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0:11 수정 : 2014.06.09 17:17

게르블리히-레벤더 부부는 일주일에 두세 번 집 근처 베이커리카페에 들러 독일 빵과 소스 등을 구입한다. 대부분의 식료품을 인터넷을 통해 본국에서 주문해 먹는 부부는 한국 제품을 제한적으로 소비한다. 한국 음식도 거의 먹지 않는다. 한겨레 박승화
일요일 오전 9시30분. 주한 독일대사관 직원 레벤더(44)는 두 딸과 함께 서울 성북동 집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세 모녀는 용산구 한남동 국제 성당으로 예배를 보러 가는 길이다. 레벤더는 강남·신촌·용산같이 먼 곳을 갈 때는 자가용 이용을 피한다. 서울의 극심한 교통 정체를 3년6개월간 살면서 터득한 결과다. 자가용을 이용할 때는 간단한 식료품을 사러 동네 마트에 가거나 러시아워가 끝났을 때다. 시침이 12를 가리키면 예배와 커피타임이 끝난다. 이들은 이태원에 가기 위해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그 시각, 남편 게르블리히는 자가용을 몰고 이태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내와 두 딸을 만나 오스트리아 레스토랑 ‘셰프 마일리’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서다. ‘셰프 마일리’에서는 유럽 각국의 전통 소시지를 맛볼 수 있다. 게르블리히-레벤더 가족은 한국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 서양 음식과 타이 음식이 외식 리스트를 채우고 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잔디가 깔린 마당에 간이 테이블을 놓고 독일식 빵과 커피를 마시며 두 딸과 담소를 나눈다. 커피는 인터넷을 통해 독일 본국에서 구매한 것이다.

오후 6시. 저녁이 되면 부부와 두 딸은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진다. 부부는 콘서트를 보기 위해 종로에 위치한 서울아트센터로 향했다. 주로 택시나 자가용으로 이동한다. 부모와 헤어진 두 딸은 혜화동에서 버스를 타고 야간벼룩시장이 열리는 강남의 클럽하우스 ‘플래툰 쿤스트할레’(이하 플래툰)로 갔다. 두 딸은 벼룩시장에서 구제 옷이나 액세서리를 구입할 것이다. 이곳은 독일 베를린에 있는 ‘플래툰’을 그대로 옮겨놓은 곳으로 익숙한 공간이다. 가족은 공연과 전시, 파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려, 문화 생활과 외식 그리고 쇼핑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이곳을 가끔 찾는다. 2년 전, 독일 국가대표 축구경기가 있던 날 새벽 3시에 축구 경기를 보러 가기도 했다.

쾌적한 생활공간 찾은 성북동 독일 가족

성북동 집들은 구불구불 오르막길을 따라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다. 한결같이 높은 담벼락과 셔터가 내려진 차고, 잘 가꿔진 정원수, 고급스러운 건물, 삼엄한 경계를 서는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다. 접근을 통제한 웅장함, 외부의 시선을 막은 폐쇄적 반듯함이 성역으로 다가온다. 고도의 산업화와 도시화의 산물인 성북동은 인위적으로 자연과 어울리는 공간이자 가난한 이들을 내쫓고 개발한 한국에서 손꼽히는 부촌이다. 하지만 지금 ‘성북동 비둘기’가 떠난 자리에는 쾌적한 공간을 원하는 외국인들이 제각각 번지수를 얻었다.

게르블리히-레벤더 가족이 성북동에 둥지를 튼 것은 아내가 한국으로 발령받은 2010년 8월이다. 세네갈, 요르단, 체코 등을 거쳐 한국에 왔다. 레벤더는 모스크바와 서울을 놓고 저울질한 끝에 치안 상태가 좋은 서울을 선택했다. 두 딸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공간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부부는 대사관 동료들에게 이태원·한남동·성북동을 소개받은 뒤 공인중개사를 통해 여러 집을 둘러보고 성북동 집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침실 3개, 부엌 2개, 욕실 3개와 대형 차고, 파티용 지하실, 갤러리 공간은 독일에서 살던 좁은 아파트와 비교할 수 없이 큰 공간이었다. 하지만 집 크기는 임차료와 비례한다. 부부는 월 700여만원씩 거주비를 부담하고 있다. 대사관에서 독일 현지 거주비만큼 보조해주지만 초과하는 비용은 본인 몫이다. 가구와 가전제품은 전 근무지 체코에서 사용하던 것을 가져와 비용을 줄였다. 한국에서 마련한 물건은 용산의 한 가구점에서 산 선반 하나뿐이다.

부부가 성북동 집을 구할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쾌적한 생활공간이다. 한남동은 두 딸이 다니는 서울독일학교 등 독일 커뮤니티가 있고, 이태원은 직장인 주한 독일대사관에서 가까웠지만 성북동이 더 넓고 환경이 좋고 집세도 저렴했다. 독일에서 살 때는 두 딸이 어려 학교와의 거리가 상수였다. 직장과 멀었지만 두 딸의 학교 근처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제 두 딸은 혼자 다녀도 될 만큼 컸고, 성북동까지 스쿨버스가 다녀 변수로 바뀌었다. 성북동 집은 고등학생인 두 딸에게 각자 방을 줄 수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옆집과 윗집에 대사관 동료가 살고 한 집 건너 한국인 아내를 둔 독일인 교수 가족이 있는 점은 여러모로 매력적이었다. 그 때문에 레벤더의 출근시간은 길어졌다. 하지만 뛰면 11분, 걸으면 20분 걸리는 한성대입구역으로 가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고생길은 거주의 쾌적함에 비할 게 못 된다. 부부가 아는 지인들 중에는 경기도 안산, 용인 등에 있는 독일계 회사에 근무하지만 한남동 등에서 출퇴근하는 가족이 많다.

식료품 대부분 본국서… 빵·우유 등만 한국서

“헬로?”(안녕하세요?)

게르블리히-레벤더 부부가 집 근처 베이커리카페인 ‘우드 앤 블릭’에 들어서자 점원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평소에도 자주 보는 사이다. 부부는 능숙하게 카페 안쪽 진열대에서 몇 가지 빵을 골랐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 이곳에 들러 독일 빵과 소스, 치즈 등을 구입한다.

부부의 소비 공간은 성북동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식료품은 대부분 인터넷을 이용해 본국 물품을 산다. 가공식품이 주를 이룬다. 대사관 직원들에게 독일 물건을 공급하는 회사가 있어 1년에 두 번 대량으로 주문한다. 식품 창고에는 커피와 파스타면, 콩·오이·버섯 등을 담은 통조림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식료품과 생필품을 다량으로 구입하기 때문에 월 생활비를 정확하게 가늠하기 힘들지만 대충 월 4천유로(약 560만원) 정도다.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부터 식료품비, 휴대전화 요금, 가사도우미 급여, 유료 TV 채널 요금, 교통카드 사용비, 공연·전시 관람비 등 모든 비용을 포함한 금액이다. 교육비는 대사관에서 전액 지원한다. 이는 한국노총이 지난해 발표한 4인 가구 표준생계비 537만원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희망사항’이라는 걸 고려하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부부는 대부분의 식료품을 본국에서 주문해 먹지만 빵·우유·물·설탕 등은 한국 제품을 소비한다. 성북동 베이커리카페를 들렀다가 ‘하모니’ ‘홈베이스’ 등 동네 마트로 가는 길은 자주 애용하는 장보기 코스다. 가족은 예상과 달리 대형마트나 백화점은 잘 가지 않는다. 파티 때 필요한 다량의 고기를 구매할 때만 이태원의 대형마트에 갈 뿐이다. 부부가 식료품을 본국에서 구매하는 이유는 한국 음식을 거의 먹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성북동 글로벌빌리지센터에서 한국 요리 강좌를 들으며 ‘한국에 가면 한국법’을 따르려 했지만 두 달 만에 포기했다. 한국어로 진행되는 강좌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마트에서 재료를 찾는 일은 더 힘들었다. 게르블리히는 “한국 요리는 마치 과학 실험을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아내 역시 한국 음식 중 가장 친숙한 것은 편의점에서 파는 삼각김밥뿐이다. 인터뷰가 끝난 뒤 식사를 대접한다고 하자 부부가 추천한 곳은 왕돈가스집이었다. 독일 음식 중 슈니첼(schnitzel)이 돈가스와 비슷하다.

1시간가량 질문과 답변이 오가고 있을 때, 시험공부 중인 두 딸이 인사를 하기 위해 2층 방에서 내려왔다. 서울독일학교에 다니는 17살 멜리사와 15살 타베아는 한국 학제로 고3, 고1에 해당한다. 멜리사는 지난 5월 초 독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인 ‘아비투어’를 봤다. 독일 대학에 가기 위해서다.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는 타베아 역시 독일 대학에 진학할 것이다. 부부는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지만 한국 부모처럼 사교육을 강요하진 않는다. 다만 타베아를 위해 특별히 바이올린 개인교습을 시키고 있다. 멜리사와 타베아에게 ‘한국 청소년들이 자주 가는 홍익대 앞이나 신촌 등에 가봤느냐’고 물었다. 두 딸의 대답은 “나인”(Nein, 아니요). 서너 살 많은 선배들이 홍대 앞에 자주 간다는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멜리사와 타베아가 해맑게 웃자 치아교정을 한 이가 드러났다. 한국 치과에서 치료했을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독일은 18살까지 치아교정이 무료다. 방학 기간을 이용해 독일에 가서 교정을 받았다고 한다. 가족은 건강검진을 위해 서울성모병원이나 서울대병원을 가봤지만 다행히도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 적은 없다. 레벤더는 “문화적 차이겠지만 한국 사람들이 감기만 걸려도 병원에 가는 모습이 낯설다”고 했다.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또 있다. 한국인들의 스마트폰 중독이다. 가족은 모두 스마트폰이 아닌 피처폰을 가지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서다. 두 딸 역시 스마트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한 달 통신비는 극히 적다. 하지만 주거비와 생활비로 많은 돈이 들어가 저축은 거의 못한다. 게르블리히는 “한국 물가가 너무 비싸다”고 푸념했다.

독일인 클럽, 그들의 ‘사회자본’

직장을 다니는 레벤더와 달리 집안일을 담당하는 게르블리히의 생활공간은 대부분 성북구를 벗어나지 않는다. 프라모델을 좋아해 지하철역 근처의 프라모델 전문점을 자주 찾았지만 그 가게마저 얼마 전 없어졌다. 부부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타베아의 악보를 구입할 때는 좋지만 이런 것까지 빨리빨리일 줄 몰랐다”며 농담을 했다. 집 거실에는 여러 가지 프라모델이 즐비했다. 미완성의 모형 자동차 등이 조립과 도색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부가 정기적으로 시공간을 공유하는 곳은 태권도장이다. 서울독일학교 한국인 교사가 학부모들을 위해 매주 한 번 태권도 교실을 열고 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게르블리히에게 몇 안 되는 정기적인 외출 시간이다. 노래를 좋아하는 레벤더는 매주 서울국제여성합창단인 ‘바리오소 합창단’에 참여한다. 이러한 모임 정보를 많이 알 수 있는 곳은 한국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의 모임인 ‘독일인클럽’에서다.

독일인클럽은 100여 가족의 300여 명이 회원으로 있다. 대부분 외교관이나 상사 주재원, 자영업자, 가정주부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이태원의 카페 등에서 만나 한국 생활 정보를 공유한다. 토요일 오전에는 ‘컬처 카페’도 열린다. 한국에 대한 주제로 각자가 조사한 것을 발표하는 자리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정치, 제주도, 한지 등이다. 부부는 이 모임에서 유용한 정보를 많이 얻었다. 가령 ‘유럽산 자동차를 사지 말고 한국산 차를 구입하라’ ‘남대문 알파문구에서는 모든 것(문구류·잡화)을 구할 수 있다’ 등이다. 부부가 한국의 현대자동차 ‘베라크루즈’를 산 이유다.

독일인클럽 회원의 90%는 단기 체류자다. 한국인과 결혼한 뒤 정착한 장기 체류자도 있지만 대부분이 2~3년 살고 떠난다. 당연히 한국어를 배울 시간은 극히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클럽 회원 대부분은 한국말을 모르고 한국인 친구도 거의 없다. 게르블리히-레벤더 부부 역시 마찬가지다. 부부는 한국 사회에 편입하기 원하지만 언어 문제가 항상 걸린다. 반면 한국인과 결혼한 독일인들은 한국 사회에 자연스럽게 편입된다. 배우자에게서 한국어를 터득하고 다른 한국인과 접촉할 통로도 상대적으로 많다. 부부의 가장 친한 이웃인 크나이더 교수도 아내 유진 크나이더가 한국인이어서 장기 체류 중이다. 한국어도 한국인만큼 잘한다. 독일계 회사에서 일하는 클뢰핑은 처음 본 기자에게 “청국장을 먹으러 가자”고 말할 정도다.

문화자본에 기반한 공적 공간 소비

“독일과 일본의 억압 아래 체코와 한국의 예술가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어요.”

게르블리히는 지난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전과 ‘한국근대미술-꿈과 시’전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한국인들이 일제강점기에 종이를 소지할 수 없어 일본인들에게 소량의 종이만 받아 그림을 그렸다는 큐레이터의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부부는 한 달에 한 번은 전시회나 콘서트를 가는 편이다. 주로 각 나라의 문화원에서 초대를 받고 지인을 통해 개인적으로 연락받기도 한다. 최근에는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주한 체코문화원에서 ‘건축학과 인테리어 디자인’전을 보기도 했다. 게르블리히는 가끔 홍대 앞으로 전시회를 보러 가기도 한다. 하지만 공적 공간을 이용하는 데 애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부는 얼마 전 ‘서울국제필름페스티벌’을 보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인터넷에 영어로 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외교관 아이디(외국인 등록번호와 다르다)로는 인터넷 결제가 불가능해 영화 예매도 못한다. 꼭 보고 싶은 영화나 콘서트는 지인에게 부탁해 입장권을 구매한다. 부부는 대부분의 영화를 독일에서 출시된 DVD를 구매해 보고 있다.

부부는 동사무소나 구청에는 볼 업무가 없어 가지 않지만 성북동 글로벌빌리지센터나 고궁, 광장 등은 자주 간다. 한국인들이 자주 가는 노래방과 목욕탕 등은 좋아하지 않아 가지 않는다. 글로벌빌리지센터에서는 1년여간 한국어 강좌와 두 달간 요리강좌를 들었다. 또 센터에서 여는 관심 있는 강연이나 페스티벌에도 곧잘 참석한다. 부부는 최근 청계광장을 찾았다가 세월호 참사 촛불집회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시위 내용은 몰랐지만 시위자들 대부분이 평화로워 보이는데도 경찰이 더 많아 의아했다. 부부는 “시위나 집회 역시 공공장소를 이용하는 데 제약을 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제약이라고 해봐야 차가 막히거나 덕수궁 출입이 제한되는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두 딸이 방학을 하면 가족은 여행을 계획한다. 여름방학처럼 길 때면 독일로 귀향하고 단기간이면 한국 여행을 한다. 일주일 여정으로 간 경주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 곳이다. 서울로 한정하자면 집 근처 길상사와 창경궁, 한강난지공원이 있다. 한강난지공원은 ‘레츠록페스티벌’로 친해진 공간이다. 평소 록을 좋아하는 부부는 직장 동료를 통해 페스티벌을 접하고 마니아가 됐다. 2년 전에는 부부만 갔지만 지난해에는 가족이 모두 참가했다. 올해도 꼭 갈 작정이다. 집 안 거실 한편에는 한국의 록밴드 ‘브로큰 발렌타인’의 CD가 놓여 있었다.

“외국인이라서 갈 수 없는 공간 있나요?” “없습니다”

한국인들이 유럽이나 미국 여행을 가면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다. 서양인의 눈에는 한·중·일 3국 사람들의 외모가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도 외국인, 특히 서양인을 구별하는 데는 서툴다. 피부색이 하얗다면 일단 미국인으로 간주한다. 게르블리히-레벤더 부부 역시 지금까지도 미국인으로 오해를 받는다. 싫어할 만도 하지만 부부는 한국에 거주하는 다수의 서양인이 미국인이기 때문에 생기는 당연한 오해라고 생각한다. 버스를 주로 타는 레벤더가 한국인의 시선을 자주 받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이유다. 택시를 자주 타는 게르블리히는 독일인이라고 말하면 택시 기사가 독일 축구선수인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이름을 묻거나 벤츠 자동차 이야기를 꺼낸다며 웃는다. 부부가 거리에서 다른 외국인을 만나도 특별한 느낌은 없다. ‘학생인가? 직업적으로 왔나? 신촌이니까 연세대나 이화여대에서 왔을 거야’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차별을 겪어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부부가 직접 당한 일은 아니지만 동남아인들이 주로 차별의 대상이다. 두 딸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 온 타이 여학생은 한국 학교에서 ‘벌레 먹는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필리핀 여성과 결혼한 독일인 동료는 한국인들이 아내를 차별적으로 대해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한국에서 필리핀 여성들이 낮은 지위에 있다보니 무시를 한다는 것이다. 그 부부는 예정보다 1년 일찍 한국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친절함으로 남아 있다. 이사 왔을 때 도와준 공인중개사, 지하철에서 자리를 비켜주는 사람들, 모든 일을 도와주는 이웃 유진 크나이더 등등.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툭’ 치고 가면서 ‘익스큐즈 미’(미안합니다) 한마디 없이 지나치는 사람들만 빼면 말이다.

게르블리히-레벤더 부부에게 ‘서울에서 가장 불편한 공간은 어디냐’고 물었다. 의외의 답을 들려줬다. 부부는 특정 지역을 꼽지 않고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고 말했다. 강남, 신촌, 홍대 앞, 명동 등이다. 한국 사람들이 자주 가는 곳이 그들에게는 불편한 공간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한번은 명동에 갔는데 모든 가게가 스피커로 노래를 틀고, 장사꾼들이 메가폰으로 소리를 질러 시끄러웠다는 것이다. 고궁도 단체객이 많은 시간대는 피한다고 귀띔한다. 질문을 바꿔 ‘외국인이 보기에 가장 어색한 장소는 어디냐’고 물었다. “이태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른 장소에서는 항상 나 혼자만 외국인인 것에 익숙해서 편한데, 외국인들이 지나치게 많을 때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나는 분명 한국에 있는데 왜 외국인들밖에 없지?’라고 생각한다. 이태원은 너무 인위적이고 미국 기준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외국인이기 때문에 갈 수 없는 공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부부의 대답은 “나인”이었다. 언어 문제와 문화 차이가 걸리지만 그들에게 한국의 공간을 소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글 김원일 기자 nirva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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