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2 14:38 수정 : 2014.05.02 15:41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 말이 사람과 함께 있었으니, 말이 곧 사람이었다. 사람이 말로 뜻을 통하여 문명을 일궈냈다. 말이 곧 문명이었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말의 허무함을 깨달은 사람이 이윽고 문자를 만들어냈다. 문자가 모여 책이 됐고, 그로부터 사람의 지식이 입 대신 책으로 후대에 전해지게 됐다. 책이 곧 지식이요, 권력이었다.

책을 독점한 사람이 지식을, 따라서 권력을 독점하는 시대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 독점의 폐해가 극에 달할 무렵,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이 개발됐다. 책 보급이 늘면서 지식과 권력을 독점하던 세력의 힘이 점차 약해졌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긴 세월 소수가 감춰놓고 독점했던 인류의 유산을 해방시켰고, 그로부터 근대 세계가 만들어졌다.

소통의 도구인 말과 문자는 ‘시간’과 ‘위치’란 물리적 한계에 붙들려 있었다. 사람이 전신과 전화를 만들어 그 족쇄를 풀어냈다. 내처 라디오와 텔레비전까지 등장하면서, 사람 사는 세상이 이전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학에 미친, 공부 잘하는 괴짜

이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만들어낸 ‘발명품’을 만날 차례다. 1989년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바로 그것이다. 지난 3월12일로 25번째 생일을 맞은 ‘월드와이드웹’(WWW) 말이다. 웹이 생겨난 뒤의 세상은, 분명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세상은 작아졌고, 사람들은 연결됐다. 이 모든 일이 1989년 3월12일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지대에 자리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세른)에서 시작됐다. 팀 버너스리란 이름의 서른네 살 영국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손끝에서 말이다.

팀 버너스리는 1955년 6월8일 영국 런던 남서부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콘웨이 버너스리와 어머니 메리 리 우즈는 수학자이자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두 사람은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로 불리는 ‘페란티 마크1’ 컴퓨터 개발에 함께 참여했다. 수학과 컴퓨터는 어려서부터 그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일부였다. 그는 유년 시절을 회고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내 세대는, 말하자면 우드스톡 록 페스티벌에 가기에는 너무 늦게 태어났다. 그래도 나는 항상 내가 적당한 때 적당한 장소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내 곁에 준비돼 있었다.”

어린 버너스리는 밖에서 뛰어노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전자석을 만들거나 전기회로판에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를 연결해 장난감 기차 선로를 바꾸는 장치를 만드는 걸 더 좋아했다. 친구도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엔 그저 두어 명의 단짝과 어울려 화학이나 물리학에 대해 토론하는 걸 즐겼다. 공부 잘하는 괴짜의 전형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단연 수학이었다. 전기회로판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1973년 옥스퍼드대학 퀸스칼리지 물리학과에 진학한 것은 일종의 타협이었다. 수학과 전기공학을 두루 섭렵하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는데, 그는 그간 여러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막상 대학에 가보니 물리학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고 털어놓고는 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그의 ‘만들기 본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어느 날 문득 컴퓨터를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맨 먼저 동네 중고 전자제품 가게에서 텔레비전을 사다가, 회로를 연결해 컴퓨터 모니터로 바꾸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버너스리표 컴퓨터 만들기 작업은 이어졌다. 때맞춰 메모리 칩이 개발돼 나오면서, 그의 작업에도 속도가 붙었다. 그는 웹 탄생 25주년을 맞아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등과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학교 실험실에서 마침내 컴퓨터 조립 작업을 마무리지었을 때가 기억난다. 현재의 노트북컴퓨터 수준도 안 되는 성능이었지만, 그걸 만드는 과정에서 컴퓨터의 작동 원리 전반을 깨우칠 수 있었다.”

소프트웨어뿐 아니라 하드웨어까지 두루 섭렵한 그는 3년여 만에 대학을 마친 뒤 ‘컴퓨터 컨설팅’ 업체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프린터 같은 주변기기를 ‘좀더 영리하게’ 만들어주는 일처럼,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하드웨어의 성능을 높여주는 일을 주로 했단다.

1980년 6~12월 세른에서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이 무렵 그는 연구진 사이의 정보 공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하이퍼텍스트(특정 자료가 다른 자료나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돼 있어, 서로 넘나들며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만든 문서) 개념을 처음 고안해내고, 그 초기 모델인 ‘인콰이어’를 선보이기도 했다.

세른 생활을 마친 뒤 다시 민간업체로 돌아간 그는 3년여에 걸쳐 원거리 실시간 컴퓨터 네트워킹 개발 작업을 경험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1984년 정규직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세른에 복귀한다. 다시 시작한 세른 생활, 버너스리는 이내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갑갑증이 밀려오더니, 점차 절박함으로 바뀌어갔다. 그의 입을 통해 당시 상황을 들어보자.

“지금은 컴퓨터가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는 주로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한 문서 작업이 많았다. 작업을 마치면 디스크에 따로 보관하거나 폴더를 만들어 저장했다. 더구나 세계 각국에서 온 세른의 연구원들은 서로 다른 컴퓨터와 프로그램으로 연구 작업을 수행했다. 특정 실험과 관련된 정보를 찾으려면, 그 정보가 저장돼 있는 컴퓨터의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따로 익혀야 접근이 가능했다. 어딘가에 내게 필요한 정보가 있다는 점은 분명히 아는데, 그걸 도서관에서 책을 찾듯 쉽게 꺼내볼 수 없었다. 정보가 있는데도 접하기 어렵다는 점에 불만이 점차 쌓여가고 있었다. 모든 연구 성과를, 모두가 함께 나누고,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틀거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필요하면, 만들어내야 했다. 그는 이를 위한 제안서 작성에 들어갔다. 표지와 각주까지 A4용지 20쪽 분량으로 만든 제안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정보관리를 위한 제언. 팀 버너스리, 세른. 1989년 3월.’

1989년 당시 세른은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인터넷 시스템을 구축했다. 버너스리는 여기에 하이퍼텍스트를 접목시키는 새로운 개념을 고안해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할 때마다 “인터넷은 이미 개발돼 있었고, 전자우편도 사용되고 있었다. 다만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 한정됐을 뿐이다. 필요한 기술은 이미 개발돼 있었고, 내가 한 일은 그저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시켰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엔 버너스리의 제안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없었다. 그렇게 1년여가 흐른 뒤인 1990년 5월 누군가 다시 제안서 내용을 물어왔다. 그는 기존 제안서에 날짜를 추가해 다시 제출했다. 이 제안서에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의 핵심 구조가 복잡한 도표와 함께 망라돼 있다. 여러 곳에 흩어진 채 높은 차단벽을 쌓고 있던 각종 정보를 누구나 손쉽게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었다. 이른바 ‘브라우저’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저 난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시켰을 뿐”

이번엔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그는 이미 ‘인콰이어’란 이름의 초기 브라우저 프로그램까지 고안해둔 상태였다. 그렇게 탄생한 세계 최초의 웹사이트(http://info.cern.ch/hypertext/WWW/TheProject.html)는 월드와이드웹 관련 정보와 활용 방법을 담고 있었다. 이 사이트는 1991년 8월6일 온라인에 공개됐다. 이로써 서른넷의 버너스리는 ‘웹의 아버지’가 된 게다. 이어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지원으로 ‘월드와이드웹컨소시엄’(W3C)을 설립했다. 웹의 기준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든 아이디어를 특허나 저작권료 없이 무료로 나눴다. 누구든 쉽게 기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새로운 세상에 기여하도록 하자는 게 이유였다. 그 뒤는 말 그대로 ‘역사’가 됐다. 지난 3월12일 <가디언> 등 외신들이 일제히 정리해 내놓은 웹의 지난 25년 성장기를 들여다보자.

세른의 웹사이트가 첫선을 보인 지 2년 만인 1993년, 웹의 대중적 확산에 전기가 마련됐다. 보기 좋고 사용하기 쉬운 대중용 웹브라우저인 ‘모자이크’가 첫선을 보였다. 모자이크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인터넷 사용자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어 1994년, 이제는 사라진 추억의 웹브라우저인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가 탄생한다. 이 프로그램은 비상업적·교육적 용도로 공짜로 제공됐다. 출시 2년여 만인 1996년에 이르면 넷스케이프는 전세계 웹브라우저 시장의 80%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웹사이트 제작의 혁명은 1994~95년 ‘지오시티스’의 등장과 함께 막이 올랐다. 이 업체는 누구든 개인용 웹사이트를 만들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그것도 무료로 지원했다. 이미지와 디자인 측면에선 ‘꽝’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지오시티스의 서비스를 통해 수백만 명이 사상 처음으로 개인용 웹사이트를 보유하게 되면서, 웹의 세상은 급팽창하게 된다.

새 세상이 만들어지자, 장사꾼들도 뛰어들었다.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 시장의 강자인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95’에 번들용으로 장착한 ‘인터넷 익스플로러 3.0’이 1996년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시장 장악력에 밀려, 3년여 쌓아온 넷스케이프의 아성은 쉽게도 무너져내렸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웹 관련 핵심 기술들도 마이크로소프트의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됐다. 다른 방식으로 만든 프로그램이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제대로 구동되지 않으면 주변부로 밀려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결국 웹 관련 기술의 표준을 마이크로소프트가 주도하는 형국이 돼버렸다.

그해 인류 역사의 신기원이 하나 더 만들어졌다. 새로운 인터넷 포털 사이트 ‘구글’이 개발됐다. 그 전까지 검색 시장을 주도했던 ‘야후!’는 웹을 일종의 검색 가능한 디렉토리 형태로 여기고 검색 정보를 제공했다. 반면 구글은 독특한 검색 알고리즘을 통해 웹 세상의 모든 정보와 연결시키려고 했다. 원하는 책을 찾기 위해 한참을 뒤져야 하는 도서관 같았던 웹은, 구글을 통해 여러 권짜리 두툼한 백과사전 전집 같은 느낌으로 바뀌었다. 구글이 지금과 같은 영향력을 얻기까지는 그로부터 몇 년이 더 걸렸지만,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 개발이 본격화한 1996년부터 일반 누리꾼에게 공개된 1998년 사이에 그 토대가 모두 만들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로봇 위즈덤’이란 사이트를 운영하던 미국 누리꾼 존 바거가 1997년 ‘웹로그’(Weblog)란 말을 만들어내기 이전에도 일부 블로그 사이트는 존재했다. 하지만 1998년 ‘오픈다이어리’가 문을 열면서 웹은 또 한 차례 새로운 진화의 전기를 만난다. 이른바 ‘온라인 다이어리’를 표방한 이 사이트는 개별 블로그의 방문자들이 올라온 글에 의견을 달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처음 도입했다. 이를 통해 앞선 미디어와 마찬가지로 ‘일방적 강의’식에 그쳤던 웹 세상에서 쌍방향, 아니 다방향의 ‘대화’가 가능한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소셜미디어’의 전조였다.

같은 해, 개인 미디어의 폭발적 잠재력을 보여주는 사건이 미국에서 벌어졌다. 워싱턴 정가 안팎의 온갖 추문과 스캔들, 음모론 따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블로거 맷 드러지가 운영하는 <드러지 리포트>에서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이 백악관 인턴인 모니카 르윈스키와 ‘연애’를 했다는 소문을 대서특필했다. 당시 <드러지 리포트>는 관련 기사 제목을 ‘<뉴스위크>, 백악관 인턴 관련 보도 삭제 파문’이라고 달았다.

개방·사생활 보호·노(NO) 검열, 웹의 3계명

그때까지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여론시장을 주도해온 주류 엘리트 언론계는 삽시간에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르윈스키 스캔들 보도 자체 때문이 아니다. 주류 언론이 보도하지 않은 내용도 대중에게 알려질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점이 더욱 큰 충격이었다.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제는 누구라도 ‘뉴스거리’만 있으면 전세계와 나눌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글은 물론 사진과 동영상도 마찬가지다. 이로써 이른바 ‘게이트키퍼’란 전통적 언론·출판 산업의 특권은 소멸 위기에 처했다. 뉴스를 독점해 여론까지 장악했던 주류 언론의 기득권은 웹의 진화와 함께 그렇게 깨져나갔다.

백과사전의 대명사 <브리태니커>의 운명도 엇비슷하다. ‘다언어, 웹 기반, 무료 백과사전’을 모토로 2001년 <위키피디아>가 첫선을 보였다. 이제 전문가가 아니어도 누구든 백과사전 편집에 간여할 수 있게 됐다. 값비싼 양장본 백과사전 전질을 사지 않고도, 누구나 잘 정리된 고급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위키피디아>는 폭발적으로 성장을 이어갔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에는 줄잡아 450만 건의 정보가 수록돼 있을 정도다. 일부 잘못된 정보가 논란이 된 때가 없지 않지만, 자체적으로 오류를 잡아내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웹 생태계가 자체 정화 능력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웹은 본격적으로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하버드대 학생 마크 저커버그는 2004년 2월 친구들과 함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을 개설했다. 애초 하버드생들만을 대상으로 했던 이 사이트는 개설 2년 뒤인 2006년 모든 누리꾼에게 접근을 허용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웹에서 만나, 가장 내밀한 추억과 감정을 나누기 시작했다. ‘소셜미디어’의 시대가 도래한 게다.

2010년 4월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시기다. 미군 병사 첼시 매닝이 이라크에서 미군이 민간인을 겨냥해 헬리콥터 기총소사를 퍼붓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시작으로 막대한 양의 비밀정보를 웹을 통해 세상에 공개했다. ‘위키리크스’ 사이트에 접속하면 누구나 미국 정부가 외국 공관 등을 통해 장기간에 걸쳐 수집한 기밀문서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게다. 웹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브래들리란 남성 이름을 썼던 매닝은 수감 기간에 ‘트랜스젠더’란 성 정체성을 밝히고, 여성 이름으로 개명했다.)

2011년 말엔 아랍에 봄이 찾아왔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봄 기운은 바람을 탁고 삽시간에 이집트와 리비아, 시리아, 예멘, 바레인 등지로 번져나갔다. 오랜 독재에 시달려온 젊은이들은 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시위 장소를 알리고,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독재자의 최후를 앞당겼다.

2012년 미국의 ‘인터넷 해적행위 방지법’(SOPA) 철폐 투쟁도 웹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웹상에서 벌어지는 저작권 침해를 막겠다고 나섰던 미 의회는 “웹에 올라온 정보를 검열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인권단체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야 했다.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수많은 인기 사이트가 입법을 막기 위해 하룻동안 ‘파업’(사이트 일시 폐쇄)에 나서기도 했다. 세계 정보 자유화 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그해 영국 런던에서 제30회 여름올림픽이 열렸다. 7월27일 개막식 축하공연 무대에 버너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25년 전 처음 웹을 구상하고 제작할 때 사용했던 구형 ‘넥스트’(NeXT) 컴퓨터 앞에 앉은 그가 타이핑을 하자 어두운 관중석에 이런 글귀가 아로새겨졌다. ‘여러분 모두의 것입니다.’

지구촌 5명 중 3명, 아직도 접속할 수 없다

웹은 모두에게 개방돼야 한다. 사생활은 보호돼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검열은 있을 수 없다. 지난 25년 동안 흔들림 없이 지켜온 ‘웹의 3계명’이다. 물이나 공기처럼, 웹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됐다.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최근 내놓은 자료를 보면, 미국인 87%가 매일 정기적으로 인터넷(웹)에 접속한다. 18~29살 젊은 층에선 그 비율이 97%까지 높아진다. ‘인터넷이 삶에 도움이 된다’는 응답은 90%, ‘사회적으로 유용한 구실을 한다’는 응답도 76%에 이른다. 응답자의 53%는 ‘인터넷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답했다. 이런 반응은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솔직히 처음엔 별 뜻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정보의 자유를 극대화해 세상을 해방시키겠다는 따위의 거창한 포부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때 겨우 34살이었고….” 지난 3월12일 버너스리는 <가디언> 등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지구상에는 6억 개 정도의 웹사이트가 존재한단다. 정보에 접근하고 공유하는 방식은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매 순간 수십억 명이 온라인에 접속해 있다. 그래, 그런 세상이 됐다. 버너스리가 웹 탄생 25주년을 맞아 “지구촌 차원에서 웹 세상의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강조한다.

“웹이 진정으로 인류 모두를 위한 도구가 되려면, 지난 25년처럼 앞으로 25년 동안에도 인류 모두가 웹의 진화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해야 한다. (…) 여전히 지구촌 인구 5명 가운데 3명이 웹에 접속할 수 없는 형편이다. 모두가 접속할 수 있는 웹을 만들어내야 한다. 인간이 존엄함과 권리를 누리고, 타고난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웹을 통해 얻을 수 있도록.”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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