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2 14:08 수정 : 2014.05.02 15:40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의 일탈에 대한 여러 설명들이 있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이하 표창원)는 일베를 범죄집단 내지 일탈집단으로 규정한 뒤 일종의 ‘프로파일링’을 시도한다. 그는 원한 감정이나 콤플렉스 등 심리적 동기에 방점을 찍는다. 그에 따르면 일베 유저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2. 강하고 능력 있는 ‘남자’이고 싶지만 경쟁에서 탈락, 인정을 못 받는 현실에 좌절, 이를 약자 공격으로 분풀이.”

“8. 겉으로는 진보나 민주화 세력에 대한 비판 및 반대 표방하나 속으론 그들이 받는 지지와 선망에 극단적 질투심.”

“9. 대부분 성장 과정에서 애정결핍 내지 학대, 폭력 피해. 학교폭력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 다수 포함.”

“26. 자기 집단이 싫어할 요소 갖춘 사람 찾아내 신상 털거나 약점 잡아내 집요하고 지나친 집단공격 가하는 ‘가학성’(사디즘)과 스스로를 ‘벌레’로 비하하며 사회적 비난 초래하고 존칭 거부 욕설 일상화 등 ‘자기학대’(마조히즘) 함께 보임.”

“39. 일베의 사회·경제적 구성(계급주의적 용어 차용): 다수의 ‘룸펜 프롤레타리아’+소수의 ‘룸펜 부르주아’+일탈적 테크노크라트. 이 중 다수 노동자층은 신분 이익에 반하는 극우 보수 지지. 히틀러 유겐트, 일제 앞잡이, 유럽 극우와 유사.”

-표창원, ‘일베에 대한 분석’, 표창원의 범죄와 세상 이야기, blog.daum.net/drpyo

일베는 루저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이하 진중권)도 표창원의 일베 분석글에 대해 트위터에서 “대체로 제 분석과 일치합니다”라고 공감했다. 진중권 역시 나름의 일베 분석을 트위터에 올린 적이 있다. “일베의 특징은 사회의 낙오자들이 권력에 대한 좌절된 욕망에서 권력과 자신을 환상적으로 일체화한 것이다. 그 환각에 빠져 권력이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권력의 주구가 되어 사회적 약자들을 공격한다.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주류 권력에 속한다는 허구적 만족감을 느끼려는 것이지만 권력이 쓰레기들을 인정해줄 리 없다. 그럼 그들은 자신들의 충성이 부족해 그런 거라 믿고 더욱더 악랄하게 사회적 약자들을 공격하게 된다.”

사실 일베 활동이 원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회 낙오자들의 일탈행위라는 유의 해석은 표창원과 진중권만의 독창적인 분석은 아니다. 일베가 사회문제화한 직후부터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오던 일종의 ‘표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루저론’이 비등하자 일베에서는 자신이 ‘명문대 학생’ ‘일류기업 사원’ ‘고소득 전문직’임을 알리는 ‘신분 인증’이 유행처럼 번졌다. “우린 루저 아니거든?”이라는 반박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일베 유저에 대한 전수조사나 표본조사는 실시된 적이 없다. 유저들 개인의 심층심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나 면담이 있었던 적도 없다. 일베 유저층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일평균 방문자 수가 약 25만 명이라는 것, 8 대 2 정도의 압도적 남초 커뮤니티라는 것, 30대 남성이 주 이용자층이라는 것 정도다(‘12개 주요 커뮤니티 성향 포지셔닝 맵’ <동아일보>, 2013년 5월). 일베 유저들의 계급 위치는, 만약 정밀한 조사가 가능하다면, 의미 있는 자료일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 데이터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루저니 낙오자니 식의 라벨링은 일베 유저의 화를 돋우는 것 외에 뾰족한 실익이나 의의가 없다.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자. 일베 유저의 계급 위치를 특정하는 것을 일베 현상의 ‘해명’이라 할 수 있을까? 일베 유저가 사회 낙오자라면 일베 현상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만, 일베 유저가 사회 지도층일 경우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되는 걸까? 일베 현상의 해명은 유저 개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밝혀내는 작업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일베 루저론은 일베를 비난할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위안이 돼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현상의 분석이 되기엔 지나치게 ‘약한 설명’이다. 게다가 ‘루저’ ‘낙오자’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강한 가치판단이기 때문에 또 다른 논란을 야기한다. 질문의 형식은 ‘일베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일베는 무엇인가’ ‘일베는 왜 그런 모습으로 현상하고 있는가’이다.

질적 경쟁에서 양적 경쟁으로

일베를 포함한 극우세력의 심리적 메커니즘이 ‘상상된 착취’라는 점은 이전의 연재에서 밝힌 바 있다. 다시 간략히 설명해두자면 상상된 착취란 일종의 피해자 의식으로서 자신의 정당한 몫을 빼앗기고 있다는 평등주의적 불만과 분노가 실제 착취의 주체(국가와 자본)가 아니라 내부의 타자에게 향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타자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자격(Membership)과 능력(Merit)인데 그것을 인준해주는 주체가 다름 아닌 국가와 자본이기 때문에 이들은 국가와 자본에 저항할 수 없다. 이들은 오직 카리스마적 지도자에게 정의를 요청하거나 국가와 거대 자본의 명령에 부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 면에서 일베 유저들이 국가정보원이 주최한 관제행사에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떼지어 몰려간 장면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일베는 다른 극우세력 및 넷우익과 구별되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정치화 가능성을 스스로 거세한다는 점이다. ‘친목질 금지’라는 대원칙과 디씨인사이드의 몇몇 갤러리에서 이어진 ‘패륜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은 일베 특유의 반(反)정치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이는 곧 인정투쟁 같은 규범적 개념으로는 일베 현상을 포착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일베는 긍정적 자기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 아니며, 그렇다고 모욕당하고 무시당하는 자의 저항이라 볼 수도 없다. 그들은 부정의한 폭력에 유린당한 주체의 윤리적 저항(예컨대 광주항쟁)을 모독한다는 점에서, 심지어 인정투쟁을 부정하는 측면도 있다. 일베에서 자주 사용되는 ‘씹선비질’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은 도덕 판단 내지 규범적 정당화의 층위를 무력화하기 위한 전형적인 담론 전략이다.

사회운동으로서의 합목적성이나 정치세력화 의지도 결여돼 있고, 어떤 이해관계에 의해 묶여 있지도 않은 이 거대한 집단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베를 해명하는 작업의 열쇠는 바로 이 질문에 묻어 들어가 있다. 일베는 촛불시위 당시 진보의 위선과 비합리성이 자신을 탄생시켰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후 발명된 탄생설화일 뿐이다. 일베를 탄생시키고 추동하는 원리는 그런 식의 정의 감각이 아니다. 저토록 일관되게 반정치적이고 반도덕적인 커뮤니티이면서도 처음에는 날카로운 윤리적 각성에 의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

일베는 이념과 사상의 생산지가 아니며 이들을 움직이는 동기도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다. 일베는 정치세력이나 이념집단이 아니라 ‘네트워크 아미’(Network Army)에 가깝다. 네트워크 아미란 1990년대부터 쓰이던 네트워크 관련 용어로, 리처드 헌터는 이를 ‘지리적으로 제약받지 않고 특정한 주제에 영향을 미치려는 집단’이라 정의한다(Richard Hunter, ‘World Without Secrets: Business, Crime and Privacy in the Age of Ubiquitous Computing’, 2002). ‘아미’(Army·군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네티즌’이나 ‘현명한 군중’(Smart Mobs)과 같은 개념에서 보이는 공공성 또는 도덕적 뉘앙스를 배제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네트워크 아미는 오픈소스 운동처럼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신상털기’, 해킹, 어뷰징(게시물 추천 수 조작 등 정상 운영을 방해하는 행위)등 일탈행위 역시 벌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도입 초기에 정치 담론이 오가는 온라인 커뮤니티들은 이른바 ‘팬클럽-공론장 모델’이었다. 이 중에서 강한 내부 규율과 도덕적 자의식을 가지고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한 대표적인 커뮤니티가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공간들은 쇠락했다. 대신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취미, 유희, 소비자 커뮤니티가 정치 담론의 유통을 겸하게 됐다. 디씨인사이드, ‘웃긴 대학’ 등이 급속히 덩치를 불려가던 시기를 하나의 분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어뷰징을 주고받는 ‘커뮤니티 전쟁’ 문화도 성행했다. 큰 커뮤니티는 집단 어뷰징을 통해 작은 커뮤니티를 마비시켜버릴 수도 있지만 작은 커뮤니티는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담론의 정당성을 놓고 경쟁하는 질적 투쟁은 ‘쪽수’와 ‘트래픽’의 양적 경쟁으로 대체돼갔다.

주목경쟁: 더 많은 관심, 더 많은 쾌락

커뮤니티 전쟁은 종종 정당한 이유 없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일베의 혐오 담론은 정당화의 포즈조차 없는 노골성과 폭력성을 드러낸다. 혹자는 ‘로버스 케이브 공원 실험’을 연상할 수도 있다. 1954년 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는 비슷한 또래, 비슷한 가정환경의 소년들을 캠핑장에 모은 다음 편을 갈라놓았다. 불과 며칠 새 두 ‘부족’ 사이에 강렬한 적대와 갈등이 발생했다. 야유와 위협은 물론 야습을 감행해 상대 깃발을 찢어놓기도 했다. 유혈 사태가 우려될 정도로 상황이 험악해지자 실험을 주관하던 셰리프 박사조차 겁먹게 되었고 급기야 실험은 중지됐다. 소설 <파리대왕>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고전적인 사회심리학 실험이다. 그런데 일베의 행태는 정말 아무 이유가 없는 ‘묻지마 폭력’ 같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다. 다만 거시적 차원에서 극우 담론이 확산되는 사회·경제적 배경과 극우 담론이 실제 활발히 유통되는 공간 내부의 동기부여와 작동 원리는 구별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두 층위를 구별하지 않으면 주체는 단순히 사회구조에 즉자적으로 반응하고 일방적으로 휘둘리기만 하는 일차원적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일베는 이해관계, 권력 의지, 이념성 같은 개념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독특한 양태를 보이는 공간이다. 일베의 유희성에 주목해 ‘인터넷 놀이문화’라는 점을 부각하는 분석도 있지만, 왜 하필 일베 같은 형태의 놀이문화가 나왔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사회·경제적 배경과 별개로, 일베라는 공간의 구체적 작동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가 아닐까 한다. 고도 정보화 사회에서 인간의 행동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토머스 데이븐포트 등의 경영학자, 그리고 찰스 더버 등의 사회학자가 발전시켜온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 타인의 주목을 추구하는 활동이 최우선 순위를 점하게 되는 경향성 또는 사회환경을 가리킨다. 주목경제 개념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지심리학자 허버트 사이먼의 ‘정보 과잉’ 착상, 즉 정보량이 많아질수록 관심이라는 자원이 부족해진다는 착안에서 처음 시작됐다. “정보를 소비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게도 수용자의 관심을 소비하는 것이다. 정보가 넘쳐날수록 관심은 부족해진다.”(H. A. Simon, ‘Designing Organizations for an Information-Rich World’, 1971)

주목경제는 ‘주목경쟁’(Attention Struggle)을 통해 성립한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담백하고 점잖게 말하면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관심을 받기 위해 발언 수위나 행동이 점점 과장되거나 자극적인 형태가 된다. 심지어 주목받기 위해 일부러 비난받을 행동을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이른바 ‘노이즈 마케팅’이다. 주목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이렇게 살벌한 시대이기에 어찌 보면 인정투쟁은 목가적인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주목조차 받기 힘든데 인정을 획득하라니!

주목경제에서 희소 자원은 타인의 관심이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정보 초과잉 사회’에서 타인의 관심은 주체의 효능감(Efficacy)을 충족시킨다. 일베가 진보를 공격하는 것은 인터넷 공간에서 그쪽이 더 많은 관심(부정적 관심이라 할지라도)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더 많은 관심이 더 많은 쾌락을’ 준다. 만일 관심경제가 커뮤니티의 최우선 작동 원리라면 당연히 논리적·도덕적 정당성은 부차적인 고려사항이 된다. 사상이나 이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념을 위해 주목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주목을 위해 이념을 추구하는 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제도정치 영역을 포함해 대부분의 조직을 주목경제라는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끝없이 주목만을 추구할 수는 없다. 주목을 획득하는 것은 인정투쟁의 필수적인 기반이지만 그렇다고 정당성(Legitimacy) 차원을 팽개치고 주목경쟁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인정투쟁에 실패하게 되는 역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당성이 결여된 효능감의 추구는 게토화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일베가 처한 현실이 정확히 그렇다. 역으로 말하면 일베가 일정한 정당성을 갖추기 시작하면 훨씬 더 큰 사회적 파급력을 가질 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글 박권일 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사회과학학회 활동을 하면서 늘 욕구불만이 있었다. 결국 ‘문화이론학회’를 만들어 당시 폭발하기 시작한 ‘홍대신’을 돌며 마음껏 뛰어놀고, 시네마테크에서 ‘죽 때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김수행판 <자본론>을 읽다가, 뜬금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욕하는 글을 쓰곤 했다. 우석훈과 <88만원 세대>를 함께 썼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