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4 12:25 수정 : 2013.07.05 19:43

티베트에는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고 있다. 이들은 티베트를 점령하고 있는 중국 세력에 침묵으로 저 항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분신자살하는 젊은 이들도 있다. 당시 18살이던 깰상 진빠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헛된 것일까?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2011년 미국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미국은 달라이 라마와 회담했다는 이유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악화일로를 걸었다. 한겨레 자료
남은 것이라고는 나무에 불탄 흔적뿐이다. 관광객들은 무심하게 지나갈 따름이다. 웃기도 하고, 서로 얘기하기도 하면서. 나무에 눈길을 주는 이는 없다. 하긴 누군들 알아챌 수 있으랴. 이 작고 검은 ‘얼룩’에 담긴, 197걸음과 어떤 젊은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젊은이의 이름은 깰상 진빠다.

승방의 어두컴컴함을 뒤로하고 승려가 걸어나온다. 햇빛이 그의 얼굴에 떨어진다. 여기는 중국 북서부 칭하이 지방의 렙콩으로, 해발 2500m 고지대다. 승려는 깰상 진빠가 추락사한 그 자리에 곧 다다르게 된다. 진빠는 그가 아끼는 제자였다. 늘 질문이 많았고, 티베트 시문과 티베트어 문법에 관한 거라면 전부 알고 싶어 했다. 분신자살할 때 진빠는 18살이었다.

승려는 40살,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그의 걸음은 확고하다. 말 머리 모습을 한 신의 사원을 지나 수도원의 앞마당으로 들어선다. 은으로 된 현판을 지난다. ‘관광명소 롱우 사원’라는 문구가 10여 개 언어로 쓰여 있는 액자다. 바로 그 옆에서 깰상 진빠가 분신자살을 했다. 오후 4시 15분이었다. 등유를 몸에 끼얹은 뒤 불을 댕겼다. “티베트의 종교와 언어, 환경을 보호하라. 달라이 라마가 귀국해야 한다. 티베트는 자유가 될 것이다.”

깰쌍 진빠 69번째 자살

모두 197걸음(사건 뒤 어떤 사람이 따로 세어 본 결과다)이었다. 그는 걸음마다 잿가루를 남기면서 큰 문을 지나 사원의 앞마당으로 치달았다. 한참 아래쪽에 있는 계곡과 도시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머리가 셋이고 둥그런 가슴을 지닌 ‘연민의 여신’ 타라의 불상이 거기 있었다. 금으로 된 타라 불상으로 깰상 진빠가 올라갔다. 그가 구호를 외치자 기도하던 이들도 함께 구호를 외쳤다. 그가 불상을 두 팔로 감쌌다. 나무 발판 위에서 스러지는 횃불처럼 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검은 얼룩이 남아 있는 바로 그 자리다.

그의 얼굴 표정은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숨지기 얼마 전 찍은 사진에는 깰상 진빠가 체크무늬 목도리에 파일럿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아마 레이밴과 버버리의 싸구려 모조품 선글라스인 듯하다. 이 사진을 한참 보고 있으면 그가 마음에 품고 있던 상상하기조차 힘든 행동을 이해할 단서가 잡힐까. 그렇지만 그런 단서는 없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그의 두 눈을 덮고 있는 어두운 안경뿐.

깰상 진빠는 2012년 11월 8일 죽었다. 2009년 이래 자신의 몸을 불 속으로 던진 69번째 티베트인이다. 60년 넘게 지속되는 중국 점령에 대한 항의로 분신자살하는 것이다. 그 후로도 48명이 그의 뒤를 이어 목숨을 버렸다. 승려, 농부, 청년, 노인,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말이다. 맨 마지막 분신자살이 일어난 건 지난 5월 27일이었다.

승려가 불상 옆을 지나가고 있다. 단지 힐끗 눈길을 주고는 자기 길을 간다. 그는 지금 평소 자주 찾는 찻집으로 가는 중이다. 모든 기억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다. 머리 위로 우뚝 솟아 있는 산, 그를 비롯한 승려들이 깰상 진빠의 주검을 거기에 묻었다. 그것뿐인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바로 그 도로에서 깰상 진빠가 죽은 다음 날 수백 명이 모여 시위를 했다.

깰상 진빠는 어릴 때 사원으로 왔다. 세력 있는 유목민인 가족이 그를 그리로 보냈다. 승려는 그 아이가 자라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봤다. 진빠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승려가 죽기 이틀 전이었다. 친구인 진빠의 삼촌을 방문하던 자리에서였다. 승려는 그때 장면들을 마음의 눈으로 거듭거듭 그려보지만, 이튿날 있을 진빠의 행동을 암시할 만한 단서는 조금도 없었다. 진빠는 아주 경건하게 그에게 인사했고, 그들은 별로 많은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승려는 “진빠는 무척 조용하고 느긋했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2008년 3월, 중국 점령 이래 가장 격렬한 저항운동이 티베트의 여러 지방을 뒤흔들었다. 당시 14살이던 진빠는 그들과 함께 시위 대열에 끼었다. 새로 깨어난 티베트의 애국주의에 흠뻑 물들면서 진압 세력의 추적을 당하는 경험도 했다. 진빠가 있던 사원의 승려들 중 3분의 1 정도가 체포되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에 새 군사기지를 계속 건설했다. 그 결과 티베트에는 민간인보다 군인이 더 많은 도시가 적잖다. 그런 시기에 티베트의 새 세대가 자라나고 있었다. 바로 진빠의 세대다. 이 젊은이들은 아버지 세대보다 훨씬 투쟁적인 세대로, 이제 더는 시간이 없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올해로 78살이다.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세상을 떠나면 티베트 국민에게 지도자가 다시 생기는 일이 없기 바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티베트인들이 결국 베이징의 통치에 완전히 고개를 숙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완전하게 통치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 많은 티베트 젊은이의 생각이다. 2008년 티베트 국민은 집단적 저항이 효과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 정부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개인의 개별적 저항뿐이었다. 승려는 말문을 연다. “전단을 뿌리는 사람들이 처음엔 몇 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도무지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았어요.”

순교자가 된 사람들

2009년 2월, 타빠이라는 젊은 승려가 쓰촨성 아바에서 분신자살했다. 그 뒤를 이어 15명이 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버렸다. 타빠이가 죽어간 거리를 티베트 국민들은 ‘순교자의 거리’라고 부른다. 그러자 정부는 아바를 접근 금지 구역으로 선포했다. 그곳에서는 24시간 내내 안전부 요원의 감시를 받는다고 티베트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분신자살은 계속되고 있다. 티베트인들은 죽은 사람의 사진을 휴대전화로 몰래 실어 나른다. “또 한 사람 죽었어. 여자야. 서른 살인데, 아이들도 있어”라고 속삭이고 있다. 분신자살하는 사람이 한 명씩 새로 나타날 때마다 국민 사이에는 순교자적 죽음이 그만큼 더 쌓여간다. 이 사안을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진지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이것을 도덕적 당위라고 믿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진빠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을까? 승려는 “그는 아주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우리 모두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지요”라고 말한다. 숨지기 5개월 전, 진빠는 사원을 떠났다. 초원으로 돌아가 유목민인 가족과 합류한 그는 티베트어 보호 단체를 결성했다. 오늘날 이 단체는 티베트 전역에 퍼져 있다. 진빠는 가족 중에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진빠가 분신하기로 결정한 건 이 무렵이었는지 모른다.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 꼭 준비해야 할 건 많지 않았다. 동시에 모든 게 필요하기도 했다. 등유 한 병, 라이터, 그리고 목숨을 버리겠다는 결연한 의지.

승려가 사원 앞에 걸려 있는 법고를 지난다. 진빠가 죽은 뒤 수백 명의 보안요원이 시내 곳곳에 배치되었다. 렙콩은 여러 달 동안 외국인과 기자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진빠의 친구들은 감옥에 갇혔다. 보안 당국은 ‘분신자살 의도가 있는 자를 신고하면 최고 20만 위안(약 3800만 원)까지 보상금을 지급함’이라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20만 위안은 2만4800유로 정도 되는 돈으로, 티베트 실정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깰상 진빠가 죽던 날, 베이징에서는 제18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이하 공산당대회)가 열렸다. 중국 정치에 어마어마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수천 명을 헤아리는 외국 기자들이 이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중국으로 왔다. 택시의 뒷좌석 창문은 전부 닫혀 있었다. 승객이 호외를 창밖으로 뿌리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정치 구호가 쓰인 깃발을 새 발톱에 감아 휘날리게 하지 못하도록 집비둘기를 잡아두라는 ‘비행금지령’을 내렸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공산당대회가 시작하기 전과 진행 중에 티베트인 28명이 분신자살했다는 소식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승려는 이제 사원을 뒤로하고 길을 떠나 도시의 소용돌이 속으로 잠겨든다. 이 도시를 티베트인은 렙콩이라고 부르고, 중국인은 퉁런이라고 부른다. 티베트 자치구의 문화 중심지이던 이 도시는 지금 중국 칭하이 지방에 부속되어 있다. 옛날에는 티베트인만 살았지만 오늘날은 한족이 거리를 활보하고, 이슬람교를 믿는 후이족이 집 앞에서 담소하는 모습이 눈에 자주 띈다. 불교 사원의 노래가, 베이스 톤을 작열하는 ‘강남스타일’과 혼합되어 흐른다.

달라이 라마와 다른 젊은 세대

티베트라는 나라가 세계 지도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달라이 라마가 누군지는 안다. 그는 전세계 수백만 명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이다. 그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순례를 떠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티베트인에게 정작 무슨 소득이 되었는가. 인도 산악에 위치한 도시 다람살라에 건립된 티베트 망명 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한 국가는 하나도 없다. 이 문제로 세계 초강대국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어느 나라가 깨고 싶어 하겠는가.

등유가 완전히 스며든 옷에 진빠가 불을 댕기자 옷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다음 불꽃은 그의 피부로 옮겨 붙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인체의 지방이 타고, 근육이 수축되어갔다. 아드레날린, 노르아드레날린, 히스타민 등 호르몬 수치가 급상승했다. 여기서 오는 충격이 어쩌면 화염으로 인한 고통보다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빠는 강력한 진통제를 미리 복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괴로움을 줄이기 위해서 말이다. 어쩌면 그를 구출할 수도 있었으련만, 구조를 시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안부 요원에게 체포되어 끌려가는 것보다 낫지요.”

승려 옆으로 어떤 한족 남자가 지나간다. 휴대전화에 대고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는 그 남자의 말을 승려는 알아들을 수 없다. 유목민 가정에서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어머니가 기도하는 걸 들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어머니는 “적들의 머리를 베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가 ‘누가 적이냐’고 물었더니, “중국 사람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1949년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이 지역으로 밀고들어왔을 때, 군인들은 자기들이 티베트의 친구라고 말했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사회 개혁을 단행하면서부터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공산주의식 해방이라는 게 도무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봉기가 일어나고 말았다. 승려는 “마을에서 하루 사이에 무려 83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중국 군인에게 사살된 적도 있다”고 말한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마오쩌둥이 문화혁명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이 혁명이 티베트에서 초래한 결과는 두 가지다.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고, 수천 곳에 달하는 사원이 파괴되었다.

1970년대에 중국의 개혁정책이 수립되고서야 이 무시무시한 상황이 겨우 끝날 수 있었다. 승려는 1980년대 중반, 14살 때 사원에 들어갔다. 렙콩 시민은 당시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었다. 외부 세계와 아무런 접촉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점차 문명의 진보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티베트인에게 진보를 가져다준 건 바로 중국인이었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기대한 것과 달리, 티베트인들은 문명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중국 시민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승려는 “바깥 세상의 어떤 ‘신호’들이 불쑥 사원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회상한다. “우리는 와 <자유아시아라디오>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지식이 쌓여갈수록, 우리에게는 더 알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더 간절해졌습니다.”

“폭탄 혁대를 허리에 둘러야 합니다”

승려가 잠시 말을 멈춘다. 고개를 돌려 산등성이 위로 눈길을 옮긴다. 진빠가 죽던 날 사원 위쪽에 있는 마당에는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는 일종의 도전이자 입장을 표명하는 행동이었다. 모인 인파가 너무 많아 보안요원들조차 감히 끼어들거나 간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부는 애초 분신자살자를 매장하는 자리에 누구도 참석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령을 내렸다. 죽은 사람을 위해 승려가 기도를 올리는 것도, 불교 의식을 치러주는 것도 불법이었다. 금지 조항은 그외에도 많았다. 자살자의 유족에게 돈을 희사하는 행위나, 죽은 이가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처럼 살벌한 상황임에도 사원의 승려들은 깰상 진빠의 주검을 승려 전용 장지에 묻어주었다.

수십 년째,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 계명을 선포해오고 있다. 그런데 그의 국민은 ‘평화 애호성’을 별로 타고 난 것 같지 않다. 1974년까지 네팔의 티베트인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지를 발판으로 중국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런가 하면 2008년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선 승려들의 저항운동이 폭력으로 끝난 적도 있다. 성난 폭도 한 명이 한족 중국인과 후이족을 살해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달라이 라마는 국민을 비폭력 저항의 길로 다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오늘날 그들은 다시 폭력을 사용한다. 다만, 이번에는 중국인 한족을 향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이런 상태는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까? 달라이 라마의 사후에는 다시 무기를 잡고 싸우게 될까? “자기 몸을 불사를 게 아니라, 폭탄 혁대를 허리에 둘러야 합니다. 그래서 혼자 죽는 대신 한족 서너 명을 함께 저승길로 끌고 가야죠”라고 말하는 티베트 젊은이도 있다.

승려가 넓은 교차로에 다다른다. 거대한 LED 영상 화면에 그의 시선이 가 닿는다. 화면에는 티베트 문자로 ‘분신자살은 노!’라는 표어가 깜박거린다. ‘달라이 라마 집단의 선동에 넘어가지 말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중국의 국영 언론은 분신자살자들을 ‘길 잃은 영혼’이라고 부른다. 인생에 실패한 자, 사랑을 이루지 못한 자, 도덕적으로 부패한 자들…. 한마디로, 달라이 라마와 그의 망명 정부라는 어두운 세력에 의해 오도된 자라는 뜻이다.

승려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좁은 골목길로 길을 꺾어 들어 자그마한 티베트 찻집 안으로 들어간다. 여러 신의 초상 앞에 빨간 소파가 놓여 있고 플라스틱 과일이 천장에서 내려뜨린 줄에 걸려 있다. 소녀가 승려의 차 사발에 버터차를 따라 준다. 소녀는 16살이다. 소녀는 승려에게 자신이 다니던 학교며, 자신이 중국 정부에 반항하는 세력에 가담하게 된 경위에 대해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깰상 진빠가 죽은 다음 날인 2012년 11월 9일, 소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이웃 학교의 학생들이 교실로 들이닥쳤다. 학생들은 “저들이 우리 말을 빼앗아가려고 한다! 함께 시위에 나서자!”라고 외쳤다. 티베트에는 중국 학교와 티베트 학교가 따로 있는 곳이 많다. 중국 학교에서는 수업을 표준어 만다린어로 진행하고, 티베트 학교에서는 티베트어로 진행한다. 그런데 지난여름, 지방 정부가 앞으로는 티베트어 학교에서도 만다린어를 우선적으로 가르친다는 법안을 공표했다. 깰상 진빠가 분신자살한 다음 날 학생들을 격분하게 한 원인이었다. 학생들은 교실에 잡아두려고 하는 교사들을 밀치고 거리로 내달렸다. 소녀도 그들과 함께 달려 나갔다. 이 시위가 있은 뒤 지방 정부는 새 규정의 시행을 일단 보류했다. 학생들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비록 공책에다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써야 했지만 말이다.

유목민의 강제 정책화… 불행의 씨앗

다른 사람들에게 항의 신호를 보내는 것은, 렙콩시 학생들이 해낸 것처럼, 깰상 진빠가 머릿속에 그린 목표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머리는 절망으로 꽉 차 있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일어난 분신에 대해 좀더 자세히 검토해보면, 대체로 공통된 한 가지 유형이 드러난다. 이제까지의 분신자살 중 대부분은 암도(칭하이성 일대) 지역에서 일어났다. 암도는 광대한 초원 지역이다. 자살자 대다수는 깰상 진빠처럼 유목민 가정 출신이다. 이들이 사는 초원에서 보면 많은 유목민을 엄습했을 ‘희망 없음’의 상태가 가히 짐작된다. 이들은 수백 년 동안 이 풀과 땅 사이를 누비며 방랑 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그들에게 한곳에 정착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렙콩에서 3시간 거리 정도 떨어진 마을. 새로 지은 건물 안에는 35살 된 남자가 파란 소파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새 난방기와 새 텔레비전이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티베트의 슈퍼스타 선발대회’쯤 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중국식 모델에 따른 ‘복지’의 한 장면이다. 그는 불과 2년 반 전만 해도 야크들을 몰고 초지를 돌아다녔다. 그때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가 그를 찾아와 유목을 중단하라고 했다. 2015년까지 유목민을 전부 정착시킬 방침이었다. 강물 때문이었다. 중국의 중요한 강은 전부 티베트 고지대에서 흘러나간다. 그런데 강물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이는 지반 침식 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땅을 파괴하는 유목민에게 책임이 있다는 게 중국 정부의 주장이다. 반면, 정부에 소속되지 않은 전문가들은 의견이 다르다.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광산 기업에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삶의 방식이, 왜 하루아침에 (환경이) 파괴되는 건지 유목민들은 이해할 수 없다. 그 남자가 새로 건설된 이 거주 지역에 산 지 두 해가 되었다. 그는 소규모 오토바이 가게를 운영한다. 가끔 오토바이에 훌쩍 몸을 싣는다. 거리를 따라 한없이 씽씽 달리면서 찬 공기를 허파 가득 들이마신다. 그러다 보면 이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예전의 삶을 잠깐 사는 것 같다.

유목민을 정착시킨 것이야말로 분신자살을 초래한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로 인해 새로운 도시 하층민이 생겨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유목 생활한 많은 사람이 이제는 새로 지은 집 안에 꼼짝 않고 들어앉아 정부가 주는 돈만 바라보고 있다. 이들 신정착 마을 중에는 사원이 단 한 곳도 없는 곳이 부지기수다. 중국 공산당은 티베트를 당의 발전 이념에 마구잡이로 종속시켜버렸다. 그래서 종교적 심성을 지닌 티베트인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발전을 원하는지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렙콩시에 석양이 지기 시작한다. 승려는 이제 사원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정부의 위임을 받은 인부 서너 명이 지붕으로 올라가 외국 방송 수신용 위성 안테나의 나사를 풀고 있다.

그곳을 지나던 승려가 떼어낸 위성 안테나 접시와 버팀대를 바라본다. 그 부품들은 가지에서 따낸 과일마냥 바닥에 놓여 있다. 그는 “위성 안테나야 저들이 제거할 수 있겠지요. 그건 쉬운 일이니까” 하고, 잠시 후 다시 말했다. “하지만 우리 티베트 문화는 훨씬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만큼은 중국이 쉽게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글 안젤라 쾨크리츠 Angela Köckritz <차이트> 베이징 특파원번역 장현숙 위원ⓒ Die Z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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