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09:49 수정 : 2014.06.13 13:35

청년의 넓은 스펙트럼만큼이나 청년 문제는 큰 틀에서 복합적으로 풀어가야 한다. 단지 생물학적 나이대가 같다는 이유로 청년을 영입하는 정당들의 청년비례대표제는 그래서 알리바이성이 강하다. ‘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한 청년연대회의’를 꾸린 이태형씨(왼쪽)와 손정욱씨는 비례대표제 확대를 통해 청년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꿈꾼다.
최근 서울 송파구 세 모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정부는 구호를 내걸었다. “찾아주세요! 알려주세요! 소외된 우리 이웃.” 여러 번 반복돼 익숙한 구호다. ‘일제조사 실시’ 계획 발표도 잊지 않았다. 정부가 내건 구호 뒤에는 세 모녀가 제도를 몰라 발생한 사건이라는 개인책임론이 전제로 깔려 있다. 그러나 세 모녀처럼 기초생활보장제도 밖에 방치된 빈곤층은 최소 5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개인 책임일까.

전제를 바꿔보자. 만약 정치인(혹은 정부)이 먼저 나서서 세 모녀를 찾아내 알렸다면 어땠을까. 정당이 집권하기 위해, 정치인이 당선되기 위해, 소외된 이웃을 대변하도록 강제했다면 익숙한 죽음이 반복되는 오늘의 현실은 다르지 않을까. 문제도, 해법도 정치에 있지 않을까.

더 나은 내일에 대한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청년단체들이 가칭 ‘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한 청년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를 꾸렸다. 연대회의에는 민달팽이유니온·청년유니온·정치발전소·서울지역정치학연합학회 등이 참여했다. 새누리당부터 녹색당에 이르기까지 참여자들의 소속 당 스펙트럼도 넓다. 연대회의는 지난 4월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발족을 알렸다. ‘비례대표제 확대’라는 정치 의제로 청년단체들이 연대체를 꾸려 대응에 나선 건 처음이다.

비례대표제 확대가 청년들에게 구체적인 삶의 언어로 다가갈 수 있을까. 연대회의의 주축인 이태형(24) 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 대표와 손정욱(36) 비례대표제청년포럼 위원장은 “사는 게 피곤하고 삶이 모욕감을 줄수록 그런 현실을 강제하는 구조를 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곤두박질치는 벼랑 끝 삶과 한 표만 부족해도 사표가 되는 벼랑 끝 정치가 포개진다.

두 청년은 지난 4월9일 서울시청 인근의 한 카페에서 <나·들>과 만나 “1등만 대변하는 승자독식의 선거판을 바꿔야 한다는 절박함이 각계각층에서 당사자 운동을 해온 청년들을 모이게 했다”고 말했다. 태형씨는 고등학교 졸업 뒤 3년간 불안정노동자로 살다가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디지털콘텐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아무리 죽어라 일해도 내 어머니의 삶은, 내 주변의 삶은 왜 나아지지 않을까’라고 묻기 시작했다.

○와 ×만 강요하는 선거, 1등이 진리

홀로 태형씨를 키운 어머니의 삶에는 쉬는 날도, 저녁이 있는 날도 드물었다. 그렇게 성실히 살았는데, 이젠 노후를 걱정해야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이 없었어요. 근데 졸업 뒤 일하며 만난 다른 사람들도 어머니가 사는 모습과 다르지 않더라고요. 저도 취업하고 가정을 꾸리면 똑같이 살 것 같아요. 누가, 무엇이, 내 삶을 빼앗아가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위한 소소한 일상이 있고 저녁이 있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고 싶었어요. 끝도 없는 불안을 견뎌내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민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시민단체인 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를 만들고 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한 공동 행보에 나섰다.

태형씨는 “청년들의 문제가 일시적 시혜나 이벤트로 소비되는 것이 아닌, 사회문제로 진지하게 논의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판’이 필요하다”고 했다. 2030세대가 겪는 일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2030세대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아프니깐 청춘이다” 따위로 견딘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일자리·주거·빈곤·결혼·출산 등 난제가 각축을 벌이는 시기가 2030세대다. 사회가 재구성되지 않는 한 청년 문제는 전 세대로 전이될 가능성이 크다. 태형씨가 “비례대표제 확대가 청년 세대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갇혀선 안 된다”고 강조한 이유다.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절반 이상의 새 인물이 국회에 들어와도 정치는 그대로예요. 보통 시민이 겪는 생활 문제를 국회의원이 ‘자신의 문제’로 받아안게 하려면 그들을 움직이는 선거제도를 바꿔야 해요.” ‘IMF 세대’(98학번)로 불리는 정욱씨가 ‘왜 민주주의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라고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대학원 졸업 뒤 새누리당 원희룡 의원실을 거쳐 현재는 같은 당 유승우 의원실에서 비서관으로 일한다. 정욱씨는 비례대표제 확대가 유의미한 정책의 실현 가능성과 지속성을 담보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봤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맞서 격렬했던 촛불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늦추는 것으로 끝났어요. 정치권 밖에서 권력을 비판하는 운동이 정치로 연결되지 못하고 그것 자체로만 머문 결과죠. 한-미 FTA를 반대한 시민들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없다보니, 한-미 FTA 타결을 넘어 더 심각한 추가 협상까지 진행됐어요. 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이런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어요.” 제주 강정마을, 쌍용자동차, 경남 밀양 송전탑 사태 등도 당사자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지만 이들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없는 탓에 정부는 무시로 일관해왔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두 종류로 나뉜다.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는 지역구 의원 246명과 각 정당이 추천하는 비례대표(전국구) 의원 54명이다. 소선거구 1위 대표제로 인해 지역구에서 1등 한 후보가 의석 다수를 점한다. 예컨대 A, B, C, D 네 정당이 40%, 30%, 20%, 10%를 득표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국회에 입성하는 표는 A정당을 지지한 40%뿐이다. 역설적이게도 A정당을 지지하지 않은 다수의 60%는 소수(사표)가 된다. 생활과 정치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이유다.

이는 청년을 비롯한 비정규직·여성·장애인·빈민·영세자영업자·실업자·성소수자 등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문제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들의 문제는 지역구 선거 이슈가 되기 힘들다. 국회의원이 이들을 외면해도 당선되는 데 지장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구조를 깨지 않는 한 ‘세 모녀’의 삶은 안타까운 사연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노무현-이명박-안철수, 다음은?

“국회의원의 생존이 지역 의제보다 국가 차원의 문제에 더 민감하도록 선거제도를 재구성하자는 겁니다. 정당에 투표하는 비례대표를 확대해 각 정당이 정책 중심으로 경쟁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계층을 대변하는 이들이 일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해요.” 정치가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게 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는 유권자에게 ‘○’(All) 아니면 ‘×’(Nothing)를 강요한다. 큰 차이도 없는 최악과 차악 가운데 최악을 심판하도록 내몰린다. 정치 내용도 설득과 합의보다는 심판과 단죄에 방점이 찍힌다.

반면 비례대표제가 확대되면 ‘누구를 어떻게 대변할 것인가’의 문제로 정치 내용이 달라질 가능성이 열린다. 비례대표제 확대는 정치 변화에 대한 열망이 새 인물로 수렴되는 한계를 넘어 구조를 바꿔보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태형씨는 한때 ‘안철수 현상’을 만들어낸 사람 중 하나였다.

“저희 또래에게 안철수는 선한 사람이 공공성을 유지하면서 저렇게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워너비였어요. 또 중원에 있는 안철수라면 잘못 돌아가는 시계추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어요. 지금은 좀 심하게 말하면, 정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 같아요. (웃음) 주변에서도 안철수 의원을 적극 지지했던 또래들이 실망하고 냉소로 돌아선 사례가 적지 않아요.”

태형씨의 기대와 실망은 익숙한 풍경이다. 구조는 가만둔 채 (구조 속) 인물만 바꾼 결과다. 변화에 대한 열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들었고, 또 다른 변화에 대한 열망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낳았다. 이후 문국현 전 의원을 거쳐 안철수 의원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시대정신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데는 2030세대의 힘이 컸다. 그들의 힘을 가장 먼저 알아챈 곳은 정당이다.

정당들은 정치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2030세대의 마음 잡기에 안간힘을 썼다. 이는 19대 총선을 앞두고 절정에 달했다.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은 27살의 이준석씨를 비상대책위원으로 ‘모셔왔고’, 민주당은 ‘슈퍼스타K’를 도입했다. ‘청년당’도 탄생했다. 모든 정당이 ‘반값 등록금’을 약속했다. 그 결과 30대 청년 9명이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하지만 청년의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태형씨는 청년비례대표제도가 “불편하다”고 했다.

“청년이라고 해도 고졸취업자·대학생·취업준비생·비정규직·기혼자 등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요. 청년 문제는 하나로 수렴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봐요. 큰 틀의 사회·경제적 맥락과 연계해 복합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정당 내 청년 정치인의 육성 체계 없이 생물학적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청년을 간택해 영입하는 현재의 청년비례는 필요하지 않다고 봐요.” 청년의 시각을 반영하고 청년 정치인을 육성하는 정당구조로의 개혁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욱씨는 “비례대표제 확대는 청년비례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의 표가 의석에 반영되고 그 효과로 인해 정당이 청년의 다양한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하자는 것”이라며 “이를 정치로부터 배제된 시민들로 확대해 정치적 효능감을 높이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현 제도는 시대정신을 국회 의정 활동에 반영하는 데도 걸림돌이 된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노동·복지·생태 등의 의정 활동으로는 재선이 힘들고 후원금도 들어오지 않아 의원들이 해당 상임위를 기피하는 게 현실”이라며 “토목·건설 등을 통해 지역에 생색낼 수 있는 국토교통위원회가 여전히 가장 인기 높은 상임위”라고 전했다.

비례대표제 확대, 기득권과 개혁의 대결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비례대표제 확대에 따른 다당제를 취하고 있다. 다당제에서는 특정 정당이 의회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 군소 정당이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생겨, 소외된 민의가 들어갈 틈이 열린다. 연대회의가 소외된 청년들의 민의를 모아내려면 두 개의 큰 산을 넘어야 한다.

첫 번째는 기존 정치권에서 비례대표제 확대안이 논의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새누리당은 고사하고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서조차 격렬한 반발이 예상된다. 양당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기득권(혹은 칼자루)을 쥐고 있는 탓이다. 비례대표 의원을 늘리려면 지역구 의원을 줄이거나 전체 국회의원 수를 늘려야 한다. 모두 험난한 일이다.

하지만 지난 3월 새정치민주연합 창당준비위원회 산하 새정치비전위원회는 지역주의 극복과 정치 개혁을 위해 ‘비례대표제 확대’를 제1의 과제로 발표했다. 공은 안철수 의원에게 넘어갔다. 정욱씨는 “비례대표제 확대는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잃어버린 사표를 찾아 투표한 만큼 의석에 반영하는 상식의 문제”라며 “기득권 그룹 대 개혁 그룹 간의 대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대선에서 정당들이 경제민주화를 놓고 경쟁한 것처럼 총선과 대선에서 비례대표제 확대 등 정치 개혁을 놓고 정당들이 경쟁하도록 견인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압박 방법은 ‘영업비밀’이다.

두 번째는 청년들이 정치세력으로서 독립적인 주체로 서야 한다. 그러려면 생활 문제와 비례대표제 확대가 연결된 문제임을 시민들에게 알려내야 한다. 연대회의 안에는 청년들이 겪는 일자리·주거·교육·빈곤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온 다양한 시민단체와 노조가 함께하고 있다. 연대회의는 소속 단체들을 통해 청년과 만날 계획이다.

“연대회의는 과거 정치인으로 수혈되는 고전적 의미의 운동권과는 달라요. 각자 다른 영역에서 당사자 운동을 하던 청년들이 작은 정책의 변화와 함께 이를 담보하는 근본적 구조를 바꾸기 위해 모였습니다. 초정파적인 운동이에요.” 그렇다고 기존 운동을 부정하거나 대립하는 건 아니다. 다른 정치 언어를 가진 새로운 운동 흐름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태형씨의 바람은 소박하면서도 크다.

“불안하고 팍팍한 사회를 만든 정치를 혐오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대안이 없는지 질문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연대회의는 비례대표 확대가 정답이라고 강요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던진 표가 살아서 정치에 반영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사회는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지 제각기의 방법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예요. 이번 논의가 그동안 외면받아온 노동·생태·복지 등의 문제를 공론화해 이들 주체가 함께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비례대표제도도 완벽한 건 아니다. 함량 미달 의원이 나올 수 있는데다, 정당 보스의 손으로 의원을 뽑는다는 부정적 인식도 적지 않다. 방법론적인 문제는 대안을 찾으면 된다. 비례후보 명부를 개방해 유권자가 직접 비례후보에 투표하게 하거나, 새정치비전위원회가 제시한 시민회의 구성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오늘을 사는 대다수 2030세대는 ‘이게 사는 건가’ 싶으면서도 희망의 고문대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다른 삶의 선택지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승자와 패자만 있는 정치가 성공과 실패만 있는 삶의 모습으로 재현되는 건 아닐까. 어쩌면 비례대표제 확대는 승자와 패자가 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live)는 의미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성공해서 생존(survive)하지 않으면 사지로 내몰리는 룰이 공정하냐고 묻고 있다.

글 김은성 객원기자 frame4@hanmail.net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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