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3:58 수정 : 2014.07.03 13:58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해 20년 가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승만과 비교해도 훨씬 긴 기간에 독재자로 군림했다. 박정희의 자녀 중 한 명은 2014년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이 글은 박정희의 ‘자녀’에 관한 건 아니다. 박정희의 ‘잔여’,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이데올로기적 잔여에 관한 것이다. ‘소셜 맥거핀’ 연재 서두에서 박정희 정권 사례를 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소셜 맥거핀을 만들어내는 데 천재적이었다. 현실의 적을 침소봉대하거나 허구의 적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아예 적대 구도를 발명해내기도 했다. 박정희는 박종홍 같은 관제 철학자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실은 스스로가 일종의 ‘철인군주’이고 싶어 했다. 그는 군인 출신 정치가치고는 통치 이념에 대해 이례적으로 많은 글을 남겼다.

반지성주의자 박정희

박정희의 ‘잔여’ 중 크게 도드라지는 게 반지성주의다. 반지성주의는 본래 이성이나 지성에 대한 불신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지식인들에 대한 혐오와 반감을 뜻하기도 한다. 박정희는 아마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적나라한 반지성주의를 드러냈던 대통령일 것이다. 그가 인용한 시와 거기에 덧붙인 코멘트, 그리고 대구사범학교 시절에 직접 썼다고 알려진 시(제목은 ‘대자연’)를 읽어보자. 모두 ‘조갑제닷컴’에서 재인용했다.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 (…)/ 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가 없다. 고운 손아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만큼 못살게 되었고 빼앗기고 살아왔다.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1963/1997

(…)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태양을 등에 지고 대지를 일구는 농부가/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 -박정희, <대구사범 교우회지> 제4호, 1936

첫 번째 시는 과거 소비에트 문학이나 중국 문화혁명 당시의 격문을 연상시킨다. “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라는 이미지가 전달하려는 바는 명확하다. 2등 객차를 탈 정도로 가난한 주제에 지적 허영에 빠져 있는 걸 냉소하는 것이다. 두 번째 시 역시 사치나 허명에 매몰되지 말고 자기 직분을 다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유사한 정조다. 박정희의 반지성주의는 ‘먹고사니즘’ 외의 다른 가치들은 전부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체제 옹호 담론이었다. “밥 굶는데 학문이며 언론이며 예술이며 민주주의가 다 무슨 소용이냐”며 일도양단해버리는 식이다. 2005년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과 2007년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 논란에서 공히 드러난 반지성주의 역시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황우석과 심형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국익에 도움이 되니까 그 밖의 잘못은 눈감아주자는 식의 논리를 펼쳤고, 애국주의 광풍을 비난하는 몇몇 지식인을 향해 격렬한 인신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학문·예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과 밥을 굶는 것은 별 무관한 일일뿐더러 만약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正)의 관계이지 반(反)의 관계는 아닐 터이다. 또한 ‘국익’이라는 것은 실체조차 모호한 개념이다. 경험칙으로 보더라도 반지성주의는 지식인을 공격할지언정 지배계급 또는 독재자를 직접 위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반지성주의의 먹잇감은 언제나 둘 중 하나다. 체제와 불화하는 지식인이거나 대중과 불화하는 지식인.

관공성과 공공성

개인과 전체의 이익은 조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상반되기 쉽다. (…) 전체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상반 대립할 때는 개인의 희생과 통제로써 합치점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개인과 전체의 이익이 상반 대립할 때, 거기서 자기를 통제하고 억제하면서 전체와 개인의 합치점을 모색하고 발견하는 것이 소위 ‘양식’이요, 이것을 민족적 견지에서 본다면 ‘민족적 양심’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사회 재건의 이념>, 29쪽, 1962

개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라는 소리다. 한마디로 시대착오다. 그러나 저 인용문을 가져온 이유는 박정희의 인식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여전히 박정희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박정희의 세계관은 개인이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낡고 억압적인 사고방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한국 사회에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박정희의 ‘잔여’는 개인이 전체에 희생하라는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물론 이것도 문제지만- 개인과 전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 그 자체다. “전체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대립”할 때 우리가 개인의 손을 들어준다 해서 박정희적 세계관이 극복되지는 않는다. 박정희의 격렬한 반대자들 중 상당수가 박정희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이 ‘물구나무 선 박정희주의자’들은 개인의 이기심에 실망하는 순간 언제든 ‘똑바로 선 박정희주의자’가 될 수 있다.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집단성은 박정희가 사망하고 한참 지나서도 국익의 이름으로 혹은 공동체의 이름으로 귀환하곤 했다.

따라서 개인과 전체의 양자택일 구도가 은폐하는 어떤 차원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공적인 것’(the public) 혹은 공공성의 영역이다. 이를 은연중에 근대국가의 관료체제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확한 인식은 아니다. 공적인 것의 필요조건은 국가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의 존재다. 다시 말해 국가가 없더라도 공적인 것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국가가 존재할 수는 없다.

박정희는 만주군에 지원할 때 일본제국에 충성 혈서를 썼다. 내용은 ‘멸사봉공’(滅私奉公)이었다. 글자 그대로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을 위해 일한다’는 뜻이다. ‘멸사봉공’에서의 ‘공’(公)은 오늘날 공적인 것 또는 공공성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그것은 개인보다 훨씬 크고 강하고 숭고한 타자이며, 개인에게 명령을 내리고 개인의 자격과 가치를 판단하는 객관적 권위다. 박정희에게 국가는 개인의 존립 근거이며 개인이 의미를 지니는 맥락이기에 ‘개인=사적인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숭고하며 가치 있는 것이다. 반면 ‘사’(私)는 하찮고 비루하고 불순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남긴 여러 텍스트를 읽어보면 개인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권리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국가의 발목을 잡는 존재일 뿐이다.

박정희의 ‘봉공’(奉公)은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여 공동의 관심사를 논의하는 게 아니라 국가와 정권의 명령에 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공공성이 아니라 ‘관공성’(官公性)이라 불러야 한다. 관공성이 실체적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바로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정치’(la politique) 혹은 ‘평등의 과정’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내세우는 ‘치안’(police)이다. 치안은 통치의 과정이고 국가를 경영하는 기술이다. 일사불란하게 개인의 역할과 기능을 분배해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일이다. 박정희는 이러한 치안의 논리를 일종의 공동체 윤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교수는 이론을 제공하고 정치가는 적절한 시책과 국민을 계도하며, 학자는 민족 재생의 철학을 창조하고, 문화예술인은 건설의 의욕을 고조시키고, 전 상공인은 각기 산업에 매진할 것이며, 농민 노동자는 땀을 흘리고, 학생은 검소한 기풍으로 일신되고, 군은 천금의 중량으로 늠름하고, 전 공무원은 진실한 봉사자가 되어야만 우리도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271쪽, 1963/1997

더 강렬해지는 반정치주의

국민 각자가 기계의 부속품처럼 제 기능을 다하는 사회. 박정희가 꿈꾸던 나라는 바로 그런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공적 활동이란 관이 기획하고 추진하는 행사였다. 그런 박정희 시대를 대표하는 공적 활동이 바로 새마을운동이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는” 일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할 일이겠지만,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국가가 시민들을 총동원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새마을운동은 유신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관제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일방적인 동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원시적 수준에서나마 공공성 의식을 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시민권에 대한 요구나 정치적 행동은 가혹하게 탄압받지만, 정치성이 탈색된 단순 복지에 대한 담론은 비교적 관대하게 인정됐다. 새마을운동은 한국에서 ‘공적인 것’이 어떻게 이해되고 실현됐는지를 그대로 보여준 사례다. 한국적 공공성, 즉 ‘관공성’은 이렇듯 ‘사적 욕망의 배제’와 ‘국가(관료)에 대한 충성’으로 규정됐고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실현됐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이 공적인 것, 공공성이라고 하면 ‘개인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일, 하지만 뭔가 거창한 명분이 있는 일’ 정도로 인식하게 되었다.

박정희의 ‘잔여’ 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바로 반정치주의다. 이는 박정희의 이데올로기 중에서도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다. 반정치주의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적극적 배제다. 박정희는 먼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고, 그 정치를 단지 치안 과정으로 환원함으로써, 정치를 적대와 갈등이 사라진 통치행위로 표백시키려 했다. 조선이 당파싸움을 하다가 망했다는 이야기를 정치적 토론이나 갈등이 무용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기묘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책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사회 재건의 이념>(1962)의 곳곳에서 민주주의와 전혀 배치되는 이야기를 민주주의의 이름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민주주의의 형태는 수입하더라도 그 뿌리까지 수입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경제적 개발과 국민생활의 향상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서구적 민주주의가 아닌, 행정적 민주주의” 등과 같은 궤변이 그것이다. 즉, 박정희가 이해하는 민주주의는 언제든 유예될 수 있는 가치였다. 그의 민주주의는 언제나 앞에 단서 조항이 붙는 민주주의였다. 처음에는 “행정민주주의”였다가 “민족적 민주주의”로 갔다가 “한국적 민주주의”가 되었다. 전인권이 말한 것처럼, 그에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며 “침범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운영원리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전인권, <박정희 평전>, 31쪽, 2006)

박정희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철저히 억누르기 위해 야비한 술수와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했다. 그리고 잔혹한 철권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공평무사하며 청렴결백한지를 틈날 때마다 과시했다. 실제로 그는 공적 관계에서 부정부패를 저지르거나 권력을 공공연히 활용해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는 타입의 리더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의 전두환이나 노태우와 대비돼 신화화된 측면도 있다. 박정희는 정권의 정당성 대신 ‘정치적 순결성’이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순정’, 농촌에서 촌로들과 소탈하게 탁주를 나눠 마시는 모습 등과 같은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덕목을 강조함으로써 대중적 인기까지 누렸다.

박정희가 오랜 세월 한국 사회에 새겨넣은 반정치주의는 이후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자유주의와 다원주의의 영향에 의해 점차 변해갔지만 근본적 차원에서의 변화는 아니었다. 정치를 배제하는 경제성장 담론은 여전히 ‘주인기표’ 노릇을 하고 있으며,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이 오히려 극우집단의 발호로 이어지고 있다. 사회의 반정치화 현상은 한결 심화돼가고 있다.

글 박권일 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사회과학학회 활동을 하면서 늘 욕구불만이 있었다. 결국 ‘문화이론학회’를 만들어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홍대신’을 돌며 마음껏 뛰어놀고, 시네마테크에서 ‘죽 때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김수행판 <자본론>을 읽다가, 뜬금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욕하는 글을 쓰곤 했다. 우석훈과 <88만원 세대>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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