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09:51 수정 : 2014.06.13 11:37

극우가 발호하는 조건은 ‘우파의 불만’이 ‘좌파의 공백’과 만나는 상황이다. 이번 글에선 그 조건이 어느 정도 수위에 와 있는지를 논해보려 한다. 누가 뭐래도 한국은 보수우파의 나라다. 1997년 김대중 정권의 탄생이 특수한 조건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예외 사태로 인식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수한 조건’이란 “한국전쟁 이래 최대의 국난”이라는 외환위기 사태, 정치인 김대중의 역사적 상징성, DJP 연합을 가리킨다. 보수우파의 압도적 우위는 한국 정치 지형에서 일종의 디폴트값이다. 이것은 2014년 현재도 마찬가지다(오히려 더 강해졌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2002년 대선에서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여당 내부 경선도 통과하지 못할 거라 여겼던 정치인 노무현이 바람을 일으키며 민주당 후보로 확정됐다. 이른바 ‘노무현 신드롬’이다. 거기에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 두 명이 깔려 사망하는 효순·미선 사건이 벌어지며 전국적인 추모집회로 번져나갔다. 이후 10년간 한국 사회를 뒤흔든 ‘촛불시위’의 효시였다.

2002년, 그 결정적 순간

2002년 대선을 다른 선거와 구별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는 ‘미디어’와 ‘세대’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뉴미디어 정치’와 ‘2030 세대동맹 투표’가 승패를 갈랐다. 사람들은 20대와 30대는 전부 젊은 세대니 성향이 비슷할 거라 오해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특히 2002년 시점에서 학생운동 세대인 30대와 포스트 학생운동 세대인 20대는 정치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처럼 서로 물적 자원을 주고받는 관계도 아니었고 사회적 자원을 둘러싼 경쟁에서 협력해야 할 대상도 아니었다.

그런 20대와 30대의 세대동맹이 2002년 선거에서 가능했던 배경에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가 있었다. 미디어 리터러시란 쉽게 말해 올드 미디어와 뉴 미디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감수성을 가리킨다. 그 중심에 열광적 팬덤의 대상이 된 매력적인 정치인 노무현이 있었다. 한편으로 ‘우리 편’의 결속을 더욱 단단히 다져줄 수 있는 명확한 ‘적’들이 존재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로 대표되는 강대한 극우 미디어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안티조선운동’이라는 자발적 시민운동을 통해 사회의 거악으로 부각된 상황이었던 것. <오마이뉴스> 같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인터넷 미디어, 순식간에 지식과 정보를 ‘퍼나르고’ ‘확대재생산’하는 웹 특유의 휘발성,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회원들의 자발적 헌신과 열정이 모여 엄청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광주 경선을 기점으로 노무현 후보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한 희망이 되었다. 정몽준과의 단일화 사태를 드라마틱하게 통과한 노무현 후보는 12월 대선에서 끝내 이회창 후보를 꺾는다. 객관적 열세를 뒤집는 대역전극이었다. 2002년 대선이 끝나자 국내와 국외 언론을 막론하고 “인터넷으로 무장한 2030세대가 오프라인 중심의 5060세대를 무너뜨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투표가 끝나고 며칠 뒤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당시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권력을 창출하는 핵심 미디어로 87년 대선에서는 광장의 확성기가, 92년 대선은 신문이, 97년 대선은 TV가, 2002년 대선에서는 인터넷이 부각되었다. 인터넷과 네티즌에 대해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바로 이 점이 패인이었다. 어차피 20∼30대 네티즌은 투표율이 낮기 때문에 인터넷의 열기와 실제 상황은 다를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상식과 판단을 뒤집어버렸다. 진짜 일을 낸 것이다. 20∼30대를 중심으로 한 네티즌들은 인터넷을 통해 그동안 지역패권·금권·관권 선거 등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를 한꺼번에 쓸어버리려 했다.”

-김형오, ‘한나라 패인은 인터넷 대책 부재’, <오마이뉴스> 2002년 12월 29일

우파의 분화

2002년 대선이 끝난 직후, 그러니까 노무현 정권이 막 출범하자마자 광장의 공기가 변했다. 두 번째로 정권을 빼앗기면서 한국 보수우파들은 전에 없던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낙승이라 여긴 이회창 카드가 노무현 열풍에 또다시 고꾸라지면서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고 각성하게 된 것이다. 2002년 6월 월드컵, 2002년 12월 효순·미선 추모 촛불시위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2003년 3월1일, 수많은 인파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한손에 태극기, 다른 손에 성조기를 들고 있었다. 상당수가 노인이었고 교회 이름이 새겨진 십자가를 든 이도 심심찮게 보였다. 그렇다. “해방 이후 최대 규모의 우익집회”라 불리며 이제 전설이 된 그 행사, ‘반핵·반김(정일)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다. 지금도 간혹 회자되는 ‘어록’이 줄줄이 튀어나온 현장이기도 했다. 천주교한민족돕기회 회장 봉두완씨는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총재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여기 나와 계신 이철승씨는 전라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입니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도 절규했다. “주여, 공산화가 되는 것보다 죽는 게 낫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계 어느 곳에는 사람으로 진화하고 있는 원숭이가 있어야 합니다!”

거리로 나온 우파.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었다. 긴 세월 동안 온실 속 화초처럼 안주하던 우파들이 무서운 기세로 약진하기 시작했다. 거리집회만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여론전을 위한 새로운 ‘우파의 진지’들도 속속 만들어졌다. 노인 일색이던 우익운동 진영에 젊은 피들이 속속 수혈됐다. 진보좌파 일색이던 인터넷 공간에도 우파들이 본격적으로 유입한 것이다. 그동안 우파 담론은 <월간조선> <한국논단> 등 소수 인쇄매체와 재향군인회, 자유시민연대 등 우익 시민단체에서 생산되고 소비돼왔지만 이 무렵부터 신생 인터넷 매체와 청년우익단체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 중심에 ‘행동하는 젊은 보수’로 각광받던 <독립신문> 대표 신혜식씨가 있었다. 당시 <독립신문>의 특종으로는 ‘<오마이뉴스> 기자 ‘앙마’ 자작극 충격’이 있다. 2002년 촛불시위의 최초 제안자로 알려진 ‘앙마’(김기보씨)가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무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였음을 ‘폭로’한 보도였다. 이 매체는 2005년 ‘노무현 대통령 저격 패러디’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비난이 쏟아지자 이후 <독립신문>과 그 지지자들은 ‘진보는 (<딴지일보>처럼) 패러디해도 되고 우리는 안 되냐’고 강변했다. <독립신문> 외에도 <뉴스타운> 등 새로운 온라인 우익매체가 적지 않게 생겨났다. 과거 운동권의 전두환·노태우 체포조를 연상시키는 ‘김대중 체포조’도 등장했다. 김대중 체포조는 ‘클린21’이라는 단체 회원과 전직 특수부대 요원 등 30명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이 모든 일이 2002년의 학습효과라고 할 수 있다. 우파들은 기층에서부터, 그리고 비주류에서부터 변화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처럼 “매국세력에 대항한 애국세력의 우국충정”일 수 있겠지만, 분명한 점은 이런 움직임이 전례 없는 종류였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계속 정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 연이어 정권을 잃은 우파 주류세력에 대한 불만이 결합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좌파의 거리정치와 온라인정치를 벤치마킹하는 형태로 세를 불려나갔다. 좀더 큰 틀에서 본다면 오랫동안 한 덩어리로 엉겨붙어 있던 우파의 분화, 또는 역할 분담이 본격화됐음을 드러내는 현상이었다. 한마디로, ‘1세대 넷우익’의 탄생이었다.

좌파의 공백이 만든 장소

2002년 효순·미선 추모 촛불시위, 그리고 2004년 탄핵 반대 촛불시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일관적인 흐름이 감지된다. 첫째, 갈수록 시위의 공간이 전국 차원에서 수도권과 서울로 한정돼가는 경향이 있다. 둘째, 전업 운동권들이 광장에서 발언권을 급격히 잃어갔다. 핵심은 이것이다. 저항의 주체가 변했다는 것. 2002년부터 10년간 ‘광장의 주인’이 바뀌었다. (내가 ‘표준시민’이라 부르는) 수도권 교양시민 계층이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라는 양대 운동세력을 대체하며 저항의 헤게모니를 독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별도의 저술로 논할 만한 주제이지만 여기서는 일단 ‘표준시민의 등장’과 ‘운동권의 쇠락’으로 정리하자.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진보세력의 상당수가 체제 내부로 흡수됐거나 친정부적인 목소리로 돌아섰다. 물론 더 급진적인 좌파들과 진보정당 세력은 개혁정부 기간이야말로 신자유주의가 일방적으로 사회에 관철된 10년이라는 사실을 비판하며 정권 내내 치열하게 싸웠다. 비정규노동 및 청년빈곤의 확대, 사회 양극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두 정권이 ‘우향우’를 거듭하면서 진보세력의 정당성과 도덕적 기반이 과거에 비해 훨씬 약해진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1990년대에 완전히 붕괴한 학생운동은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재생산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학생운동은 그 자체로 강력한 운동세력이었지만 동시에 진보좌파운동에 인재를 공급하는 일종의 팜(Farm)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면서 과거처럼 젊은 세대의 앙가주망(Engagement·사회참여)이 원활히 일어나지 않게 된 것이다. 저성장 시대에 돌입하고 청년고용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진보좌파의 공백은 정당성의 공백이면서 동시에 물리적 공백이기도 했다. 좌파의 공백이 급격히 커져가던 무렵 그 공간을 일정 부분 채운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 가시화하기 시작한 ‘개혁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안티조선운동 등의 미디어운동, 노사모 등의 정치팬클럽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운동 주체로 부상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이들은 사분오열한다. 정권에 대한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탈정치적이거나 반정치적인 성향이 강했다. 어떤 이들은 노무현이란 아이콘의 지지자로 남았고, 어떤 이들은 환멸에 젖어 일상으로 다시 침잠해 들어갔다(개혁국민정당 사태). 극소수의 사람들만 정치적으로 각성해서 진보정당으로 들어갔다(민주노동당).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다양한 이념 스펙트럼을 지닌 시민들의 열정을 각 정당들이 계급적으로 대표하는 것일 테지만, 기득권 양당 체제는 변화를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진보정당은 기성정치의 벽에 끝내 균열을 내지 못했다. 오히려 내부에서 반칙을 일삼던 세력이 주류를 차지하면서 큰 내홍을 치르다 분열하고 만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7~8년간은 정치 미디어 과잉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기존 정치 구도가 시민의 열망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잉여의 에너지가 인터넷 정치 미디어의 난립으로 나타난 측면이 있었다. 반짝했던 호황이 다시 꺼져들면서 대중은 ‘먹고사니즘’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결국 2007년 이명박 정부가 탄생하고 보수우파는 10년 만에 정권 탈환에 성공하게 된다. 기억하다시피 이명박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사실상의 레임덕에 직면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였다. 국민과의 합의나 어떤 소통의 노력도 없이 정권 초기의 힘만 믿고 밀어붙이다가 엄청난 저항에 맞닥뜨렸다. 이때 광장에서 촛불을 든 주체가 표준시민들이다. 이들은 앞서 개혁적 시민들과 겹치는 집단이다. 표준시민은 정치·문화적 민주화 이슈, 즉 절차적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 등에서 진보적 성향을 보이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 이슈, 예컨대 조세, 부동산, 대학입시 등의 분야에서는 보수적이거나 시장주의적인 성향을 보인다. 1980년대에 진보좌파가 말하는 ‘보편계급’은 곧 노동계급이었다. 그러나 표준시민들은 자신이 보편적 시민이라 여긴다(“나는 정치인도 운동권도 아닌 일반 시민이다”). 많은 경우 이들에게 ‘노동자’라는 단어는 비하어이거나 ‘불쌍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몰계급성과 반정치성이야말로 자신의 공정성을 증명한다고 믿는다. 결과적으로 표준시민의 저항은 이명박 정부에 치명타가 되지 못했다. 이 정부는 임기 마지막까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하고 당당히 퇴임했다.

좌파의 공백이 만든 장소에 표준시민이 출현했다면 우파의 불만이 만든 장소에 넷우익이 등장했다. 한국 보수 블록은 여전히 견고하기 때문에 넷우익 등 기층 극우세력은 균열을 일으키기보다 동원되거나(일베) 무시(반이주노동자 커뮤니티)되는 상황이다. 우파의 불만이 임계에 달하고 표준시민이 그 몰계급성과 반정치성으로 인해 치명적 한계를 드러낼 때, 우파의 불만과 좌파의 공백이 충돌하는 그때가 바로 한국 사회에 진정한 의미에서 ‘새정치’, 즉 모든 낡고 약한 것을 쓸어버리는 강력한 극우정치가 도래하는 날일지 모른다.

글 박권일 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사회과학학회 활동을 하면서 늘 욕구불만이 있었다. 결국 ‘문화이론학회’를 만들어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홍대신’을 돌며 마음껏 뛰어놀고, 시네마테크에서 ‘죽 때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김수행판 <자본론>을 읽다가, 뜬금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욕하는 글을 쓰곤 했다. 우석훈과 <88만원 세대>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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