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8 18:01 수정 : 2013.02.26 22:55

류현진(26·LA 다저스)
‘20%의 계층이 80%의 부를 가져간다’는 파레토의 법칙은, 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지극히 당연한 현실이므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상위 1%의 소득이 노동자 평균 소득의 26.1배, 전체 소득의 16.6%를 차지하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차라리 파레토 법칙이라도 철저히 관철되기 바랄지 모른다. 상당수가 기본적인 생활조차 유지하기 어렵고, 또 대부분은 갈수록 삶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온갖 편법을 동원해 기업의 자산을 사유화하고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그걸 대물림하는 사람들이 있다. 간혹 법의 심판을 받아 ‘감방살이’를 하지만, 올림픽 유치라는 국가적 대업을 위해 ‘곧’ 풀려난다. 더구나 부당하고 불평등한 삶의 육신들이 오히려 희망과 양심의 촛불을 짓눌러 꺼뜨린다. 촛불마저 꺼진 밤은 더욱 캄캄하다.

 그래서 오디션이 되고 스포츠가 된다. 그나마 보이는 부분에서만큼은 공정하고 평등하니까. 악마의 편집이나 냄새 나는 패자부활전도 없는 스포츠는 더욱 그렇게 보인다. 그런 까닭인지 스포츠 스타들에 대한 관심에는 다른 유명인들에 대한 그것과는 다른 긍정 시선이 느껴진다. 혹독한 훈련의 시기를 거쳤든 태어날 때부터 천재였든, 그의 성적과 실력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류현진이 LA 다저스와 계약했다. 3600만 달러, 그 숫자만으로도 이야깃거리는 충분하다. 월급 1천만 원을 360년 동안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더구나 LA 다저스는 박찬호를 미국에 데뷔시킨 팀이다. 사람들은 박찬호를 ‘선구자’ 혹은 ‘개척자’라 부른다. 국내 프로 팀들은 그의 미래를 살펴볼 눈이 없었다. 미국은 그가 야구를 계속하기 위한 마지막 가능성이었다. 그는 벼랑 끝에서 삶을 일으킨 자수성가형 캐릭터이다. 반면 류현진은 국내 무대를 석권하고, 더 큰 목표를 찾아 밖으로 눈을 돌린 천재형 캐릭터이다. 그에겐 눈에 띄는 굴곡이 없었다. 어린 시절 야구를 하기 위해 만난 초등학교 감독은 그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중·고교 시절에도 이름 있는 선수로 활약하며, 나름 주목받는 고졸 신인으로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부상 때문에 연고지인 인천을 떠나 한화에 지명되었지만, 프로 첫해 다승·평균자책·탈삼진의 3관왕으로 신인상과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통산 98승 52패 1세이브, 평균자책 2.80, 탈삼진 1238이 지난 7년간의 기록이다.

 물론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할 순 없다. 류현진이라는 이름 뒤에는 ‘소년 가장’이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소속 구단의 허약한 경기력 때문에 승패의 부담을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 팍팍한 상황 때문이었다. 윤석민, 김광현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투수, 그 가운데 최고로 일컬어졌지만 승률이나 승수가 명성에 미치지 못한 것이 그 까닭이다. 그의 기록을 더욱 빛나게 해줄 우승의 영광은 그와 크게 인연이 없었다. 아무튼 그런 그가 미국 메이저리그로 직행하는 첫 번째 프로 야구선수가 되었다.

 라면이 먹고 싶어 야구팀에 들어간 박찬호와 다르게 그는 야구가 좋아 야구를 시작했다. 기왕 하는 야구 제대로 해보라며 옥상에 연습장을 만들어주신 아버지, 동생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꿈을 포기한 형, 처음 보는 날 야구부에 들게 한 초등학교 감독, 든든한 후원자들도 그에겐 커다란 힘이었다. 국내가 힘들어 해외 진출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박찬호와 다르게,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는 국내 무대를 떠나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이미 성공한 선수’이다. 그런 면에서 류현진은 시간을 들일수록 ‘스탯’(능력치)이 올라가는 ‘롤플레잉게임’(게임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역할을 맡아 직접 수행하는 형식의 컴퓨터 게임)의 캐릭터 같다.

 기억하건대 박찬호의 미국 진출에는 우려와 걱정이 컸던 것 같다. 무명 선수의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은 축하와 응원의 대상이기보다는 질투와 의혹 거리였다. 더구나 물 건너간 지 1년 만에 혀를 굴리며 서툴게 구사하는 우리말은 이런 생각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그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어려웠을까’라고 생각해주는 사람보다는, 못되고 건방진 근성이라고 흉잡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사람들을 얻는 데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TV 예능 프로그램 <1박2일>과 <황금어장>이 자리를 마련해주기 전까지 박찬호라는 캐릭터는 무겁고 어둡고 단단했다.

엘에이(LA) 다저스의 투수 류현진이 25일(한국시각)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시범경기에서 3회 마운드에 올라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글렌데일/AP 뉴시스
 류현진을 사람들은 ‘류뚱’이라 부른다. 온라인 야구 게임 류현진 캐릭터의 포인트는 역시 ‘류뚱’스런 보디라인이다. 물리적으로 훨씬 무거운 몸무게지만 그 의미는 오히려 가볍다. TV 프로그램 <런닝맨>의 류현진은 드라마보다는 예능, 정극보다는 코미디에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여성 출연자들의 이름표를 뜯어내는 그의 모습은 초딩의 유치함과 귀여움을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PC방에서 게임하다 만난 팬들에게 그림판으로 사인을 그려 보내는 모습 등은 그런 이미지를 더욱 굳게 만든다. 그에겐 시련과 역경이 어울리지 않는다.

 캄캄하고 추운 밤에는 작은 빛도 더 밝고 뜨겁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고진감래 자수성가는 그것이 가능해 보일 때 힘을 얻는다. 그런 면에서 박찬호는 그를 보며 자라난 세대들에게 희망이 되고 목표가 될 수 있었다. 무명 박찬호의 성공은 환풍기 수리공(Mnet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K2> 우승자 허각)의 우승과 마찬가지로 가능성이라는 신화를 품는다. ##류현진(박찬호???)## 또한 그런 신화 속에서 성공을 꿈꾸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류현진은 박찬호와 전혀 다른 상징이다. 그는 순수한 선망의 대상이다. 타고난 재능과 굴곡 없는 성장, 그리고 그 끝에 도달한 대박의 성공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능력은 장난이 아니다. 그동안의 성적과 통계가 그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증명한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캐릭터는 코믹해서 싫어하기도 힘들다. 우리는 온전하게 그를 좋아하고 부러워한다. 의혹과 질투는 없다.

 세상은 점점 가능성을 믿기 어려운 지경으로 흐른다. 이번 대선이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가능성의 신화는 희망을 주지 못한다. 나를 못나게 만들고, 우리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아 오히려 부담스럽다. 노력이 모자라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쉬는 시간만이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류현진은 이 시대의 상징이다. 도피적이라거나 공상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비난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열려 있을 때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어둡다.

박근서 대구가톨릭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관련기사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