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09:18 수정 : 2014.05.08 13:35

한겨레 박승화
88올림픽을 앞두고 제10회 아시안게임이 서울에서 열렸다. 대한민국 국민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버릴 듯한 깡마른 체구의 작은 소녀가 달리고 또 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800m 결승에서도, 1500m에서도 그리고 3천m에서도 1등을 차지했고 3개의 금메달을 목에 거는 3관왕이 되었다. 근육보다는 오히려 몸 안의 뼈대가 더 잘 보인다고 할 만큼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저토록 잘 달리다니! 모두가 경탄했고 ‘라면 소녀’라는 수식어와 함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육상선수 임춘애씨의 이야기다. 하지만 대중에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2009년 한 스포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세 차례나 비밀스럽게 성별 검사를 받아야 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800m에서 우승한 이후 주변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경기를 하는 도중에 성별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고도 다음 경기에서 그녀는 또 우승을 했고 결국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녀는 다시 한국체육과학연구원에서 더욱 정밀한 성별 검사를 받았다. 지금 그녀는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무엇이 그토록 의심스러웠을까? 이런 소동이 남모르게 일어났던 1986년 바로 그해 12월25일, 박은선 선수도 큰 울음을 터뜨리며 이 세상에 태어났다.

축구선수가 될 운명, 시샘을 받을 운명

축구에 깊은 관심이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박은선 선수에 대해서는 지난해 ‘성별 논란’이 있었던 선수 정도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은선은 어린 나이에 이미 한국 여자축구계에 큰 족적을 남긴 선수다. 16살에 국가대표선수가 되었고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뽑는 ‘올해의 선수’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박은선은 중학교 2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친오빠가 운동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오빠를 따라다니며 놀긴 했지만 운동선수가 될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재능은 숨길 수 없는 법인지 중학교 1학년 때 학교 대표로 육상대회에 나온 박은선을 눈여겨본 다른 중학교의 축구팀 코치가 축구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처음엔 가족도 여자가 무슨 축구냐고 반대했고 자신도 싫다고 거절했지만, 결국 축구팀이 있는 창덕여중으로 전학을 가고 축구선수로 등록해 그라운드를 누비게 되었다.

“어릴 땐 몸집이 왜소하고 키도 작았어요. 그땐 절 보고 남자 같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축구를 하면서부터 키가 크고 골격도 커지기 시작했어요. 발도 작았는데 커지고…. 그래서 아, 내가 축구를 하려고 태어났나보다라고 생각했죠.”

축구를 하기에 최적의 몸으로 자라는 것을 운명으로 여긴 그녀는 점점 더 축구에 몰두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돼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미국 월드컵 출전권을 걸고 2003년 6월8일에 열린 홍콩팀과의 아시아지역 예선전이 그녀의 A매치 데뷔전이다. 당시 나이는 16살6개월이었고 이는 남녀 축구계를 통틀어 최연소 A매치 출전 기록이었다. (이후 2006년 10월 지소연 선수가 15살8개월로 이 기록을 깬다.) 박은선이란 걸출한 운동선수가 드디어 그 날개를 활짝 펴게 된 것이다.

이어 미국에서 열린 여자월드컵대회에 나가 예선에서 7골을 터뜨리며 본선 진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04년 그리스 아테네올림픽에도 출전했고 그해 6월에 열린 아시아 U-19 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8골을 넣으면서 득점왕과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특히 숙적인 중국에 3 대 0으로 이긴 결승전에서 박은선은 혼자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한국에 우승컵을 안겼고, 이때부터 ‘여자 박주영’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 대회에서의 우승으로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여자축구청소년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 여자축구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넣은 첫 번째 골의 주인공 역시 박은선이었다.

2005년엔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 나가 다시 중국을 꺾고 한국을 원년대회 우승국으로 이끌었다. 전년도의 눈부신 활약 덕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FIFA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렇게만 보면 2005년에 박은선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축구선수 중 한 명이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이때부터 그녀의 시련과 방황이 시작됐다. 국가대표선수로 혼신의 힘을 다 바쳐 그라운드를 뛴 그녀에게 세상은 오히려 경기 출전 금지라는 잔인한 답례를 보낸 것이다.

그해 2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박은선의 진로는 모두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여러 실업팀과 대학에서 입단 제의가 밀려왔다. 고민 끝에 박은선은 대학이 아니라 실업팀에 가기로 결심했는데,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부모님의 어깨에 놓인 짐을 좀 덜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종 선택은 신생 구단인 서울시청이었다. 마침 고등학교 때 자신을 가르쳤고 평소 존경해오던 은사가 서울시청의 감독이기도 했기에 그녀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하지만 서울시청에 막상 입단하고 나니 갑자기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서랍에서 잠자고 있던 한국여자축구연맹의 규약에 있는 선수선발 세칙 제3조 3항을 근거로 한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결국 졸업하자마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선수들은 대학에 입학해 2년간 뛰어야 한다”는 조항을 어겼다는 이유로 한국여자축구연맹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2년간 출전 금지라는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 열렸던 대회는 총 7개였고 그중 4개가 연맹에서 주최하는 대회였다. 반 이상의 경기를 출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2005년 당시 <서울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연맹에서 주최하는 대회가 아니더라도 만약 박은선이 출전하면 그 대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실업팀도 있었다고 한다. 박은선으로는 충격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될 것은 없다며 온갖 달콤한 제안을 하던 실업팀과 6개월만 뛰면 실업팀으로 보내주겠다고까지 하던 대학팀이 아니었는가. 한 선수의 앞길을 이렇게 막아도 되는 것일까.

이제 와 헤아려보면 이런 상황에서 박은선이 그해 8월 동아시아여자축구대회에 출전해 결승전에서 골을 넣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팀에 소속돼 있어도 팀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선수로 훈련만 하는 생활을 계속 견디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축구 자체에 대한 회의도 깊었을 것이다. 결국 2006년 국가대표 훈련 도중 합숙소를 무단 이탈하는 등 물의를 일으켜 6개월 출전 및 자격 정지를 받게 된다.

지독한 방황, 돌아온 풍운아

박은선이 없는 여자축구 국가대표팀의 성적은 예상보다 좋지 않았다. 2003년에는 월드컵 본선까지 진출했지만 2007년 열리는 월드컵엔 진출권도 따내지 못했고, 2006 아시안게임에서는 3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마침내 2007년 1월 박은선에 대한 징계가 해제되고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박은선이 포기했다. 축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쪽지를 남기고 다시 숙소를 이탈했다.

인터뷰에서 이 시기를 두고 박은선은 이런 말을 했다. “어릴 때 꿈은 당연히 국가대표선수가 되는 거였죠. 그런데 제가 막 징계를 맞고 그러면서 나는 우리 팀에서는 하지도 못하는데 대표팀에 가서 뭐하겠나 싶기도 했고, 또 어른들이 너무 싫었어요. 굳이 이렇게 나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데, 나를 내버려둬도 되는데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나 싶기도 했고. 그래서 축구와 관련된 것이 다 싫었어요, 그땐.”

그런 험한 일을 겪으면 누군들 이런 맘이 들지 않을까. 축구를 괜히 시작했다는 후회가 들곤 했지만 축구를 계속 외면한 채 살 수는 없었다. 축구장이 그립기도 했고 자신을 뒷바라지해주던 아버지가 골수암 판정을 받게 되자 6개월 만에 다시 이를 악물고 돌아왔다.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복귀전이던 제15회 여왕기 전국종별여자축구대회에서 해트트릭으로 3골을 기록하며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9월에 열린 추계여자축구연맹전에서도 6골을 넣으며 대회 득점왕에 오르지만 경기 도중 오른쪽 발목을 다쳐 재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2008년 3월 국가대표에 차출되지만 이번엔 박은선이 아직 자신의 몸과 마음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고사한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이었던 탓일까. 2009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박은선은 또다시 잠적했고 그해 11월에야 소속팀으로 복귀했다. 그렇게 맞이한 2010년 시즌 전반기의 성적은 예전만 못했다. 초반에 골을 넣긴 했지만 서울시청은 오히려 연패의 늪에 빠졌다. 그 와중에 부친상을 치르고 아버지의 병원비로 막대한 빚을 졌다. 국가대표팀에 차출됐지만 체력 부족을 이유로 중도 탈락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박은선이 우월한 체격 조건만 믿고 독단적으로 플레이하기 때문에 5년 전과 달리 전반적으로 기량이 향상된 여자축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그런데도 2004년과 2005년에 박은선의 활약으로 대패를 경험한 바 있는 중국 감독은 박은선의 복귀 소식만 듣고도 2010년 여자아시안컵대회를 앞둔 인터뷰를 통해 만약 박은선이 국제 경기에 나온다면 성별 검사를 요청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박은선은 또다시 구설에 올라야 했고, 결국 2010년 7월 휴가가 끝난 뒤에도 아무 말 없이 팀으로 복귀하지 않고 훌쩍 사라졌다.

계절이 한 바퀴 반을 돌아섰던 2011년 11월, 박은선은 다시 축구장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서울시청의 서정호 감독은 박은선을 아무 말 없이 받아주었다. 겨울훈련 기간을 끝내고 WK리그 2012 시즌에 출전해 10골을 넣었다. 득점 2위였지만 만족할 만한 성적은 아니었다. 자신의 공백기를 인정하고 몸을 만들어가면서 체력뿐만 아니라 기술력 향상에 힘썼다. 묵묵히 노력한 대가인 양 2013년 시즌에서는 20경기를 뛰면서 무려 19골을 넣었다. 득점왕에 올랐고 만년 하위권이던 서울시청은 준우승팀이 되었다. 경기 내용을 보면 더욱 놀랍다. 서울시청은 박은선을 중심으로 한 팀플레이가 확실하게 살아나 6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달렸고, 그중 한 경기에서는 박은선 혼자 4골을 넣으며 역전승을 거두었다. 서정호 감독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다려줬더니 이렇게 잘하네요. ‘가르침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선수입니다”라며 기뻐했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천재들이 곧잘 혼자 모든 걸 다 하려는 나쁜 습관에 빠지곤 하는데 박은선이 드디어 축구를 11명이 함께 하는 팀플레이로 받아들이고 다른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은선도 지난 방황으로 낭비한 시간이 너무 아깝기에 남은 선수 생활 동안은 정말 최선을 다해 잘 뛰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한민국의 여자 축구선수로 다시 한번 멋지게 활약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왜일까. 아직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뛰어난 여자 운동선수로 산다는 것

2013년 11월5일치 신문에 서울시청을 제외한 6개 실업팀 감독들이 박은선 선수의 성별 검사를 요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논란이 크게 일어나자 6개 팀 감독들은 사적 자리에서 나눈 농담일 뿐이었다고 발뺌했지만 ‘한국 여자축구 실업 감독 간담회 안건’이란 제목으로 축구연맹에 보낸 공문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밝혀졌다. 리그의 경기 운영 방식이나 선수 드래프트 등에 대한 의견, 국가대표팀 감독의 선정 기준에 대한 제안 등이 포함된 이 공문의 7번 항목은 ‘박은선 선수 진단’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됐다. 박은선 선수의 출전 여부를 2013년 12월31일까지 정확히 판정해주지 않으면 2014년 시즌 출전을 거부한다는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이 사건은 2005년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자신들이 영입하고자 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던 내규를 꺼내어 국내 경기에 뛰지 못하게 했던 것과 같이, 2013년에 박은선 선수가 대활약을 펼치자 다시 선수의 발목을 묶어두기 위해 ‘성별이 의심된다’는 카드를 꺼낸 것이다. 6개 팀 감독들은 박은선 선수를 처음 본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10여 년 전부터 직접 가르치기도 하고 함께 운동을 한 사이였기에 이들에게 박은선 선수의 ‘성별’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여서 무려 ‘결의’까지 했다. 이 부분이 기가 차는 부분이다. 감독들은 대한체육회나 대한축구협회에 선수의 성별 판단에 관한 규정이 따로 없다는 것을 몰랐을까. 몰랐다면 그런 절차에 대한 조사와 사전 지식도 없이 일을 벌였으니 어이없고, 만약 알고도 그랬다면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면서 시즌 전체를 보이콧하겠다는 협박을 한 셈이니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유독 여성선수들에게만 제기되는 ‘성별 의심’을 한번 살펴보자. 흔히 성별은 태어났을 때 외부 생식기의 모양을 보고 결정되며, 그 성별은 우리나라의 경우엔 주민등록번호로 서류상에 기재된다. 또 학교에서는 성별이 XX/XY라는 염색체로 남녀 구분을 할 수 있다고 배운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성별 구분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신체기관의 모양도, 염색체도, 호르몬도 명확한 차이를 두고 양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정함이 생명인 스포츠계일수록 오히려 성별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자칫하면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XY염색체는 남성이라 알고 있지만 Y염색체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남성은 아니다. 1990년대에 학자들은 Y염색체가 남성의 성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SRY(Sex-determining Region Y gene)라는 유전자의 역할임을 밝혀냈다. 그래서 XX염색체로 태어나도 이 SRY를 가지고 있으면 고환이 있는 남성으로 자라기에 성별 판단의 기준으로 염색체가 아니라 SRY의 유무로 판정하려 했다. 하지만 최근엔 이마저도 폐기됐다. SRY가 있고 고환에서 남성호르몬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호르몬이 신체에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생식기의 모양이 아니라 흔히 남성호르몬이라고 부르는 테스토스테론이 골격과 근육의 생성에 관여하기 때문에 체내 남성호르몬의 양을 기준으로 판단하자고 주장한다. 체외에서 고의적으로 호르몬을 주입하는 경우라면 불법적인 약물 투여에 해당돼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겠지만, 선천적으로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량이 다른 사람들보다 좀 많다고 하여 스포츠 선수의 자격을 박탈할 수는 없다. 테스토스테론 자체가 저절로 운동을 더 잘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의 남자들이 여성 운동선수보다 호르몬 양은 많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체계적으로 훈련받고 스스로를 단련해가는 여성선수들보다 운동을 더 잘하는 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어떤 마라토너가 남들보다 뛰어난 폐활량을 타고났다고 해서, 어느 농구선수가 2m가 훨씬 넘는 키를 가졌다고 해서 이들이 경기를 뛰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타고난 신체란 각자의 타고난 장점이거나 혹은 단점일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의학 지식이 아니다. 이런 모든 것을 모른다고 해도 더 심각하고 명백한 의문을 놓칠 수는 없다. 감독들은 왜 하필 지금 이때에 성별을 거론하며 박은선 선수의 출전 여부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는가.

성별 논쟁은 스포츠 정신이 지켜야 할 공정성을 명분 삼아 제기된다. 만약 여성들이 자신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성과 경기를 해야 한다면 그것만큼 불공정한 것이 없다는 거다. 하지만 스포츠 정신에 어긋나는, 매우 불공정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었던 건 바로 6개 팀 감독들과 그에 동조한 이들의 행동이다. 왜냐면 그들의 관심은 공정함의 여부가 아니라 자신들의 입지와 이익에 위협이 되는가 아닌가이기 때문이다.

2009년 전세계적으로 알려졌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육상선수 캐스터 세메냐의 경우도 그러했다. 영국의 칼럼니스트 캘리 힐디치는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이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800m 결승전을 몇 시간 앞두고 기자회견을 열어서 세메냐의 성별 검사를 시행했다고 밝힌 건 매우 비열한 짓이라고 지적했다. 테스트 결과가 나오려면 몇 주의 시간이 걸리는데 정확한 결과도 없이 선수에게 부담을 줄 뿐 아니라 경기 뒤에도 언론이 계속 이슈로 다룰 게 뻔한 기자회견을 굳이 한 것이다. 예상대로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언론은 선수의 인권보호를 위해 비공개가 원칙인 검사 결과를 자신들은 비공식적으로 확인했다며 기사화했다. 어차피 결과는 비밀이어서 보도가 거짓인지 사실인지를 밝혀내긴 어렵다. 그저 당사자의 삶만 힘들게 할 뿐. 세메냐는 여자선수로 계속 활동 중이지만 그 뒤론 좀처럼 1등 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임춘애 선수가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이 됐을 때의 키는 162cm였다. 그녀는 당시 자신의 가슴이 작고 생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을 받은 것 같다고 하지만, 2차 성징이 발달하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며 운동선수에게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다. (아시안게임 이후 임춘애 선수는 키가 6cm나 더 자랐다고 한다. 계속 성장 중이었던 것이다.) 만약 금메달이 아니라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땄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같은 이유로 성별 검사를 세 번이나 받았을까.

한국에선 양궁이나 탁구 등 여성이 더 잘한다고 믿는 종목의 경우 남자선수보다 더 잘한다고 성별을 의심받지 않는다. 하지만 육상이나 축구, 야구와 같이 전통적으로 남성의 운동으로 지목된 종목들에선 앞으로도 뛰어난 여자선수들에 대한 의심이 쉽게 거둬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왜 여자들이 잘 달리면 ‘남자처럼 달린다’고 말하는 걸까. ‘여성과 어울리는 것’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이번 올림픽을 뜨겁게 달굴 10인의 미녀 선수는 누구’와 같은 기사들? 아무리 운동선수라고 해도 성적 대상화를 놓치지 않는다. 얼굴이든 허벅지이든 가슴이든 신체의 어느 부분이라도 기어이 ‘여성화’를 시켜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여자축구, 기대되는 앞으로의 역사

여자축구가 있는 줄 몰랐다는 독자도 있겠지만, 한국 여자축구의 역사는 해방 직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6년 최초의 여자축구팀이 생겼고, 1948년에는 전국여자축구대회가 열리고, 1949년에는 3개의 중학교에 축구팀이 결성될 정도였다. 전쟁이 터지면서 사라졌지만 1985년에 부흥을 시작해 1990년에 최초의 여자국가대표팀이 중국 베이징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했다. 2001년 한국여자축구연맹이 설립되고 2009년부터는 남자축구의 K리그처럼 WK리그가 시작됐다. 차이가 있다면 남자축구와 겹치는 것을 피해서 월요일에 경기가 열리고 서울시청, 부산 상무, 인천 현대제철 등 각 팀마다 지역명은 붙어 있으나 연고지 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전용 구장이 없기에 그동안 충북 보은, 강원도 화천, 경기도 이천, 이 3곳을 돌며 경기를 뛰어야 했다. (올해부터 연고지 시범 운영이 시작돼 수원과 대전에서 홈경기가 열린다.)

이런 열악한 여건임에도 지난해에 박은선 선수를 두고 축구계가 그런 논란이나 만들어낸 건 꽤 한숨 나오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박은선 선수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축구를 펼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난해의 상처를 딛고 박은선은 2014년 시즌 초반 6경기에서 7골 2도움의 활약을 했고 마침내 다시 국가대표 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4년 만의 일이다. 여자축구대표팀이 소집됐던 지난 4월22일 대한축구협회의 홈페이지 메인 화면 가득히 박은선 선수의 환한 웃음이 떴고, 입소 장면을 찍기 위해 파주 NFC(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에는 취재진이 몰리기도 했다.

이제 여자축구대표팀은 5월14일부터 베트남에서 열릴 여자 아시안컵 출전을 준비한다. 내년 캐나다 월드컵 출전권 5장이 걸려 있는 중요한 대회다. 벌써부터 월드컵 본선 진출뿐만 아니라 우승까지 바란다는 기사들이 나오는 걸 보며 나는 다른 건 모르겠지만, 여자 축구선수들도 남자팀처럼 잔디구장에서 연습하고 경기할 수 있길 바란다고 읊조려본다. 자본의 논리와 이기심, 그리고 무능함이 결합해 빚어내는 비극을 목도하고 있는 요즘, 어른들이 싫었다는 박은선의 말이 새삼스레 더 아프게 남은 탓일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잔디구장”이라고 답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저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지키고 돌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글 한채윤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운영위원. 1998년 한국 최초의 동성애 전문지 <버디>(BUDDY)를 창간했다. 2001년부터 퀴어문화축제(kqcf.org) 기획에 참여하고 있으며, 2002년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org)를 조직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생계는 주로 강의와 원고로 해결하고 있는 전업활동가이며, 낸 책으로는 <한채윤의 섹스 말하기> <남성성과 젠더>(공저) 등이 있다. ‘마포 민중의 집’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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