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2:07 수정 : 2014.06.09 17:16

300명 가까운 애꿎은 목숨이 참혹하게 스러졌다. 눈먼 탐욕이 부른 어이없는 참사였다. 미리 예견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 사건 발생 초기부터 구조 작업은 진척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현장으로 달려온 정치인들은 해선 안 되는 말과 행동을 일삼았다. 가족들의 오열은 차츰 분노로 바뀌어갔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성난 함성이 메아리쳤다. 한국의 전남 진도 팽목항이 아니다. 여기는, 터키 서부 마니사주의 인구 10만 명 남짓한 탄광도시 소마다.

터키의 세월호, 소마의 탄광 참사

지난 5월13일 오후 2시30분께, 한 민간업체가 운영하는 소마의 석탄광산에서 전기 공급 장치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폭발했다. 지하 갱도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불길에 닿은 탄가루에선 금세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죽음의 가스, 일산화탄소가 갱도에 가득 찼다.

하필 교대시간이었다. 오전 근무를 마친 노동자들은 지상으로 향하기 위해 승강기 부근으로 모여들었다. 일찌감치 채비를 갖춘 오후 근무조 일부도 지하로 내려와 있었다. 배전장치가 폭발했으니 승강기가 움직일 리 없다. 노동자들이 하나둘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업체 쪽과 터키 에너지부의 발표 내용을 종합하면, 사고 당시 모두 787명의 노동자가 갱도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사고 발생 직후 탄광으로 몰려든 동료와 가족들은 안타까운 눈물을 쏟아냈다. 구조 당국은 “꺼졌던 불길이 다시 치솟아오른데다 유독가스까지 들어차 구조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갱도 안의 유독가스를 빼내기 위해 구조 작업은 멈췄다 이어지기를 되풀이했다. 사고 이튿날까지 구조된 이들은 부상자를 포함해 363명에 그쳤다.

애끓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더딘 구조 작업에 가족들이 반발하는 건 당연했다. 현장을 지휘하는 고위 공무원에게 욕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시위 진압 장구를 갖춘 경찰이 물대포와 함께 탄광 들머리로 득달같이 달려왔다. 구조 당국은 “추가 구조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고 있다”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었다.

사고 발생 직후 터키 정부는 사흘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외국 방문 일정을 취소하고 사고 다음날 현장으로 달려갔다. 구조 작업을 독려한 뒤, 매몰 노동자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탄광 들머리로 향했다. 이어 그는 소마시청으로 자리를 옮겨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누구에게 사고의 책임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영국의 과거로 가보자. 1862년 매몰사고로 204명이 숨졌다. 1866년엔 361명이 숨졌다. 1894년 폭발사고로 290명이 숨졌다. 미국은 어떤가? 온갖 기술력을 갖췄지만, 1907년에 탄광사고로 361명이나 죽었다. 1942년 중국에선 석탄광산에서 가스 폭발로 1549명이나 목숨을 잃었고….”

미리 준비를 한 게 분명했다. 참극의 통계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19세기의 영국과 21세기의 터키가 고스란히 ‘동급’이 됐다. 그는 이어 “이번 사고는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우리 모두 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탄광에서는 이런 사고가 흔하게 벌어진다. 일상적인 일 아니냐. 그러니 제발 이런 사고가 다른 나라 탄광에선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말자. ‘산업재해’란 용어까지 있지 않나. 사고는 다른 산업현장에서도 벌어지기 마련이다. 탄광에선 사고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거다. 그게 탄광의 속성이다. 탄광에서 무사고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회견 막바지에 그는 “철저한 진상 조사”를 거듭 약속했지만, 분위기는 이미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특히 그는 “이런 비극적 사태를 악용하는 일부 불순한 세력이 있다. 국가의 평화와 단결을 위해 그런 자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 게 대단히,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에르도안식 화법’의 전형이었다.

시장직 박탈이 기회로… 독재의 서막

2003년 터키 제25대 총리로 집권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1954년 2월 이스탄불의 카심파스 지역에서 태어났다. 해안경비대 소속이던 아버지를 따라 터키 북동부 흑해 연안의 리제에서 성장한 그는 13살 때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그는 10대 시절 용돈을 벌기 위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팔기도 했고, 터키인들이 간식으로 즐겨 찾는 참깨빵 행상을 하기도 했단다.

신심 깊은 무슬림 집안에서 성장한 에르도안은 이슬람주의 성향인 이맘 하팁고등학교를 거쳐 마르마라대학 경영학부에 입학한다. 고교 시절부터 축구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지역 프로구단의 영입 제의까지 받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선수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1969~82년 세미프로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대학 시절,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전국투르크학생연맹’에 가입했다. 열혈 반공단체였다. 그는 1974년 공산당과 유대인을 악마로 묘사한 연극의 각본을 쓰고 직접 주연을 맡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2년 뒤인 1976년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이슬람민족구원당 이스탄불 시당 청년위원장을 맡게 된다.

1980년 9월 케난 에브렌 합참의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세속주의’를 표방한 군부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세력을 옥죄었다. 에르도안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이슬람복지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그는 불과 2년 만인 1985년 이스탄불 시당위원장에 오른다. 터키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을 기반으로 한 정치인 에르도안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1994년 3월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불혹의 에르도안은 이스탄불 시장에 도전했다. 선거에 앞서 그가 시장이 되면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기반한 통치에 나설 것이란 소문이 떠돌았다. 접전 끝에 25%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시정을 장악한 그는 철저히 ‘실용주의’ 노선을 걸었다.

비잔틴제국의 심장부였던 고대도시 이스탄불은 1천만 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몰린 거대 도시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산처럼 쌓인 ‘민원’이 에르도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팔을 걷어붙였다. 만성적인 식수 부족 사태는 장거리 파이프라인 건설로 일거에 해소했다. 골머리를 앓아온 쓰레기 문제는 최신 재활용 설비를 들여오는 것으로 해결했다. 친환경 연료를 사용하는 버스를 들여와 대기오염을 낮췄다. 고가도로와 다리를 늘리고 고속도로망을 확충하는 것으로 교통체증을 풀었다. ‘유능하다’는 평가가 자연스레 뒤따랐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에르도안에게 정치적 위기가 닥쳤다. 터키 헌법재판소가 이슬람복지당의 정강·정책이 정교분리를 규정한 헌법에 반하는지에 대한 심리에 들어갔다. 에르도안은 규탄 집회의 선두에 섰다. 1997년 12월 그는 대중연설에서 유명한 옛 시 한 수를 읊었다. 내용은 대체로 이렇다. “사원(모스크)은 우리의 병영, (사원의) 돔은 우리의 헬멧, 첨탑(미나레트)은 우리의 총검, 신심 깊은 우리의 병사는….”

터키 형법 제312조는 공공장소에서 종교적 언사로 대중을 선동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 그가 낭독한 시구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지만, 그는 곧바로 기소돼 재판을 받아야 했다. 1998년 터키 헌재는 복지당을 위헌 정당으로 규정해 해산시켰다. 재판에 회부된 에르도안은 징역 10개월형에 처해졌다. 시장직은 박탈됐다. 그는 1999년 3월부터 7월까지 넉 달을 복역한 뒤 석방됐다.

에르도안의 삶에서, 위기는 곧 새로운 기회로 가는 문이었다. 수감 기간에 그는 새로운 이슬람주의 정당 구상에 골몰했다. 그는 2001년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하고 당대표로 나선다. 2002년 총선에서 신생 정의개발당은 말 그대로 ‘압승’을 거뒀다.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석권한 게다. 실형 선고로 공직 출마가 금지된 에르도안은 총리 취임이 불가능했다. ‘2인자’인 압둘라 귈 현 터키 대통령이 대신 총리를 맡게 됐다.

2002년 12월 터키 선거관리위원회가 시르트 지역에서 선거 부정이 저질러졌다며 재선거를 결정했다. 투표는 2003년 2월로 예정됐다. 에르도안의 공직 출마 제한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그는 총선에 출마해 무난히 당선됐다. 잠시 맡겨둔 총리직도 넘겨받았다. 바야흐로 에르도안의 시대가 온 게다.

민영화 박차, 참사의 전조

정의개발당 집권 때 터키 경제는 심각한 위기 국면에 봉착해 있었다. 금융권의 불안이 만성적 경기침체를 불렀다. 무엇보다 급한 건 투자 유치였다. 무엇을 해야 할까? 과감히 규제의 빗장을 풀었다. 주요 산업의 민영화에 박차를 가했다. 외국에서 돈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2002~2012년 10년 동안 터키의 국내총생산(GDP)이 무려 64% 늘어난 것도 막대한 외국자본 유치 덕분이었다.

1961년 이후 19차례나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려야 했던 터키는 2002년 235억달러의 외채를 지고 있었다. 2010년 3월 터키 정부는 “더 이상 외채는 없다”고 선언했다. 2008년 금융위기와 함께 전세계를 휩쓴 경제위기 속에서도 터키의 실업률은 꾸준히 한 자릿수를 유지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외국에서 끌어온 탄탄한 자본을 바탕으로 대규모 토목공사를 쉼없이 벌여나갔다.

도로를 넓히고, 다리를 놓고, 건물을 세웠다.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보스포루스해협의 물줄기를 끌어다 선박 운항이 가능한 운하를 조성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국제공항이 2곳이나 들어선 이스탄불에 290억달러를 들여 세계 최대 규모의 공항을 건설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히잡을 쓴 토건주의’로 터키가 흥청거렸다. 지난해 5월 말 이스탄불 중심가 탁심광장의 게지공원 재개발 사업을 밀어붙이다 거센 반정부 시위의 역풍을 맞은 것도 흥에 겨워 무리수를 둔 토건족이 만들어낸 웃지 못할 풍경이었다.

한때 사양세로 접어들었던 터키의 석탄산업이 뚜렷한 회복세로 돌아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전력 생산을 위해 전적으로 의존하던 수입 천연가스의 수급·가격 불안정이 심해지자, 터키 정부는 화력발전용 연료를 다시 석탄 쪽으로 돌렸다. 이미 2010년부터 에너지 부문 민영화를 적극 추진해온 에르도안 총리는 미개발 광산에 민간자본을 대거 유치하기 시작했다. 참사가 난 소마의 탄광 역시 그 가운데 하나다.

국영업체가 채산성을 찾지 못한 탄광에서 민간업체는 어떻게 이윤을 낼 수 있을까?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5월14일 소마 탄광에서 만난 한 노동자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생산량을 늘리라는 압박이 대단히 심했다. 할당량을 채우느라 모두들 혈안이 돼 있었다. 회사 쪽에선 어떻게든 빨리, 어떻게 많이 석탄을 캐내느냐에만 골몰했다. 탄을 캐내는 노동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실제 소마 탄광에선 참사의 ‘전조’가 숱하게 등장했다. 2012년 하반기에만 석 달 새 세 차례나 소규모 갱도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2013년 10월에도 비슷한 사건이 재발했다. 네 차례의 사고로 노동자 2명이 숨지고 48명이 다쳤다.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의 주도로 지난해 소마 일대 소규모 광산에 대한 의회 차원의 안전점검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제출된 것도 이 때문이다. 터키 의회는 지난 4월29일 이 결의안을 표결에 부쳐 부결했다. 불과 보름도 안 돼 덮쳐올 파국을 내다보지 못했다.

때로 숫자가 현실을 웅변한다. 정의개발당 집권 첫해인 2002년, 터키에서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는 872명이다. 2013년 그 수가 1235명에 이른다. 참사 직후 터키 노동복지부는 “소마 광산은 2012년 이후 모두 5차례 안전점검을 받았다. 안전상의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사고 탄광의 알프 귀르칸 사장과 정의개발당의 ‘돈독한 관계’에 대한 소문도 무성하다. 터키 영자지 <투데이스자만>은 사고 직후 “귀르칸의 부인은 여당 소속 시의원”이라며 “집권당의 위세를 등에 업고 있으니 탄광의 안전점검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실제 소마 탄광이 가장 최근에 안전점검을 받은 지난 3월, ‘완벽하다’는 평가가 나왔단다. 일간지 <휘리예트>는 5월25일 인터넷판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지난 3월 노동복지부의 의뢰를 받아 소마 탄광의 안전점검에 나선 에민 규뮤시 점검단장은, 해당 탄광의 기획 담당 임원인 하이리 케바츨라르의 매부인 것으로 드러났다. 탄광 안전점검은 전기설비까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통상 한 달 남짓 걸린다. 소마 탄광 점검 작업은 3월13일, 14일, 17일, 18일 단 나흘뿐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온 나라가 비통한데 외국서 선거 유세

터키 정부는 소마 탄광 사고 나흘 만인 5월17일 수색·구조 작업 종료를 선언했다. 타네르 이을드즈 에너지부 장관은 “유족들의 추가 수색 요청도 없고, 우리가 확인한 정보로는 갱도 안에 더 이상 남은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간 수습된 주검은 모두 301구. 터키 사상 최악의 탄광사고로 기록됐다. 현지 노동·인권 단체들은 “갱도 안에 사람이 더 있을 수도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터키 정부는 이날 사고가 난 갱도 입구를 아예 벽돌을 쌓아 막아버렸다.

‘터키의 진실을 알리겠다.’ 에르도안 총리는 5월24일 독일 쾰른을 방문했다. 오는 8월 대선에 출마하는 그는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사는 터키인들에게 직접 지지를 호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대선부터 약 500만 명으로 추산되는 터키 이민자에게도 재외국민 투표권이 부여된 터다. 이들 절대다수가 몰려 있는 독일이 첫 번째 방문지다.

이날 그는 쾰른의 한 실내 경기장에서 지지자 1만5천여 명에게 둘러싸여 1시간30분가량 격정적인 연설을 했다. 그 시각 경기장 밖에선 독일은 물론 주변 나라에서 몰려온 5만 명 정도의 터키 이민자들이 ‘독재자’ ‘살인자’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데페아> 통신은 현지에 사는 한 터키인 이민자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소마 참사 수습 과정은 끔찍했다. 온 나라가 비통에 잠겨 있는데 총리란 사람이 외국 땅에서 선거 유세나 하고 있다. 참담하다.”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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