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7 17:36 수정 : 2014.06.13 13:22

홍원석씨가 노역수들을 목격한 곳은 서울남부교도소 의료과다. 노역수들은 건강검진 과정에서부터 벌금액이 구별된다고 한다. 푼돈을 내지 못해 잡혀 들어온 노역수들에게는 구구절절한 사정만큼이나 아픈 곳도 많다.
시작은 가벼운 방담이었다. 어느 미지근한 봄날, 20~30대 남성 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장소는 형광등 빛이 하얗게 들어찬 회의실이다. “녹음 시작하겠습니다.” ‘큐’ 사인이 떨어지자 각기 다른 목소리들을 따라 음량을 표시하는 녹음기의 바늘이 오르내린다.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지난해 서울남부교도소에서 출소한 전길수씨와 홍원석씨, 재작년에 의정부교도소에서 출소한 김영준씨, 이들보다 먼저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현민(‘감옥의 몽상’ 필자)씨다. 모두들 병역거부를 이유로 1년 이상 징역형을 살았다.

2시간 남짓 이들이 자유롭게 털어놓은 수감생활은 한 묶음의 퍼즐 같았다. 각자가 개별적인 장면을 클로즈업하는데도 서로 맞닿아 있는 연결점이 보였다. 깃털처럼 떠도는 말들의 꼭짓점을 이어 긋자 큰 그림이 보였다. 그림의 정체는 견고한 담장 안에 형성된 별개의 권력 세계였다. 새로운 세계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쌓아올려진 문화와 규범, 관계들의 합작이다. 그중에서도 일반 재소자들이 목격했던 노역수들의 초상은 담장 속 세상의 가장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낸다.

서울남부교도소 영치과

밤새 들어온 짐의 크기가 만만치 않다. 수용자들이 들고 다니는 짐의 무게는 삶이 고된 정도에 비례한다. 그동안 서울남부교도소의 영치창고를 지키면서 깨달은 점이다. “칫솔, 면도기, 비누, 수건….” 가방 하나를 풀어헤치고 장부를 써내려가는 손이 바쁘다. 거의 이동 만물상 수준이다. 건설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작업화와 안전조끼도 눈에 들어왔다.

‘공사장 인부인가?’ 십중팔구는 노역수의 짐이다. 작업복, 부두출입증, 전당포전표, 복지카드 등은 주로 노역수의 가방에서 나온다. 벌금 몇 푼도 버거운 노역수들 중에는 경제활동이 어려운 장애인이나 떠돌이 생활을 하는 일용직노동자가 많다. 겨울이면 비슷한 구성의 짐 꾸러미가 배로 늘어난다. 답답한 담장 안이 누군가에게는 추위로부터의 피난처가 된다.

나는 입소 7개월차에 공장에서 운영지원팀으로 옮겨왔다. 흔히 관용부(官用部)라고 부르는 운영지원팀은 교도소 내부의 잡다한 일을 맡는다. 이발, 청소, 영치 등이 관용부 직업군이다. 입소자들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거쳐야 하는 절차가 영치(領置)다. 재소자들은 신분 확인 뒤 입고 있던 옷이나 외부에서 들여온 물품을 영치창고에 맡긴다. 내가 맡은 영치 업무가 바로 재소자들의 개인 소지품을 관리하는 일이다.

서울남부교도소 의료과

몸은 공장에 있을 때가 더 편하다. 공장에서는 20~30명이 일주일 안에 정해진 작업 할당량만 채우면 되기 때문이다. 오전에 1시간30분, 오후에 2시간 정도만 일하면 충분하다. 영치과에서는 쉴 틈이 없다. 업무량에 비해 직원 수가 턱없이 부족해서다. 이제 좀 숨을 돌리나 싶었는데 금세 복도가 시끄러워졌다. 눈앞에 들이닥친 것은 수십 명의 입소자다. “아니, 왜 이렇게 많아요?” 피곤한 안색의 교도관이 심드렁하게 답한다. “이주노동자 단속 기간이야.”

벌금을 내지 못해서 노역형을 살러 온 노역수들의 무리다. 이주노동자 단속 과정에서 덩달아 걸린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단속 기간에는 심신박약자나 노숙인도 많이 잡혀온다고 한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 큰소리를 치는 사람, 술에 취해 있는 사람.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몇몇 보인다. 일반 징역수들 사이에선 볼 수 없는 유형의 인물이다. 이들의 표정에서는 낯선 환경이 빚어낸 위축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일까. 험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교도소의 묵직한 분위기는 별게 아닐지도 모른다.

사기, 폭력, 상해…. 좀 전에 영치를 거쳐 의료과로 넘어온 사람들에게 들은 죄명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기죄는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한 것이고, 폭력죄는 술 때문에 붙은 시비다. 이런 사람들이 내야 할 벌금은 대개 200만원을 넘지 않는다. 내가 본 노역수들의 복역 기간은 벌금액에 따라 최소 2일에서 200일까지 다양했다.

‘2일 복역’이라는 기록을 세운 노역수는 특별한 경우다. 벌금이 무려 50억원이었는데, 입소 다음날에 전액을 내고 출소했다. 어마어마한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소수의 경제사범들뿐이다. 이들의 일당은 몇백만, 몇천만원을 뛰어넘는다. 노역 기간의 법적 한도가 최대 3년이기 때문이다. 억대의 벌금액을 기간에 맞춰 나누다보면 일당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노역수들은 단돈 몇 푼이 수중에 없어서 형을 산다. 벌금액이 적을 때는 일당도 5만원을 넘지 않는다.

노역수들이 머무는 방도 벌금액에 따라 달라진다. 벌금액이 억대로 넘어가는 사람들은 경제범 방에 있다가 미지정 방으로 보내진다. 그중에서도 끗발이 있다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의 행보를 택한다. 원예나 세탁처럼 편한 직군으로 출역(出役·수용실 외부에서 작업하는 것)을 나가거나 독거 사동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일반 재소자들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벌금액이 소박한 노역수들은 노역 사동으로 배정된다. 노역수라고 하면 공사장에서 돌이라도 깰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교도소 공장에는 일거리가 부족할 때가 더 많다. 노역 사동에는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람도 많기 때문에 면담을 통과한 일부만 출역을 나온다.

방금 의료과로 들어온 사람들은 노역 사동의 일원이 될 것이다. ‘이들 중에는 또 몇 명이나 병동으로 빠지게 될까?’ 노숙생활을 경험한 노역수들은 질병을 앓고 있을 확률이 높다. 가장 흔한 병은 알코올중독인데,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결핵 환자도 징역수에 비해 두 배나 많다고 한다. 의료과의 분위기도 배로 분주해졌다. 입소자들의 건강검진이 닥쳐오면 늘 이렇다. 나는 서울남부교도소 관용부 의료과에 투입된 재소자들 중 하나다.

의정부교도소 출역 현장

관용부에 배정된 재소자들이 화이트칼라라면, 공장노동자인 나는 블루칼라다. 재소자들은 교도소의 분류 심사를 거쳐 일을 배정받는다. 신분장(身分狀·수형자의 입소부터 출소까지의 생활을 기록한 문서)이 안 좋거나 말썽을 부려서는 관용부에 가기 힘들다. 관용부의 가장 큰 장점은 조직폭력배들과 부대낄 일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의정부교도소에서 집중근로공장 출역과 함께 사동소지 일을 맡고 있다. 사동소지들은 별도로 차출돼 돌아다니면서 재소자들의 심부름을 해준다. 주요 업무는 쓰레기를 걷거나 배식을 하거나 빨래를 도와주는 식의 허드렛일이다. 여느 재소자들과는 달리 사동 안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서 좋다. 지금은 집중근로공장에서 한창 작업이 이뤄질 시간. 이곳의 재소자들은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건조대를 만든다.

‘퍽!’ 문을 힘껏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수십 개의 시선이 일제히 공장 입구를 향한다. 한 달 전쯤에 합류한 노역수가 누구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적어도 내가 겪어본 노역수들은 죄다 지나치게 순진하다. 주변에서 대접을 해주면 들뜬 마음에 뭐든지 하려고 한다. 교도소는 그다지 이타적인 장소가 아니다. 새로 온 노역수는 자신의 호의가 다른 재소자들의 편의에 ‘악용’되자 마침내 폭발했다.

연달아 문을 때리는 소리에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이웃 감방과 족구를 할 때의 일이다. 나와 같은 방을 쓰던 노역수가 족구 경기에 끼겠다고 나섰다. 시켜줬더니 공을 제대로 따라가지도 못했다. 족구 경기에는 각 방을 관리하는 조직폭력배들의 위신이 걸려 있다. 우리 방이 시합에서 지자 조직폭력배가 노역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때도 노역수는 애꿎은 방문만 걷어찼다. 교도관에게 항의하면 될 텐데 워낙 요령이 없어서 그렇다. 서로 먹고 먹히는 세계에서 힘없는 노역수들은 확실히 먹히는 쪽이다.

그렇다면 먹는 쪽은 누구일까? 사실 교도소 안에서 진짜 갑(甲)은 ‘범털’들이다. 바깥세상에서 돈과 권력을 거머쥔 사람들 말이다. 벌금만 몇백억원씩 되는 범털들은 노역수로 불리지 않는다. 그들은 교도소에서도 여전히 ‘사장님’ 또는 ‘회장님’이다. 이들이 주로 맡는 노역은 고상하게 꽃을 기르는 원예다. 예전에 사업 기밀을 빼돌려서 징역을 선고받은 범털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사동에서 혼자서만 문을 열고 돌아다니며 교도관과 담소까지 나눴다. 교도소 사람들은 그를 ‘자치 회장’이라고 불렀다.

그 대칭점에 노역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밑바닥이다. 일반 재소자에게 노역수는 거의 욕에 가까운 호칭이다. 출역방에 노역수 한 명이 이사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다른 징역수들의 반응이 좋지 않다. “아 씨, 냄새 나는 노역수랑 같이 살아야 하는 거야?” 야유 섞인 농담에 노역수들은 잘 씻지도 않는다는 고정관념이 단단히 박혀 있다. 순간 몇몇 노역수 형의 멀끔한 얼굴이 떠올랐다. ‘노역수도 사람 나름인데….’

영등포교도소 영치과

징역수가 노역수를 보는 시선처럼 일반인이 재소자를 보는 시선에도 고정관념이 끼어 있다. 그중 하나는 전과범에 대한 인식이다. 전과범을 극악무도한 범죄중독자로 뭉뚱그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는 갈 곳이 없어 교도소에 오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전과 10범을 넘긴 사람들은 노역수일 확률이 높다. 노역은 10일이나 20일씩 형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금방 전과가 올라간다. 나와 같은 방을 썼던 좀도둑도 대여섯 번 교도소를 들락날락한 상태였다.

“처음에 어쩌다 3개월 형을 살았는데 교도소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거야. 따뜻하고, 밥도 주고. 그래서 이제 밖에서 뭣 좀 하다가 힘들면 교도소로 들어오고 그랬지.” 전과가 쌓이면 복역 기간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좀도둑은 누범이라는 이유로 4년 형을 살고 있었다. “몇 년 지나니까 아주 죽겠지, 뭐. 그래봤자 밖에 연고도 없고, 여길 벗어날 수가 없네.”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 중인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겨울철에 쪽방에 거주하는 빈곤층들의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아, 서울에서 이만한 공간에 살려면 한 달에 얼마씩은 들 텐데.’ 다 무너져가는 쪽방보다는 난방시설을 갖춘 감방이 차라리 낫지 않은가. 쪽방촌에서는 외로운 죽음이 일상이지만 교도소에서는 사람이 죽는 것이 큰 사고다.

그러니 갈 곳 없는 사람들이 교도소로 몰려든다. 나는 영치과에서 추레한 몰골로 들어왔던 사람들이 훤해져서 나가는 광경을 종종 봤다. 그럴 때는 교도소가 꼭 사회보호기관 같다. 문제는 이들이 얼마 뒤면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교도소 문턱을 밟는다는 것이다. 노역수들은 복역 기간이 짧아서 교화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없다. 조경 직업훈련이나 식품조리사 교육과정은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 장기 복역수가 아닌 이상 징역수들도 때가 맞아야 신청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립이 어려운 노역수들의 처지는 출소 뒤에도 그대로다.

들어올 때나 나갈 때나 변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영치창고에 덩그러니 놓인 노역수들의 짐이다. 인맥이 있는 재소자들은 외부에서 물품을 받아 짐을 불린다. 출소를 앞둔 재소자에게는 가족이 교도소에서 입고 나올 사복도 보내준다. 관계가 단절된 노역수들의 짐은 그대로일 때가 더 많다. 연고가 없는 노역수의 출소복을 챙기는 것 또한 영치 부서의 업무다. 나는 곧 출소하게 될 어느 노역수의 옷가지를 찬찬히 훑어보는 중이다. 역시나 엉망이다. 비릿한 땀내는 물론이고 어디서 싸우고 들어왔는지 군데군데 핏자국마저 보인다.

서둘러 출소복을 준비해야겠다. 이런 꼴로 출소자를 밖에 내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복장이라도 깨끗해야 얼마간은 주변의 멸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지. 담장 밖에서나 안에서나 설움만 당하는 노역수에게는 옷 한 벌이 교도소가 안기는 유일한 선물이다. 출소자가 새 옷을 입고 세상 밖으로 복귀하는 첫걸음만큼은 가벼웠으면 한다. 첫 번째 발자국이 예쁘게 찍혀야 그다음 발자취도 기대해볼 만하지 않겠나.

봄날의 방담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벌금이 몇백억이나 되면서 40일 만에 나왔다는 건 굉장한 특혜인 거죠. ‘황제 노역수’는 가지고 있던 수단이 지나치게 많았던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최소한의 수단도 없기 때문에 노역수가 되는 거고요.”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황제 노역 사건 얘기로 넘어가자 음량을 표시하는 녹음기의 바늘이 껑충 뛰어오른다. “대부분의 노역수들은 정말 벌금 낼 형편이 안 돼서 교도소에 오거든요. 이 사람들은 징역수들한테 무시당하고, 재소자 교육도 못 받고…. 교도소에서도 사각지대에 있어요. 원래는 죄질이 약해서 벌금을 매기는 건데 사실상 구금형이 되어버리니까. 어떤 행위가 죄가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삶 자체가 죄인 거죠.”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는 사회에서 배제당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그 어떤 제도상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사회적 인간’이 아닌 ‘벌거벗은 생명’으로서만 존재한다. 삶이 죄가 된다는 노역수들 역시 그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했다. 사회 밖으로 튕겨진 이들은 힘겹게 떠밀려온 담장 안에서조차 또다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황제 노역수 개인에게만 손가락질하며 노역수들의 실상을 외면했던 몸짓은 또 어떠한가. 담장 밖의 태도가 호모 사케르를 더욱 짙은 안갯속으로 밀어넣지는 않았을까. 굵직한 물음을 남겨놓은 채 봄날의 방담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글 김효정 인턴기자 genu2ne@naver.com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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