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2:00 수정 : 2014.07.03 12:00

‘친박’이란 단어는 이명박 대 박근혜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생겨났고, 재수 끝에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박근혜 리더십 아래 뭉친 그들이기에 정치세력으로서 큰 그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진화하느냐 소멸하느냐, 그 갈림길에 친박이 서 있다. 한겨레 김태형
“내가 친박 원조다. 내가 친박 울타리를 만들었다. 날 비박으로 분류해 가지치기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난 비박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6월8일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

“박근혜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내가 친박연대 만들고, (박 대통령과의) 우정이나 신임을 안 버렸다. 나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원조 친박이다, 그런 부분도 내가 (말씀)드리기 어렵다.”(6월12일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

새누리당의 새 지도부를 뽑는 7·14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권 주자들의 ‘원조 친박’ 경쟁이 거세다. 특히 ‘양강’으로 꼽히는 김무성 의원과 서청원 의원은 연일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며 ‘내가 진짜 친박’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새누리당 의원 148명(6월24일 기준) 가운데 친박계가 60%를 넘는 90여 명으로 분류되고, 박 대통령 지지율이 제아무리 떨어져도 40%대를 공고하게 유지하고 있으니, 당심과 민심을 동시에 잡아야 하는 당권 주자들로선 그럴 법도 하다.

‘박근혜 계파’를 뜻하는 ‘친박’이라는 단어는 ‘이명박 대 박근혜’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생겨났다.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두고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던 이들은 친이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이들은 친박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원조 친박’의 뿌리는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박의 탄생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차떼기당’(2002년 대선 당시 불법 대선자금을 모금한 사건에서 비롯됨) 오명을 떼려는 반전 카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다가 엄청난 후폭풍을 맞았다. 당이 문을 닫기 직전의 위기에 놓이자, 탄핵안을 주도했던 최병렬 당시 대표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해 3월23일 열린 임시 전당대회에서 대표 자리를 이어받은 이가 박근혜 당시 의원이다. 박 대표는 천막당사를 쳐서 불법 대선자금 사건을 사과하고, “마지막으로 한나라당에 기회를 한 번 더 달라”며 읍소해 4월 총선에서 121석을 건졌다. 목표치였던 개헌 저지선(100석)을 훌쩍 뛰어넘으며 ‘선거의 여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박 대표와 ‘농밀한’ 대화를 나눈 이가 유승민 당시 여의도연구소장이었다. 유 소장은 이회창 전 총재에게 발탁돼 여의도연구소장 자리를 맡았고, 2002년 대선 때는 이 전 총재의 경제 참모를 지내기도 했다. 같은 대구 출신으로, 박 대표가 ‘평의원’일 때부터 잘 알고 지냈던 유 소장은 대선 패배 뒤 ‘포스트 이회창’으로 박 대표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박 대표가 ‘이회창 사람’이던 유 소장을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한 여권 인사는 “당시 유 소장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박 대표를 다음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도와야 한다’고 얘기했다. 박 대표도 중요한 결정은 유 소장과 상의했다”고 말했다.

4월 총선 이후 한나라당은 본격적으로 ‘박근혜 체제’로 재편됐다. 2004년 3월부터 2006년 6월까지, 박 대표가 2년3개월의 재임기간 동안 당직에 임명한 이들이 바로 ‘친박의 원류’다. 김무성·허태열 사무총장(역임순), 진영·유승민·유정복 비서실장(역임순), 전여옥·한선교 대변인, 이성헌 사무부총장, 서병수 정책위 부의장, 이혜훈 정책조정위원장 등이다. 특히 진영 비서실장과 한선교 대변인을 제외한 8명은 ‘8인방’으로 불리며 친박 핵심 중의 핵심으로 꼽혔다.

박 대표가 ‘내 사람’을 고르는 기준은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었다고 친박 인사들은 입을 모은다. 실제 진영 의원은, 박 대표와 대척점에 있던 ‘이회창 라인’이었고, 전여옥 의원은 최병렬 전 대표가 발탁한 인사였다. 다른 이들도 대부분은 박 대표와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 ‘인사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수첩 인사’의 시작은 이때였는지도 모른다.

시련과 성장

한나라당의 17대 대선 후보 경선을 1년 앞둔 2006년 6월16일, 박 대표는 ‘당권-대권 분리’라는 당헌·당규에 따라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주 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임기를 마치고 본격적인 경선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당내 기반이 탄탄했던 박 전 대표와, 여론 지지에 올라탄 이 전 시장이 맞붙는 모양새였다. 이 전 시장의 지지율이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당내 중립 성향 의원들은 물론 친박 의원 일부도 이 전 시장 쪽으로 옮겨갔다. ‘박근혜의 입’이었던 전여옥 의원이 대표적인 인물이고, 일부 친박들은 친이계에 ‘양다리’를 걸치기도 했다.

열세로 고전하면서도 박 전 대표 곁에 남은 친박들은 ‘박 대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친박이 박근혜 대표 시절에 형성됐기 때문인지, 이들은 박 전 대표를 두고 ‘박 대표’라고 불렀다. 한때 박 전 대표 쪽도 영문 이니셜이나 다른 별칭을 고민했지만, 익숙한 ‘박 대표’로 결론을 냈다. 당시로선 먼 훗날의 얘기지만, 박근혜 정부 초기 일부에선 잠시 그를 ‘피피’(PP·President Park)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청와대에서 어감이 나쁘니 쓰지 말아달라고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어쨌든 친박 ‘8인방’은 경선 캠프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에 더해 정조위원장을 지낸 최경환 의원이 캠프 종합상황실장에, 기획위원장을 지낸 김재원 의원이 대변인에 임명되면서 새로운 핵심으로 부상했다. 박 전 대표가 뽑아 썼던 중·하위 당직자들 가운데서는 이정현·구상찬 상근 부대변인이 캠프 공보특보에, 김선동 대표실 부실장이 캠프 종합상황실 부실장에 임명되면서 주목받았다. 이들은 이후 18대 국회에 입성했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요직에 기용된다.

경선 캠프 인사를 보면, ‘박근혜 인사’의 또 다른 특징이 눈에 띈다. 바로 ‘아버지 시절의 인연’이다. 당시 친박 핵심들도 “누구지?”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깜짝 인사’로 꼽힌 이는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안병훈 전 조선일보사 부사장이다. 박 전 대표가 안 전 부사장을 영입한 것은, 박정희 정권 때 청와대 출입기자를 하면서 맺은 인연 때문이었다. 후원회장을 맡은 남덕우 전 총리 역시 박정희 정권 때 재무부 장관, 부총리 등을 지냈다. 지금 ‘기춘대원군’으로 불리는 김기춘 당시 선대위 부위원장은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한 장본인이고, 현경대 선대위 고문은 정수장학회 출신이다, 김용환 고문은 박정희 시절 대통령 경제수석, 재무부 장관 등을 지냈다. 연배는 박 전 대표보다 한참 위지만, 이들은 여전히 박 전 대표를 ‘영애’ 모시듯 했다고 한다. 친박계의 한 핵심 인사는 “그들과의 인연이 ‘대통령의 딸’이자 ‘퍼스트레이디’일 때 시작됐기 때문인지, 그들은 박 전 대표를 몹시 깍듯하게 대하면서도 어려워했다. 박 전 대표도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 전 대표는 패배했다. 경선 직후 박 전 대표는 “깨끗하게 승복한다. 백의종군하겠다”며 당의 화합을 당부했지만, 친이들은 친박의 뿌리를 뽑으려 들었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김무성·김재원 의원 등 박 전 대표의 핵심 측근들과 김기춘·이해봉 의원 등 친박 원로 중진들이 공천에서 대거 탈락했다. 친박들은 “공천 학살”이라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박 전 대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분노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들은 한나라당을 탈당했고, 일부는 친박연대로, 일부는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 후보들의 선거를 지원하지 않는 대신, 탈당한 친박들에게 전화를 걸어 “힘이 없어서 죄송하다. 꼭 살아서 돌아와달라”고 당부했다. 친박연대나 친박무소속연대로 당선된 이는 25명이나 됐다. 이들은 대부분 한나라당의 친이계 후보를 꺾었다. 박 전 대표는 당 지도부를 끊임없이 압박해 그해 7월 탈당자들이 모두 복당하게 된다. 180석이 넘는 공룡 한나라당에서 친박은 50여 석을 차지했다. 이와 함께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원내에 진입한 이정현·윤상현·이학재 의원 등은 친박 핵심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분화와 재결합

다음 대선까지 ‘불멸의 단일대오’로 굴러갈 것 같던 친박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2009년 5월이었다. 4월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0 대 5로 참패하자, 이명박 대통령과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등 친이계는 쇄신과 화합을 명분으로 친박계 좌장인 김무성 의원을 새 원내대표로 추대하기로 했다. 재보선 참패의 가장 큰 원인이 친이계에 유리한 어떤 일도 하지 않는 박 전 대표 때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그런 식으로 원내대표를 하는 것은 반대”라며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당사자인 김무성 의원과 상의는커녕, 언질도 주지 않은 채 나온 강경한 반응이었다.

이상한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원내대표 후보로 나선 중립 성향의 황우여 의원과 짝을 이뤄 최경환 의원이 정책위의장에 출마하겠다고 하자 박 전 대표는 이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친박 핵심들에게 전화를 걸어 “최 의원을 좀 도우라”고 지시까지 했다. 친박들은 ‘김무성은 안 되고, 최경환은 되는’ 원칙과 기준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됐다. 황우여-최경환 짝은 원내대표 선거에서 친박들의 표도 모두 흡수하지 못한 채, 안상수-김성조 짝에게 큰 차이로 패배했다. 친박계의 한 의원은 “좌장인 김무성 의원을 내치고 최경환 의원을 미는 모습을 보면서 친박 내부적으로 (결속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박 전 대표와 김 의원의 ‘결별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원내대표가 된 김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박 전 대표를 훌륭한 대통령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욕이 이제 거의 소진해버렸다”고 털어놨다. 또 “박 전 대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사고의 유연성에서 부족한 점이 감춰져 있다. 민주주의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 없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돼선 안 된다”고 직격탄을 날리며 사실상 ‘탈박’을 선언했다. 유승민·이혜훈 의원 등 원조 친박의 일부 의원들도 이 일을 계기로 박 전 대표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해 7월 언론관련법 처리를 둘러싼 박 전 대표의 우왕좌왕 행보, 2010년 세종시특별법을 둘러싼 논란, 2011년 전당대회에서 범친이계 홍준표 의원을 지지할 것인가 등을 둘러싸고 친박의 분화는 더욱 가속화했다. 친박 의원들 사이에선 “박 전 대표가 말하는 원칙이 뭔지 모르겠다”거나 “이명박이 소통이 안 된다는데 이 사람은 아예 불통”이라는 근본적인 회의와 불만이 터져나왔다. 2010년 8월엔 ‘1호 비서실장’인 진영 의원이 “이젠 친박이 아닌 중립으로 불러달라. 박 전 대표 주변의 배타성에 지쳤다”며 친박계를 이탈했다.

2012년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친박 지도’는 또 한 번 요동치게 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 사건 이후 박 전 대표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한나라당을 다시 이끌게 된다. 그는 중립으로 분류되는 권영세 의원을 총선 공천을 책임지는 사무총장에 임명했다. 김종인 보건사회부 전 장관,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안종범 당시 성균관대 교수, 이주영 의원 등을 비상대책위원으로 발탁했다. 조윤선 의원은 대변인에 기용됐다. 박 비대위원장은 새로운 친박 핵심 그룹과 함께 ‘새누리당’이라는 이름으로 2012년 총선에서 압승했다. 당내 친박은 9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선을 앞두고는 ‘복박’(復朴)도 이뤄졌다. 진영 의원이 2012년 5월 친박계 이한구 의원과 조를 이뤄 정책위의장 선거에 나서자, 박 비대위원장은 선거 하루 전 진 의원의 지역구인 서울 용산을 방문해 자신의 의중이 진 의원에게 실려 있음을 드러냈다. 진 의원은 손쉽게 정책위의장에 당선됐고, 대선 선대위의 공약을 담당한 행복추진위 부위원장, 대통령직인수위 부위원장에 이어 박근혜 정부의 첫 보건복지부 장관으로까지 기용된다.

김무성 의원도 대선을 두 달 앞두고 ‘복박’됐다. 과거사 문제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하자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김 의원을 총괄선거대책본부장으로 불러들였다. 김 의원은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 논란까지 무릅쓰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쏟았다.

그렇다면 이런 우여곡절 과정에서 친박계를 떠난 이와 떠나지 않은 이들의 차이는 뭘까? 이 질문은 박 대통령이 어떤 스타일의 인물을 주변에 두려는지와 맞닿아 있다. 박 대통령의 첫사랑이 <삼국지>의 조자룡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친박계의 한 핵심 의원은 “박 대통령은 친박이라고 해서 무조건 똑같이 신뢰하지 않는다. 자기한테 얼마나 헌신적인가를 중요한 기준으로 본다. 조자룡처럼 자신에게 충성하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은 “대선 전까지 박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보고서를 받아들면 표지 제목만 힐끗 보고 아무 대답도 안 했다. 박 대통령에게 ‘레이저’를 맞았다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이들은 ‘싫은 소리’를 직설적으로 하다 그리 된 거다”라고 했다. 이를 종합하면, 박 대통령은 ‘쓴소리 하지 않는 조자룡’을 원한다는 얘기다. 친박계가 ‘종박’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데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 친박의 미래는 무엇일까?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박근혜 리더십 아래 뭉친 그들이기에, 아직 대중적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이는 눈에 띄지 않는다. 특정한 가치를 중심으로 모인 ‘정파’가 아니기에, 집단적인 정치세력으로서 큰 그림을 내놓을 가능성도 많지 않아 보인다. 일부지만 경제민주화, 건강한 당-청 관계 등의 화두를 붙들고 고민하면서 성장하는 친박도 있다. 지금 친박은 진화하느냐 소멸하느냐의 갈림길에 선 것 같다.

글 조혜정 <한겨레> 정치부 기자 zesty@hani.co.kr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