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05 23:07 수정 : 2013.03.05 23:07

베를린
동명수, 그는 장르의 자식이다. 주인공의 배후에는 반드시 악당이 있어야 한다. 조커가 없는 배트맨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첩보영화는 주인공과 악당의 경합을 보여주다 끝내 주인공이 승리하는 서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완성된다. 주인공은 까닭 없이 고난에 빠지며, 이유 불문하고 곤란하다. 슈퍼 첩보원 표종성이 겪는 고난과 곤란은 그래서 그가 왜 그 많은 능력을 접어둔 채 빠르고 단순무식하게 오로지 ‘싸움’만 선택했을까를 의심하게도 하지만, 표종성이 합리적으로 움직인다면 첩보영화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첩보영화의 장르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해 최대한 동일자가 될 것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주인공의 활약이 정당한가를 묻기 전에 이미 주인공 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주인공이 도심 한복판에서 차량을 박살내며 도주해도 손에 땀을 쥐게 되고, 오늘도 힘겨운 하루를 버텨가는 시민들의 일상이 주인공의 활극에 하릴없이 부서져도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할 수 있다. 그 모든 책임은 악당이 져야 할 몫이다. 표종성과 동명수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고 누구를 배제할지는 극장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결정난 문제다. 나쁘게 더 악랄하게! 장르의 자식, 악당 동명수의 존재 의의다.

악당 동명수, 그는 또한 체제의 아들이다. 어느 체제에나 기득권은 존재하고,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최상류층의 자식들은 어김없이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고 당대의 체제를 만드는 데 기여해왔다. 동일노동이 동일임금은 되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의 극적 모순이라면, 모두가 노동을 신봉한다고 하지만 정작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보다 더한 악성 자본이 되었더라는 것이 그 체제의 치명적 모순이다. 그의 아버지는 체제에 반대하는 자들을 숙청했고, 권력을 비판하는 이들을 제거하며 권력의 영토를 최대치로 확장해왔다. 그는 그게 체제를 위한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그 영토의 언저리 구석구석에 자신의 금고를 숨겨두었다. 그렇게 비밀계좌를 만들고, 해외 공관을 비자금 창구로 활용하는 일탈을 당연시하며 아들을 낳고 길렀다.

그 아버지의 노력으로 체제는 3대째 유지되고 있다. 이제 갓 서른 언저리의 청년이 남다른 지도력이나 리더십이 있어서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들의 굳건한 이해관계로 지탱되는 것이다. 그 체제는 부를 만들 수 있는 수단을 소수가 독점하는 방식으로 대물림된다. 선택받은 체제의 자식들은 그래서 언제나 체제에 대해 자긍심과 자신감을 갖는다. 체제를 충분히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충분히 배려받기 때문이다. 성질이 급한, 그래서 결정적일 때 실수하는 체제의 아들, 악당 동명수가 사는 법이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김완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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