를 슬쩍 들여다볼 수 있었다. 존 레논의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다. 커다란 주방 안의 수많은 자갈로 치장된 기다란 탁자 끝에 오노 요코가 앉아 있다. 오노는 검은색 털 재킷을 입었는데 지퍼가 끝까지 올려져 있다. 자주색 아이섀도가 그녀의 검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자주색 빛과 잘 어우러졌다.

차이트 어제 <조각내기> 퍼포먼스를 봤습니다. 그 속의 젊은 여인은 사람들이 자신의 옷을 자르는 것을 참아내고 있었습니다. 요즘 그 여인을 볼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오노 저 여자가 바로 나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하지요.

차이트 40년 전의 당신이지요. 사람들이 가위를 들고 다가올 때 그것을 어떻게 참고 있었습니까.

오노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하면서 머리를 비웠죠. 이 퍼포먼스의 아이디어는 당연히 여성으로서 내가 겪은 것들에서 나왔습니다.

차이트 페미니즘….

오노 오, 그때는 페미니즘이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차이트 페미니즘에서 역할 고정에 대한 반박이 있지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여성이 직접 여성인 자신을 향한 공격적 행동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는데.

오노 왜 그러면 안 되나요. 그런 일은 항상 일어나고 있는데.(웃음)

차이트 너무 극단적이지 않을지 두렵지 않았나요.

오노만일 그런 것까지 생각했다면 퍼포먼스를 못 했겠죠.

차이트 어떤 여성은 옷을 자르라는 당신의 요청을 따르고 싶었지만 차마 할 수 없다고 했던데요.

오노 그분 귀엽네요.

2010년 3월 4일 상파울루대학 현대예술박물관을 방문한 오노 요코. / 마르셀라 카탈디 치폴라
동물 소리 내는 성악도 출신

그녀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성적인 것에 대해 모르는 척 점잖을 떨던 1950년대에 나체를 등장시킨 작품 때문에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이야기도 털어놓었다. 우리는 패션과 <벌거벗은 엉덩이들>(Bottoms)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패션계가 좀처럼 남성을 벗기려 하지 않는다는 데 이르렀다. 그러자 그녀는 비서를 불러 존 레논에게 결혼식 때 선물한 남성복 디자인 초안들을 가져오게 했다. “얼마나 섹시해요!” 그녀가 웃었다. 이것은 곧 책으로 나올 것이라고 한다. 바짓가랑이에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을 낸 디자인에 대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포르노그래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작품 <파리>(Fly)는 포르노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신체 각 부분을 따로따로 마치 경치를 보여주듯이 카메라로 찍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부분들을 머릿속으로 전체를 짜맞추어야 한다. 그녀가 웃으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했다. “마지막에서야 몸 전체가 보인다. 그리고 곧 ‘어머나! 사실은 여자의 몸이었잖아’라고 깨닫지요.”

차이트 <파리>의 사운드 트랙에는 한숨 소리, 끙끙대는 소리, 흐느낌 등 모호한 감정을 표현한 소리가 들어 있는데요. 어디서 이런 소리가 나온 겁니까.

오노 그냥 나에게서 나온 소리입니다. 말하자면 저 위에서 나에게 준 소리이지요. 감사할 일입니다.

차이트 당신은 체계적으로 성악 공부를 한 적이 있지요.

오노 그렇습니다. 독일 가곡을 부르곤 했어요.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 파트를 다 부를 수 있었습니다. 내 음역은 놀라울 정도였죠. 새 앨범을 위해 나는 매일 ‘오오오아아아’ 하고 연습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스페인에는 춤추면서 소리를 지르는 전통이 있다고 이야기해줬습니다. 가부키나 노(일본의 가면악극)의 전통도 퍼포먼스에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냥 나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차이트 당신의 목소리는 가사가 없는 그냥 소리입니다. 어떨 때는 동물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이런 소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입니까.

오노 나를 통해서 동물들이 울부짖는 것입니다. 네, 그렇고 말고요.

이에 대해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는 사이 인터뷰 시간이 끝나버렸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다코타 앞에 섰고 센트럴파크 쪽으로 길을 건너 스트로베리 필즈로 갔다. 스트로베리 필즈는 오노 요코가 존 레논을 기리기 위해 센트럴파크 안에 만든 장소다. 한 여인이 숲 속을 무릎으로 기고 있다. 뭘 하나요? 나뭇잎을 모은단다. 그녀는 쪼글쪼글하고 갈색이 되어버린 잎들을 플라스틱 상자에 담고 있다. 마치 다코타의 오노 요코에게서 퍼포먼스를 하라고 지시를 받은 것처럼. 그렇다면 제목은 ‘웃음’(Laughter Piece) 정도가 되지 않을까.

글 수잔 마이어 Susanne Mayer <차이트> 문학 부문 편집장

번역 이상익 위원

ⓒ Die Z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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