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11:40 수정 : 2013.01.22 19:30

연구연구소 엠블럼
 트위터에는 ‘해시태그’라는 게 있다. 일반적으로 블로그나 개인 홈피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태그’(주제어) 기능과 비슷한 것인데, 트위터에서는 ‘#’ 뒤에 주제어를 붙여 입력하는 방식으로 해시태그를 완성한다. 물론, 이 기능은 검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쓴 트윗 내용이 어떤 특정한 이슈나 주제에 관한 것이라면, 140자 트윗 안에 ‘#주제어(이슈가 되는 단어)’를 적어 넣은 채로 트윗을 완성한다. 그러면, 해시태그가 된 ‘#주제어’는 트윗 안의 다른 글자들과 구별되어 공개되고, 그렇게 구별된 해시태그를 클릭하면, 동일한 해시태그를 넣고 작성된 수많은 다른 트윗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연구 연구소’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트위터 사용자가 아닌 분들을 위해 ‘해시태그’에 대해 잠시 설명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지금 얘기하려고 하는 ‘연구 연구소’는 바로 이 ‘해시태그’로만 존재하는 연구소이기 때문이다. ‘연구 연구소’는 트위터라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시작되고 확장된 네트워크 그룹의 일종이다. 이 조직- 이라고 이름 붙이는 게 옳은지도 잘 모르겠지만- 의 실체는 참으로 불명확하고, 조직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도 모호하다. 이 ‘조직’은 가입 방법이나 가입 후의 활동내용이나 모두 무의미해 보일 만큼 허술하다. ‘연구 연구소’를 시작한 사람은 있으나 관리하는 사람은 없고, 매서운 조직의 목표나 행동방침도 없다. 그러나 ‘총체적 부실과 무의미’로 무장한 것 같은 이 ‘연구 연구소’의 허술함이 가진 특별한 힘이 있다. 기존의 시각으로 보자면 한없이 장난 같기만 한 해시태그 조직 ‘#연구 연구소’의 유의미한 실체에 대해서 몇 가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트위터 사용자이고, ‘#연구 연구소’ 선임 연구원이다. (아, 물론 오프라인 세상에서 내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은 따로 있다.) 선임 연구원은 나 말고도 많다. 다만, 나는 연구 연구소가 시작되던 초창기에 “대체 ‘연구 연구소’라는 데가 뭐하는 데냐?”고 궁금해 하면서도 당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애매하고 광범위하며 허술한’ 조직의 규정과 의미를 짧은 글로 정리한 적이 있고, 그게 ‘연구 연구소’의 실체에 관한 유일한 공식적인 글이어서, 이번에도 역시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선임 연구원’이라고 해서, 뭔가 연구 연구소 조직 안에서 크게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의미 있는 일을 담당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나는 일개 트위터 사용자일 뿐이다.

  

 아무나, 아무거나 연구한다 

 연구 연구소의 연구원이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트위터 프로필에 자기 스스로 ‘#연구 연구소 연구원’이라고 적은 후, 연구 연구소 페이지를 관리하는 수석 연구원에게 알리기만 하면 된다. 그런 후에 연구 연구소 연구원으로서 하는 일은? 그냥 ‘아무거나 질문’하는 것이다. 무의미하고, 중요할 것 없는 사소한 질문을 트윗으로 작성하되, 해시태그 ‘#연구 연구소’와 함께 작성하는 것뿐이다.

 누군가 ‘왜 ○○라면은 생각보다 맛이 없을까?’ 라는 질문을 ‘#연구 연구소’ 이름으로 올린 적이 있다. 그랬더니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질문에 대한 ‘연구 결과’를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했다. 면발의 굵기와 끓이는 시간의 관계, ○○라면의 광고 및 홍보가 표방하는 이미지와 실제로 끓여진 라면의 상태가 보여주는 간극 등에 대해 꽤 길고 자세하게 언급하며 ‘왜 ○○라면이 생각보다 맛이 없는지’를 설명했다. 그야말로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에 ‘답 같지도 않은 답’ 아닌가. 이처럼 ‘#연구 연구소’ 안에서는 그런 질문과 답이 난무한다.

 누군가의 어떤 질문- 그것이 아무리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이라 해도- 이 단지 ‘질문’이 아니라 ‘연구 주제’로 격상되었기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유일하고 절대적인 정답’의 권위 대신, 공동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의 대답, 즉 또 하나의 ‘연구 결과’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된다. 모든 질문과 대답은 ‘모르는 사람이 하는 질문과 아는 사람이 내리는 정답’ 같은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공동의 연구 주제에 대한 하나의 연구 결과’라는 동등하고 수평적인 관계가 되면서 자유로운 소통을 독려하는 것이다.

 ‘#연구 연구소’ 해시태그를 클릭해 검색하면 온갖 다양한 질문들이 보인다. 매우 한심한 질문도 있고,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는 흥미로운 질문도 있다. 내가 답할 수 있을 것 같은 질문도 있고, 나로서는 전혀 궁금할 것 같지 않은 질문도 있으며, 잊고 있었지만 나 역시 궁금해 하던 질문도 있다. 개인의 ‘사소한 질문’, 그 하찮은 호기심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꺼내어 흔적을 남기게 하는 것, 그것이 ‘연구 연구소’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 다양한 (때로는 한심하기까지 한) 질문과 호기심을 ‘연구 주제’라고 불러주는 것은 그저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서로의 ‘시각’을 완전히 존중하기로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해시태그 ‘#연구연구소’를 통해 쏟아내는 질문들은 서로 전혀 무관하던 사람들을, 그리고 서로 전혀 무관심하던 세계와 시각들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발견하게 하고, 관심 갖게 한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것을 궁금해 하면서 살고 있는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대단한 기대나 목적 없이 그저 심심해서 ‘연구 연구소 연구원’이 된 사람들은 ‘연구 연구소’라는 해시태그 하나로 갑자기 서로에게 유의미한 존재가 된다. ‘연구 연구소 연구원’이라는 정체성을 자신의 일부로 인정했으니 ‘#연구 연구소’라는 해시태그에 호의적일 수 있고, 그 해시태그를 검색하며 서로의 질문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서로 전혀 무관했던 ‘존재’를 호의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공존’과 ‘소통’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믿는다면 ‘#연구 연구소’는 낯선 타인의 하찮은 질문을 존중하는 연습을 통해 가볍고 유쾌한 기분으로 공존과 소통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천부 호기심권’을 존중하라 

 ‘연구 연구소’가 공식적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

 -‘연구 연구소’는 완장과 스펙의 억압에서 자유롭고 싶은 개인의 사소한 호기심을 연구하는 집단입니다.

 -‘연구 연구소’의 연구는 당연히 국익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연구 연구소’는 거대담론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꼬물거리며 일상을 사는 우리의 잡다하고 쓸데없는 ‘호기심’, 그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물음들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고, 그 단상들을 ‘연구’로 격상시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연구 연구소’는 자신의 호기심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며 자발적으로 연구소 가입 의사를 밝히는 모든 분들을 연구원으로 모십니다. 아무것도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연구 연구소’ 연구원들은 ‘세상에 이런 쓸데없는 걸 궁금해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연대하고, 미처 관심을 두지 못했던 타인의 쓸데없는 연구 주제를 보며 자신의 연구력을 향상시킵니다.

 

 그리고, 이 내용에 동의하거나 이를 재미있게 여기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트위터 계정 프로필에 ‘#연구 연구소 연구원’이라는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구의 허락이나 인정 없이 그냥 자신들의 연구를 시작한다. 매우 열렬히 질문을 쏟아내는 연구원도 있고, 별 질문이 없는 연구원도 있다. 연구력의 적극성에 따라 연구소에서 뭔가를 해주는 것도 없고, 연구 주제의 품격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연구 연구소’는 단지,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누구나 갖게 되는 ‘인권’ 중에 특별히 ‘아무거나 궁금해 할 권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연구 연구소’라는 해시태그로 독백과도 같은 각자의 ‘호기심’에 의미를 부여하고, 서로 무관하거나 상충할 것 같은 다양한 ‘질문’들을 ‘연구 연구소’라는 이름의 집단으로 연결하는 것. 이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내건 ‘#연구 연구소 연구원’ 표시는 ‘나는 당신의 천부 호기심권을 인정한다’는 표시다. 그리고, ‘그러므로, 당신도 나의 호기심을 인정하라’는 요구의 표시이기도 하다.

 

 ‘결속’이 아닌 ‘공존’의 조직 

 ‘연구 연구소’ 이름으로 몇 차례 오프라인 모임을 한 적이 있다. 모여서 영화나 공연을 함께 보는 행사였는데, 이런 오프라인 모임에 대해 ‘연구 연구소’가 가진 구체적인 계획이나 특별한 방향은 없지만, 한 가지 공식적인 입장이 있다. ‘공식적인 뒤풀이 모임’은 없다는 것이다. 우연히 영화를 볼 일이 만들어지면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이긴 한다. 그러나, 볼 영화를 다 보면 각자 알아서 흩어지는 식이다. ‘연구 연구소’가 친목 도모를 위한 인맥 네트워크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만나면 친해지기 마련이고, 친해지다 보면 좀더 친해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간극이 생길 것이고, 혹은 오프라인 모임에 좀더 적극적일 수 있는 처지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도 간극이 생길 것이다. ‘연구 연구소’라는 조직으로 만나 서로의 ‘호기심’보다 서로의 ‘정체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연구 연구소’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모든 호기심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고자 만들어진 ‘조직’이기에, 더 중요한 사람과 덜 중요한 사람이 생기는 것을 피하고, 좀더 가까운 사람과 좀더 먼 사람이 생기는 것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구 연구소’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 끈끈하고 밀접한 관계를 만들며 ‘결속’으로 하나 되는 조직이 아니라, 각자 ‘다양한 질문’을 가지고, 각자의 시공간에 존재하며 ‘연결’되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공존’의 조직이다.

 

 아무거나 질문한다, 고로 아무 때나 존재한다  

 ‘연구 연구소’가 ‘연구원’으로 인정하는 유일한 정체성은 그의 ‘질문’밖에 없다. 그가 가진 ‘호기심’ 외에 그가 가진 다른 정보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 갖지 않는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하고, ‘허락’이 필요하겠나. 그래서 ‘연구 연구소’는 자신을 소개하는 글 첫머리에 밝힌다. ‘나는 아무거나 질문한다, 고로 아무 때나 존재한다.’

 ‘답을 내리는 삶보다, 궁금해 하는 삶이 더 재미있지 않겠나?’ 하는 만화가 강도하 작가의 질문이 단초가 되어 시작된 ‘연구 연구소’는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확실히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재미삼아’ 연구 연구소 배지를 제작하면 어떨까 했을 때, 누군가 ‘재미있겠다’고 하며 선뜻 후원을 자청한다든지, ‘재미삼아’ 연구 연구소 주제가를 만들면 어떨까 했을 때, 연구연구소 연구원인 가수가 선뜻 주제가를 만들어 준다든지, 소장의 단골 돼지국밥집 주인에게 연구 연구소에 대해 얘기했더니 ‘재밌겠다’며 선뜻 ‘연구 연구소 연구원 500원 할인’를 자청한다든지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연구 연구소’라는 이 실체 없는 호기심 조직이 ‘재미있어 보인다’며 가맹점을 자처한 카페나 식당들도 있다. 가끔 있는 오프라인 모임에 책과 선물을 보내와 연구 연구소 연구원들에게 나눠주는 사람들도 있다. 이유는 그저, 하찮은 질문으로 연결된 이 허술한 조직 ‘연구 연구소’가 ‘재미있어 보이기’ 때문이란다.

 트위터에서 ‘아무나, 아무거나 질문하는 사람들’이라는 흐릿한 정체성을 가진 조직 ‘연구 연구소’는 지금도 계속해서 가입과 탈퇴가 이어지고 있다. 아무도, 아무 질문도 하지 않게 되면, 더 이상 누구도 ‘#연구 연구소’라는 해시태그로 질문하지 않게 되면, 이 조직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곳곳에 숨어 있는 사소한 개인의 하찮은 질문이 계속되는 한, 별다른 관리 없이도 존재하고 확장될 것임도 분명하다. 느슨한 결속력, 흐릿한 정체성을 오히려 미덕으로 삼은 조직이라 극적으로 무너질 일도 없어 보인다.

 (추신. ‘연구 연구소’는 ‘연구 연구소’를 본따 트위터상에 한발 늦게 만들어진 ‘영구 영구소’, ‘연구 연구원’, ‘연구연구 연구소’, ‘연구 연구회’와는 아무 관계가 없음을 이 지면을 빌어 밝힙니다.)

박새봄 극작가 혹은 극텍스트 생산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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