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8 18:42 수정 : 2013.01.14 17:55

<나·들> 둘러보기, 구독신청

서울 신당동의 한 골목길에 다세대 주택이 밀집해 있다. 다세대 주택은 대체로 반지하를 끼고 있고, 이는 주로 저소득층 1인 가구의 주거공간이 된다. / 박승화 기자
 부모님은 여러 지역을 전전했지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최초의 집은 강원도 어느 바닷가의 단칸방이다. 비록 단칸방이었지만, 어려서는 불편한 것도 몰랐다. 전해 듣기로는 내가 태어나기 전 이 지역에 큰 해일이 닥쳐, 부랴부랴 복구하느라 대강 지었다고 한다. ‘새마을’이라는 흔한 이름이 붙은 동네였고, 시멘트 벽돌 위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들이 모여 있었다. 걸어 나가면 금세 바다에 닿을 수 있는 정도였지만, 전형적인 어촌 마을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고기잡이보다는 보신탕집이나 택시 영업, 과일 가게를 하며 살았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아마 ‘고도 성장기’라고 부르는 시기에 이곳도 형편이 피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1990년대 초반엔 우리 집도 형편이 피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비닐봉투를 제조·판매하는 일을 했는데, 단칸방 셋집에 붙은 임시 건물에 원단을 절단하는 기계로 재단한 비닐 뭉치를 쌓았다. 상호는 뭘 만드는지도 모호한 ‘○○화학’이었고, 아버지 ‘명함’은 대표이사이거나 ‘비니루 아저씨’이거나 ‘○○아빠’였다. 가끔 일하는 사람을 쓰기도 했지만 주로 어머니가 기계를 돌리고 아버지가 봉고차에 비닐봉투를 싣고 팔러 다녔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 공장이나 가내수공업 같았다.

 물건 담는 비닐봉투 만드는 사업은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지방 소도시에서는 자영업자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했다. 경기가 좋은 여름휴가철,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기계가 돌아가더니 드디어 우리도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비니루 아저씨’였던 아버지 

 우리 집이 생긴다고 들었을 땐, 어린 마음에 책에서 보던 세모꼴 지붕과 다락, 마당, 울타리가 있는 단독주택을 상상했다. 하지만 막상 부모님이 지은 집은 스위트홈이라기보다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집이었다. 운 좋게 ‘당첨’되었다는 택지는 아파트 두 동 사이에 있었는데, 부모님은 1층을 상가로 지어 세를 줄 수 있겠다며 상당한 행운으로 여겼다. 부모님은 그 터에 타일로 벽을 마감한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1층에는 점포 2개, 2층에는 2가구, 3층에는 1가구가 거주할 수 있었다. 그곳은 모두 세를 주었다. 지하는 반을 잘라 한쪽에는 우리의 호구지책인 절단 기계를 놓고 창고로 썼고, 다른 한쪽은 반지하로 만들어 건축비를 다 갚을 때까지 우리가 들어가 살았다. 반지하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면 정화조 조성비가 더 든다는 이유로 화장실은 마당에 지었다. 화장실이 바깥에 있는 집은 스위트홈이 될 수 없으니, 집주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야 했다.

 기계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2년을 더 살았고, 중학교 갈 무렵 비로소 주인집이 응당 거주해 마땅한 3층 집에 가서 살 수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되었는데, 방이 생겼다는 사실보다 더 놀란 것은 창이라는 것이 아래에서 위를 올려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면서 창이 있는 내 방과의 짧은 시간도 끝났다. 기숙사가 없는 학교여서 고교 1학년 나이에 혼자 살아야 했는데, 급하게 구한 집은 보증금 2천만 원에 월세 20만 원인 다가구 주택이었다. 물론 이 비용은 부모님에게 받았다. 나는 결국 고등학교를 다 마치지 않고 검정고시를 보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이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기보다는 내친 김에 서울로 옮겨 수험 준비에 들어갔다. 세가 저렴한 동네를 찾아 얻은 집은 영등포구 ㅅ동의 3층짜리 다가구 주택 2층이었다. 전세 2천만 원에 주방과 방이 분리되어 있었고 제법 햇살도 잘 들었지만 험한 동네였다. 밤늦게 비디오 대여점에서 다녀오는 길에 집 앞 골목길에서 낯선 남자가 나를 덮쳤다. 다행히 집 바로 앞이라 주인집 문을 두드려 사고를 면했지만, 그로 인한 트라우마는 오랫동안 극복하기 힘들었다.

 수험생활을 거쳐 동대문구에 위치한 대학에 입학했는데, 장거리 통학에 지쳐 학교 근처로 이사를 했다. ㄷ동에 위치한 3층 다가구 주택의 반지하였다. 도로에 바로 접해 있어 골목길이 짧고 버스정류장까지 30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 맘에 들어, 다시 반지하 생활을 감수하기로 하고 전세 2천만 원에 계약했다. 반지하에 2가구, 2층에 1가구, 3층에 주인집이 사는 흔한 다가구 주택이었다. 나는 이 집에서 졸업할 때까지 지냈다.

 

 “네 똥이 굵은 탓이 아니다” 

 이 집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화장실 변기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았다. 주인에게 호소해도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2년 넘게 이런저런 방식으로 물을 내렸으면 요령이 생길 법하건만 이 변기에는 통하지 않았다.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였다. 한 친구가 우리 집에 왔다가 화장실 변기가 막힌 게 자기 일생에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일이라고 뒤늦게 털어놨을 때, 나는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웃었을 뿐 “원래 그렇다. 결코 네 똥이 굵은 탓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을 내가 매일 겪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 집에서 나는 도둑을 두 번 맞았다. 한 번은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까지 했다. 건물 뒷골목에 면한 반지하 창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이다. 훔쳐간 것은 귀고리 두어 개가 전부였지만, 난장판이던 방에서 오랫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이사를 해야 했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고,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하자 집주인은 다음 세입자가 나타나야 줄 수 있다며 버텼다. 3개월이 지나도록 집을 보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장기전이 될 것 같아 ‘나가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내용증명을 보냈다.

 내용증명을 받고 찾아온 사람은 내 또래의 주인집 아들이었다. “한 달 전에 어머니가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셔 아버지가 많이 심약해지셨는데, 지금 집 문제로 많이 괴로워하세요. 말씀하실 것이 있으면 아버지한테 하지 말고 저한테 하세요.”

 건강해 보이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셔서 영 뒷맛이 씁쓸했지만, 나는 더 이상 똥과 사투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또 밤손님이 마음만 먹으면 창을 뚫을 수 있는 곳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눈 딱 감고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경우 경매에 넘기겠으며, 연 20%의 지연 이자를 물게 될 것’이라는 위협적인 표현을 골라 재차 내용증명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몇 주 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집주인은 결국 자신이 살던 3층을 세주고, 내가 살던 반지하로 내려오는 걸로 보증금을 반환했다. 안주인이 죽고 단촐해진 식구가 죽으라고 변기에 ‘뚫어 펑’을 꽂아대며 살아갈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일이 될 수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운 좋게도 취직을 했다. 수도권의 가장 바깥 자락에 위치한 회사였다. 먼 통근거리와 다가구 주택의 열악한 치안 상황에 질릴 대로 질린 나는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었다. 실로 아름다운 방이었다. 중견 건설사가 이름을 붙여 지은 집이었다. 깨끗한 화장실과 큼지막한 창이 있는 10층이었다. 전세 2400만 원을 주었다. 이 지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테리어 예쁘면 뭐해, 환기가 안 되는데 

 문제가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밤 9시면 끊겼다. 새벽에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버스가 한 대 더 있었지만, 그걸 타려면 서울에서 새벽까지 좀 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깨끗한 집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점점 생활이 회사와 집을 오가는 것으로 단조로워져갔고, 어쩌다 서울 가는 날이면 심야버스 탈 시간까지 거리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질릴 대로 질린 나는 월세를 내더라도 사람답게 살겠다며, 서울 마포구 합정역에 바로 붙어 있는 13평형의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보증금 2천만 원에 월세 35만 원이었다. 직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주인은 같은 건물에 3채를 가지고 임대사업을 했는데, 세금을 회피할 요량으로 전입신고를 못 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20여만 원을 들여 전세권 설정을 해야만 했다. 관리비가 15만 원 정도 나왔다. 월세를 포함하면 ‘사람답게’ 사는 데 월 50만 원이 들어갔다. 다음해 월세가 5만 원 더 올랐다. 월세는 매년 이사 비용에 중개 수수료를 더한 금액에 약간 못 미치는 금액을 12개월로 나눈 수준만큼 오른다. 이듬해 집주인은 다시 5만 원을 올려달라고 했다. 아마 매년 5만 원씩 오를 것이다. 언젠가는 이사해야 했다. 2년을 살다가 나왔다. 가끔 부동산 매물 사이트에서 이 오피스텔 가격을 검색해보는데, 지금은 보증금 1천만 원에 월 60만~100만 원 하는 것 같다.

 이번엔 통근이 쉬우면서 고립되지 않고, 다가구 주택이 아니면서 서울보다 집값이 싼 지역을 골라서 고양시 일산으로 갔다. 이번에는 대학생인 동생과 둘이 살 것이라 집이 더 커야 했다. 모아놓은 돈에 대출을 약간 받아 지하철역 근처 20평대 복층 오피스텔에 보증금 8천만 원에, 월세 20만 원의 반전세로 들어갔다. 역시 직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고작 오피스텔 따위에 제국의 이름이 떡하니 붙어 있어 낯부끄럽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입신고도 가능한 ‘아파트형’ 오피스텔은 널찍하고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여름에 진가가 나타났다. ㄷ자로 마주 보게 배치한 구조로 두 동이 붙어 있었는데, 바람 한 줄기 들지 않았다. 꼭대기 층이라 그런지 초여름부터 콘크리트벽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실내 온도계는 40℃를 가리켰다. 살기 위해서 에어컨을 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환기 불량으로 담배 냄새가 수시로 집으로 들어왔다. 인터넷에는 ‘인테리어가 예쁜 집’이라고만 나와 있었는데, 살아보기 전에는 집의 단점을 알 길 없다. 집주인은 집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쉬쉬하고, 세입자는 다음 사람에게 넘겨야 하기 때문에 쉬쉬한다.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인근에 위치한 20평 아파트를 구했다. 이번엔 바람이 잘 통해야 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다가구 주택은 처음부터 논외였다. 그렇게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전세 1억 원이었다. 역시 직장이 있어서 가능했다. 오래된 15층짜리 아파트라 천장은 내려앉고 보일러 조절기는 망가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쾌적했다. 복도식 아파트라 양 방향으로 바람이 들이쳤으며, 1기 신도시의 나무들이 4층 높이까지 우거져 여름에는 풀 향기까지 났다.

 

 ‘깡통 아파트’를 어떻게 피할 것인가 

 2년 뒤 재계약할 무렵이 되자, 집주인이 집을 팔려고 내놓는다고 통보해왔다. 내놓은 가격이 1억8500만 원이란다. 국토부 실거래가를 확인해보니 최근에 1억6천만 원에 매매된 기록이 있었다. 난 ‘팔리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다. 매매하려고 내놓았다는 말은 묵시적 갱신을 하지 않겠다는 말인지, 하겠다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말이었다. 매매가 되지 않는 한 묵시적 연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매매와 관계없이 계약이 종료되었으니 보증금을 반환하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집이 팔리지 않자, 집주인은 이제 전세금을 ‘시세대로’ 올려달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2년 사이에 3천만 원이 올랐다. 대출 이자는 이사 비용을 고려하면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매가 1억6천만 원인 아파트에 보증금을 1억3천만 원 걸 수는 없었다. ‘깡통 아파트’가 두려워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집주인은 한 달 남짓 시간을 더 끌다가, 결국 2천만 원만 올려 새로운 세입자를 구했다. 그동안 20여 팀이 집을 보러 들락거렸다. 카드 대금이 하루만 연체되어도 온갖 전화에 시달려야 하는데, 집주인이라는 이름의 채무자들에게는 손해 보지 않는 다양한 기술이 있었다.

 월세는 최대한 피하고 싶고, 지금은 집을 살 생각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늘어나서 전세가가 치솟고 있다고 한다. 월세가 아까워 대출받아서 전세 보증금을 만들고, 그걸 갚아온 내게 전세 보증금은 전 재산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깡통 아파트에 전세 계약을 연장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으니, 적당한 전셋집을 찾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의 기준은 제각각일 터. 내게는 그동안 그것이 깨끗한 화장실이거나, 침입자가 땅 위에서 관찰할 수 없는 창이거나, 이른 시간부터 발이 묶이지 않는 지역이거나, 40℃ 열통지옥이 아닌 곳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좋은 주거환경보다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 10번째 이사를 준비한다. 보증금을 은행이자로 환산해 주거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인지 따져보고, 선순위 대출금이 있는 집은 무조건 제외하고, ‘나라면 지금 이 가격에 이런 집은 절대로 구입하지 않겠다’며 정부의 연착륙 유도 정책에 의구심을 품으면서.

 직장이 이것마저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직장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글 메로나

기획·자료 제공 ‘아파트 키드의 생애’ 기획팀 김류미, 박재현, 김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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