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0:01 수정 : 2014.07.03 11:13

5월13일 서울 사당역 부근에 있는 한 커피숍으로 그가 들어섰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왜소한 체구, 나약해 보이는 발걸음…. 짐작과 딴판이었다. 인사를 건네는 눈동자가 순간 파르르 흔들렸다. 악수를 청하며 내민 손은 작고 뽀다. 좀처럼 세파에 시달릴 일이 없었을 것 같은, 그저 모범생 같아 보이는 그가 일주일 전 사건의 주인공이라니.

김창인(24)씨의 실제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부모님 말씀을 아주 잘 듣는 편도 아니고, 공부를 썩 잘하지도 않는, 그렇다고 앞에 나서지도 않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학생이었어요. 부모님도 제가 특출한 인재가 되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제 밥벌이를 하는 소시민으로 살기 바라셨어요.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고요.”

6일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보자. 5월7일 중앙대 정문 앞. 검은 옷을 입은 창인(당시 중앙대 철학과 3)씨가 기자회견을 했다. “정의를 꿈꿀 수 없는 대학, 거부한다”는 이른바 ‘자퇴 선언’이다. 2010년 고려대 경영학과 김예슬씨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선언’한 것처럼.

내가 이 대학에서 배운 것은 정의를 꿈꿀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의 벽은 너무나 거대하고 완고해서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때문에 그저 포기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경쟁을 통한 생존을 요구하고, 그렇게 대학은 세일즈하기 편한 상품을 생산하기 원했다. 하지만 대학은 기업이 아니고 나 또한 상품이 아니다. 결코 그들이 원하는 인간형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저항을 해보려고 한다.

-김창인씨 ‘자퇴선언문’ 중


“아직은 실감이 잘 안 나요. 자퇴 선언 전엔 불안했는데 이제 좀 편안해졌어요. 학교가 싫어서 그만둔 것도 아니고…. 일주일 동안 늦잠 자고, 집에서 빈둥대다가 약속 시간에 맞춰서 씻고, 불규칙하면서 느슨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책도 읽죠. <중국 철학사>를 읽고 있어요. 평소 눈길도 주지 않았던 책인데….”

창인씨와 관련된 기사를 꼼꼼히 찾아봤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굳이 자퇴까지 해야 했을까?’ 한국 대학의 문제를 제기했던 ‘김예슬 선언’이 그랬듯, ‘김창인 선언’도 열기가 사그라질 것이다. 더구나 동어반복 아닌가.

“김예슬씨는 대학에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거부한다, 나를 따를 사람은 따르라는 뉘앙스였어요. 반면 저는 대학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의 구성원들이 대학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돼달라는 마음으로 자퇴를 선택했어요. 제 행위도 잊혀질 날이 올 겁니다. 그럼에도 ‘자퇴 선언’ 이후 중앙대 안에서 담론화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것만으로 의미와 역할을 다했다고 봅니다.”

창인씨는 09학번이다. 두산그룹이 중앙대를 인수한 이듬해에 입학한 ‘두산대학 1세대’다. 고3 수험생이던 2008년 두산이 중앙대를 인수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운좋게 그해 입시에서 중앙대, 경희대, 국민대, 세종대에 합격했다.

“주위 사람들이 중앙대 입학을 추천했어요. 대기업이 들어와서 대학 순위도 올라가고 취업도 잘될 거라면서요. 저도 같은 생각이었어요. 중앙대 학생이 되고 싶었죠. 그때만 해도 ‘두산’ 때문에 학교를 떠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두산을 등에 업은 괴물이 중앙대라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학생회장 불출마 종용·3번 징계… 옥죄는 대학

“중앙대라는 이름만 빼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모두 바꾸겠다.” 중앙대를 인수했을 때 박용성 이사장이 했던 호언장담이다. 창인씨는 명문대 반열에 올려놓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하고, 환영했다. 연구와 학문 중심의 대학으로 도약하는 것도 기대했다. 하지만 실상은 철저한 ‘기업화’였다. ‘대학 경쟁력’이라는 미명 아래 순수학문 육성 대신 실용학문 위주로 재편하는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비인기 학과가 폐지되거나 통폐합됐다.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였다. 가정복지·아동복지·청소년·비교민속학과 등이 폐지 수순을 밟았다.

“중앙대에는 어문계열이 사실상 없어요. 국어국문학과와 영어영문학과를 제외하고 유럽문화학부와 아시아문화학부로 통폐합됐거든요. 대학이 인문학의 보루가 되어야 하는데, 중앙대는 ‘대학’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거꾸로 가고 있어요.”

중앙대는 이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와 학생 자치권을 무시했다. 선출직이던 총장을 임명직으로 바꿨다. 교수들의 급여를 차등 연봉제로 전환했다. 정권과 재단을 비판한 교수를 해임했고, 총장을 비판한 교지를 수거했다. ‘허가받지 않은’ 행사와 대자보는 불허했다. 지난 1월 청소노동자 파업 때 대자보 수십 장이 전부 철거됐고, 창인씨의 자퇴선언문도 하루가 안 돼 뜯겨나갔다. “대자보를 붙여서는 안 되는 곳에 붙였다거나, 학교 도장을 받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어요. 비판 언론 재갈 물리기죠.”

학교의 폭압적인 구조조정과 자치권 훼손 앞에서 학생들은 무기력했다. “폐과를 눈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던 친구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어요.” 창인씨가 본격적으로 학내 구조조정 반대 투쟁에 나서게 된 계기다. 2010년 4월8일 “중앙대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라고 쓰인 펼침막을 들고 한강대교 아치에 올랐다. ‘주홍글씨’의 시작이었다. 학교는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그에게 무기정학(이후 1년6개월 유기정학 경감) 처분을 내렸다. “이후에도 토론회 등을 기획하며 구조조정 반대 투쟁을 이어갔어요. 학교에 미운털이 박혔죠. 징계위원회에 5번 회부됐고, 3번 징계를 받았으니까요.”

그가 가장 분개한 건 학내 집회와 시위를 모두 불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학교는 총학생회가 주관하는 신입생 환영회와 농촌활동마저 축소·금지하려 했다. 창인씨는 “지금도 ‘학내 금주’ 회칙 개정 움직임, 경제경영관(100주년기념관) 건립을 빌미로 한 학생회관 철거 등이 논의되고 있는데, 학생들의 의견 수렴 통로가 하나도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대학을 대학답게 바꿔보려 ‘배수진’

4월8일, 그가 자퇴를 결심한 날이다. 그날 그 사달(?)만 없었더라도 자퇴를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려 자신이 꾸리게 될 소박한 학생 공동체를 구상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이때 그는 인문대 학생회장 선거에 단독으로 출마한 상태였다. 지난해 11월에도 도전했으나 학교 쪽에서 피선거권 자격을 문제 삼자 사퇴했고, 이번에 재출마한 것이다.

“과학생회장, 단과대학생회 집행부 활동을 하면서 재미와 보람을 느꼈고, 선배들한테 받았던 것만큼 후배들에게 돌려주고 싶었어요. 또 제가 만들고 싶었던 대학의 모습이 있었기에 끝까지 선거를 치르려고 했죠. 하지만 학점 등 사문화된 학칙으로 제 후보 자격을 문제 삼은 학교의 협박 때문에 투표가 중단되고 선거가 엎어졌어요. 학교가 선거에 관련된 모든 학생들에 대해 징계, 학군단·교환학생 자격 박탈, 학생회비 지원 중단 등을 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거든요.”

상심이 컸다.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 대학을 대학답게 바꿔보려고 한 대가는 참혹했다. ‘학우들에게 피해가 가는 걸 막으려면 내가 학교를 떠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더럽고 치사하다’ ‘더는 못해먹겠다’는 반발 심리도 자퇴에 영향을 미쳤다. 어쨌든 그가 학교에 남아 있으면 징계가 반복될 것이었다. 그 고리를 끊고 새로운 국면을 만들 수 없을까. 학교에 강하게 메시지를 던지고 뛰쳐나오면 학내에 변화의 흐름이 생기지 않을까. ‘자퇴’ 외엔 선택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 블랙리스트 자체였어요. 학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학교는 제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것도 모자라 징계 전력을 들어 장학금 환수를 요청했어요. 학교에 저항하면 저처럼 된다는 걸 본보기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아요. 낙인찍기죠. 학교가 나를 과대평가했구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대단한 사람이 아닌 내가, 재수 없게 타깃이 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자퇴 결심을 굳혔으나 전 국민적인 애도 분위기 속에서 공론화할 수는 없었다. 차일피일 시간만 흘렀다. 그사이 의지가 여러 번 흔들렸다. 언제까지 미룰 수 없는 노릇이었다. 4월 마지막 주부터 자퇴를 위한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교수님을 만나 조언을 구하고, 친구와 선후배·부모님께 결심을 전했다. “부모님은 학생 신분인 것과 아닌 것은 다르고 졸업장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반대하셨어요.” 하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그의 의지를 꺾지 못한 부모님은 결국 자퇴 동의서에 서명해주셨다. “내 인생을 봤을 때, 지향하는 가치가 있는데 그걸 포기하고 타협하면서 살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고 여러 날 부모님을 설득한 결과였다.

“아버지께서 사회복지 쪽 일을 하셔서 어릴 적부터 노숙인, 장애인, 고아, 독거노인 등을 자주 만났어요. 부모님은 ‘네가 뭘 하든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죠. 돌이켜보니, 제 ‘자퇴 선언’ 역시 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신 것 같아요. 자퇴가 배수진이었던 만큼 더 치열하게 살아야죠.”

디데이를 5월7일로 잡았다. 5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자퇴선언문을 쓰기 시작했다. “5년의 대학생활을 돌이키면서 정리를 하는데 착잡하더군요. 밤마다 친구·선후배들과 함께했던 술자리,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살다시피 한 과방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어요. 맨정신으로는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아 술에 의지하면서 꼬박 닷새 동안, 정말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풀어냈어요. 지금은 홀가분해요.”

대학,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

애초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할 때, 인터뷰 장소로 중앙대 교정을 제안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며 단번에 퇴짜를 놓았다. “학교를 그만둔 사람이 학교에 들락거리는 모양새가 안 좋잖아요. 그것도 인터뷰하러 간다는 게.” 생각이 짧았다고 자책하는데, 그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더니 ‘희소식’을 전했다. 8일 뒤 학교에 갈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렇게 5월21일 오후 창인씨와의 두 번째 만남이 중앙대 교정에서 성사됐다. 중앙대 정문 앞,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현대식 건물들, 새로 짓는 건물들 사이에서 쉼없이 움직이는 타워크레인들이었다. 약대 건물에 내걸린 플래카드가 펄럭이고 있었다. “창의인재 육성을 통해 대학과 기업이 더불어 발전할 수 있는 창조경제 생태계를 실현하겠습니다. 2014년 산학협력 선도대학”.

중앙광장을 지나는 학생들의 걸음걸이와 표정을 관찰했다. 여유와 넉넉함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창희씨에게 “교문이 사라지고, 현대식의 세련된 건물이 들어선 모습에서 격한 이질감이 느껴진다”고 기자의 느낌을 전했다.

“제가 입학했을 때와 학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지금은 스펙 쌓기에 더 치중하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졌죠. 학내 구조조정이나 자치 문제도 그래요. 학교가 심하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나서기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징계를 남발하고, 대자보를 바로 떼어버리고, 커뮤니티에 글을 쓰면 삭제하고 또 계정까지 정지시키니까. 해봐야 안 된다, 나만 피해를 본다는 심리가 있고, 내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인가 고민도 되죠. ‘대학은 교육이 아닌 산업’이고 ‘학교의 주인은 이사장인 나’라고 했던 박용성 이사장의 말이 불과 5년 만에 실현된 거죠.”

창인씨가 생각하는 대학은 지식 전수라는 고유의 역할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주적 절차, 다양한 학문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곳이다. 사회가 부조리하고 각박하더라도 대학은 그 안에서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학내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학교와 사회의 발전에 대해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는 공간이 대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중앙대는 대학의 이러한 역할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건전한 여론 형성을 막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안타깝죠.”

그가 ‘자퇴선언문’을 붙였던 교양학관 대자보 게시판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회와 공동체를 고민한 흔적의 대자보는 보이지 않았다. 라섹 수술 광고 전단지, 자유대학생연합의 회원 모집 포스터 등이 붙어 있었다. 어디에도 학교 도장은 찍혀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웃기는 거죠.”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모든 사람들한테서 공통적으로 받는 질문”이라며 웃는다. 표정이 씁쓸하다. 창인씨는 “제가 무엇을 할지보다 대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으면 한다”며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대학을 만들기 위해 교수와 학생들이 조금씩 용기를 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 없어요. 이제부터 계획을 짜려고 합니다. 똑똑해지고 싶어서 철학과를 택했으니까, 책부터 읽어보려고요. 10월에는 군대를 갈 예정이고요. 하지만 제가 어디에 있든 제 모교는 중앙대입니다.”

먼발치 201동 외벽에 새겨진 ‘의에 죽고 참에 살자’라는 글귀가 보였다. 중앙대 교훈이다.

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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