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09:10 수정 : 2014.06.09 17:18

언론들은 쏟아지는 비난에 일시적으로 반성의 포즈를 취하지만 ‘보도 참사’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기자들의 취약한 공감능력은 윤리의 문제이기 전에 집단적 문법과 담론, 사고 틀의 문제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기자단에 브리핑을 하고 있다. 한겨레 박승화
기자질 시작한 지 20년 남짓 지났다. 나는 아직도 어떤 기자들의 언행을 보면서 그들의 뇌구조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건 내 뇌구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연간 도로 위 교통사고 사망자 수와 견주는 유의 발상이, 지금 석고대죄를 하는 기자 집단에서 또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청와대 기자단은 대변인의 ‘계란 라면’ 비보도 요청 따위를 파기하는 매체가 다시 나오면 언제든지 징계를 내릴 거라는 점이다.

KBS 보도국장은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자기네 사장이 (청와대의 뜻을 받들어) 보도에 일쑤 개입해왔다고 폭로했다. 유가족들에게 사과는 하지 않고 외려 희생양 코스프레를 한 것은 자신의 발언에 문제가 없었다고 항변한 거나 다름없다. 청와대 기자단은 비보도 요청을 깬 매체들이 재심을 요청하자 출입정지 기간을 경감했다. 결정을 철회하지 않고 다만 수위를 낮춤으로써 이전 결정이 타당했음을 재확인했다. 두 사건은 형식상 별건이지만, 사태의 맥락으로 보자면 동어반복이다.

저들이 하나같이 드러내는 건 취약한 공감능력이다. 하지만 개별적으로 본다면 저들 가운데 누군가는 화장실에서 몰래 눈물을 훔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길냥이를 거둬 애틋하게 보살피는 이가 있을지 또 누가 알겠는가. 정작 주목해야 할 건 공적 영역에서 드러나는 저들의 집단적 문법과 담론, 그리고 사고의 틀이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본다. 산업재해라는 뜻이 아니다. 윤리 문제로만 환원해서는 저들의 집단적이고 일관된 병리성을 규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내가 눈으로 보았거나 전해들은 몇 장면을 지금부터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기자들이 몇 번이고 반성문을 발표해도 ‘보도 참사’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이유를, 기자단의 집단두뇌가 자극을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과정을 재구성해 규명하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한국 언론의 참상이 전적으로 기자단 탓은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자단을 들여다보지 않고는 한국 언론을 이야기할 수 없다. 기자단 제도는 출입처 내부뿐 아니라 개별 언론사의 조직과 문화에까지 자극을 전달하는 한국 언론계의 중추신경이기 때문이다. 자, 어느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보자.

1993년, 기자실서 쫓겨난 수습

1993년 12월 어느 날 새벽 3시 서울의 한 경찰서. 그날 신문 사회면 머리기사에 오른 사건을 추가 취재하다 사회부 야근 선배에게 마지막 보고를 했다. 눈이 반쯤 감긴 내 모습을 본 형사계 당직 데스크가 물었다. “출입기자요?” 고개를 끄덕였다. “늦었는데 차라리 기자실에서 자고 가시지.” 기자실 소파에 누웠다는 기억밖에 없었다. 누군가 어깨를 쿡쿡 찌른다.

“당신 누구야?”

억지로 눈을 떠서 시계를 보니 6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그쪽은 누구냐고 되물었다. 상대는 ‘<○○통신> 아무개’라며 재차 내 신원을 물어왔다.

“<한겨레> 안영춘인데요.”

“어, 유○○씨 딴 데 갔어요?”

“아뇨. 그대론데요.”

“그럼 당신은 뭐야? 수습?”

나는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상대한테서 육두문자가 날아왔다. 영문을 몰라 가만히 있었더니 그가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심 주눅이 들었지만 “일단 나가겠다”고 끝내 한마디는 남긴 다음 기자실을 빠져나왔다. 그날 저녁 신문사로 돌아와 내가 겪은 일을 얘기했더니, 입사 동기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니, 왜 그랬어?”

수습 첫 달, 그렇게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알게 되었다. 수습기자는 기자실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담당 경찰서가 바뀐 이듬해 3월 오전 9시. 공중전화 부스에서 기자실로 전화를 걸어 신문사 선배를 찾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 남성이 물었다.

“당신 <한겨레> 수습이야?”

그렇다고 했더니 이번에도 육두문자와 함께 “인마, 수습이면 수습이라고 밝혀야 할 것 아니야. 다시 걸어!” 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흥분해서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용케 신문사 선배가 받았다.

“방금 그 ×× 누구예요? 당장 바꿔줘요.”

답이 없었다. 숨을 고른 다음 조금 전 상황을 설명했다. 점잖기로 소문난 선배가 점잖게 말했다.

“야, 내 처지도 생각해줘라. 앞으로는 ‘수습’이라고 꼭 밝히고. 근데 왜 전화했냐?”

나는 분명 한겨레신문사에서 월급을 받는데,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다른 언론사 기자가, 그것도 국가인권위 제소감인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선배라고 참칭했다. 나는 20년이 넘도록 아직 그 기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내가 알게 된 건 기자단에서는 그 기자의 행동이 아니라 내 행동이 일탈로 간주된다는 것이었다. 새벽마다 경찰서 안에서 함께 뒤엉켜 자는 다른 언론사의 친한 수습기자에게 그날 오전 일을 말했더니 돌아온 한마디가 이랬다.

“너, 미쳤구나.”

1997년, 성역의 경찰 브리핑실

1997년 가을, 여자 어린이 유괴 사건이 일어났다. 엠바고가 걸렸고, 잘 지켜졌다. 어린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엠바고를 깰 만큼 ‘야만적인’ 기자도, 언론사도 없었다. 경찰은 수사에 진전이 없자 공개수사로 전환했다. 머잖아 피의자가 잡혔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주검으로 돌아왔다. 사건 브리핑이 열리는 경찰서 회의실은 열기에 휩싸였다. 경찰의 브리핑과 질의응답이 이어지는데, 단상 부근에 서 있던 기자단 대표가 갑자기 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누구야?”

수습기자 시절 아프게 들었던 말이었다. 뒤를 돌아봤다.

“저희는 ○○○ 방송사 아침 프로그램 아줌마 기자단입니다. 사건 내용을 들어보고 싶어서요.”

기자단 대표가 다시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경찰 간부를 향해) 관리를 이렇게밖에 못해?”

간부가 손짓을 하자 부하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가 ‘불청객’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내쫓기는 여성들을 보니 얼추 나이가 희생된 아이의 엄마뻘쯤 돼 보였다. 취재에 열을 올리는 기자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평균나이는 그녀들보다 확실히 젊어 보였다. 찰나, 어쩌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도 그만큼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무려나, 기자단의 군령은 사정없이 집행됐다.

피의자가 경찰서로 호송됐다. 모자를 눌러쓴 가냘픈 여성이 우람한 형사 두 명에게 팔이 잡힌 채 포토라인 앞에 섰다. 한동안 카메라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지고 난 뒤였다. 한 기자가 포토라인 쪽으로 다가가더니 한 형사의 어깨와 ‘쿵’ 부딪히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의 ‘이상행동’에 다들 잠시 의아해했지만 곧바로 질문 공세가 시작됐다.

가판(조간신문이 미리 전날 저녁에 내는 초판 신문으로 지금은 없어졌다) 마감을 마치고 널브러져 있는데, ‘삐삐’(무선호출기)가 울렸다. 사회부 데스크였다. 조폭의 협박에 못 이겨 피의자가 아이를 유괴했다는 기사가 어느 신문 가판 1면 머리기사로 나왔다고 했다. 기자단이 발칵 뒤집혔다. 수사 책임자를 불러 자초지종을 추궁했다. 피의자를 처음 체포해 현장에서 조사했을 때 그런 진술이 나왔지만 수사를 해보니 거짓이었다고 했다.

이번에는 그 기사를 쓴 기자에게 조용히 물었다. 피의자를 호송해오는 형사의 웃옷 주머니에서 빼낸 메모지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낮에 이상행동을 보인 기자였다. 그러나 다들 낙종을 면한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을 뿐, 그의 취재 방식을 문제 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페어플레이라고 승인한 셈이다. 그 기자의 소속사는 흔히 조·중·동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곳 가운데 하나였다.

추석이 코앞으로 닥쳐왔다. 경찰 수사가 더 길어지면 연휴고 귀성이고 모두 날아갈 판이었다. 추석 연휴 전날 오후, 경찰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한다고 발표했다. 연휴 시작과 함께 공은 검찰 출입기자들에게 넘어갈 터였다. 나는 곧장 집으로 전화를 걸어 옷가방을 꾸리라고 하고는 서둘러 퇴근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고 얼마 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졌다.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릴 일은 없었다. 아니, 한 번 있었다. 몇 해 전, “우리가 당신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피싱 사기 전화를 받고 혼비백산했다가 아이가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걸 확인한 다음 우황청심환을 삼킬 때였다.

2000년, 마차가 가다보면 벌레가 죽을 수도 있지

2000년 1월 어느 날 아침 경찰청 기자실. 수습기자가 새벽에 챙긴 사건들을 전화로 보고했다. 보고받는 입장에서는 태반이 자질구레한 내용들이다. 그래도 ‘팩트’를 취재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따져묻고, 제대로 답을 못하면 나무라기도 한다. 같은 시기 수습기자들이 있는 기자단의 기자들이 보고받는 내용도 대개 어슷비슷하다. 그날도 다들 별 차이 없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 내용에는 성폭력 사건도 있었다. 동대문시장의 패션몰에서 장사하는 여성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악성 빚을 갚지 못해 사채업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보고를 받는 기자들은 다들 “알았고, 다음!” 하며 넘어가는 눈치였다. 그런데 나는 피해 생존 여성의 사정도 안타까웠지만, 어쩌다 빚을 지게 되었을까 의아했다. 얼마 전부터 여러 언론들이 ‘동대문 패션몰은 한국의 실리콘밸리’라며 눈부신 성공 신화로 앞다퉈 보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취재에 들어가보니 보도 내용과 그곳 상인들의 현실은 크게 달랐다. 장사가 잘되는 곳보다 망해가는 곳이 더 많았다. 그런데도 점포 분양가는 뛰어오르고, 배를 불리는 건 점포 분양업자들뿐이었다. 정확히 말해 보도 내용은 패션산업 기사가 아니라 부동산 개발 띄우기 기사였다. 파고들수록 요지경이었다. 교묘한 분양 사기와 탈세, 이를 비호하는 정·관계 실력자의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아침에 보고 한번 잘못한 것 때문에 그 수습기자는 나와 함께 몇 달을 이 취재에 매달렸다. 여러 차례 크게 보도했고, 분양업자로부터 고소를 당해 검찰 구인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어느 언론도 우리 보도를 따라오지 않았고 ‘동대문밸리’ 기사만 이어졌다. 같은 기자단의 몇몇 친한 기자들에게 이 문제에 무관심한 이유를 물었다. “그건 어차피 개인적인 불행들이잖아. 동대문시장이 잘되는 게 모두에게 이익 아니야?”

그때나 지금이나 천칭 저울에 함께 올려질 수 없는 것들이 계속해서 올려지고 있다.

2009년, 카르텔 위반… 적극적 보복

2009년 4월, 대법원 기자단이 회의를 열어 KBS에 대해 ‘1년 출입 정지’를 결정했다. 출입 정지 1년은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사건의 얼개는 이랬다. KBS가 톱뉴스로 ‘삼성 경영권 승계 무죄’를 내보냈다. 그러자 법조 1진(선임)들로 구성된 대법원 기자단이 KBS 법조팀에 모든 기자실(대법, 대검, 서울중앙지법, 서울중앙지검) 출입과 법원·검찰 브리핑 참석을 1년 동안 정지하는 조처를 내렸다. 사법부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판결 선고 전에 보도하지 않는다는 기자단의 원칙을 위배했다는 게 핵심 이유였다. 그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출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 와중에 회의를 열 만큼 KBS의 보도는 기자단 내부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나는 이 사태의 뒷얘기를 여러 경로로 취재해 몇 가지 재미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기자단 회의 장면으로 들어가보자. 회의 자리에서 제법 많은 기자들이 “나도 판결이 나오기 전에 취재를 해서 전원합의 내용을 알았다면 보도했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각자 속내야 어떻든, 대법 고정 출입기자 21명이 ‘양형’을 놓고 거수투표에 들어갔다. ‘1개월 이하 출입 정지’는 3명에 그쳤다. 그래서 선택항을 ‘1개월 이상’으로 하고 비밀투표에 들어갔다. 투표 결과, △1개월 4표 △3개월 4표 △6개월 8표 △9개월 1표 △1년 8표 △영구 제명 0표로 나왔다. 6개월과 1년이 동수였고, 전체 분포로 보면 6개월 이하가 6개월 이상보다 2배 더 많았다. 하지만 6개월과 1년을 놓고 최종 투표를 하자 △6개월 11표 △12개월 13표로 결과가 뒤집어졌다.

대화 내용을 좀더 들어보자. 중징계 의견의 논리는 “다른 엠바고 파기 같으면 그나마 타사가 따라가기라도 하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회사는 물먹고 마는 형국이 됐다”는 것이었다. 물을 먹이는 것도 모자라 아예 좇아서 보도할 수조차 없게 했기에 죄질이 더욱 나쁘다는 논리인 셈이다.

여기까지다. 전임 대통령 검찰 소환을 하루 앞두고 21명의 대법 기자들이 모여 사자후를 토해가며 이런 대화를 나누고 세 차례에 걸쳐 투표까지 한 사건의 전말치고는 허무하다. 누가 봐도 그들의 최종 판단 기준은 ‘국민의 알 권리’나 ‘사법부 신뢰도’는커녕 ‘특종 욕심’도 아니었다. ‘수동적 저널리즘’과 카르텔 위반에 대한 ‘적극적 앙갚음’의 열성 결합일 뿐이었다. 그러나 잊지 말자. 처음엔 온정주의와 동정론도 꽤 있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그들도 집에 가면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아들이다. 그런데 2014년 ‘계란 라면’ 사태에서 강한 기시감이 드는 이유는 뭘까.

기자단 시계는 거꾸로 돈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보자. 2007년 10월, 임기가 거의 끝나가던 노무현 정부가 부처별 기자실을 없앤 뒤 통합 브리핑룸을 신설했다. 계획이 발표될 때부터 거의 모든 언론들이 들고일어났다. 정부는 이 조처에 ‘취재 지원 선진화 방안’이라는 지극히 건조한 이름을 갖다붙였다. 언론들은 어땠을까. ‘기자실 대못질… 국민 알 권리 발길질’(<동아일보>), ‘언론 자유의 조종이 울린 날’(<중앙일보>)처럼 비감하면서 다소 신파적인 제목들이 지면을 장식했다. 기자들이 정부 부처 기자실 앞 복도에 쪼그려 앉아 종이상자 위에 컴퓨터를 올려놓고 기사를 쓰는 모습의 사진도 실었다. 나는 20년 남짓 기자질을 하면서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출입처를 넘어서 그때만큼 적극적으로 저항의 미장센을 공동 연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때 울린 조종은 누구를 위해 울린 종이었을까? 지금 울리는 조종은 그 공명 현상일까?

글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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