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0:17 수정 : 2014.07.03 11:14

메트로놈처럼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되는 마리아의 동선은 서울의 수많은 공간 중에서도 해방촌과 혜화동을 벗어나지 않는다. 두 공간은 그녀 삶의 9할, 아니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른다. 일요일마다 혜화동에서 장사를 하는 마리아의 모습. 한겨레 박승화
다가구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서울 용산구 용산동2가 해방촌 일대. 마리아 바로크(59)와 서미연(23)씨 모녀는 일요일 오전 9시 해방촌 집 앞에서 트럭을 타고 이동한다. 평소에는 트럭을 이용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일요일 하루는 일당제 기사가 이들을 태워 종로구 혜화동으로 데려다준다. 비슷한 시각, 강북구 미아리에서 사는 아들 브라이언 바로크(32)는 따로 출발한다. 처음엔 미아리에서 어머니와 남매가 함께 살았다. 2007년부터 마리아가 용산 미군기지 내 미국인 가정에서 보모로 일하게 되면서 모녀만 해방촌으로 이사를 왔다. 9시30분쯤이면 혜화동에 도착한다. 장사를 시작하는 10시 전까지는 각종 생필품과 식료품을 대충 정리해야 한다. 근처 혜화동 성당에서 집전하는 타갈로그어(필리핀어) 미사가 시작되는 오후 1시 전부터 손님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오전 10시,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앞은 분주하다. 장사를 준비하는 마리아의 손길도 덩달아 바빠진다. 매주 일요일이면 혜화동 성당에서부터 동성고등학교 앞까지 50m 남짓한 거리를 따라 필리핀 장터가 열린다. ‘리틀 마닐라’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필리핀 다문화가정 15가구가 좌판을 펴고 장사하는 공간이다. 아들 브라이언과 딸 미연씨가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다. 장사를 시작한 지 7년이 넘는 동안 세 사람 모두 일요일을 쉬어본 적이 거의 없다. 마닐라가 고향인 마리아는 20여 년 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남성과 재혼한 뒤 딸 미연씨를 낳았다. 미연씨는 어머니 마리아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필리핀계 한국인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성을 따라 ‘서’씨 성을 쓴다.

혜화동 필리핀 장터의 역사는 2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필리핀 장터는 광진구 자양동에 형성된 공간이었다. 1992년 자양동 성당에서 필리핀 신부가 타갈로그어로 미사를 집전한 것이 시초가 됐다. 필리핀 아내와 다문화가정을 꾸리고 필리핀 상인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박일선(67)씨는 필리핀 장터 형성의 가장 큰 배경으로 종교적 요인을 꼽았다. “필리핀 사람들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다. 한국에 거주하는 필리핀 사람들이 자양동으로 미사를 드리러 오면서 덩달아 근방의 마트와 음식점이 꽤 많은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구청에 민원이 반복되면서 자양동 필리핀 공동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꾸 민원이 걸리니 당시 필리핀 신부님이 혜화동 성당의 미사 시간대를 빌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필리핀 사람들도 혜화동으로 옮겨온 것이다. 여기서 장사를 시작하니 종로구청과도 마찰이 심했다. 구청을 수차례 드나들면서 지금의 규모로 협의를 했다.” 새롭게 둥지를 튼 혜화동에서의 시작도 순탄치는 않았다. 그때의 기억을 되짚으며 담담하게 대답하는 박일선 회장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걸려 있었다. “이 사람들은 왜 우리나라에 와서 이래, 복잡하게.” 박일선 회장과의 인터뷰 도중 거리를 지나는 한국 여성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피부색이 다른 이들을 대하는 한국인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방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뒤로 펼쳐진 이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마리아의 동선은 매우 단조롭다. 거주지도 일하는 곳 인근에 위치한다. 마리아에게 한국에 들어와 처음 구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지금 하는 일은 어떤지 물었다. “1991년에 처음 와서는 공장에서 일했다. 보모일은 2007년부터 시작했다. 미국인 가정에서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한다. 좋은 건 원화가 아니라 달러로 월급을 준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집이 가깝다.” 영어가 섞인 서툰 한국말이 돌아왔다. 해방촌에 거주 중인 마리아의 이동 공간은 그 일대에 한정된다. 주거지인 해방촌에서 그녀가 일하는 용산 미군부대까지는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이 구간의 반복이다. 미아리에 거주하는 아들 브라이언도 별반 차이가 없다. 그가 일하는 공장은 거주지인 미아리와 가까운 수유동에 있다. 마리아 모녀가 거주하는 해방촌 일대와 브라이언이 사는 미아리 부근 거주지는 대부분 월세다. 마리아 또한 월세를 내고 산다. 해방촌의 임대료는 다른 서울 지역보다 저렴한 편이다. 월 40만원이면 좋지는 않아도 방 2개 정도의 집을 구할 수 있다. 한 칸짜리 반지하 방은 월 30만원 정도다.

마리아의 동선은 해방촌 일대와 혜화동 두 곳을 벗어나지 않는다. 집에서 한국 음식과 필리핀 음식 모두 해먹는 편이다. 해방촌 근처 한국 마트와 ‘피노이’ 같은 필리핀 마트에서 주로 장을 본다. 웬만한 건 다 구할 수 있어 굳이 멀리 있는 대형마트까지 나갈 필요가 없다. 은행은 일요일에 문을 여는 혜화동의 우리은행을 이용하거나, 복잡한 업무가 아니면 동네 은행을 이용하기도 한다. 다만 관공서를 방문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역시 언어적 문제가 가장 크다. 꼭 필요하면 딸과 동행하거나 통역이 가능한 센터에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나마 단 하루뿐인 토요일 휴일에도 마리아는 멀리 이동하지 못한다. 영화를 보거나 전시회장을 찾는 소소한 여가생활도 이들에겐 사치다. 한국인뿐 아니라 다른 외국인들도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광화문, 청계천 같은 공적 공간도 거의 가는 일이 없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대중교통을 꺼리기도 하지만 일주일 내내 거의 쉬는 날 없이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네에 사는 필리핀 아주머니들과 용산 미군부대 안에서 식사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게 어머니의 여가생활이다. 한국말이 서툴기도 하고 나이가 많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힘들어하셔서 멀리 가지 못한다. 평소 일하느라 피곤하니까 쉬는 날 집에서 쉬는 게 우리의 여가다.” 미연씨는 어머니의 여가생활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생계를 위해서는 보모일도, 일요일 필리핀 장터도 건너뛸 수 없다. 언어적 제약보다 경제적 제약이 더 큰 셈이다. 오히려 동남아인들을 무시하는 문화적 편견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필리핀 사람들만 만나는 일정한 동선을 반복하다보니 한국인들과 대면할 일도 별로 없다.

서래마을의 프랑스, 한남동의 독일, 경기도 안산의 중국 커뮤니티처럼 거주지를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과는 다르게, 이곳 혜화동은 종교 활동을 기반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응집했다 흩어지는 일시적 공간이다. 오후 1시부터 붐비기 시작하는 이 공간은 미사가 끝나는 2∼3시에 가장 바쁘다. 5시가 지나자 손님은 점차 뜸해졌다. 그렇다고 5시에 딱 맞춰 좌판을 정리하지는 않는다. 마리아와 두 남매는 1시간 정도 남은 물건을 더 팔기 위해 행인들을 불러세운다. 저녁은 혜화동 근처 식당에서 사먹거나 집에 가서 해결한다. 6시쯤이면 펼쳐놨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집으로 향하는 트럭에 몸을 싣는다. 마리아의 단조로운 동선은 오늘도 반복된다. 해방촌에서 혜화동으로, 혜화동에서 다시 해방촌으로.

글 이지희 객원기자 amour.fati@daum.net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