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06 02:49 수정 : 2013.03.06 20:10

FC 바이에른 뮌헨의 새 감독 페프 과르디올라는 칸트와 헤르만 헤세를 좋아한다. 그에게 축구는 파란 잔디 위에서 하는 체스놀이 같은 것이다.

FC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의 페프 과르디올라 / 외마르
그는 입을 다물고 있지만 유럽 신문의 1면에는 난리가 났다. 스페인 출신 페프 과르디올라(주제프 과르디올라)가 다음 시즌부터 독일 프로축구팀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직을 맡는다. 3년 계약에 사인을 했다. 독일 각 가정의 저녁 식탁에서 과르디올라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들은 구세주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눈빛을 주고 받았다.

구세주 과르디올라는 4년 동안 FC 바르셀로나에 우승컵 14개를 안겼고, 그의 축구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여성 팬들은 큰 눈망울을 가진 이 42살의 감독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축구협회는 과르디올라가 독일에 그의 효율적인 스타일을 전수했으면 하는 바람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 ‘효율적인 스타일’을 이용한 스페인 국가대표팀은 유로컵과 월드컵을 모두 휩쓸었다. 바이에른 뮌헨 회장인 울리히 회네스는 과르디올라가 팀을 이끄는 모습을 보면 놀랄 수밖에 없다면서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2012년 여름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직을 그만둔 이래로 과르디올라는 미국 맨해튼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있는 자기 소유의 아파트에서 산다. 센트럴파크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마리아, 발렌티나, 마리우스 세 아이의 아빠로서 그는 매일 지하철을 타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다. 그리고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 강의를 듣는다. 그의 친구이자 전 바르셀로나시 정부의 경제수석 사비에르 살라이마틴이 하는 강의다. 날씨가 좋을 때면 부인 크리스티나 세라와 함께 이스트강과 허드슨강에서 요트를 타기도 한다. 그는 쉬는 동안 자신이 꿈꾸던 일을 했다. 성공의 정점에 서있는 축구 감독 중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세간에는 과르디올라가 사람 만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평이 있다. 이는 오해일 뿐이다. 그는 다만 사람들 앞에서 쇼하기를 싫어할 뿐이다. 미디어, 스폰서, 경영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쇼를 피해서 미국으로 간 것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본 사람이면 그를 움직이는 두가지 열망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의 소망은 전략적으로 완벽한 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과르디올라는 이런 목표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삶이 오직 축구만을 위한 것이 돼서는 안 된다

그가 두 번째로 사랑하는 것은 철학이다. 그는 이마누엘 칸트를 좋아하고 헤르만 헤세의 글을 즐겨 읽는다. 매일 계속되는 감독일로 지쳐 있을 때 이 독일 철학자와 소설가의 글에서 휴식을 얻었다.

과르디올라는 축구 외 삶의 진정한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에야 축구 선수들이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축구 선수들이 스스로 정체성을 찾고, 삶이란 겸허한 자세로 맞아들여야 하는 과제임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는 종종 다양한 사람들과 문학, 음악, 패션을 토론한다. 타율적으로 움직이는 축구 세계 속의 선수들은 독자적으로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소년 축구 시스템에 의해 정체성이 결정되는 요즘, 소수 선수들만이 차별화된 이력을 갖는다. 선수들에게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일과 취향을 발견해주는 것이 감독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게 과르디올라의 판단이다.

과르디올라와 팀 선수들 간의 관계는 마치 독일 출신의 NBA 댈러스 매버릭스 농구 선수인 더크 노비츠키와 감독 홀거 게슈빈더 사이 같다. ‘사유와 존재가 동일한 것이다’라는 죄우명 아래 홀거 게슈빈더는 제자에게 헤겔을 읽게 했다.

과르디올라는 선수들에게 고도로 복잡하고 전략적인 경기를 하도록 훈련시킨다. 이는 마치 파란 잔디에 펼쳐지는 체스 같다. 예를 들어 그의 팀 선수들은 일부러 상대편에게 공을 양보하기도 한다. 다른 감독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는 이런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믿으며, 선수들이 항상 세 가지 가능한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르디올라는 오랫동안 다음 질문에 천착해왔다. ‘통찰력을 유지하려면 축구 비즈니스에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것이 충분히 가까이 있는 것인가’.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생각에 대해 기꺼이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항상 조금씩 전진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는 쉬는 기간을 자기 발전에 썼고, 그의 아이들은 영어를 익히고 새로운 경험을 쌓았다.

과르디올라가 바르셀로나를 떠나기로 한 것은, 그가 팀에 챔피언스리그 우승컵과 프리메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을 안기는 순간이었다. 이때가 그만두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라고 여겼다. 그는 감독이란 노력의 30%를 축구에 쏟고, 나머지 70%를 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주변 일에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달간 선수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면 이는 우승컵을 놓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입니다.” 게다가 나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다. 언제 떠나야 할지를 아는 것도 이 능력에 포함된다.

과르디올라의 업적은 ‘크루이프즘’에 기초한다. 이는 20년 전 네덜란드 축구 전설 요한 크루이프가 FC 바르셀로나 감독으로서 만들어낸 현대 축구 스타일이다. 한 선수가 크로스를 올리면 공격수가 곧바로 슛으로 연결시키는 구식 스타일 대신, 크루이프는 기술적으로 뛰어난 윙어들이 공을 골대 방향으로 몰고 가게 했다. 이런 짧은 패스 중심의 경기를 하면 상대방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방식은 지능적인 게임을 요구하며, 모든 선수가 서로를 위해 함께 생각하고 수비수가 넓은 시야를 가지고 후방에서 공격의 시발점을 제공할 때에만 가능하다.

과르디올라는 13살에 FC 바르셀로나의 스카우터에게 발탁됐다. 스카우터는 그를 축구학교인 라 마시아로 데려갔다. 1986년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코파 델 레이 결승을 위해 캄프누 경기장에 입장할 때 사진에서 볼보이로 동행한 그를 발견할 수 있다. 4년 뒤 크루이프는 그를 바르셀로나 프로팀으로 발탁했다. 1992년 과르디올라는 ‘가장 전도유망한 젊은 선수’로 뽑혔다. 그는 경기가 전략적으로 바뀌는 동안 이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경기가 어려워질 때에도 경기를 조망할 수 있었다. 크루이프즘을 위해 타고난 선수인 것 같았다. 26살에는 주장 완장을 찼다. 꿈같은 이력을 쌓아가고 있었지만 키 180cm, 몸무게 76kg의 몸이 선수 생활을 견뎌내지 못했다. 부상 때문에 전력에서 제외되는 일이 자주 반복됐다.

FC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의 페프 과르디올라 / 츠토무 타카수
라커 룸에서 선수에게 시를 읽어주는 감독

과르디올라는 선수 생활 하는 동안 카탈루냐 출신 시인 미구엘 마르티 이 폴과 친분을 쌓았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시인이다. 동료들과 언론에 의해 ‘지식인’이라고 놀림받던 과르디올라는 자신과 잘 맞고 말이 통하는 친구를 찾고 있었다. 자신의 삶이 오직 축구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삶을 잘 이해할 때 축구계에서 느끼는 압박을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 입학 자격 시험 때 과르디올라는 이마누엘 칸트에 대한 문제를 준비했다. 그는 자신이 왜 순수이성에 의해서 의문시되는 이상적인 아버지상에 특별히 흥미가 있는지 설명했다. 시험관은 그의 글에 최고 점수를 주었다.

과르디올라는 무엇보다 칸트의 인식론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지각이 이뤄지고, 어떻게 그로부터 사유가 생겨나는가? 그는 자아와 세계, 자아와 타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었다.

이런 생각들을 감독직을 수행하는 데 어떻게 반영할지 마르티 이 폴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과르디올라는 축구 경기가 끝없는 자극과 지각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계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좋은 감독이란 선수들에게 축구 이외의 것을 일깨우게 해줘야 한다. 선수 생활 중에 이미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과르디올라는 이런 일을 잘 해냈다.

과르디올라는 마르티 이 폴에게서 이상적인 아버지상을 발견했다. 시인은 다발성경화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둘은 서로 긴 편지를 나누곤 했다. 두 번째 시집 <고독에 관한 책>은 시인의 젊은 친구 과르디올라와 그의 부인에게 헌정됐다. 시들은 간결하고 슬프면서 인간적이었다.

‘내가 두려움에 차서 일어났을 때/ 세상이 끝났다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바람이 제때에 불었는지 우리가 알 수 있을까?/ 사랑을 나눈다는 표현은 우회어법인지?/ 약속들은 지켜질 것인지?/ 이 순전한 삶이 우리에게 가치가 있는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순수한 우화인지?/ 이 우화가 어떤 이에게는 초월로 향하는 지점이 될 것인지? 이런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을까?’

마르티 이 폴은 2003년 세상을 떠났다.

지난여름 과르디올라는 이 시구를 바르셀로나의 군중 앞에서 인용했다.

과르디올라가 자신의 독일행을 처음으로 알린 사람들 중에는 시인의 아내인 모트세라 산스도 있었다. 그녀는 카탈루냐 산골 마을 로다 데 테르에 산다. 과르디올라는 시인이 죽은 뒤에도 정기적으로 그녀를 방문하고, 뉴욕에 있을 때는 자주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페프는 독일 축구에 큰 자산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아는 그라면, 여름이면 독일어로 의사소통할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것을 존중할 줄 알며, 또 쉽게 적응합니다. 그러니 곧 많은 친구가 생길 겁니다. 그가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할 것입니다.”

이렇게 뛰어난 과르디올라도 스포츠 시스템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2001년 그는 FC 바르셀로나를 떠나 이탈리아 축구팀으로 이적했다. 당시 두 번의 도핑 테스트에서 난드롤론이라는 금지 약물이 나왔다. 난드롤론은 보통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us·HIV)에 감염됐을 때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쓰는 약물이다. 운동선수들은 뼈를 강화하기 위해서 쓴다. 이탈리아스포츠협회는 과르디올라에게 출전 정지를 명하고 벌금을 물렸다. 그러나 이 판정은 과르디올라의 이의신청으로 기각됐다. 도핑 테스트 결과에 신빙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진짜 금지 약물을 복용했는지 조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과르디올라는 음모설을 제기했다. 나이 서른하나에 도핑하러 이탈리아까지 가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눈에서 진실을 읽을 수 있다.

감독직을 수행하게 되는 오는 7월부터 우리는 그가 칸트와 헤세와 스페인 문학을 바이에른의 정신에 잘 융합시킬 수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오래전부터 바이에른 뮌헨은 그들만의 철학을 추구해왔다. 위르겐 클린스만 전 감독은 선수들이 매일 조금씩 발전하도록 독려했다. 이제 과르디올라는 선수들이 더욱 현명해지도록 이끌 것이다.

글 카트린 길버트 Cathrin Gilbert <차이트> 기자

번역 이상익 위원

ⓒ Die Zeit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