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2 17:00 수정 : 2014.05.02 17:00

재난 보도에서 드러난 언론의 민낯은 현장 기자의 윤리 문제이기 전에 한국 언론계의 불량한 구조가 일으킨 또 하나의 참사다. 세월호 참사 보도와 관련해 지난 4월23일 열린 재난보도 준칙 제정 방안 토론회에 앞서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뉴시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4월25일 한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세월호 참사를 언급했다. “지난 9·11 테러 후에 미국 국민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힘든 과정을 극복해냈듯이 한국 국민들도 이 위기를 반드시 극복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믿고 있다.” 대비할 수 없었던 테러와 막을 수 있었던 인재가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두 사건 모두 자국민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는 측면에서 비교될 수는 있을 것 같다. 단언컨대, 9·11 이후와 이전으로 미국 사회가 구분됐던 것처럼 한국 사회 역시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가 분리될 것이다.

그러나 신속한 위기 극복을 주장하기에 앞서 냉정을 찾을 필요가 있다.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 말자.” 미국의 저명한 문화비평가 수전 손태그가 2001년 9·11 테러 직후 언론에 기고한 칼럼의 제목이다. 손태그는 충격에 빠진 미국인의 슬픔을 공유하지만 이를 토대로 국수주의와 ‘테러와의 전쟁’으로 귀결되는 거센 흐름에 제동을 걸었다. 손태그는 슬픔을 분노로 바꾸고 분노를 전쟁으로 탈출하려는 정치인과 미디어의 논리에 맞서 미국이 수행했던 제국주의의 역사를 성찰하자고 제안한다. 이와 동일한 제스처를 세월호 참사로 정서적 공황 상태에 빠진 한국에서 취하고 싶다.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이를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절망과 냉소의 허무주의로 바꾸지는 말자. 특히 언론에 대한 불신과 조롱을 추슬러야 한다.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세월호 참사가 드러낸 언론의 민낯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고 직후 전해진 ‘전원 구조’ 오보는 거대한 언론 재난의 시작이었다. 유가족을 고려하지 못한 현장 대응, 비판과 검증 없는 정부 발표 받아쓰기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 쓰기, 정치권 눈치 보기와 팩트 마사지, 현장과 괴리된 뉴스 생산은 두고두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사회적 알람인 언론이 뒤늦게 비분강개해 한국 사회 전체의 무능과 무책임을 질타하는 모습에서 진정성을 찾기는 어렵다. 언론은 이번 참사를 겪으며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조롱을 감내해야 할 정도로 공공의 적이 되었다. 하지만 조롱은 비판을 잠식한다. 카타르시스를 제공할지언정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변치 않는 사실은, 언론은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이다. 언론을 불신하고 적대하는 일은 오히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의 물길을 차단한다.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 우리 중 다수는 언론을 통해 대표될 수밖에 없기에, 언론을 포기할 수가 없다. 이 글은 언론 불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언론에 대한 조롱과 분노를 좋은 언론을 위한 생성의 비판으로 급랭하려는 제언이자 언론에 대한 변명이다.

친구가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있나?

참사 첫날, 의 손석희 앵커는 긴 사과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뉴스를 시작했다. 자사 앵커가 참사의 생존자 학생과 인터뷰하며 물었던 부적절한 질문에 대한 사과였다. 손 앵커는 어떠한 변명과 해명도 필요치 않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과에서 곱씹을 대목이 있다. 그는 이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이 30년 방송 생활을 통해 습득했던 재난 보도 원칙을 후임 기자에게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과오임을 밝힌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손 앵커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것 중 하나는 뉴스가 투자가 필요한 상품이라는 것이다. 한 명의 유능한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의 취재 경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선후배 사이의 도제식 교육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직 차원의 투자 또한 필요하다. 체계화된 훈련이 사회적으로 뒷받침됐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이번 재난 보도와 관련해 언론에 노출됐던 많은 기자들이 젊은 초년 기자였다는 점에 주목하자. 대개의 베테랑 기자들은 데스크를 지켰거나, 해외 특파원으로 파견됐거나, 주요한 권력기관 출입처에 상주했다. 불신받고 홀대당하며 유족과 마주한 채 시시각각의 속보에 분주했거나 무책임한 현장 공무원과 드잡이질을 했던 이들은 대체로 초년의 말단 사회부 기자

재난 보도에서 드러난 언론의 민낯은 현장 기자의 윤리 문제이기 전에 한국 언론계의 불량한 구조가 일으킨 또 하나의 참사다. 세월호 참사 보도와 관련해 지난 4월23일 열린 재난보도 준칙 제정 방안 토론회에 앞서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뉴시스
였다. 이번 세월호 참사의 보도 불량은 취재원이 마주하는 첫 기자가 미처 준비되지 못한 미숙련 기자였기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기자 개인의 역량 부족이기보다는 미진한 교육과 경험 부족이 야기한 구조적 불량이었다. 현장 기자 또한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였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2013년의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인 교육에서 재난 보도와 관련한 교육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2013 언론인 교육 종합보고서). 언론사와 이들을 지원하는 사회적 체계의 재난 무관심이었으며 교육 방기였다. 이에 대한 고민 없이 기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어찌 보면 과도한 비난일지도 모르겠다.

물살 거세지기 전에… 사상 최대 규모 수색 총력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은 군대와 기자들을 하나로 엮어 기자들에게 취재 편의를 제공했다. 최초 775명의 기자가 선발됐고 이들은 ‘임베디드 저널리스트(Embedded Journalist)로 불렸다. 의역하면 ‘공식 종군기자’쯤 되겠지만, 이 경우 직역이 직관적이다. 바로 ‘동침 기자’다. 동침 기자는 군대에 밀착함으로써 폐쇄적인 전쟁정보를 최대한 개방해 시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킬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막상 그 결과물은 아군에 유리한 뉴스였다. 숙식을 함께한 기자가 군대에 중립적이고 공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한 군인 편에 섰다. 명시적인 언론 통제는 없었을지라도 암묵적인 언론 통제가 가능했다. 언어 전문 웹사이트인 ‘유어딕셔너리닷컴’은 2003년의 영단어로 ‘Embedded’를 꼽았다.

비록 전시가 아닐지라도 한국 언론의 취재 관행은 ‘동침 저널리즘’에 가깝다. 출입처에 상주하는 기자는 출입처가 제공하는 보도자료를 받아쓰는 경우가 잦다. 특종의 가능성은 낮을지라도 낙종의 위험성은 줄어든다. 노골적인 언론 통제가 가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암묵적인 입맞춤이 가능하다. 참사 현장과 괴리된 ‘사상 최대 규모 수색 총력’이란 기사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동침 저널리즘 탓이다. 언론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갈팡질팡하고 숱한 오보를 양산했던 이유다. 언론에 부여되는 사실 검증의 의무는 출입처의 공신력에 위임됐다. 공적 기관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리 없다는 순진한 믿음이 뉴스 생산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행여 공적 기관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지라도 그 책임은 언론사에 있는 게 아니라 공적 기관으로 돌리게 되는 정교한 알리바이일지도 모르겠다. 이 와중에 출입처의 프레임에 따라 뉴스가 생산되는 일도 빈번해졌다. 이런 관행은 비단 세월호 참사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2011년의 구제역 파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와중에도, 통계상의 물가와 체감 물가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피의자의 항변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입처의 보도자료는 기자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뉴스원으로 여전히 각광받는 중이다. 출입처와 기자의 동침을 깰 만한 대안적인 뉴스 제작 방식은 아직 도래하지 못했다.

‘진도 여객선 침몰’ 등 선박사고 다룬 영화는?

오늘의 근대 언론은 대의성과 상업성의 딜레마에 놓여 있다. 언론이 내세우는 알 권리란 기실 시청자나 독자의 알 권리다. 시민 각자가 알 권리를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언론이 위임받아 대신하고 대표한다. 그러나 이들 언론매체는 대부분 개인이 소유한 상업 매체기도 하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공적 뉴스 가치는 상품 가치로 치환되기 마련이다.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언론 보도는 시청자나 독자가 더 많이 보기를 원했던 ‘좋은’ 뉴스였을 수 있다. 위기가 조장될수록 뉴스의 주목도는 상승했다. 이 와중에 관음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관행이 되었다. 뉴스는 패스트 뉴스가 되었다. 시청자나 독자, 그리고 언론은 상업적 가치로 뉴스 가치를 매기는 일에 공모했다. 내 일이 아니라면 묵인하거나 무시했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불이 번져 내 일과 가까울수록 더 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패스트 뉴스에 좋은 뉴스 가치를 담아내라는 주문은 어찌 보면 웰빙 햄버거와 같은 모순이다.

급기야 인터넷 포털이 세월호 참사 보도 초기 언론사들의 어뷰징을 자제할 것을 요구했던 건 부끄러운 오늘의 언론 자화상이다. 하지만 이것을 이윤 추구에 눈이 먼 언론의 탓만으로 돌리는 일은 무책임하다. 공적 뉴스 가치를 상업적 뉴스 가치의 우위에 둔 언론의 출현은 일부러 특정 언론을 찾아보거나 양질의 뉴스에 대한 합당한 시청자 및 독자의 지급 행위 없이는 불가능하다. 포털에서 소비되는 공짜와 다름없는 패스트 뉴스가 일반화된 환경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규범적인 언론윤리 비판은 현실적인 언론 생존 앞에서 별다른 구속력을 발휘할 수 없다. 잠시나마 세월호 참사와 같이 특별한 국면에서는 공적 뉴스 가치가 뉴스의 상품 가치에 앞서자는 당위가 통용될 수 있겠지만 이는 문제의 근본을 가리는 임시방편에 머무른다. 제대로 된 언론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인센티브 체계의 수립 없이 언론의 당위만을 고집하는 일은 그리 생산적이지 못한 언론 비판에 불과하다.

박 “지위고하 막론 처벌… 선장 행위는 살인과도 같아”

언론의 권력은 상징권력으로부터 발생한다. 언론의 힘은 지칭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지칭이 추상적일수록 상징권력은 낮아진다. 구조나 제도를 이야기할수록 뉴스는 외면받기 십상이다. 책임의 당사자가 구체적으로 지목될 때 뉴스의 수용성과 이해도가 높아진다. 이는 뉴스를 만드는 이들에게도 해당된다. 구조나 제도를 추적하는 일은 사람을 지목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시간이 걸리기에, 뉴스 제작 관행은 다시금 사람으로 향한다. 세월호 참사의 가해자로 선장이 호명되고 그를 단죄하는 이로 박 대통령이 소환된다. 사과와 책임의 주체로 박 대통령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다. 희생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경청하는 일도 그러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개인이 뚜렷하면 뚜렷할수록 문제가 되었던 구조와 제도는 추상적으로 밀려나 그나마 희미하게 남았던 흔적마저 시야 밖으로 밀어낸다. 대통령이 사과하면 세월호 참사의 책임 주체가 명백해지는 것일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관계된 이들을 처벌하면 문제는 종결되는가?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완료되면 세월호 참사는 잊히는 과거지사가 될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가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로 남아 고통스럽게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개인으로 특정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세월호 참사 속에 집약돼 있다는 인식 탓이다. ‘침몰하는 대한민국호’라는 말이 과장된 수사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모순을 하나하나 가려내 풀어내는 일을 과연 지금의 언론이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지 회의감이 앞선다. 개인화하는 언론의 생리를 고려한다면, 개인화하지 못하면 쉽사리 싫증 내는 수용자의 특성을 떠올려본다면, 세월호 참사는 다가오는 월드컵에, 아시안게임에 밀려나 표면적으로는 사라질 것이다. 구조를 살피라는 주문을 하기는 쉽다. 사람 뒤의 배후를 밝히라는 주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구조를 밝힐 때까지 여전히 이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언론은 세월호 재난을 소모적으로 활용하고 쉽게 관심을 거둘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와 독자에게 향할 것이다. 제2, 제3의 세월호 참사가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언론에 대한 변명은 공교롭게도 언론 자체뿐만 아니라 시청자와 독자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향하게 되었다. 상황이 아주 절망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언론의 옥석 가리기가 세월호 참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누구보다 많은 이들이 언론을 말하고 좋은 뉴스를 칭찬한다. 금전적인 후원도 열심이다. 그에 발맞춰 열정적이고 성실한 저널리스트들이 새로운 뉴스를 선보이고 있으며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제도권 언론의 경직성에 비교한다면 미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찻잔 속 태풍으로 머무르지는 않을 것 같다. 시청자의 적정한 뉴스 지급이 이뤄지며 일부러 찾아보는 뉴스가 늘고 있다. 다시금 강조컨대, 언론에 대한 불신과 조롱, 언론의 사망 선고는 유예해야 한다. 언론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포기할 수 없는 주요한 사회적 제도다. 대의하지 못하는 언론에 대한 불평을 대의하는 언론의 제자리 찾기에 대한 열망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상적으로 언론을 말하고 언론을 평가하기. 세월호 참사가 빚어낸 슬픔과 분노를 생산적으로 바꾸는 첫 시작일 것이다.

글 홍성일 언론학 박사,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세상은 어떻게 뉴스가 될까>, (공저), <글로벌 시대 미디어 문화의 다양성>(공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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