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3:45 수정 : 2014.07.03 13:45

스물네 살에 청계천으로 시집온 ‘오복 할매’ 안영희씨는 20여 년 동안 토스트 장사, 반찬가게, 오복식당으로 생계를 꾸렸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 공사는 영희씨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청계천 상인 이주 상가로 지어진 ‘가든파이브’는 돈 먹는 하마였다. 그 뒤 온 가족이 신용불량자가 됐지만, 그나마 영희씨를 받아준 곳은 동묘시장 좌판이었다. 한겨레 박승화
마이클 잭슨도 마돈나도 맥을 못 추는 골목이 있다. 무명씨가 반주한 경음악이 “마지막 물건”이라고 외치는 상인의 육성과 궁합이 더 잘 맞기 때문이다. ‘발기찬’ 아침을 만든다는 이름 모를 향수와 파전 지지는 냄새가 뒹구는 어느 골목엔 중년 커플의 실랑이가 한창이었다. 남자가 고른 3천원짜리 남방셔츠의 디자인이 여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한 여자의 머리 위엔 밥상이 4층으로 쌓여 있다. 밥상을 머리에 인 그녀는 틈을 찾아 곡예하듯 걸었고,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소박한 식탁이 차려졌다. 한쪽에선 교복 입은 학생들의 웃음소리도 간간이 터져나왔다. 어떤 남학생 무리는 성지가 된 골목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어떤 여학생 무리는 ‘등골 점퍼’를 득템했다. “5장!” 한 할아버지가 손가락 5개를 펴 보이고 망원경을 건네자 외국인이 5천원을 내밀었다. 물건을 볼 줄 아는 고수끼리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혼자 밥 먹기 좋은 식당은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면 혼자 술 먹기 좋은 대폿집으로 변한다. 가난하지만 궁상맞지 않고, 낡았지만 흉물스럽지 않고, 익숙하지만 낯선 골목을 따라가다보면 여관도 아닌, 여인숙이 끝을 장식한다. ‘장기 투숙자 구함’이라는 문패를 달고.

종잡을 수 없는 이곳은 동묘역 벼룩시장이다. 서울 종로구 동묘공원에 위치한 이곳을 언제부터 누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벼룩시장이라는 이름도 정확하지 않다. 아는 사람만 알던 이곳은, MBC <무한도전>에 ‘동묘역 뮤직비디오’가 소개되면서 뜨기 시작했다. 5060의 홍익대 앞, 돌아온 황학동, 개미시장, 골목성지, 구제시장 등 이곳을 찾는 이들은 제각각의 이름으로 시장을 호명했다. 외국인에게도 동묘시장은 ‘핫 플레이스’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종로구도 섣불리 불법 노점 단속에 나서질 못한다.

북적거리는 이들을 바라보는 상인들의 심정은 복잡다단하다. 어리둥절하면서도 좋고, 좋으면서도 불안하다고 했다. 이곳엔 “서울시가 버린 사람들”이 모여 있다. “공공에 반하는 떼쟁이” “도시 미관과 문화 발전을 저해하는 흉물”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퇴물”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들은 청계천 복원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개발로 밀리고 쫓겨난 사람들이다. 살기 위해 좌판을 깔았고, 좌판이 모여 동묘시장이 됐다.

복원된 물길, 수몰된 사람

반면 서울시가 대체 이주 상가로 마련한 ‘장지동 가든파이브’(상점)와 ‘신설동 풍물시장’(노점)엔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 서울시가 시키는 대로 이주했던 이들이 만신창이가 돼서 동묘로 모이는 이유다. 오복 할매도 그중 한 명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파는 물건이나 나이 등에 따라 안경, 코털, 가방, 총각, 새댁 등으로 서로를 부른다. 오복 할매는 “옛날 얘기든 이름이든 잊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6월14일 동묘시장에서 만난 오복 할매는 78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했다.

“시방 내가 할 게 너무 많아서 그래. 웬수 같은 놈들 복수도 하고 막둥이 장가도 보내고 밀린 빚도 갚아야 해.”

그녀는 ‘시방’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할머니 고향은 충남 서천군 장항읍이다. 오복 할매는 동묘시장에서도 부지런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어김없이 아침 8시면 가장 먼저 좌판을 깐다. 철거된 옛 삼일아파트 4동 앞이 그녀의 구역이다. 1평 정도의 좌판에는 구제 옷과 수입 과자가 진열돼 있다. 잘 보려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오복 할매는 폭우, 폭설, 제삿날을 제외하고 항상 시장을 지킨다. 거리에서 죽을지언정 “장사꾼은 터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 그녀의 철학이다. 청계천 오복식당 운영 시절에 알게 된 단골이 지금도 단골이다. 손님이 없을 때는 다른 노점 물건을 대신 봐주거나, 관광객 길안내도 한다.

지금의 청계천에 물이 흐르기 전, 그곳에 사람이 살았다. 청계천 복원을 위해 2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내주었다. 가족까지 고려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청계천 복원 뒤 이들의 삶이 어떻게 됐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 중 한 명이던 오복 할매의 이름은 안영희다. 스물넷에 청계천으로 시집온 뒤 잊고 산 이름이다. 영희씨는 200원짜리 토스트 리어카로 장사를 시작했다. 10원짜리 이문을 모아 반찬 파는 노점을 열었고, 100원짜리 이문을 모아 오복식당을 냈다. 오복식당은 그녀가 장사를 한 지 20여 년 만에 마련한 상점이자 6남매를 키운 밥줄이었다. 영희씨 옆에도 남편이라 불리는 남자가 있었지만, 생활력은 없었다. 그녀는 “남자가 벌어준 돈으로 먹고살 팔자가 아니었다”며 “장사하는 재미로 살았다”고 했다.

“시방 내가 음식을 아주 잘했어. (웃음) 식당 안에선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식당 밖에선 사람이 (음식을 기다리며) 끼웃끼웃했지. 어떤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발바닥에 막 불이 났어. 그럴 때는 맨발로 뛰었어.”

이문을 조금 남기는 대신 오랫동안 많이 파는 게 오복식당의 서비스였다. 메뉴는 돼지껍질·곱창·해장국이었다. 하지만 손님이 원하면 메뉴에 없는 국수도 말고 전도 부쳤다. 영희씨는 “국민학교만 나온 내가 남한테 굽실굽실하지 않고 잘 살아온 건 청계천 덕분”이라며 “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밥 먹이는 일이 좋았다”고 했다.

밥줄 양보했지만 ‘떼쟁이’ 낙인만

오복식당 평수가 늘어나는 동안 청계천도 한국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성장했다. 2002년 월드컵 등 국제 행사가 열릴 때면 오복식당엔 외신기자들이 북적였다. 한국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청계천 시장과 삼일아파트를 찍기 위해서였다. 당시 청계천은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청계천 일대의 섬유·기계·전자상가는 한국 경공업의 근대화를 이끌어냈다. 설계부터 생산·도매·소매·배송까지 중간비용 없이 한번에 이뤄지는 시스템이 형성됐다. “청계천에서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한국에서 못 만든다”는 말은 그렇게 나왔다. 영희씨는 “식당에 사람이 바글바글해 지쳐 쓰러져 시장에서 잠들던 그때가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오복식당이 잘나갈 때는 하루 매출이 250만원에 달했다. 그 덕에 영희씨 손은 거북이 등껍질이 됐고, 다리에는 하지정맥류가 생겼다.

2003년 청계천을 복원한다는 말이 돌았다. 불안했던 그녀는 식당 일도 제쳐두고 설명회를 쫓아다녔다. TV도 시민들도 상인들도 “서울시를 믿자”고 했다. 서울 송파구 장지동 가든파이브에 7평짜리 가게를 7천만원에 분양해주겠다는 서울시의 약속을 믿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말로 한 약속은 안 지켜본 적이 없다”며 약속을 문서로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영희씨는 1억8천만원에 이르는 권리금도 받지 못하고 삶의 터를 내주었다. 받은 건 1천만원가량의 이주비가 전부였다. 약속은 공수표로 돌아왔다. 600년 고도의 청계천 역사·문화·생태를 복원하겠다는 개발을 2년 만에 끝낸 서울시에 영희씨의 삶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명박이 대통령 되려고 우리 삶을 도둑질한 거야. 대통령 되고 안면박대를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홀딱 넘어가버린 우리가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아.”

영희씨는 장지동 가든파이브가 완공될 동안 6년을 기다렸다. 그사이 동대문운동장에서 임시로 노점을 했다. 청계천 복원 공사로 밀려난 사람들은 그곳에서 또다시 맨손으로 시장을 만들었다. 전기를 끌어오고 지붕을 만들고 진열대를 세웠다. 장사는 예전 같지 않았다. 2007년 국제 금융위기로 장사는 그나마 바닥을 쳤다.

백화점 입점에 또다시 밀려나는 청계천 상인

영희씨는 대체 상가를 생각하며 견뎠다. 가든파이브에 들어가면 장사는 맏이에게 맡기고, 노후엔 좀 편하게 지내보자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막상 뚜껑을 연 가든파이브 분양가는 7천만원에서 2억원으로 뛰었다. 터가 좋은 곳은 5억원대로 치솟았다. 청계천 상인의 경제력을 무시한 고분양가는 결국 상인의 이주를 포기하게 했다. 영희씨는 고민 끝에 빚을 내 임대로 전환 입주했다.

“빚 때문에 가족 모두가 신용불량자 됐어. 돈 벌어서 애먼 사람에게 갖다 바치느라 정신없었지.”

당시 입주 예정자 6천여 명 중 입주한 이는 700여 명에 그쳤다. 입점한 이들조차 상당수는 점포를 팔거나 쫓겨나, 현재 남은 이들은 200여 명에 불과하다. 서울시 산하 SH공사는 ‘동양 최대 복합 쇼핑문화 공간’이라며 손담비·현빈 등을 내세워 광고했다. 실상은 벌판에 건물 하나 지은 게 전부였다.

SH공사는 영희씨에게 생활용품 판매를 배정했다. 평생 음식만 팔았던 그녀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이어 “상가를 활성화하려면 청계천 이미지부터 벗어던지라”는 충고도 들었다. 하지만 현대화된 상가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한 안내나 교육은 없었다. 영희씨는 맏이와 함께 구제 옷과 수입 과자를 팔았다. 최소한 쪽박은 차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손님은 고사하고 상인들조차 사라졌다. 사채빚 독촉에 야반도주를 하고, 벌금을 못 내 노역을 살고, 자살을 했다.

2년 안에 모든 점포를 이주시켜 상권을 만들겠다는 약속은 사라지고, 강남 코엑스몰의 6배에 이르는 ‘동양 최대 귀곡산장’만 남았다. 영희씨가 팔던 과자에는 곰팡이가 피었고, 오른쪽 발은 썩어들어갔다. 돈이 없어 하지정맥류 치료를 미룬 탓이다. 영희씨는 결국 개시(첫 물건 판매) 한번 못해보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가든파이브를 나왔다. 맏이 유산화(53)씨는 가든파이브 비상대책위 위원장을 맡아 투사가 됐다.

“어려울수록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맘을 합심해야 저것들을(서울시) 이길 수 있는데, 사람들이 돈 때문에 버티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게 가장 속상해.”

영희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든파이브 입주를 기다리다 신용불량자가 된 상인들은 언제 활성화될지 모르는 상권을 기다리며 한 달에 수백만원에 이르는 관리비를 낼 재간이 없었다. 일부는 살기 위해, 일부는 한몫 잡기 위해 전매 딱지를 팔았다. 분양률 올리기에 급급했던 SH공사는 불법 전매를 방조했다. 장사가 아닌 투기를 목적으로 가든파이브에 들어온 점주가 많다보니, 가든파이브 공실률은 지금도 절반을 웃돈다.

서울시는 빈 공간을 대기업 입점(이랜드 NC백화점, 이마트 등)으로 메웠다. 공공개발 사업인 가든파이브에는 완공하는 데만 1조6천억원의 혈세가 들어갔다. 현재 미분양으로 회수되지 못한 금액이 5천억원에 이르고, 한 해 이자만 250억원이 나간다. 청계천 이주 상인 정착을 위해 쓰여야 할 세금이 애먼 대기업과 투기꾼 지원에 쓰이고 있다는 얘기다.

“청계천 물이 우리 피눈물인지 알란가 몰라. 여름에 비만 오면 냄새 때문에 죽을 지경이야. 옛날엔 물이 깨끗해 거기서 빨래도 했는데 시방은 물이 거꾸로 흘러 죽은 붕어가 떠다녀. 한강서 물을 거꾸로 끌어올리는 것도 다 돈(세금)인데 사람들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영희씨의 좌판은 청계천이 흐르는 영도교를 마주 보고 있다. 2005년 청계천에 물길이 열린 뒤 하루 평균 5만여 명이 청계천을 다녀갔다. 반면 청계천 사람들의 삶은 수몰됐다. 동대문운동장에서 상권을 만들었던 노점상들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개발에 또다시 신설동 가건물(풍물시장)로 쫓겨났다. 동대문도서관과 교수학습지원센터 사이에 놓인 신설동 풍물시장은 상권이 형성되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세운상가 일대의 공구상도 예전의 영광은 찾아볼 수 없다. 원스텝으로 움직였던 공구상은 산업생태계 특성상 함께 이주하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하지만 상권이 쪼개지면서 모두 엉망이 됐다.

영희씨는 오갈 데 없는 자신에게 좌판 자리를 내준 동묘시장이 고맙다. 그래서 그녀는 가든파이브에서 밀려난 같은 처지의 상인에게 자신의 구역 일부를 내주었다. “여기는 서로 형편을 봐주면서 어떻게든 함께 살아갈 수 있어 좋아. 그게 시장이야. 가든파이브는 그게 없어.” 이른 더위에 새까맣게 그을린 영희씨가 달뜬 표정으로 바람을 전했다.

“단골들이 그러는데 내가 초년엔 고생해도 말년에는 괜찮게 사는 관상이래. (웃음) 시방 노점에서 돈 벌면 여기 사람들 뙤약볕에 뜨겁지 않게 큰 우산(파라솔)을 달고 싶어.”

글 김은성 객원기자 frame4@hanmail.net

가든파이브, 현대파이브?

길 잃은 가든파이브, 현대백화점 입점 놓고 몸살

청계천 상인 이주 상가로 지어진 가든파이브를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임대료를 못 내서 쫓겨나는 상인이 늘고 있는 가운데 서울시·SH공사가 현대백화점 아웃렛 입점을 추진해 상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2010년 가든파이브 개장 당시 고분양가와 상권 미형성 등에 따른 대규모 미분양 사태가 발생하자, 서울시는 빈 공간을 대형 키테넌트(Key Tenant·핵심상가) 입점으로 채웠다. 대형 매장(이마트· NC백화점 등)이 들어오면 손님이 늘어 소규모 점포도 덕을 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기존 점포 손님마저 NC백화점에 흡수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게 상인들의 생각이다. 이런 지적은 서울시의회 행정감사에서도 여러 번 제기됐으나, 상생을 위한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가든파이브 인근의 로데오·송정 상인들조차 전국패션대리점연합회와 대책위를 꾸려 현대백화점 입점 저지에 나섰다. 서울시의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서울시 관계자는 “청계천 상인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현대 아웃렛이 입점해 상권을 활성화해야 한다”며 “상인들이 개별적 이해관계를 넘어 큰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산화 가든파이브 비상대책위원장은 “서울시가 가든파이브를 투기 온상으로 만들어놓고 상가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또다시 백화점 입점에 따른 희생을 상인에게 전가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세금으로 만든 이주 상가가 애초 목적을 다하고 있는지 정책 감사를 실시해 상인들과 함께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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