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2 16:37 수정 : 2014.05.02 16:37

2003년 2월18일 오전 10시 무렵, 신병을 비관한 50대 남자가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 진입한 객차에 불을 질렀다. 기관사는 승객들을 지하철에 남겨둔 채 마스콘키를 뽑고 탈출했다. 승객 192명이 숨졌다. 생존자 강기호씨는 “세월호 참사와 대구 지하철 참사는 모든 면에서 판박이”라고 말했다. 한 시민이 사고 며칠 뒤 중앙로역 벽에 추모의 글을 남기는 모습.
불길한 예감은 항상 지독하리만큼 적중한다. 탑승객 476명을 태우고 인천에서 제주를 향하던 6천t급 대형 여객선 ‘세월호’ 침몰 소식을 접했을 때, 본능적으로 강기호(55·가명)씨는 대참사를 직감했다. 불행하게도 자신이 겪은 11년 전 대구 지하철 화재 때와 모든 것이 판박이였다.

“씨랜드, 삼풍백화점 등 대형 사고의 반복, 대규모 인명 피해를 미리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 기관사와 선장의 비이성적 행동, 사고를 대처하는 방식과 수습 과정, 사고 수습 책임자의 혼선, 사건의 축소·은폐 움직임, 희생양을 앞세운 꼬리 자르기까지 전부 다 똑같더군요.”

슬픔도 잠시, 분노가 치밀었다. 용서와 침묵은 이런 끔찍한 사고를 막는 최선책이 아니었던가? 그는 절망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를 계기로 달라질 것이라고, 아니 달라졌다고 믿었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는 그를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날로 안내했다. “세월호 승객들과 마찬가지로 대구 지하철 화재 당시에도 탑승객들을 살릴 기회가 충분히 있었어요.”

지금껏 침묵과 방관으로 일관했던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와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이 때문이다. 꽃도 피우기 전에 허망하고 어이없게 목숨을 잃은 안산 단원고 학생 300여명이 가장 눈에 밟혔다. 하필 그의 둘째딸도 고등학교 2학년생이다. “부모·자식 간의 준비 안 된 죽음만큼 가혹하고 후유증이 큰 것이 없어요. 사망·실종 학생 가족도, 생존자도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갖고 살아갈 겁니다. 이들이 안쓰럽고 불쌍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를 수소문해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처음부터 즉답을 한 건 아니었다. 한사코 자신은 적임자가 아니라며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런데도 수화기 너머로 그의 침착하면서도 신중한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 사람이 적임자’라는 신뢰가 차곡차곡 쌓였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틀간의 설득 끝에 허락을 받아냈다. 인터뷰는 4월23일 대구 경북대 교정과 그 인근에서 꼬박 8시간 동안 진행됐다. 섭외 과정에서 가장 궁금했던 질문부터 던졌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생존자들 대부분이 언론과의 접촉을 거절하던데, 이유가 있습니까?”

“나만 살았다는 죄책감 때문이지요. 그래서 다들 잊고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저도 그랬고. 실제 생존자 중에는 그 사실을 숨기고 결혼했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분이 많습니다. 생존자 모임에 나오지 않거나 연락을 끊은 분도 여럿이고요. 이분들이 세월호 참사를 접했을 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또다시 죄인의 심정이 되어 괴로웠을 겁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는 192명으로 최종 집계됐지만, 당일에만 실종자로 등록된 사람이 600여 명에 달했다. 사고 현장은 검은 재만 남은 상황이고, 주검 수습은 요원했다. 가족과 연락이 되지 않는 시민들이 한꺼번에 부상자들이 입원한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자식, 손주의 사진을 들고 생사를 헤매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뤘어요. ‘우리 아들 본 적 있느냐?’ ‘우리 손녀 못 봤느냐?’고 물으시던 분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부상자들 중에는 중앙로역을 빠져나올 당시 ‘살려달라’는 이들의 절규를 외면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들이 내민 구조의 손길을 외면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저도 얼핏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죽겠어서 뿌리쳤어도 인간이기 때문에 죄책감을 피할 수 없지요.”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기관사 “가만히 있어라, 곧 출발한다”

2003년 2월18일, 그의 운명이 180도 바뀐 날이다. 평소 잘 타지 않던 지하철을 탄 것이 화근이었다. 이후 건강을 잃었고, 직장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당시 경남 진해에서 입시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6년째 계속된 주말부부 생활을 청산할 요량으로 상인역 인근에 새 집을 알아보러 가는 길이었다. “아양교역에서 1080호 전동차를 탔어요.” 출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내부는 한산했고, 평온했다. 평소대로 책을 꺼내 읽었다. “중앙로역에 들어서는데 순간 화끈한 기운이 확 퍼졌어요. 깜짝 놀라 반대편을 바라보니 전동차가 불타고 있더군요. ‘누전으로 광고판에 불이 붙었고, 전동차까지 옮겨붙었나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승객들이 동요하려 할 즈음 안내방송이 나왔다. “‘가만히 있어라, 곧 출발한다’는 내용이었죠. 기관사는 어떻게든 비상전력을 공급받아 중앙로역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불길과 유독가스가 번지는 와중에도 승객들은 의심 없이 자리를 지켰죠.” 그는 1호칸에 타고 있었다. 기관사가 급하게 현 상황을 사령실에 보고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얼마 뒤 “××, 안 되잖아” “어떻게 하란 말이야”라며 화내고 욕하는 소리, 시동을 거는 듯 ‘철컥철컥’ 하는 기계음 소리도 들렸다.

1080호 전동차는 끝내 중앙로역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당시 방화범 김대한이 탔던 1079호 전동차와 달리 1080호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나왔다. 기관사는 승객들을 남겨둔 채 마스콘키를 뽑아 홀로 대피했다. 기관사를 믿고 전동차 안에 있었던 승객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다행히 제가 있던 1호차에 지하철공사 직원이 타고 있었는데, 그분이 문을 열었다”며 “문이 열리지 않았던 5·6호차에서 피해가 컸다”고 말했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세요. 움직이면 더 위험해요”라는 세월호 기관사의 안내방송을 따른 단원고 학생들의 피해가 컸던 것과 오버랩된다.

“저를 비롯해 세월호 참사에 전 국민이 슬퍼하는 건 승객들을 살릴 수 있었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에요. 공교롭게도 대구 지하철 때도 승객 192명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세 번이나 있었습니다. 기관사가 중앙로역에 진입하기 전 전동차를 세웠거나, 아니면 중앙로역을 무정차로 통과했을 경우, 마지막으로 중앙로역에 도착한 직후 기관사가 전동차 문을 열고 승객들을 대피시켰다면 말이죠.”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그를 살린 건 갓 세 돌을 넘긴 막내아들이었다. ‘살아야 한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 경기도 수원에서 조그마한 공장을 운영할 당시 안전관리 책임자로 받았던 재난 대비 교육 내용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노릇이다. 강연의 핵심 내용은 이랬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왼쪽으로 도망간다. 다수의 말과 행동에 따라 움직인다. 사고 현장에서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다가 목숨을 잃는다. 그 반대로 하면 살 확률이 높아진다.’

무조건 오른쪽으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얼마나 갔을까, 정신을 잃었다. 소방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는 결국 화마의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안전관리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지하철역 안에서 오른쪽 왼쪽을 오가다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며 “정기적이고 실질적인 재난 대피 매뉴얼에 대한 현장 실습 교육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고 말했다.

“위기의 순간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현장 상황을 잘 아는 책임자에게 사고 대처와 수습에 대한 재량권을 부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상명하복의 관료제 문화가 뿌리 깊게 남아 있는데, 이것이 세월호에서 보듯 신속한 초동 대처와 골든타임 확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요. 혹여 오판했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면 관용을 베풀 줄도 알아야 하고요.”

“더 아플 생각만 하지 말라는 아내 때문에…”

‘살아남은 자’. 사회는 그를 이렇게 칭한다. 끔찍한 사고의 순간에서 생존한 ‘행운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모르는 소리,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라고 일갈한다.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일상 자체가 힘겹다. 사고 전까지 그는 건강했고, 매사 의욕적이었으며, 학원 운영을 도맡아 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반면 사고 이후 그는 최근까지 극심한 무력감에 빠져 있다. 기관지 손상 후유증을 비롯해 만성적인 디스크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도 그는 자주 ‘불’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종종 악몽을 꾸기도 한다. 이웃 아파트에서 불이 나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기차나 버스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을 항상 안고 산다. “김대한처럼 사회 불만 세력이 언제든 돌발행동을 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니까 더 두렵고 오싹하지요. 실제 부상자 중에는 불면증 때문에 취업은 포기하고 밤에 하는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는 청년이 있어요.”

인터뷰 당일, 그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몸을 꼿꼿하게 세우지 못했고, 움직일 때마다 극심한 허리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오래 앉아 있는, 평범한 일상도 그에겐 사치다. “사고 이후 좋은 취업 자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학원 운영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곳도 있었고…. 하지만 양심상 일을 할 수 없었어요. 언제 갑자기 후유증이 나타날지 모르고, 괜히 일한답시고 나섰다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을 잃게 될까봐.”

한때는 ‘그만 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죽음의 충동, 아내와 자식들에게 가장으로서 제 역할을 못한다는 죄책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게 하는 원천인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딸은 누구보다 듬직하고, 둘째딸은 아빠를 이해할 줄 아는 혜량과 포용력을 지녔다. 그의 목숨을 살린 막내아들은 아주 착하고 속이 깊다. “아내는 제게 다른 생각 말고 더 안 아플 생각만 하라고 합니다. 미안할 따름이지요. 한때는 그런 아내가 안쓰러워 ‘이혼해달라’고 했어요.”

그의 집에서는 세월호 관련 뉴스를 보거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보다도 국어 교사로 재직 중인 아내에 대한 배려다. “저보다 충격이 더 클 겁니다. 학생들과 동료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될지도 모를 학생들을 염려하는 눈치더군요. 저 역시 희생자 대부분이 학생이어서 걱정을 하는데, 그 마음이 오죽할까요?”

“자식 잃은 부모한테 정부 전복 세력이라니!”

4월 말까지 생존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사고를 총괄하는 ‘범정부사고대책본부’라는 컨트롤타워는 사고 수습 초기에 우왕좌왕했고, 그사이 생존자를 구할 타이밍을 놓쳤다. 총책임자는 무능했고, 재난 앞에서 국가와 정부는 무기력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공약에서 ‘국민 안전’을 최우선 국정 과제로 제시했었다.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이름까지 바꾸고 안전의 컨트롤타워 기능을 부여했다. 하지만 사태 초기부터 안행부는 해양경찰청, 해양수산부 등과의 유기적인 지위체계는커녕 협조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등 대응력과 전문성에서 난맥상을 드러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유언비어가 난무한다는 건 그만큼 사회가 불안하다는 뜻입니다. 사건의 내막을 감출수록 더욱 요동치지요. 그런데도 정부와 여당은 사태를 책임지고 수습하기보다 축소·왜곡·은폐하려고만 합니다. 허위 사실 유포자를 엄벌하겠다며 여론을 통제하고 있어요. 비용뿐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종자부터 구출하는 게 정답 아닙니까?”

그는 정부의 이런 행태가 못마땅하다. 국민의 관심을 실종자 구조가 아닌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것처럼 읽힌다. 대통령이 나서서 ‘선장의 행위는 살인’ ‘눈치만 보는 공무원 퇴출’ 발언을 해서 책임을 선원과 승무원에게 떠넘기려는 것도 그렇다. 실종자 수색에 매진해야 할 사건 초기부터 청해진해운, 유병언, 구원파, 해운조합 등으로 수사를 확대하는 의도가 사뭇 의심스럽다. “대통령과 정부의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희생양을 만들고, 또 정부가 사태 수습을 잘하고 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한 의도된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이고, 그 화살이 사회적 약자에게 가는 게 께름칙하다.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대구시와 대구지하철공사 책임자가 아니라 기관사와 사령실 말단 직원들만 원흉으로 매도됐다.

정부 쪽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겠다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행위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한기호·권은희 의원, 정몽준 의원의 아들은 실종자 가족들을 종북·정부전복 세력이나 미개한 국민으로 매도했다. 가족을 잃었을지 모를 불안감에 놓인 이들을 사실상 두 번, 세 번 죽였다.

“국민이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해 여론을 호도하려고 그런 것이죠. 자식의 생사를 모르는 것도 억울한 사람들한테 종북몰이라뇨? 언론은 또 어땠습니까. 정확한 취재 보도보다는 속보 경쟁에 치우쳐 정부 발표를 인용하기에 급급했어요.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부, 시스템, 정치인, 관료 등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그 틈을 타고 유언비어와 음모론도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원인을 ‘신뢰의 상실’에서 찾았다. “정부와 유가족, 유가족과 언론 등이 서로를 불신하는 상황에서는 사고 원인 규명뿐 아니라 재발 방지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할 수 없습니다. 신뢰의 회복이 시급합니다. 정부는 이제부터라도 모든 의혹에 대해 숨김없이 공개하고, 유가족들의 애로 사항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월호 수습 과정 끝까지 지켜보는 건 산 자의 몫

대구 지하철 참사의 경우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할 희생자 유가족과 대구시, 유가족과 부상자, 부상자와 부상자 간 불신의 골이 깊다. 그가 지난 11년간 겪어야 했던 고통은 대부분 여기에서 기인한다. 대구시는 사고 다음날 전격적으로 중앙로역 물청소를 단행해, 유족들의 분노를 샀다. 주검 수습도 채 안 됐을 때여서 은폐 의혹이 일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된 주검 앞에서 유가족들은 분노했다. “50사단 병력과 지하철공사 직원 등이 밤에 기습적으로 청소를 했어요. 그런데 현재까지 지시한 사람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어요.”

당시 유가족 사이에서는 희생자가 200명이 훨씬 넘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무연고 승객, 무임승차, 노숙인 등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승객이 지하철 안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서다. 그는 실제 “대구시 공무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희생자가 200명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는 얘기를 지인에게서 들었다”고 말했다.

유가족의 염원으로 대구시가 약속한 추모공원, 위령탑, 교육관 등은 현재까지 부지도 확보하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애초 대구시는 시내 중심에 위치한 담배인삼공사 터를 약속해놓고, 이후 보수단체 등으로 하여금 반대 시위를 하게 하는 등 이중 플레이를 했어요. 팔공산에 있는 시민안전테마파크 일대를 추모공원으로 조성해, 수목장을 허가하기로 해놓고 오히려 희생자 유가족 대표를 암매장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고요.”

오히려 항의하는 이들에게 채증자료를 내밀어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 치료비와 생활안정자금 등을 차등 지급함으로써 부상자와 부상자 사이를 이간질한 것도 대구시였다. 당시 치료비를 정신적 충격이나 후유증 발생 여부와 상관없이 외상을 기준으로 책정해 논란을 부추겼다. 일부 부상자들은 지하철공사 직원들에게 ‘치료보상금을 줄 수 없다’, ‘지하철공사에서 해임하라’는 연판장을 돌리기도 했다.

“직접 사고 전동차를 운행한 것도 아니고, 일하다 부상당한 건데 말도 안 되는 행위였지요. 저를 비롯한 몇몇의 문제제기로 결국 이들이 보상금을 받긴 했어요. 하지만 공사 직원들이 부상자단체에 가입하지는 못했어요. 희생자들 대신 죽다 살아난 걸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돈이 개입되니까 생존자들도 치사해지더라고요.”

이뿐 아니었다. 몇몇 부상자는 값싼 의약품을 비싼 값에 판매하는 방법으로 폭리를 취하기도 했고, 500만원 생활안정자금의 10%를 단체 운영비로 기부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는 이때마다 문제제기를 했다. 정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되돌아온 건 협박과 회유다. 심지어 아내의 학교에 찾아가 ‘목포 깡패’라며 “남편이 그런 활동을 못하게 하라”고 겁을 준 이들도 있었다. 아내가 큰 상처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집사람은 저를 원망합니다.”

그를 고통스럽게 한 건 이뿐이 아니었다. 약자 앞에서 군림하고 권력 앞에서 눈치만 보던 의사들, 생존자와 부상자와 대구시민을 이간질하는 대구시, 시민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정치인 등의 행태를 볼 때마다 억울하고 또 화가 치밀었다. “입원 초기 우리를 꾀병 환자 취급하며 퇴원을 종용했던 의사들이 고건 총리가 다녀간 뒤에는 ‘편히 쉬라’며 극진한 대접을 해주더군요.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사람들만 골라 안부를 묻더군요. 심지어 뒤늦게 타 지역구 주민에게 위로금이 간 걸 알고 회수해간 의원님도 있었으니 말 다했지요.”

이에 비하면 ‘황제 라면’과 ‘기념촬영 논란’은 그의 시각에서 봤을 때 해프닝에 불과하다. 그는 “시민들의 격분에 당사자인 안행부 국장을 해임한 것도 동의하지 않는다”며 “잘잘못을 떠나 한 집안 가장의 밥벌이를 하루아침에 빼앗는 건 현 정부가 근본적으로 인간과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지적했다.

그가 육체적·심리적으로 피폐해졌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곳이 없었다는 것도 상처 중 하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약속했던 부상자들을 위한 심리적 치료는 정작 특정 교수의 논문 작성을 위한 심리 검사뿐이었다. 정작 이를 토대로 한 심리상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입원 당시 생존자들의 외상후 스트레스를 치료한다면서 한 것은 고작 설문지를 나눠준 뒤 답을 쓰게 한 것이 전부였어요. 그 논문은 엉터리입니다. 보상금 지급을 앞둔 상황에서 외상후 스트레스가 더 심하다고 표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설문조사 내내 시험을 보는 기분이어서 짜증 내며 대충대충 성의 없이 답했죠. 잘못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가짜 처방전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참사 유경험자들을 위한 심리치료는 이들을 이해하고 온전하게 상처를 보듬어줄 것이라는 진정성을 보여줄 때 효과를 볼 수 있다”며 “끝까지 우리의 손을 잡아준 최남희 서울여자간호대학 교수가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도 이민을 고민했을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그랬을 것”이란다. “아이들한테는 지금도 기회가 되면 외국에 나가 살라고 합니다. 세월호와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보듯 한국은 사회적 약자와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만 희생을 강요당하는 나라입니다. 양심적이고 도덕적으로 살면 손해를 보지요. 솔직히 세월호 이후 그런 인식이 더 팽배해질까 우려스럽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총체적 난국과 부실을 해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 관제센터 직원을 비롯해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했다면 어땠을까요? 다수의 인명을 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월 270만원을 받는 비정규직 선장이 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과연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세월호 참사의 원인 중에는 비정규직, 무사안일, 관료제 등 시스템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는 뜻이죠. 지금이라도 개인의 잘못된 판단으로 원인을 몰아갈 것이 아니라 참사를 불러온 총체적인 원인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그것이 제2, 제3의 세월호 참사를 막는 길이기도 하고요.”

“세월호 사태는 어떻게 수습될까요?”

“애도 분위기가 잠잠해지고, 시민들은 방관자가 될 겁니다. 사고에 무관심해지고 냉담해질 겁니다. 그러고는 잊혀질 겁니다. 구속된 선장과 승무원 등은 몇 년 복역한 뒤 일상에 복귀할 거고요. 그 누구도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일상과 삶, 치유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되겠죠. 정부 등은 보상금 집행을 통해 사태를 조기에 마무리하려 할 겁니다. 이 과정에서 보상금에 눈먼 온갖 사람들이 유가족과 부상자 주변으로 모여들 겁니다. 참사와 상관없는 이들이 이후 사태 수습을 맡겠다고 나설 수 있지요. 오히려 저처럼 유족이나 부상자들이 협박당하는 일도 생길 수 있고요. 저는 대구에서 이런 일을 수없이 봤습니다. 이런 지난한 과정이 얼마나 살아남은 자들을 지치고 힘 빠지게 하는지도 말이죠.”

그는 생존자들이 겪는 가장 큰 상처와 아픔은 무관심이라고 했다. 대형 참사 당시 뜨거웠던 추모 열기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그라진다. 이렇게 대중의 관심 밖으로 벗어날수록 생존자들은 방치되고, 고립된다. 소수자가 되어 정부·지자체와의 기싸움 등에서 약자로 밀릴 수밖에 없다. 이를 악용해 보상금 등을 노린 이들이 접근할 수도 있다. 다른 사건들과 달리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영원히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사건이 어떻게 수습되고 마무리되는지, 생존자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사회 구성원으로 복귀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나마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SNS와 포털 사이트 등을 중심으로 ‘노란 리본 달기’ ‘추모 댓글 남기기’ 등 애도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어서 위안이 되긴 합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지 않았다면 평생 묻고 살았을 것입니다. 지금껏 이런 깊은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나봅니다. 너무 많은 말을 두서없이 한 것 같아 죄송하고 또 부끄럽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그를 배웅하고,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띠리링~’ 문자가 왔다. 기호씨였다. “먼 길 안녕히 가십시오. 나이가 들어서인지 주책이었습니다. 가족 모두 건강하십시오.”

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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