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09:31 수정 : 2014.07.03 11:12

“제가 대안교육운동에서 받은 전반적인 인상은 말이 좀 앞선다는 느낌이었어요. 기존 체제와 너무 다른 체제를 꿈꾸는 것 같기도 했고요. 교육적으로 좋고 올바른 것이라 생각되는 것들만을 중심으로 또 다른 성채를 구축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죠. 저는 아주 더럽고 불순물들로 꽉 찬 공간이 제일 좋은 교육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무균실의 진공관 같은 데서 오히려 영혼의 내상을 입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불온한 교사 양성과정>, 이계삼


-정말로 불온하다. 어떤 사람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사들이 불온하다는데, 이계삼은 전교조 교사들조차 불온하게 여기는 교사였다. 그는 같은 글에서 교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교조 교사가 되기 위해 교직을 택했지만, 경험해보니 전교조가 없는 게 훨씬 나을 거라 생각한다고까지 썼다. 전교조의 존재는 ‘전교조도 손 못 대는 일을 나 따위가 감히…’와 같은 좌절의 기제를 교사의 마음속에 심을 뿐이라는 것이다. 좀 과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같은 논리는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닌가.

이계삼- 전교조에 대한 제 선망은 특별했어요. 경남 밀양의 가부장적이고 속물적인 분위기, 죽창 들고 다니면서 좌익을 사냥했던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우울하게 보냈는데, 전교조 선생님을 만나고 큰 충격을 받았거든요. 전교조 선생님들을 보면서 막연하고 희미하지만 나도 올바름의 세계에 끼고 싶다는 꿈을 품었죠. 대학에서 진로를 교사로 정했고, 전교조 운동을 아주 열심히 했어요. 사무국장을 4년 동안 했고, 총 8년 동안 전교조가 주최하는 모든 행사와 집회의 기획에 참여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전교조의 함몰된 계층성을 느끼게 됐어요.

안정적 소득이 보장되는 직장에 다니는 신중산층이라고 할까요? 전교조가 체제를 갖추고 협상력이 커질수록, 학교 교육의 악마적 관행을 외면하는 현상이 나타나더라고요. 일제고사 반대 투쟁 때 반성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썼는데 전교조 기관지에서는 실어주지 않았어요. 일제고사 거부 투쟁이 결국 조합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때 전교조는 민주주의 집단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어요. 정치적 선택과 결론에 매달릴 뿐 정작 지켜야 할 가치를 조직적으로 배제하는 집단이 되었구나, 전교조는 끝났다. 차라리 교사들이 개체로서 존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죠. 무정부적인 분출과 혼란이 교육을 더 희망 있게 만들 거라고 봤습니다.

-세월호 사건 뒤에는 국가와 시민 사이에 존재해야 할 정치가 죽었다고 선언했는데 같은 맥락으로 들린다. 중간매개체인 정치를 해체하는 것으로 제도의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계삼- 끊임없는 길항관계에 있다고 봐야죠. 중요한 것은 ‘적정규모’라는 개념이에요. 적정한 규모를 벗어나는 순간 제도와 시스템은 속한 개체를 배반하게 돼요. 우리 삶의 테두리를 이루는 적정 규모를 슬슬 이야기해봐야 합니다. 정치란 게 지방선거에서 박근혜 정부가 승리할 것이냐 패배할 것이냐 수준이어서는 안 되죠. 죽음을 넓은 상상력으로 확장하고, 내 삶의 세월호와 그 뒤에 다가올 세월호, 우리 세상에 꽉 차 있는 세월호를 불러내야 합니다. 제도정치냐 거리냐의 이분법일 필요는 없다고 봐요.

-보수적인 도시 밀양에서 진보적인 교사였고 지금은 송전탑 반대 투쟁 대책위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보수적인 지역민들과의 갈등은 없는가. 위험한 인물로 분류된다거나.

이계삼- 수군거리는 소리는 있죠. 제가 인터뷰를 하고 뉴스에도 얼굴이 나오다보니, “점마 정치하려고 저러는 기다” 같은 말은 가끔 들려요.

-그 정도라면 꽤 온건하게 들린다. 죽창으로 좌익을 사냥했다던 할아버지들은 이제 다 돌아가신 건가.

이계삼- 종종 위협받긴 했어요. 관변단체들이 활동가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플래카드를 벽에 도배하는 식으로요.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사람들이 적대적인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아요.

-한채윤이 물었다. “운동을 하면서 인간의 바닥을 많이 봐서 애정을 유지하는 게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환멸감이 들지는 않는가.”

이계삼- 인간이 싫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불쌍하다는 생각은 했죠. 송전탑 반대 싸움을 하면서, 배신해서 합의서에 도장 찍고 눈물 흘리며 미안해하거나 싸움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각자의 선함은 있되, 국가권력의 압도적인 힘에 굴복해 전향하는 사람이었을 뿐이에요. 오히려 학교에 몸담았을 때 교사집단에 환멸을 많이 느꼈어요. 사소한 일로 아이를 눈물 빠지게 혼내고 돌아와서 컴퓨터로 인터넷 쇼핑을 하는 교사, 교육청에 논술강사로 가서 월급의 몇 배를 챙겨오면서 학교에서 담임은 맡지 않으려는 교사, 성금 모금에는 2천∼3천원 내면서 보충수업비로 뒷주머니를 차서 방학 때 동남아로 골프 치러 가는 교사…. 전교조, 민주, 진보 등 세상의 좋다는 것들을 개념적으로 다 독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위선에 대한 분노를 오히려 강하게 느꼈죠.

-이계삼은 밀양에서 태어나 밀양에서 자랐고 밀양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밀양 송전탑 건설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 한채윤이 물었다. “이계삼에게 고향 밀양은 어떤 의미인지.”

이계삼- 한동안 참 많이 후회했어요, 왜 고향에 돌아왔을까 하고. 하하. 학교 그만둘 때 계획은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을 하면서 교육 담론 쪽에 힘을 쏟는 것이었어요. 그만두자마자 송전탑 싸움을 하던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했다는 연락을 받았죠. 새벽 첫차를 타고 밀양에 내려갔고, 석 달쯤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3년간 투쟁하게 됐네요. 내려갈 때 <한겨레>에 쓴 글이 있어요. 인간은 식물이라서 유목적 사고가 맞지 않고 지역에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요. 밀양에 내려가고 얼마 지났을 때 괜히 잘난 척하다가 망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죠.

그러나 결국 잘 내려왔다고 믿어요. 전에는 거창한 단어로 ‘고향땅’ ‘농업’ ‘뿌리내림’이란 개념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귀향해서 농업으로 뿌리내리는 게 얼마나 녹록지 않은지도 배웠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생태계의 종양인 도시에 물리적으로 묶여서 떠날 수 없는데, 도시와 절연할 수 있는 의지는 결국 정신적인 데서 찾을 수밖에 없어요. 바로 고향이죠.

-<삶을 위한 국어교육>에서 교사로서 교육 불가능성을 자각했다고 쓴 적이 있다. “이건 공부가 아닌 게 맞아. 하지만 수능을 봐서라도 하고 싶은 직업이 있다면 그걸 찾아가라”고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공부하고 졸업한 아이들이 결국 비정규직으로 떠돈다고. 이 문제의식이 교사를 그만두는 계기가 되었나.

이계삼- 맞아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졸업한 아이들이 가끔 찾아오는데, 놀라서 말이 안 나왔어요. 김예슬씨는 고려대 경영학과나 되니까 멋들어진 퇴교 선언이라도 하지만, 소리·소문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해요. 아이들에게 들려주려고 KTX 투쟁하는 여승무원을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아이들 꿈을 깨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째 이렇게 비정규직으로서 싸우고 있다”는 말을 녹음해 학생들에게 들려줬죠. 고등학교 수업에서는 아무리 좋은 영화를 틀어줘도 절반은 자기 마련인데, 그때 모든 아이들이 찬물을 맞은 것처럼 얼어붙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저는 비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솔직히 알려주는 게 공교육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었는데, 졸업하고 어렵게 사는 제자들을 자꾸 보면서 죄책감이 커졌어요. 신영복 선생님이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우산을 씌워주지 말고 같이 비를 맞아라”는 비유를 썼죠? 퇴직할 때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마지막 날 아이들에게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너희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생각해달라”고 말했는데, 그뜻을 이해했을지 모르겠네요.

이계삼은 고향 경남 밀양으로 돌아간 뒤 한동안 후회했다. 그러나 지금은 잘 내려왔다고 믿는다. 그의 투쟁은 3년째 이어지고 있다. 풀 수 없는 문제들에 맞서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답은 아나키적이다. 영원한 저항, 끝없는 패배, 제도를 계속 들이받는 것, 그것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 제도 바깥에 자신만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 한겨레 박승화
-결국 우리 교육이 입시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정작 입시는 사회 관문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그런데도 입시는 혼자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닌가. 대체 어디서부터 문제인가.

이계삼- 풀 수 없는 문제가 모든 시대마다 있었죠. 저는 급진적으로 당장 교육제도를 전복해버리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는 한계 속의 존재예요. 정치는 계속 흘러갈 거고, 이 시스템은 망하는 순간까지 유지될 것입니다. 제가 가진 답은 아나키적이에요. 영원한 저항, 끝없는 패배. 결국은 제도를 계속 들이받는 것, 그것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끝없이 주장하는 것, 제도 바깥에 자기 자신의 진지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겠죠. 성공 여부는 복잡한 정치공학이 결정하므로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서 <청춘의 커리큘럼>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민주화가 진척될수록, 경제성장이 진행될수록, 아이들의 삶은 훨씬 나빠졌다.”

이계삼- 저는 경제가 성장해서 파이가 커지면 경쟁이 완화될 거라 믿었어요. 하지만 교육개혁을 할수록 경쟁의 질과 양이 극악해졌고 학생들의 학습노동은 늘어났죠. 철학자 이반 일리치의 표현을 빌리면 “풍요에 시달리는” 삶이 된 거예요. 교사의 폭력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학원 폭력과 따돌림은 더 심해졌어요. 끊임없이 서로 힘을 겨눠야 하는 경쟁체제 속에 놓인 거죠.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야간자율학습은 일부 학교에서만 시행했고,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부모의 경운기를 몰았어요. 지금은 그런 아이들까지 100% 야간자율학습을 해요.

-입시를 통해 대학에 가도 비정규직으로 떠돌 수밖에 없는 사회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아이들은 대학에 가기 위한 학업 경쟁에 전보다 더 몰두하는 모순된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계삼- 두 가지 측면이 있겠죠. 첫째, 강력한 사회적 아비튀스예요. 구한말 이전부터 시작된 교육을 통한 지위 경쟁과, 그로 인해 나타난 학벌사회죠. 제도가 망할 때까지는 제도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게 된 겁니다. 두 번째로 물적 근거예요. 풍요의 시대로 진입했지만, 진입 순간부터 내리막길을 맞은 거죠. 예전에는 지방의 중위권 대학만 졸업해도 공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어요. 이제는 달라요. 제가 가르쳤던 학교에서 1등 하던 학생은 서울대에 가기 위해 재수하다가 장학금을 받고 부산대 경영학과에 갔어요. 최근에 연락을 받았는데 9급 세무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부산 세관에서 수습직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전교 1등을 하던 학생이 말입니다. 9급 공무원 시험조차 100 대 1 가까운 경쟁률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교문이 닫힐 시간이 다가오면 아이들이 지각하지 않으려고 학교로 뛰어오는데 바로 그런 현상이죠. 경쟁사회의 말기적 징후인 겁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두고 있는데,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과 아버지로서 자식을 교육하는 입장에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계삼- 혈육인데 아무래도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죠. 아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첫 시험 성적에서 40점을 받아왔어요. 충격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하더라고요. 아무리 아닌 척해도 우리 아이가 지적인 일을 하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 제 안에 있었는데, 육체노동을 하며 몸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받아들인 거죠. “내 자식이 바로 기층 민중의 일원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교육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죠. 아이는 미안한지 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 뒤에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를 쓰곤 합니다만, 하하.

-한채윤이 물었다. “한때 국어사전은 모성애를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본능적인’ 사랑으로, 부성애를 아버지의 자식을 향한 사랑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국어의 젠더 차별에 대해 국어 교사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계삼- 언어는 근본적으로 폭력적이에요. 인간이 언어적 존재이기 때문에 말에 집착하고 말로써 싸우게 되는 거죠. 그래서 말에는 사회의 권력관계가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예를 들어 ‘밀양 송전탑 투쟁’이라고 발화했을 때 사람들은 실제 투쟁의 파편들을 떠올려요. 할매들의 싸움, 노인들의 싸움으로 언어화돼 있죠. 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상투적인 기호들이 아주 싫죠. 그렇게 싸우는 할매들 중에는 박근혜의 열렬한 지지자도 있거든요. 그 구체적 결들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상투적인 기호에 걸맞은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어요. 투쟁이 언어를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세상은 말이 지배하고, 세상을 바꾼다는 건 사물에 호칭을 제대로 부여함을 뜻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싸움은 말의 세계로부터 이탈하려 노력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밀양은 ‘할매들의 싸움’이라는 말에 대해 좀더 자세히 들려달라.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에 대해 “남자와 술이 망친 싸움을 여자들이 살렸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계삼-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가 지금 세 번째인데, 앞선 두 대책위는 남자 위주였어요. 여자들은 그저 따라다녔고요. 6∼7년 해보니 남자들은 안 되겠다는 타산을 하기 시작했어요. 뒤로 몰래 협상을 한다거나, 아니면 술에 취한 채 경찰에게 낫을 휘둘러서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하고 투쟁 전체에는 찬물을 끼얹기도 했죠.

이치우 어른이 분신했을 때 지도부 남성들은 다 포기하고 돌아섰어요. 그때부터는 현장에 할매들만 남아서 싸웠어요. 할매들은 자기들의 적인 공사장 인부와 경찰들에게 밥을 먹이고 커피를 타주면서 끝까지 싸웁니다. 할배들과 달리 잇속을 계산하지 않아요. 한국전력이 보상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도, 그냥 태생적으로 싫은 거죠. 힘없고 약한 주체들만 남았을 때 밀양 싸움의 진정성이 오히려 드러난 겁니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에서 이계삼은 환경론자의 입장으로 임하고 있지만, 노회한 지역 주민들은 좀 다를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이계삼- 원전 문제를 이성이 아니라 몸으로 싫어하는 분들이에요. ‘원전 때문에 이 무슨 개고생이냐’로 시작하셨죠. 탈핵의 최전선으로 호명될 때면 멋쩍어하면서 이렇게 대답하세요. “그런 기 아이다, 재산 지키라꼬 하는 기다.” 여기서 ‘재산’이란 단어는 40년, 50년의 거친 노동과 삶의 역사가 집약된 땅을 말합니다. 시장의 교환가치로서 재산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신토불이’인 거죠. 한번은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온 여성활동가 한 분이 “주민들이 ‘탈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서 아쉽다. 탈핵에 대해 좀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했어요. 웃기는 소리였죠. 몸의 분노보다 의식적인 분노에서 나온 투쟁이 더 강할 순 없잖아요.

-한채윤이 물었다. “밀양 송전탑 투쟁에서는 서울에서 쓸 전기를 위해 왜 밀양이 희생돼야 하느냐는 말이 종종 나온다. 반대로 송전탑 건설에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그렇다면 모든 지역이 자가발전을 해야 하는가, 송전탑이 불가피하다면 밀양이 아니라도 어디엔가 세워야 하는데 반대투쟁이야말로 지역이기주의가 아니냐고 되묻는데.”

이계삼- 개발 독재 과정에서 정립된 에너지 수급 시스템 자체가 잘못돼 있어요. 그걸 돌아보도록 만든 게 밀양 싸움의 큰 성과이기도 하고요. 대도시 소비지의 공장에 싸게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지방 한곳에 발전소를 몰아서 짓는 게 지금까지의 시스템이었어요. 이것을 분산형 시스템으로 바꿀 필요가 있어요. 현재 100대 대기업에서 쓰는 전기량과 23기 원전에서 나오는 전기량이 일치합니다. 기업들은 전기요금을 생산원가 이하로 내고 있고요. 기업의 수출 가격 경쟁력을 위해 지방 주민들의 생존권을 짓밟아온 겁니다.

우리는 송전탑을 어디다 옮겨 꽂을 것이냐는 수준의 논의가 아니라 판 자체를 다시 짜자는 요구를 하는 거예요. 밀양 송전탑 문제 역시 지방에 너무 많은 원전을 지은 것이 원인입니다. 부산 고리 지역에 원전 1·2·3·4호기가 있고 그 옆에 신고리 1·2호기가 가동되고 있어요. 3·4호기가 완공됐고 5·6호기는 예정이죠. 총 10기예요. 2025년이면 고리 1~4호기는 설계수명이 끝납니다. 원전이 6기만 남는 10년 뒤부터는 초고압 송전탑이 필요 없게 되는 거예요. 그럼에도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는 건 수명이 다 된 고리 원전을 20년 더 연장하려는 위험한 계획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죠.

-세월호 사건 이후 <한겨레>에 쓴 ‘가만히 있으라’는 칼럼이 화제가 됐다. 이후 서울 시내에서 ‘가만히 있으라’ 시위가 열렸고, 시스템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들으며 정말로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학생들. 세월호 선내에서 촬영된 동영상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도 저기 있었으면 죽었겠구나’였다. 학창 시절 전체 조회 시간에 화장실에 갈 엄두조차 못냈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세월호 문제를 보는 관점에 교육자로서의 문제의식이 투영됐을 것 같다.

이계삼- 맞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곧 있을 교육 강연에서 그 이야기를 할 계획입니다. 지금 정말 전복적인 담론이 나와야 해요. 서울 홍익대 앞 ‘가만히 있으라’ 시위 정도로는 너무 나이브하다고 생각해요. 구한말 나라가 망할 때 일어났던 만민공동회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나라가 망했잖아요. 답이 아니라 말들의 성찬이 필요합니다. 왜 박근혜에게만 책임의 깔때기를 꽂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치적 차원의 타당성 논쟁이 돼서는 안 되죠. 저는 한국 사회가 세월호 사건 이후 더 나쁜 방향으로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나고도 후쿠시마 현 지사에 자민당 후보가 당선된 것처럼, 정치적 몽매와 방향 없는 혼돈이 지배하는 사회로 가게 될 거라고 봐요. 정권 퇴진이라는 정치적 전술로는 담아낼 수 없는 심대한 지층을 가로지르는 문제입니다. 가만히 있으라. 이것은 교육의 종말과 다름없는 사태입니다.

-만민공동회식 ‘말의 성찬’, 정신분석학적 치료처럼 말과 생각을 쏟아내는 일은 이 상황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는가.

이계삼- 말은 해방적 기능을 갖고 있어요. 말을 쏟아내는 과정에서, 말이 말을 개발할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정치, 새로운 삶의 출발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정권 퇴진이 될지 안 될지 짬을 보는 건 정치인들이나 할 일이죠. 우리는 노동 세월호, 교육 세월호, 세입자 세월호, 무수한 세월호들로 모여야 합니다. 낭만적인 상상이라고 탓할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못할 게 없다고 봐요.

-전교조 문제, 밀양 송전탑 투쟁, 최근의 세월호 사건까지 상당히 일관된 무정부주의다. 그는 중간정치를 철저히 불신하며, 투쟁의 몫을 작은 공동체로 환원해야 한다는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밀양 송전탑 싸움을 묘사할 때 그가 사용했던 “남자와 술이 망친 투쟁-할매들의 잇속 없는 투쟁”의 대비는 세월호 사건에서도 “반정부 투쟁-시민 공동체의 언어 투쟁”의 구도로 전사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투쟁 공동체의 이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계삼- 공동체가 건강하기 위해 반드시 공유해야 할 것은 ‘밥’입니다.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 밀양을 통해 배웠습니다. 함께 밥을 먹는 공동체는 이질적 요소까지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지만, 멀리 떨어진 이들은 논쟁이 시작되는 순간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요. 공자의 이상사회를 ‘대동사회’라고 하는데, 여기서 ‘같을 동’(同)자가 천막 안에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이 입으로 밥 먹는 모습을 뜻합니다. 대동사회란 다른 게 아니라 함께 밥을 먹는 사회인 거죠.

글 손아람 힙합 그룹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멤버로 활동했다. 그룹 이름과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써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 용산 참사를 소재로 정통 법정소설인 <소수의견>을 썼으며,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해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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