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2 14:50 수정 : 2014.05.02 15:42

엄마는 가난 때문에 어려서부터 버스안내양, 식모살이, 웨이트리스, 식당 아줌마, 파출부 등 여러 직업을 거친 뒤 마지막 직업으로 간병인을 택했다. 어느덧 8년차인 그녀는 “환자를 가족처럼 대하고, 환자를 위해 기도할 줄 아는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서울의 한 병원에서 환자를 보살피는 간병인 모습.한겨레 강재훈
똥 치우는 아줌마. 간병인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간병인 8년차가 되었다. 8명을 꾸리는 팀장이라 수당이 10만원 더 붙는다고 해도, 간병인에 대한 시선은 딱 그 월급만큼뿐이다. 그래도 엄마는 만족해한다. 요양원에 오는 환자들은 다양하지만 경로는 비슷하다. 웬만하면 대학병원 두 군데 이상을 거쳐서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뇌종양 수술을 하고, 심근경색 수술을 하고, 대장암에 걸려서 인공항문을 옆구리에 찬 사람도 있다. 모두 수술 자국이 여기저기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학병원에서 장기적으로 생각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요양병원으로 온다. 대학병원에 있어봤자 치료비만 많이 나오고, 치료해도 나아지지 않으니 말이다.

“미국까지 가서 수술하고도 못 나아서 온 사람들도 있어. 그런 큰 대학병원에만 있다가 여기 오면 기가 막히는 거야. 벌써 시설이 협소하잖아. 장비가 그렇고, 의사란 사람들도 그렇고. 못 배우고 늙은 아줌마들이 뭐 똥 치운다고 장갑 끼고 있는데, 모든 게 한심한 거야. 그니까 처음에 오면 우는 사람도 있어. 자기 부모가, 남편이, 자식이 결국은 이런 데로 밀려나고, 이렇게 살다가, 고생하다 죽는구나. 그래갖고 한 이틀 만에 적응을 못해서 큰 병원으로 다시 옮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갔다가 어차피 또 와….”

김치공장, 김밥집, 파출부 거쳐서 ‘정착’

엄마는 어려서부터 여러 직업을 거쳤다. 가난 때문에 공부를 중단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혼자 상경했다. 귀한 막내딸이라지만, 시골에 계신 당신의 엄마를 위해 이런 일 저런 일 닥치는 대로 해서 돈을 벌었다. 오기랄까 책임감이랄까, 특히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가득했다. 학력이랄 것도 없고, 인맥도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에 그리 있겠는가. 버스안내양, 식모살이, 웨이트리스를 전전했다. 뒤늦게 결혼하고 나서는 남편을 따라 갑자기 남도 끝 섬마을로 이사를 갔다. 아이들은 커가는데 남편의 벌이로는 시골 생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서울로 올라와 여관을 임대해 운영했는데, 남편이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점점 남편 얼굴 보기가 힘들어지더니 어느 날 이혼을 하자고 했단다. 엄마는 이혼 이야기만 나오면 유독 표정이 어두워진다. “내가 바보 같았지” 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아빠는 도망치듯 우리를 떠났고, 위자료는 없었다. 엄마는 이를 악물며 계속 일했고 재혼도 했다. 여관 임대료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돼서야 그동안 모은 돈으로 다른 일을 시작했다. 삶은 계속되고, 딸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당하고, 그렇게 일하고도 아직 엄마는 우리에게 미안해한다. 나와 동생 몫의 죄책감까지 모두 짊어진 것처럼.

엄마는 집 근처 김치공장에 다니다가 공장이 망하고는 작은 김밥집에서 일을 했다. 길을 오가며 본 ‘김밥천국’ 아주머니처럼 자리에 앉아서 종일 김밥을 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주문도 받고, 바쁠 때는 주방에도 갔다가, 김밥도 말다가, 배달도 나갔다. 머리에는 지글지글 끓는 뚝배기불고기며 김치찌개를 네댓 개 얹고, 손에는 철가방을 들고, 추우나 더우나 종종걸음으로 음식을 날랐다. 배달을 하다 현금으로 건네받은 돈이 행여 1천원, 2천원이라도 부족하면 주인 아주머니의 핀잔을 감당해야 했다. 쉬는 날은 한 달에 두 번, 하루 12시간을 일해도 월급은 많지 않았다.

엄마는 주인 아주머니와 실랑이 끝에 김밥집을 그만두고는 용역회사에 등록했다. 맨 처음 간병인을 하겠다고 소개받은 병원은, 허름한데다 할머니 6명을 아줌마 한 명이 보고 있었다. 욕창이 심한 할머니들은 살이 썩어 문드러져 뼈가 보일 지경이어서 어지럽고 구토가 나는데, 어느새 점심때라고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단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꼴을 보고 놀란 엄마는 참을 수가 없어 그 길로 줄행랑을 쳐 소개소로 돌아갔다. 나 못하겠다, 협회비 37만원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받지 못했다.

“그래서 파출부로 나섰는데, 일일 파출부는 한계가 있더라고. 그 직업소개소란 데에 또 6만원을 내고 등록해. 아침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감자탕집 몇 번지에 사람 둘 보내래. 소개소 사람이 전화를 끊고는 아줌마들한테 ‘가실래요? 가실래요?’ 물어봐. 모르는 길을 버스 타고 찾아 찾아가서, 저 소개소에서 보내서 일하러 왔는데요 하면, 내 귀에 이런 얘기가 들리는 거야. ‘아, 젊은 사람 보내지 뭐 늙은이를 보내고 있어.’”

10시간을 일하고 나면 5만원쯤 받는다. 불고기집에서는 불판, 그 쇠로 된 불판이 닦기 힘들다. 그걸 산더미같이 담가놓는다. 닦고 또 닦고. 저녁때 술 손님이 가고 나면 또 불판이 그만큼 나온다. 밤 10시에 퇴근해야 하는데 해도 해도 끝이 안 난다. 10시30분이 돼서야 가야겠다고 말하면 주인은 “아줌마 손이 느려서 지금 그거밖에 못 닦았다. 이렇게 해놓고 가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소개소 사무실에 전화해서 “이런 아줌마 보냈다”고, “내가 가만 안 놔둔다”고 협박하듯이 말한다. 엄마는 어찌어찌해서 돈을 받아 나왔다. 그러고선 ‘에이, 안 나가야겠다’고 결심한다. 여기저기 다녀봤자 쪽팔리고 돈이 안 된다. 일당 5만원씩 받는데 일이 있는 날이 있고 없는 날이 있고, 다니다보면 차비만 드니까. 엄마는 말했다. “논다는 건 있을 수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지.”

죽음을 지키는 건 가족이 아니라 간병인

한 10년 정도 되었을까. 새아빠가 사업한다고 그나마 벌어놓은 돈을 말아먹고, 경기도 광명의 가장자리 조그만 빌라로 이사를 갔다. 방구석을 훔치며 엄마는 많이 울었다. 이런저런 고생을 다 해봤지만 이렇게 더럽고 누추한 곳에 살게 될 줄이야. 김밥집에서도 잘리다시피 나왔고, 파출부도 못할 일이었다. 건성으로 다니던 교회도 작은 곳으로 옮겼다. 살면서 가장 절박하고 절실했다. 고통 속에서 기도에 전념했고, 종교에 의지했다. 이제 쉬는 날이면 엄마는 종일 기독교방송을 틀어놓고 찬송과 기도를 한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서 뭔가 기대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간병일에 정착했다.

“아무리 학력 있고, 실력 있고, 능력 있고, 기술 있어도, 우리나라에선 아직까지도 나이로만 평가해. 젊으면 쓰고 늙으면 안 쓰고. 그러면 우리 나이에 갈 수 있는 데가 식당, 청소, 간병, 이거밖에 없어. 식당은 내가 해보니 너무나 힘들어서 안 된다는 걸 알았어. 청소도 한 달에 70만∼80만원 받는 건데, 깨끗하지 않다고 말이 많다고 하더라고. 매일 나가야 하고. 그치만 간병은, 환자를 돌보는 거는, 노동하고는 조금 달라. 목욕시키고, 면도해주고, 머리카락도 잘라주고, 손톱 깎아주고, 대소변 봤으면 둘이 치우는 거야. 한 사람이 탁 뒤집으면 한 사람이 치우는 식으로. 기운 세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노하우로 하는 일이라서. 그리고 믿음 생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하면 좀 낫지.”

일반 병동에서 일할 수도 있지만, 중환자실을 자처했다. 쉬는 날이면 친구나 다른 간병 여사들이 찜질방에도 가고 산에도 가자고 하지만, 이제는 싫단다. 조용히 집안 정리를 하고는 반쯤 눈을 감고 설교 방송을 듣는다. 동선이 점점 단조로워진다.

“중환자실에서 환자들을 보면 느끼는 것이 굉장히 많아. 걸어서 나간 사람은 아예 없고, 처음부터 들려오기 때문에, 죽어서 나간 사람밖에 없어. 요양병원은 병이 낫는 데가 아니고, 죽을 때까지 관리를 해준다고 생각해야 돼. 암환자, 치매환자, 이런 죽어가는 사람을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돌봐주는 거지. 통증 없게 진통제를 놔주고, 욕창 안 생기게 2시간마다 체위 바꿔주고…. 아버님, 어머님, 여보, 하고 와서 울지만 시간이 되면 가족도 가야잖아. 자기들 하는 일이 있고, 병원에 계속 있을 수도 없고. 저녁 8시까지밖에 안 돼요, 내일 아침에 오세요, 이러믄, 그사이에 죽을 때도 있거든. 죽어가는 사람을 마지막까지 우리가 보는 거야. 가족도 옆에 없어. 모르는 아주머니 옆에서 죽는 거지.”

엄마는 계속 말을 이었다. 환자들이 하루 종일 듣는지 안 듣는지는 모른다. 하루 종일 요러고만 있으니까(몸을 웅크려 보인다). 그렇지만 사람의 뇌는 죽을 때까지도 인지한다는 거다.

“‘할머니, 눈 좀 떠보세요’ 해도 눈 뜰 힘도 없고, 손가락 하나 까딱을 못하고, 불구덩이에 넣어도 반항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할 거야. 우리가 안 돌봐주면 하루 종일 꼬꾸라져 있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내 가족이란 마음으로, 사랑을 가지고 해야 돼.”

세상 모든 딸은 엄마가 된다

엄마는 환자를 위해 기도도 많이 드린다. 간병인 중에 처음 온 사람들은 환자가 못 듣는다고 판단해서 아무 말이나 해버린다. 예를 들면, 빨리 죽었음 좋겠어, 식구들 우울하고 한 달에 몇백씩 돈만 까먹고, 죽지도 살지도 않고 큰일 났네 같은 말을 환자 앞에서 막 하기도 한다. 엄마는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제일 슬픈 경우는 자식이 아파 들어올 때지. 그게 제일 공감이 가. 부모가 죽으면 훌쩍훌쩍 하다 말게 돼 있어. 어떤 할머니 하나는, 할머니가 팔십이니까 딸도 오십이 넘었어. 교통사고라 그러대. 식물인간이 돼서 의식불명이지. 2년째 그러고 누워 있는데, 할머니가 3일에 한 번씩 오는 거야, 딸이기 때문에, 꼬부라져가지고. 근데 입으로 죽을 먹을 수 없으니 코에다 호스를 넣어서 주는데 일일이 데울 수가 없거든. 그냥 비닐팩에 걸어두는데, 할머니가 그 매달아놓은 죽 비닐을 손으로 감싸고 비비는 거야. 할머니,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죽이 차잖아요. 우리 딸은 찬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하는 거야. 그 늙은이 손으로 비벼봤자 뭐 그게 따뜻해지겠느냐마는 그런 게 부모 마음이더라고.”

죽음을 가까이서 자주 접하다보니, 엄마는 일이 끝나고 아침 일찍 퇴근해 쌔근쌔근 자고 있는 가족을 볼 때면 절로 감사기도가 나온다고 했다. 정작 당신은 담담히 말하는데도, 나는 듣기가 수월치 않았다. 어느새 인터뷰 내용과 가족사가, 내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버렸다. 대화가 끝나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엄마는 마지막에 “꼭 건강해야 한다”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고 거듭 당부한다.

하나라도 더 말해주고 싶은 엄마와 듣기가 두려운 나. 매번 재탕되는 삼류 드라마의 사랑 이야기처럼, 세상의 모든 딸이 곧 엄마가 되고 그 엄마가 또 딸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언제나 슬프다.

글 김국화 직장인

‘독자의 인연 인터뷰’는 독자에게 열린 지면입니다. 독자가 인터뷰어가 되어 자신의 부모, 자식, 친구, 친척, 동료 등 가까우면서도 정작 궁금한 것을 묻지 못했던 이를 직접 인터뷰하는 형식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히려 못하는 이야기가 많을 수 있습니다. 일상의 소통 방식에서 벗어나 인터뷰를 하면 뜻밖에 새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0자 원고지 30장 안팎 분량에, 일문일답이나 수필, 일기 등 자유로운 형식으로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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