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2:04 수정 : 2014.07.03 12:04

“안녕들 하십니까?”와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요?”라는 구호는 서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다. 특히 ‘안녕들 하십니까’의 열린 질문은 개개인이 자신의 안녕함에 대해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계기가 됐다. 2013년 12월14일 서울 고려대학교 정경대 후문에서 처음으로 열린 ‘안녕들 하십니까’ 집회 현장. 한겨레 김봉규
“‘가만히 있으라’는 사회에서 교수님들이 그만 가만히 있길 바라는 불손한 제자들 드림.”

지난 6월9일 고려대 정경대 게시판에 붙은 ‘교수님에게 부치는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6개월 전 대자보 열풍도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됐다. 하 수상한 시절에 가만히 있던 이들의 움츠린 목덜미를 겨냥하듯,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도발적인 문구와 함께.

지난해 12월10일 주현우(27·고려대 경영 4)씨가 대자보를 통해 던진 물음표의 공명은 엄청났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에 “안녕하지 못하다”고 하는 답문들이 병든 시대의 증표처럼 거리마다 휘날렸던 것이다. 대자보 밖에서는 안녕하지 못한 이들이 철도 민영화에 맞서 촛불을 들기까지 했다.

지난 4월, 우리는 더욱 안녕하지 못했다. 전남 진도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했고 수많은 승객이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목숨을 잃었다. “우리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요?” 또다시 물음표를 찍은 사람은 청와대 자유게시판에 침묵행진을 제안한 용혜인(24·경희대 정치외교 4)씨였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대학가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결의에 찬 대자보들이 붙었고 전국 각지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반어적인 이름의 침묵행진이 이어졌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사건의 발생은 어쩌면 다음 물음을 예고하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화는 사건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완성되지 않던가? 연달아 등장한 물음표들을 제대로 읽는다면 다가올 변화의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물음표를 던진 발화자들을 만나 두 사건이 교차하고 갈라지는 지점에 대해 들어봤다. 이들이 증언하는 각각의 사건은 숨은 차이를 안은 채 동일한 트랙에서 또 다른 질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남의 문제’에서 ‘나의 문제’로

“제가 앞에 잘 나서는 성격이 아니에요, 낯을 가려서.” 한때 서울 신림동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는 용혜인씨의 조곤조곤한 말씨를 듣고 있자니 당찬 호소문 속의 바이라인이 낯설었다. ‘가만히 있으라’를 제안한 용혜인씨, ‘안녕들 하십니까’ 초반에 대자보를 썼던 주현우씨와 강태경(25·고려대 철학 4)씨까지, 적어도 이들 중에 ‘팔뚝질’의 운동권 전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현상의 무게에 비해 너무도 소탈한 각자의 모습이 의아하게 다가올 정도다. 세 명 모두 특정 정당 당원이기는 했지만 이들이 털어놓은 정치활동에는 ‘촛불집회’와 ‘희망버스’처럼 개별적인 경험들 역시 공통적으로 녹아 있었다.

열악한 아르바이트 환경을 경험한 뒤 알바노조에 가입하고(용혜인), 학교에서 같은 정당 지지자들끼리 소모임을 만든다거나(주현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에 사회문제에 대한 견해를 담는 것(강태경)은 개인의 영역에서 주체적으로 이뤄지는 생활정치다. “그게 내 생각이라면 (행동)한다” “잘못된 것은 바꿔야 한다”는 뚜렷한 주관을 공유하지만 그 너머로는 사회참여도가 낮은 20대에 대한 공감까지 엿보인다. “솔직히 사는 게 팍팍하잖아요.” 개개인의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는 일방적으로 주장을 강요하기보다 각자가 주체적인 판단을 하도록 서로 물음을 던지는 구호에서도 묻어난다. “안녕들 합시다!” “가만히 있지 맙시다!” 대신에 “안녕들 하십니까?”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요?”가 아니던가.

‘안녕들 하십니까’와 ‘가만히 있으라’의 인물들이 차이를 드러낸 지점은 ‘남의 문제’가 ‘나의 문제’로 이어지는 대목이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철도노조원들의 직위해제 직후 등장했지만 정작 주현우씨와 강태경씨는 철도노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끊어진 이음새를 메우는 것은 ‘경험의 축적’이다. 발화자는 전부터 다양한 사회문제에 분노를 쌓아왔고 응답자 역시 취업난, 비정규직, 정리해고 등이 만연한 사회에서 크고 작은 좌절의 경험을 수집해왔을 것이다. ‘철도노조원들의 직위해제’에서 폭발한 대자보는 ‘내가 느끼는 고통의 임계점’에서 결말을 찾는다. ‘남의 문제’가 ‘나의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을 이끈 용혜인씨에게는 세월호 참사가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용혜인씨는 경기도 안산에서 20여 년간 거주했다. 알고 지내던 이웃 중 세월호 참사의 직접적 피해자도 적지 않다. 정신적 충격 탓에 사고 이후 실시간 언론 보도를 일부러 피했을 정도다. 참혹한 사고 현장이 생중계됐다는 점은 ‘가만히 있으라’의 응답자들이 ‘남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데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우연성 vs 필연성, 추상성 vs 구체성

“6월10일, 거리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 청와대로 갑시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삶을 통치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시 인간이기를 약속하기 위해서. 경제성장을 위해 인권과 생명은 잠시 잊고 가자는 그 끔찍한 약속을 파기하기 위해서.”-용혜인,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다시, 6월을 시작합시다’ 중

2014년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은 2013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의 연장선에서 더욱 구체적인 행동 양식과 조준 대상을 보여준다.

별다른 실행 계획 없이 출발한 ‘안녕들 하십니까’의 주요 무대는 주현우씨가 재학 중인 고려대였다. 그에게 학교는 일상의 공간이다. 그가 대자보를 붙인 데는 충동적 성격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자보가 SNS를 통해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그때부터 1인시위와 선전전, 오프라인 모임 등이 병행됐다. 용혜인씨가 알바노조에서 만난 3~4명의 대학생들과 침묵행진을 기획한 뒤에야 제안 글을 올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가 세월호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일상성을 넘어선 공적 공간인 청와대 게시판에 올려졌다.

글이라는 형식으로 확산된 대자보와 직접행동으로 표출된 침묵시위라는 점도 양쪽의 도드라진 차이다. ‘안녕들 하십니까’의 대자보 쓰기는 언제 어디서나 비교적 참여가 자유롭지만 각자의 글이 특정한 행위로 집중되기는 어렵다. 대자보 작성 과정에서 펼쳐진 여러 구호들은 힘을 모으기 위한 준비 단계처럼 보인다. 이후 등장한 ‘가만히 있으라’의 침묵행진은 실제 행동이라는 직접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만 행동에 따르는 부담감과 시공간적 제약은 참여 규모를 확장하는 데 장애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둘의 차이보다는 맥락적 연관성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만히 있으라’의 진화가 ‘안녕들 하십니까’의 학습 효과를 통해 발생한 것은 아닐까. 실제 ‘가만히 있으라’의 활동가들 중에는 ‘안녕들 하십니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용혜인씨도 마찬가지다. ‘안녕들 하십니까’가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와 더불어 전국 각지에서 날아든 대자보 인증샷은 침묵행진을 퍼뜨릴 때 중요한 수단이 됐다.

“‘안녕들 하십니까’와 ‘가만히 있으라’는 달라요.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안녕들 하십니까’를 알잖아요. 서로가 맥락 속에서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않다고 봐야지요.”(주현우)

‘안녕들 하십니까’에 이어 ‘가만히 있으라’에서도 파급력이 뛰어난 페이스북이 홍보를 담당했다. ‘안녕들 하십니까’의 페이스북은 주로 대자보에 나온 공지 사항을 보완하고 오프라인 활동을 전달하는 데 쓰였다. ‘가만히 있으라’에서는 온라인 공간의 참여도와 영향 범위가 더욱 확대됐다. 예컨대 페이스북 개인메시지로 참여 방법을 전달받은 독일 베를린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교민들이 현지에서 침묵행진 뒤 인증사진을 게시하는 식이다.

열린 질문 vs 불완전한 해법

“저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외면할 수 없잖아요, 자기 삶이 안녕하지 못하다는 건.”(주현우) ‘안녕들 하십니까?’는 피할 수 없는 자기성찰을 요구하는 동시에 무한대로 열린 답안을 허락한다. 철도 파업, 부정선거 의혹, 비정규직, 경남 밀양 송전탑, 정치적 무관심 등. 자신들의 안녕함에 대해서는 개개인이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공무원 학원가까지 각양각색의 대자보가 흩날렸던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을 것이다.

‘안녕들 하십니까’가 저마다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가만히 있으라’는 모두가 안녕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단계다. ‘생명보다 이윤이 먼저인 사회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이다. “‘안녕들 하십니까’와 ‘가만히 있으라’ 사이에는 분명 연결성이 보여요. 안녕하지 못하니까 가만히 있지 말자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아직 완결성까지 갖춘 것 같진 않아요. 둘 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요. 안녕하지 못해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면 과연 무엇을 하겠다는 거죠?”(강태경)

한계점도 있었지만 ‘안녕들 하십니까’와 ‘가만히 있으라’가 연이어 호응을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우리 사회가 서로 ‘안녕하냐’는 물음을 거세한 채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만 질러온 것은 아닐까. 복잡한 현상을 섣불리 세대의 문제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억지 위로를 받던 20대와 ‘닥치고 공부’만 하던 고등학생의 활약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침묵행진 하기 전후에 자유발언을 하면 사람들이 엄청 적극적이에요. ‘왜 나는 안 시켜주냐?’고 항의도 들어오고, 나중에는 시간이 없어서 다 못 들을 정도로요. 자기 이야기가 너무 하고 싶은데 지금까지 그럴 수 있는 공간이 없었던 거고, 그래본 적도 없었던 거죠.”(용혜인)

집단 속의 사명감 vs 개별성인 감수성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경쟁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행위조차 개인의 자유라 부른다. 개인의 선택을 집단의 공존과 연결짓던 유대관계가 녹아버린 시대.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 근대’다. 견고해야 할 안전망이 액화된 사회에서는 모든 책임과 부담이 개인의 어깨 위로 떨어진다. 파편화된 개인들을 광장에 불러모으는 것은 낡은 집단 속의 사명감, 그 이상의 무엇이다. 텅 빈 광장을 채우려면 전과 다른 형태의 연대를 시도해야 할지 모른다. 사적인 시대에 새로운 연대는 개별성들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지 않을까.

‘안녕들 하십니까’에서 ‘가만히 있으라’로 이어지는 현상은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는 절차일 수 있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내면화한 대자보의 물결 속에서 ‘안녕하지 못한’ 개별적 주체들은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며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여기서 주체들을 연결하는 물리적 매개체는 SNS일 것이다. 바로 뒤에 찾아온 ‘가만히 있으라’는 더 나아가 ‘안녕하지 못하기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던 개별적 주체들을 또 한 번 각인시켰다.

구체성이 결여된 구호에도 이들을 거리로 이끌었던 정서적 매개체는 ‘나들’의 문제에 공감한 ‘개인의 감수성’이다. ‘나’의 문제가 ‘나들’의 문제로 치환되는 경로에 ‘안녕들 하십니까’의 숱한 자기고백들이 있을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고 무엇을 할 것인가?

“감수성은 윤리적인 거라고 말하려다 제길, 감수성은 고상한 것이 아니라 염치라고 말했습니다.” -백무산, ‘감수성’(<그 모든 가장자리>) 중

지난 6월16일 고려대 정경대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윤리적인 감수성을 지닌 개별적 주체의 외침은 투쟁이나 단결과 거리가 멀다. “저는 다만 듣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우리 정말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요?”라는 구절은 슬픈 노랫말처럼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가만히 있지 않고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남은 것은 행동이다. “대한민국에서 대입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지방선거 때 입시 철폐 얘기가 나왔어야 하지 않나요? 웃긴 건 어느 누구도 그걸 문제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거기에 이해관계가 깔려 있는 거예요. 그걸 정확하게 짚어내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안 움직여요.”(주현우)

‘안녕들 하십니까’와 ‘가만히 있으라’가 일궈낸 가장 큰 변화는 주체들이 사회문제와 개인의 접점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기 삶에 대해 자꾸 고민하고 이야기하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하잖아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정치에 참여하는 맛을 계속 봐야 한다는 거죠. ‘안녕들 하십니까’에선 그런 경험을 축적하기 위해 강연과 토론으로 이뤄지는 ‘자기정치공작소’를 기획하고 있어요. 연사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자기 생각을 만들고 표현하는 활동이 될 것 같아요.”(강태경)

‘안녕들 하십니까’(facebook.com/cantbeokay)와 ‘가만히 있으라’(facebook.com/keepyourplace)는 페이스북 페이지의 ‘좋아요’를 통해 연계돼 있다. 이들은 서로의 활동을 홍보하며 여러 사회적 이슈들을 공유한다. ‘앞으로 함께 무언가를 해볼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양쪽 모두 긍정적 의사를 내비쳤다. 개별적 주체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제2, 제3의 ‘안녕들 하십니까’ ‘가만히 있으라’를 통해 물음표의 경험치를 쌓아가는 것. 최후의 느낌표는 바로 그 과정 끝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글 김효정 객원기자 genu2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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