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01:31 수정 : 2012.12.28 01:34

구자열 회장의 취미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때로는 고급 승용차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는 파격적 모습도 보여준다.
정치인과 달리 기업인의 속내를 듣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이들은 마이크를 들이대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궁금하다. ‘대기업 회장님’들이 맞닥뜨린 위기의 순간은 언제일까. 그들은 스트레스를 어떤 식으로 풀고, 무슨 책을 즐겨 읽을까. 재벌가에 대한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이 억울했던 적은 없을까. <나·들>이 이런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나섰다. 예종석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이 묻고, 대기업 회장들이 답한다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 2층에 가면 100년도 더 된 희귀한 자전거 20여 대가 전시돼 있다. LS 직원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둘러볼 수 있다. 전시장 이름은 ‘두바쿠’. 첫 페달 자전거 ‘벨로시페드’나 세발 자전거의 원형인 ‘러지로터리’, 현재 자전거 형태의 원조 격인 ‘세이프티’ 자전거도 볼 수 있다. 모두 구자열(59) LS전선 회장의 애장품들이다. 자전거광인 그는 2002년 동양인 최초로 ‘트랜스알프스’ 산악자전거 대회를 완주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8박 9일 동안 알프스산맥 650km를 넘었다. 매일 백두산 높이의 산을 자전거로 오르내린 셈이다. 지난해에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페달을 밟았다. 소설가 김훈과 함께였다. 구 회장은 머지않은 미래에 지금까지 수집한 자전거 130대를 전시하는 박물관을 만들 생각이다.

자전거

구 회장에게 자전거와 경영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LS전선 제공
트랜스알프스는 일반인이 타기에 험난한 코스로 보이는데, 도전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릴 때부터 자전거로 통학할 정도로 자전거타기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때 자전거로 내리막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끼어든 택시와 충돌하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어요. 5시간이 넘는 뇌수술을 받은 이후로 한동안 자전거를 못 탔죠. 크게 놀라신 부모님의 엄명도 있었고요. 그러다가 1995년 해외 생활 마치고 들어오면서 상사에서 증권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업무 분야가 바뀌다 보니 사람들을 전부 새로 사귀어야 했어요. 술자리도 많아지고 체중이 불더라고요. 그때 산악자전거를 타게 됐어요. 트랜스알프스는 동호회 분들이 같이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산악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꿈이라고 부추기는 바람에(웃음). 6개월 정도 준비를 철저히 했어요. 금요일 저녁만 되면 2인1조로 강원도에서 민박하며 태백산맥을 넘었죠. 자전거는 재미있는 그 무엇이라기보다 자기와의 싸움인 것 같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페달을 계속 밟아야만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이 있죠. 기업 경영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자전거와 기업 경영이 어떤 점에서 통하나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뭔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다는 점에서 같아요. 제가 몸 담고 있는 전선 쪽은 장치산업인데, 특히 끈기가 많이 필요한 분야예요. 전자 쪽과 달리 전기 쪽은 아직 디지털 혁명이 안 일어났어요. 라이프사이클도 엄청 길고요. 그렇다 보니 지속적으로 원가 절감하는 쪽으로 연구가 집중되는 편이고, 그러려면 끈기가 필요한 거죠.

요즘도 자전거를 타시나요.

그럼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아침 6시부터 2시간 30분 정도 타요. 팔당댐과 퇴촌을 거쳐서 남한산성까지 갔다 오죠. 주로 동호회 회원들과 같이 가고, 카카오톡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아요.

‘바이클로’라는 브랜드로 자전거 소매업에도 진출한 바 있습니다. 자전거 사랑이 지나쳐 골목상권에 대한 밥그릇 침해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기도 했습니다.

소규모 자전거 숍들이 많은데, 고객 입장에서 보면 서비스 수준이 숍마다 천차만별이에요. 자전거는 애프터서비스가 중요합니다. 바이클로는 고객 서비스 관리 체계를 잘 구축해놨어요. 자전거를 구입한 점포가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했고요. 그런데 직영점 10여 곳으로 어떻게 골목상권을 장악할 수 있겠어요. (논란이 일고 나서 바이클로는 매장을 14개에서 11개로 줄였다.) 애착은 여전히 남아 있죠. 본사와 가맹점이 어떤 내용으로 계약을 맺는지가 중요하지, 무조건 골목상권 장악한다고 몰아붙일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원래 중점을 두려고 했던 것은 외국 브랜드와 경쟁할 자체 브랜드를 생산하는 거였어요. 지금 업체 대부분이 부품을 수입해 조립해서 팔거든요. 그래서 현재 벤처회사와 합작해 ‘토마’라는 전기자전거를 생산해서 팔고 있습니다. 좀더 경쟁력 있는 브랜드 개발에 나서고 싶어요. 국내에서는 전기자전거 수요가 많지 않지만 유럽이나 일본에선 시장이 매우 커졌어요. 우리나라에서도 누군가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조언을 구하는 멘토가 있나요.

아무래도 (사촌 형님인) 구자홍 회장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죠. 경험이 많으시니 배울 것도 많고요. 바깥에서는 ‘월가회’에서 조언을 많이 듣는 편이에요. 상사와 증권을 거치면서 금융 업무를 볼 때 만난 분들이죠. 국내 시장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많이 도움이 돼요. 이 모임에는 황영기 전 KB지주 회장과 하영구 한국씨티은행 은행장도 나옵니다.

LG도 그렇지만 LS도 가족경영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데, 특히 LS는 사촌경영이 돈독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 회장은 사촌형이면서 배울 점이 많은 비즈니스 파트너입니다. 전략적 차원에서 큰 그림을 보는 일에 익숙한 분이기 때문에 미래 시장 예측에 대한 조언을 많이 구하죠.

아드님은 어디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나요.

우리는 다른 그룹하고 다르게 맨 밑바닥 사원 생활부터 시작하는 전통이 있어요. 저만 해도 만 5년을 말단사원으로 지냈고요. 제 아들은 우리투자증권에서 리서치 업무를 보고 있어요. 제가 증권회사에서 일할 때 한 일본계 증권사 사장이 그러더군요. “은행이 사무라이면 증권은 야쿠자의 세계”라고. 언제 어디서 칼을 맞을지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일부러 그쪽으로 보냈어요.

기업마다 인재 확보가 큰 고민거리 중 하나일 텐데, 어떤가요.

전선은 여러 분야의 인재가 필요해요. 금속공학, 기계공학, 고분자화학 등이죠. 그런데 요즘 애를 많이 먹고 있어요. 젊은 사람들이 자꾸 공기업 같은 안정적인 직장에만 가려고 하니 좋은 인재를 찾기가 어려워진 거죠. 기계 전공자들은 월급을 좀더 주는 다른 대기업으로 가버리고. 또 대학들이 전기와 전자를 같이 가르치다 보니 그쪽 학생들은 전자로 가버리는 거예요. 근데 직업 안정성이나 근무 조건은 전기 쪽이 더 좋거든요.

인재 고를 때 어떤 점을 중시하는 편인가요.

저는 가정교육을 중요시하는 편이에요. 공부를 얼마나 잘했는지보다는 어떤 환경에서 컸는지 많이 물어보죠. 사람들이 가정에서 상당 부분 인격이 형성되는 거니까요.

재벌가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서는 어떠세요.

섭섭할 때가 많았죠. 친구들에게 커피 좀 사면 “돈 있으면 다냐”고 하고, 또 안 사면 “있는 사람이 쩨쩨하다”고 하고. 그나마 저희 구씨 집안은 보수적이라 스캔들이 거의 없었어요. 워낙 보수적이라 며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웃음).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가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묘사돼서 안 좋은 거 같아요. 딸이 결혼 전 시댁에 가는데 청바지 입고 전철을 타고 갔더니 바깥사돈이 깜짝 놀라더래요.

일하면서 ‘트랜스알프스’와 같은 어려움을 맞은 적은 없나요.

2003년 LG그룹에서 계열 분리해서 나왔잖아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처지에서는 조그만 회사를 받아서 재창업하는 팔자가 된 거였어요. 근데, 와서 보니까 너무 작은 거예요. 그룹 매출이 당시 7조 원이었으니까요. ‘이래선 안 되겠다, 열심히 해서 매출을 키워야겠다’ 하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엔 어땠나요. 최고경영자가 되고 나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계열분리를 해서 나올 때 전선을 고른 것은 기업이 오래돼서 매력적이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럴수록 자산이 많고 새로운 비즈니스에 활용할 여지도 많아지니까요. 그런데 오래된 기업일수록 과거와의 단절이 절실히 필요하더라고요. 악성 재고 물량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조차 파악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고민 끝에 2005년에 이아르피(ERP·전사적자원관리시스템)를 도입하기로 했는데 당시에 회사 내에서 모두 다 반대하는 거예요. 전선업계에서 어느 기업도 도입한 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죠. 우리가 왜 모르모트가 돼야 하냐고 묻더라고요. 이게 당장 수치로 성과가 나오기 어렵다 보니 더 꺼려했죠. 결국 직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수기간을 뒀어요. 자진신고를 하면 그동안 잘못 관리해왔던 거 다 용서해준다고 했어요. 하지만 이후에 드러나는 거는 절대 용서 안 한다고 했어요.

LG그룹에서 떨어져나온 이후 성장 폭이 더 컸다는 평가들이 있습니다. 비결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업 다각화가 아니라 전문화를 추구했어요. 많은 기업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화나 신사업 진출을 시도했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우리가 가장 자신 있는 케이블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추고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면 사업 기회도 확대된다는 진리를 깨달은 거죠. 해외 진출도 이런 맥락에서 진행해 성공적이었어요. 북미와 유럽·중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슈피리어에식스와 홍치전선을 인수할 때 단순히 외적 덩치를 키우는 데 주안점을 두지 않았어요. 본사와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스터디를 많이 한 결과였죠.

기업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미래 성장 동력이 아닐까요.

‘그린’과 ‘스마트’가 키워드가 될 거예요. 몇 해 전 하이브리드나 전기자동차 시대가 왔을 때 우리는 뭘 할 수 있을지 떠올려봤어요. 그래서 도요타의 프리우스를 갖다놓고 분해하고 연구해봤어요. 미래 자동차용 부품 개발이 이런 단계를 거쳐 진행되고 있어요. 또 저는 전선이 단순히 전력이나 통신 케이블을 만드는 게 아니라 에너지와 정보를 전달하는 물류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지금처럼 꼭 유선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어요. 소비자들이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 원하는 형태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하죠. 현재 추진 중인 무선 전력 전송이 그런 맥락에서 나온 일들이에요. 궁극적으로는 통합 에너지·정보 플랫폼으로 성장시키는 게 우리 계획이죠

구자열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넷째 동생 구평회 이원(E1) 명예회장의 큰아들이다. 구자열 회장의 두 동생은 구자용 E1 회장과 구자균 LS산전 부회장이다. LS그룹을 대표하는 구자홍 회장이 사촌형이다.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78년 LG상사 피혁기획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LG투자증권을 거쳐 2001년 LS전선(당시 LG전선)으로 옮겼다. 대한사이클연맹 회장과 울산과학기술대학 이사장을 맡고 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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