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2 14:40 수정 : 2014.04.03 15:21

“왜 가자를 벌하는가? 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인가? 왜 가자를 벌하는가? 점령군에 맞서 총을 들었기 때문인가? 어려운 시절을 지나고 있다. 곳곳에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겁먹지 않는다. 두려울 것은 없다.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다. 이 어려움에 이미 익숙해져 있으므로….”

지난 3월22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의 집권세력인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가 수만 명의 군중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는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제1정당의 수장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에 올랐지만, 역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소수 정파의 수장인 대통령(자치정부 수반)이 해임했다. 그가 이끄는 하마스는 가자지구에서, 마무드 아바스 대통령이 이끄는 파타는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서 각각 정부를 수립했다. 나라도 없는 땅에 2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비극이다.

하마스와 파타, 2개의 팔레스타인

2002년 야세르 아라파트 당시 대통령이 안팎의 압박에 밀려 마지못해 서명한 ‘자치정부 기본법’은 팔레스타인의 헌법 격이다. 기본법은 자치정부 내각 해산권을 오로지 자치의회에만 부여했다. 대통령은 총리를 해임할 권리가 없다. 그럼에도 아바스 대통령은 2007년 ‘대통령 직권’으로 하니야 총리를 해임하고 비상내각을 출범했다. 그로부터 하마스는 가자지구에 철저히 고립됐다. 그 기막힌 사연, 자세히 살펴보자.

하니야 총리가 격정에 찬 연설을 한 3월22일은 제삿날이다. 무슬림형제단 팔레스타인 지부를 모태로 1987년 이슬람 저항단체를 뜻하는 하마스를 창설한 셰이크 아메드 야신이 이날로 10주기를 맞았다. 2004년 3월22일 이스라엘군은 다중장애로 한평생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온 야신이 새벽 기도를 마치고 사원에서 나서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파치 공격용 헬리콥터에서 발사된 헬파이어 미사일이 그의 일행을 덮쳤다. 사실상 공개처형이었다. 하니야 총리는 셰이크 야신의 보좌관 출신이다.

같은 해 11월 아라파트 대통령이 숨을 거뒀다. 이듬해인 2005년 1월 치러진 대선에서 62%의 득표율로 아라파트에 이어 자치정부 대통령에 오른 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 출신인 아바스였다. 그해 8월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점령해온 가자지구에서 병력을 물렸다. 이스라엘은 이후 여러 차례 가자지구를 침공했으니, 당시의 철군을 평화협상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건 옹색하다.

이어 2006년 1월25일 가자지구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의회(PLC) 선거가 일제히 치러졌다.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출범한 이후 두 번째 총선이었다. 1996년 총선과 함께 치른 대선에서 당선된 이후 아라파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점령정책과 탄압을 이유로 총선과 지방선거를 단 한 차례도 치르지 않았다.

선거에 앞서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였다. 아라파트의 정당인 ‘파타’의 몰락이다. 자치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공무원의 80% 이상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아온 이들로 채웠다. 하지만 고위직은 모두 자치정부 출범을 전후로 망명지에서 ‘귀환’한 기술관료들이 장악했다. 자치정부가 비민주주의적 관료주의와 부패의 온상이 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졌다. 그러는 사이 이스라엘과 비타협적 투쟁을 벌이는 한편 자선·교육 사업으로 피폐한 민심을 보듬어온 하마스는 대안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다.

켜켜이 쌓여온 집권 파타당과 팔레스타인 옛 지도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반감의 정도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자치의회 전체 132석 가운데 ‘변화와 개혁’을 내건 하마스가 절반을 훌쩍 넘어선 74석을 얻었다. 파타당은 45석을 얻는 데 그쳤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이슬람주의 진영이 집권에 성공한 최초의 사례였다.

같은 해 2월19일 하니야 총리는 하마스를 중심으로 새 정부를 구성했다. 파타는 기득권을 내놓지 않기 위해 버텼고,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이슬람주의 세력의 집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원조 중단’ 선언이 이어졌다. 이스라엘의 봉쇄와 무력시위로 노골적으로 내정을 간섭했다. 하마스 정부 출범 10개월 남짓 만인 그해 12월 아바스 대통령은 ‘조기 총선’을 거론했다.

이듬해인 2007년 2월 어렵사리 파타가 참여하는 거국내각이 구성됐지만, 파타 진영은 하마스 주도 정부의 통제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움과 분노의 상승작용이 자주 피를 불렀다. 그해 6월13일 하마스 소속 무장요원들이 가자지구의 파타 보안군 사령부를 장악한 것도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우발적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아바스 대통령은 즉각 하마스가 주도해온 거국내각을 해산하고, 파타 주도의 비상내각을 출범시켰다. 미국과 EU는 기다렸다는 듯 원조 중단 조처를 해제하고 경제 지원을 재개했다. 이스라엘도 하마스 집권 이후 동결했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세금과 관세수입 약 5억달러를 풀어줬다. 하마스는 ‘섬’이 됐다.

두 정파의 중재자, 마르완 바르구티

360km²의 땅덩어리에 줄잡아 150만 명이 몰려 살고 있는 가자지구는 지구상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통한다. 2005년 철군 이후에도 그리로 통하는 땅길과 하늘길, 바닷길은 모두 이스라엘군이 장악하고 있다. 가자로 향하는 물과 식량, 석유와 전기도 모두 이스라엘이 공급권을 쥐고 있다. 지난 7년여, 가자가 천천히 말라 죽어가고 있는 이유다.

그나마 숨구멍 구실을 했던 이집트마저, 지난해 7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시나이반도 국경을 철통같이 막고 있다. 쫓겨난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의 무슬림형제단과 뿌리가 같은 하마스를 ‘안보 위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가자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럼에도 파타 쪽은 여전히 하마스 탓만 하고 있다. 어디서 숨통이 트일 것인가? 10년째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는 마르완 바르구티(55)에게 눈길이 가는 이유다.

마르완 하시브 이브라힘 바르구티는 1959년 6월6일 요르단강 서안지구 코바르에서 태어났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도 격인 라말라가 지척인 곳이다. 그가 태어난 해, 팔레스타인민족해방운동(파타)이 라말라를 근거로 결성됐다. 1965년께 정당으로 탈바꿈한 파타를 주도한 것은 이집트·레바논 유학파로, 페르시아만 연안국가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팔레스타인 출신 망명객들이었다. 파타는 1964년 창설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최대 정파다.

바르구티가 파타운동에 뛰어든 것은 15살 무렵이다. 그는 18살 되던 1976년, 무장단체 활동 혐의로 이스라엘 당국에 처음으로 체포됐다. 수감 중에 고교 졸업 자격을 얻은 그는 1983년 뒤늦게 비르제이트대학에 입학해 역사와 정치학을 전공한다. 학부생 시절 바르구티는 파타 청년조직을 이끌며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해 총학생회장을 했다. 잇따른 투옥과 망명으로 바르구티가 학사과정을 마치는 데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1987년 말 마침내 저항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1993년 9월까지 4년9개월여 지속된 제1차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인티파다)가 시작된 게다. 당시 항쟁 지도부에 가담했던 바르구티는 이내 체포돼 요르단으로 추방됐다. 그는 1994년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이후에야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1996년 사상 첫 자치의회 선거에서 바르구티는 무난히 당선됐다.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위한 그의 정치적 노력이 본격화한 시점이다.

바르구티는 아라파트가 이끄는 자치정부의 만연한 부패를 통렬히 비판했다. 자치정부 치안기관의 인권유린 실태도 낱낱이 까발렸다. 파타가 장악한 자치의회에서 그는 ‘야당’을 자임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스라엘의 진보적 정치인·평화운동가들과 교분을 쌓아나갔다.

평화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임기가 막바지로 접어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조바심을 냈다. 그의 중재로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2000년 7월11일 마주 앉았다. 협상은 전혀 진척이 없었다. 결국 협상은 같은 달 25일 아무런 합의 없이 막을 내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바르구티는 땅을 주고 평화를 살 수 있다는 오슬로협정 체제의 환상에서 벗어났다. 그는 당시 “대중적 봉기, 새로운 형태의 무력투쟁이 다음번 인티파다의 특징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의 예견이 현실화하는 데는 채 두 달이 걸리지 않았다.

‘제2차 인티파다’의 주범으로 수감

그해 9월28일 이스라엘 보수파의 거두인 아리엘 샤론 리쿠드당 대표가 1천여 경찰 병력의 호위 속에 예루살렘의 템플 마운트를 방문했다. 그곳이 어딘가? 구약성서 창세기 22장을 보면, 신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땅으로 가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한다. 아브라함은 명에 충실히 따랐고, 신은 마지막 순간 이삭 대신 제물로 바칠 양을 내준다. 그 모리아 땅이 템플 마운트 자리다. 유대경전 <탈무드>는 그곳에서 신이 첫 인간인 아담을 빚어내기 위한 흙을 취했다고 지목한다. 템플 마운트는 유대교 제1의 성지다.

이슬람에도 그곳은 메카, 메디나에 이은 세 번째 성지다. 성서 코란과 예언자의 행적을 담은 하디스 등의 경전을 보면, 서기 621년 한여름 밤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의 손에 이끌려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난다. 무함마드의 마지막 행적인 이른바 ‘이스라 왈 미라즈’다. 그곳 알아크사 사원에서 기도를 올린 예언자는 하늘로 오른다. ‘이스라’는 여행 또는 여정, ‘미라즈’는 사다리 또는 승천이란 뜻이다. 샤론 대표의 방문날로부터 2005년 2월8일까지 팔레스타인에서 제2차 인티파다가 불을 뿜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저항이 본격화하자 이스라엘 쪽은 바르구티를 무장단체 ‘알아크사 순교자 여단’의 지도자로 지목했다. 이 단체는 이스라엘 안팎에서 민간인을 겨냥한 자살폭탄 공격을 포함한 유혈극을 여러 차례 벌였는데, 바르구티가 개인적으로 진두지휘했다는 게다. 이스라엘군은 2001년 바르구티를 겨냥한 암살작전에 나섰다. 그가 탄 차량 행렬로 미사일이 날아들어 경호원이 목숨을 잃었다. 바르구티는 용케 살아남았지만, 이듬해 4월15일 라말라의 자택에서 이스라엘군의 급습으로 체포돼 예루살렘의 경찰본부로 넘겨진다.

체포 넉 달 만인 2002년 8월에 시작된 재판은 길고도 지루하게 이어졌다. 바르구티는 변호인의 조력 없이 스스로 변론에 나섰다. 그는 “이스라엘 당국은 나를 재판할 법적 권한이 없다. 그러니 재판 자체가 불법”이라고 강조했다. 체포 당시 바르구티는 팔레스타인 자치의회 의원 신분으로 면책특권이 있었다. 체포된 장소 역시 이스라엘이 사법 관할권을 행사할 수 없는 팔레스타인 땅이었다. 더구나 무력 점령지에서 체포된 사람을 점령 당국의 관할 지역으로 옮기는 행위는 제네바협정이 금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마침내 2004년 5월20일 법원의 판단이 내려졌다. 이스라엘 법원은 바르구티에 대한 기소 내용 가운데 2002년 3월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차량폭탄 공격을 포함해 모두 5명의 목숨을 앗아간 3건의 테러 공격을 주도한 혐의 등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나머지 30여 건의 기소 내용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무죄였다. 그해 6월6일 선고공판이 열렸다. 법원은 5명의 목숨값으로 5차례 연속 종신형을, 살인 미수 등 나머지 유죄가 인정된 부분에 대해선 징역 40년형을 각각 선고했다. 검찰의 구형량과 똑같았다. 그날은 바르구티의 45번째 생일이었다.

석방운동은 그가 체포된 날부터 이미 시작됐다. 팔레스타인 내부뿐 아니라 유럽의회와 이스라엘 인권단체들까지 나서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당시 <로이터통신> 등은 그를 가리켜 “팔레스타인의 넬슨 만델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분열된 팔레스타인을 하나로 모아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얘기다.

모두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옥중에서도 바르구티는 ‘정치’를 지속했다. 그는 아라파트 사망 직후인 2005년 1월 치르게 된 자치정부 대통령 선거에 옥중 출마를 선언했다. 이미 파타당 내부에선 마무드 아바스 PLO 의장을 후계자로 결정한 상태였다. 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아바스 의장을 앞서기도 했지만, 그는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팔레스타인의 단결을 저해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바르구티는 2006년 1월 자치의회 선거에서 옥중 당선됐다. 이 무렵 이스라엘 정치권 내부에서도 그를 석방해야 한다는 의견이 비등했다. 당시 선거에서 하마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파타를 제치고 자치정부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1월 시몬 페레스 당시 부총리는 대선에서 승리하면 바르구티에게 사면령을 내리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그는 당선 뒤 사면령을 내리지 않았다. ‘미래의 평화협상을 위한 카드’로 손에 쥐고 있었던 게다.

지난해 미국은 올해 4월 말까지 평화협상을 일단락짓겠다는 이른바 ‘케리 프레임워크’를 발표했다. 협상은 아직 시작조차 못했다. 팔레스타인 쪽은 회담 참여의 전제로 정치범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도 이를 받아들였다. 석방은 지금까지 세 차례로 나눠 진행됐다. 남은 건 한 차례다. 마지막 석방 대상자 명단에 마르완 바르구티도 끼어 있다. 협상의 길이 열려야 가자에 갇힌 주민들의 숨통도 틀 수 있다. 2007년 2월 하마스와 파타가 거국내각 구성에 합의한 것도 바르구티의 중재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가자의 주민들이 그나마 남은 희망마저 꺾게 될 때, 이스라엘은 뭘 얻을 수 있을까? 모두가 바르구티를 기다리고 있다.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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