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3:33 수정 : 2014.07.03 13:36

안영춘 편집장(앞줄 오른쪽), 이재훈·김미영 기자, 권우태 과장, 김원일·황보연 기자(안 편집장 기준 시계방향). 사진에는 없지만 이정훈·박승화 기자, 교열 서윤희·정희경 기자, 김은성·이지희·김효정·오다인 객원기자, 손은민 인턴기자 등이 〈나·들〉을 만드는 데 애써주셨다. 지면을 가장 빛나게 해준 건 사내외 여러필자들이시다. 이름을 일일이 불러드리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한겨레 박승화
낭패다! 필진으로 합류한 지 이제 겨우 5개월째인데 잡지 전체의 역사를 아우르는 글을 써야 한다. 이건 능력 밖의 일이다. 욕심을 접고 독자 입장에서 써보자고 해도 역시 낭패다! 잡지에 대한 소감을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여론조사가 안 된다. 주변에 <나·들>을 읽은 사람이, 아니 잡지를 본 사람이 거의 없다. “<나·들> 알아?”라고 질문했을 때 잡지를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 공지영이 표지 모델이었던 그 잡지.” (사실 내가 처음 편집장으로부터 섭외를 받았을 때 똑같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늘 창간호가 가장 주목받기 마련이라지만 창간호의 그늘이 이토록 깊고 오래 드리우는 잡지도 드물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다른 독자들의 반응을 보려고 검색어를 넣어보았다. 이마저도 낭패다! 아무리 검색해도 그 흔한 블로그에 올려진 소감 정도도 <나·들>에 관한 것은 몇 개 발견하기조차 힘들다. 왜일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인가!

잡지에 연재를 시작한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최근 2주 사이에야 사람들에게서 ‘<나·들>에 실린 글 잘 봤어요’라는 인사말을 건네들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누군가 기사 링크를 걸어둔 것을 우연히 발견할 땐 반가웠다. 아, 이제야 반응이 슬슬 오는가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나·들>은 최근에야 기사 전문을 홈페이지에 올리기 시작했다. <나·들> 필진으로 합류하기 전부터 정기구독자였기에 이런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돈을 내고 종이 잡지를 사보는 독자를 위해 기사를 웹에 띄우지 않는 것을 처음부터 원칙으로 했단다. 쉽게 소비되는 글쓰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 어차피 온라인으로 읽기에는 장문의 기사가 많았기에 그리 결정하는 것이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이는 곧 온라인상으로 퍼져나갈 입소문거리가 없었다는 뜻도 된다. 오프라인의 입소문이야 출처를 밝힐 필요 없이 두 입술의 부지런한 움직임만으로도 널리 퍼지지만, 온라인상에서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힘을 실어줄 링크가 핵심이다. 트위터의 리트윗 기능이든 페이스북의 공유 기능이든 웹페이지상의 댓글이든 어쨌든 모두 원본이 있고 그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확장된다. 링크할 원본이 없으면 웹상으론 회자되기 쉽지 않다. 아, 이 잡지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길을 고집했었구나를 뒤늦게 깨닫는다. 편집장에게서 광고도 최대한 줄이고 잡지 구독료만으로 운영비를 마련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링크가 없는 종이 잡지가 된다는 것의 의미

전통적 매체들은 종이 잡지로서의 가치를 지키는 것과 모든 것을 웹에 공개하는 대세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 키워드는 종이와 웹 사이에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다. 이미 넘어간 지 오래다. 사실 서점이나 거리의 신문 가판대는 스마트폰과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렸다. 처지가 막막해진 것은 신문이나 책뿐만 아니라 심지어 껌이나 소소한 먹거리도 마찬가지다. 이제 사람들은 다음 전철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동안 지하철역의 작은 매점에 전시해놓은 신문이나 잡지 등을 곁눈질하지 않는다. 괜히 매점 앞을 지나다가 견물생심으로 눈에 띄는 껌 한 통을 사는 일마저도 줄었다. 사람들은 틈이 날 때마다 그저 손 안에 든 스마트폰을 쳐다볼 뿐이다.

그래서 스마트폰과 경쟁하는 대신 공존을 택하는 매체가 외국에서는 늘고 있다. 스마트폰 대신 손에 쥐어질 잡지가 되려는 전략에서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공유하고 싶은 잡지가 되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다. 잡지들은 오히려 더 두꺼워지고 더 고급스럽게 디자인하고 발행 주기를 계간지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소장’하고 싶은 잡지가 되는 것이 웹진과의 차별화 지점이다. 사람들은 이 잡지가 자기에게 있음을 자랑하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찍을 것이다. 매체로서의 기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과감히 이런 전략을 택할 수 있는 패션잡지 등과는 달리 발행 주기 등을 변경할 수 없는 시사잡지가 난관을 타개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서 ‘종이 잡지’란 정체성은 훨씬 더 깊고 많은 고민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인터뷰에서 계속 반복돼 나온 것처럼 <나·들>이 창간을 준비했던 2012년의 상황으로서는 무모한 결정이었던 건 사실이다. 겉으로 눈에 띄게 나타난 변화만 보아도 2012년은 미국의 유명 주간지 <뉴스위크>가 종이 잡지 발간을 중단하고 온라인 매체로 완전히 옮긴다고 선언한 해다. (1933년에 창간했으니 80년 만이다. <뉴스위크>가 폐간을 결정한 것은 손실액이 2200만달러, 우리 돈으로 약 250억원에 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더 이상 종이 형태로 발간하지 않기로 했다. 국내에서는 탄탄한 마니아 독자층이 있다고 믿었던 만화잡지 <윙크>마저 웹진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해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13년 미국에서 나온 어느 발표에 따르면 10년 전과 비교해 종이 잡지의 판매량이 50%가량 줄었다고 한다. 한국의 잡지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종이 잡지 시장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보면 다른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사실 2012년은 남성 패션잡지들이 대거 창간된 해이기도 하다. <젠틀맨> <로피시엘 옴므> <레옹> 등이 새로 등장했다. <월간 잉여>와 같은 독립잡지들의 창간도 줄을 이었다.

이전에 높은 판매부수를 자랑하던 주류 매체들의 판매율과 광고수익률은 확실히 떨어졌지만 이것이 곧 ‘종이 잡지는 이제 끝’임을 알리는 바로미터는 아니다. 예를 들어 <뉴스위크>는 지난 3월에 다시 종이판으로 돌아왔다. <뉴스위크>를 인수한 IBT미디어는 디지털 버전의 독자들이 그사이 3배 늘어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다시 종이 잡지로의 회귀를 결정했다.

한겨레신문사가 <나·들>의 창간을 결정했음에도 폐간에 이르는 20개월 동안 ‘왜 지금 굳이 종이 잡지를 창간하는가’라는 의문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이재훈 기자의 말은 곱씹어봐야 한다. 왜냐하면 종이 잡지인지 아닌지를 떠나, 돈이 되는 잡지를 만들 것이냐와 ‘기레기’로 총칭돼버리는 지경에 이르는 언론계에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잡지를 만들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고민이 ‘종이’ 잡지에 갇혀버리게 될 때,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유료 독자가 있는가 없는가의 공간으로 나뉘어버리고 온라인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오프라인의 성격을 강화하는 전략이 나온다. 권우태 전략사업부 과장(당시 창간준비팀)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기존 한겨레 구독자들이 함께 읽어주길 기대하는 마케팅 전략을 잡은 것이 실수였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나·들>의 편집 방향이 기존 한겨레에서 벗어나자는 것을 모토로 했다는 대목에 이르러 모순이 생긴다. 탈한겨레가 목표였는데 어떻게 기존 한겨레 구독자가 구독 유도의 주요 타깃이 될 수 있었을까. 다시 의문이 생긴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글이 길기 때문에 온라인에는 부적합하다고 예단해버린 것이 아닌지 아쉽다는 부분은 모두가 입을 모아서 이야기했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긴 글이라도 읽을 의사가 이젠 있다.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하고 반응을 살피며, <나·들>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시너지를 낼 또 다른 길을 찾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잡지의 판매부수가 하향세를 보일 때 더디고 완만하지만 상승세를 보이며 구독자가 늘어나고 있었던 건 <나·들>뿐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입소문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놀랍다는 김미영 기자의 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제 발행 중단을 앞두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도 전에 결론이 먼저 도착해버렸다. 20개월이다. 짧다. 한겨레신문사가 2003년 말에 창간하고 1년 만에 접어버린 <허스토리>보다는 길었다는 것이 위로가 될까.

<나·들> 창간 멤버들과의 인터뷰에서 여러 번 반복된 표현은 ‘실패한 실험’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이것이 결과적으로 실험에 실패한 것인지, 실패를 실험한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느꼈다. <나·들> 편집진은 실패를 무서워하지 않고 실험을 진지하게 해보고 싶었지만 경영진은 달랐던 것 같다. 실험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는 것에 관심을 쏟지 않은 경영진은 아무래도 ‘실패’를 실험해보려 한 것 같다. 만약 무엇 때문에 실패했는지가 남지 않고, 실패했는지 안 했는지만을 남길 실험이었다면 굳이 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사람 때문에 사람이 만드는 잡지

<나·들>은 ‘사람 매거진’이라는 다소 알쏭달쏭한 수식어를 달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자동차 잡지, 음악 잡지, 바둑 잡지 등 잡지가 집중적으로 다루는 주제로 분류명을 붙일 수도 있고, 여성 잡지나 청소년 잡지처럼 잡지를 읽는 대상별로 나눈 경우도 있다. ‘사람 잡지’라는 표현은 잡지가 다루려는 주제와 대상을 모두 포괄하는 셈이다. 사람에 대해 쓸 것이고 사람이 읽어주길 바란다. 그게 ‘사람 매거진’이다. 이렇게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만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을 다룬다는 것에는 항상 이런 질문이 달리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을 어떻게 다룰 건데?

사람을 중심으로 할 때 인터뷰 전문잡지로 구성할 수 있다. 어쩌면 한겨레는 처음에 조선뉴스프레스에서 발간하는 매거진 <탑클래스> 같은 인터뷰 전문잡지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대중잡지 중 하나인 <피플>과 같이, 사건이 아닌 사람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들 잡지는 공통점이 있지만 어떤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유명한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은 지겹고 유명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지루하다. 그래서 사람을 다룬다는 것은 아슬아슬 휘청휘청거리는 줄타기같이 균형잡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이 세상에 사람만큼 오해하기 쉬운 존재가 없다. 사건의 맥락과 개요는 오히려 간단히 정리할 수 있으나 천만번 다시 생각해봐도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그 순간에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대학 시절에 함께 공부했던 선배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있었다. “채윤아, 이 세상에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사람을 함부로 미워하지 말라는 참 속이 깊은 말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참 슬픈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마다 자기 사정이란 것이 있어서 그걸 알면 잘못된 행동을 했어도 차마 비난할 수는 없게 된다. 역지사지로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며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도움이 되지만, 나는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는 식의 태도가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의지까지 지워버리는 것을 종종 보았다. 그래서 사람을 아는 일은 극히 중요하면서도 극히 두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일을 언론이 담당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몰라서 편견을 갖게 되고 그래서 별다른 근거도 없이 호불호가 뚜렷해지는 것에 저항하고, 사람을 도구화해 사건의 진짜 원인이나 속성이 숨겨져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경계하고, 특정한 이들의 목소리만이 세상에 나가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더 다양한 목소리를, 숨은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려 노력하고…. 사건 이전에 사람을 보고, 사람을 통해 사건을 다시 분석하자는 <나·들>의 창간 취지는 그래서 스스로에게 매우 높은 수준의 과업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안영춘 편집장과 기자들이 2013년 7월호(l9호) 최종 인쇄를 앞두고, 출력된 컬러 대장을 보며 오류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한겨레 박승화
이 기준은 편집진이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기에 한정된 시스템 안에서 고군분투했다. 아마 독자가 느끼거나 보지 못하는 영역에서 싸우고, 버티며, 오기도 한껏 부려보기도 했을 터이다. 평가는 누구나 개별적으로 할 수 있지만 의미 부여는 다수가 함께 할 때만 가능해진다. 그런 면에서 <나·들>의 지난 어려움 중 하나가 부족한 ‘의미 부여’는 아니었을지 싶다.

가령 한 사람을 인터뷰하는데 두 명 이상이 동시에 진행하고, 또 그 사람을 풀어내는 데만 16쪽 이상을 할애하는 매체는 없다. 이런 ‘3차원 인터뷰’는 매우 파격적인 행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나·들>에서 마땅히 주목받아야 할 코너는 성폭력 피해 생존 여성들의 목소리를 집중적으로 담아낸 ‘내 몸, 파르헤시아’라고 생각한다. 인터뷰할 사람을 연속으로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매체에서도 이런 기획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나·들>이 하는 작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한겨레 내부에서의 논의는 어느 정도였을까 알 수는 없다. 그것이 쓰디쓴 비판이든 감정적 조언이든. 나의 상상은 여기까지다. 너무 많은 것을 마지막에 담아낼 수는 없다.

마치며

나는 1998년에 잡지 하나를 창간했었다. 라는 제호를 가진 잡지였다. 이성애만을 중심으로 다룬다고 해서 이성애 전문지라고 말하는 법은 없지만, 는 잡지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성애 전문지’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2003년까지 6년간 발행되고 ‘종간’됐는데, 보통 ‘폐간’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차마 마음이 아파서 ‘폐’자를 쓸 수 없어 단지 한 단계를 마무리할 뿐 다시 새로운 시작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종간호’라고 달았다. 종간을 결정하고 책을 마무리하던 때가 아직도 생생한데 어쩌다 10년 만에 또 어느 잡지의 마무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두 번째라 좀더 능숙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마지막 글이 너무 쓰기 어려웠다. <나·들> 기자들을 인터뷰했지만 여느 때처럼 인터뷰이를 요리조리 나름의 시각으로 뜯어보고 재조립도 해보고 소감을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기자들이 말하는 <나·들>에 대해 분석해야 하는데 솔직히 오가는 대화를 전부 이해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손아람도 이미 조심스레 자신의 글 말미에 밝혔듯이 저널리즘에 대한 전문적인 고민을 현장에서 오랫동안 해온 사람이 아니기에, 뭔가 말을 더 거들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어설프게 아는 척할 수도 없는 당황스러움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발행 중단 소식을 들을 독자를 생각하면 지면을 통해 위로하는 것도 사치가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너무 담담하면 그것도 섭섭할 노릇이다. <나·들>에 대한 소회는 편집장과 마지막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몫일 것 같아 많은 말을 다시 삼키며 나는 최대한 인터뷰한 내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래서 이번 글은 꼭 앞서 손아람의 글부터 읽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해도 너무 부족함이 많지만.

하나의 잡지가 2012년의 가을볕을 받으며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2014년 초여름과 함께 끝이 난다. 이 명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다 새삼스레 깨달았다. 아! 우리가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건 <나·들>은 어쨌든 존재했다는 사실이구나. 그러니까 적어도 상상 속의 잡지는 아니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떠돌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훌쩍 던져진 그 궤적은 남아 있다. 이것이 역사구나. 사라져도 사라졌다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역사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나·들>이 있었다.

새로운 저널리즘을 꿈꿨던 <나·들>이 있었다.

뒤늦었지만 창간을 열렬히 축하하며, 너무 이르게 찾아온 종간에 아쉬움을 담아 보낸다. 이 한마디만은 <나·들>에 꼭 전해주고 싶다.

“실패한 실험이란… 세상사에 없다!”

글 한채윤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운영위원. 1998년 한국 최초의 동성애 전문지 <버디>(BUDDY)를 창간했다. 2001년부터 퀴어문화축제(kqcf.org) 기획에 참여하고 있으며, 2002년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org)를 조직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생계는 주로 강의와 원고로 해결하고 있는 전업활동가이며, 낸 책으로는 <한채윤의 섹스 말하기> <남성성과 젠더>(공저) 등이 있다. ‘마포 민중의 집’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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