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05 03:51 수정 : 2013.02.05 03:51

한국에 종합격투기 대회가 도입된 2003년 열린 경기 가운데 하나인 스피릿MC의 ‘투혼’ 경기포스터. 초창기에는 무술 각 유파 간 대결 성격이 강했다.
이 땅에 종합격투기가 처음 알려진 것은 2003년이다. 이름은 조금 달랐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종격투기’다. 이 이름에는 뜻밖에도 강호의 느낌이 서려 있다. 이를테면 각 유파와 종목을 망라해 누가 가장 강한지 겨뤄보자는 취지였다. ‘스피릿’이라는 격투기 대회가 발족한다는 소식을 들은 건 2002년에서 2003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이었다. 당시 케이블TV 는 종합격투기 대회인 ‘King of the Cage’, ‘K-1’, ‘PANCRASE’, ‘PRIDE’ 등을 방송했다. 프로레슬링 단체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의 경기도 (경인방송)와 를 통해 방송됐다. 전반적으로 ‘격투’에 대한 콘텐츠가 흥행하던 시절이다. 종합격투기 대회가 독자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반이 된 것은 일본의 PRIDE와 K-1 대회다.

두 대회는 일본 현지 위성방송 에서 PPV(Pay Per View·시청한 프로그램 수나 시간에 따라 요금을 지불하는 것)로 방송했다. 때마침 국내에서 이런 수익 구조의 모델을 도입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던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가 IB스포츠(손연재 리듬체조 선수와 전속계약을 맺은 것으로 유명한 스포츠 매니지먼트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SnE에 컨설팅을 맡기면서 본격적으로 대회 구상이 시작됐다.

무술 각 유파 간 대결

첫 대회의 기본 골자는 이들이 모델로 삼은 일본 최고의 격투기 대회 PRIDE와 사뭇 달랐다. 1993년 미국에서 시작한 종합격투기 대회(UFC)에 맞춰져 있었다. UFC는 브라질 유술인 그레이시 주짓수가 알려진 대회이자, 초창기에는 무술 각 유파 간 대결에 초점을 맞춘 대회였다. 태권도, 합기도, 특공무술 등 무예를 많이 배우는 한국의 실정에 더 맞는 대회라 판단한 것이다. 당시 격투기 관련 방송이 인기 있었지만 실제 수련 인구는 전무했고, 자칫하면 단순한 싸움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대회 출전자 역시 각 무술 계파에서 추천 또는 예선을 거쳐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이 무렵 국내 아마추어 격투기 대회 KPW를 개최한 한태윤 대표와 그의 KPW팀이 경기국에 합류했다.

그런데 막상 대회가 출범하고 보니 여러모로 많은 것이 필요했다. 먼저, 무술 계파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걸림돌이었다. 이는 초창기 UFC 대회 때도 겪은 딜레마이다. 각 계파 간 대결은 언제나 최강자 논란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선수가 대회에서 패배하는 것은 개인의 패배이기 전에 해당 무술 자체가 약한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팽배했다. 누가 그런 부담을 지고 싶겠는가. 선수를 모집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천창욱 종합격투기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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