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1 15:50 수정 : 2014.05.02 15:40

19살 어린 나이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 들어간 황유미는 백혈병에 걸려 23살에 숨졌다. 삼성은 개인 질병이라고 매몰차게 외면했다. 아버지 황상기는 딸이 죽은 이유를 밝혀내겠다며 삼성전자 반도체 산업재해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다. 2011년 6월 유미는 기적처럼 법원에서 산재로 인정됐다. 그것은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한겨레 박종식
아버지는 딸과의 약속을 지켰다. 2007년 3월6일 딸 유미는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는 택시 뒷좌석에서 생을 마감했다. 경기도 수원에서 병원 치료를 받고 강원도 속초 집으로 가는 도중, 유미는 고열에 시달리다 눈도 감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유미의 마지막 말은 “더워… 추워…”가 전부였다. “유미가 죽었어.” 어머니는 울부짖으며 유미의 눈을 감겼다. “흑~.”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신음 소리를 내며 울었다. 죽은 딸을 택시에 태우고, 속초까지 운전을 했다. 어떻게 차를 몰고 왔는지 아버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장례를 마치고, 아버지는 딸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유미야, 너 백혈병 걸린 이유, 누구 때문인지 아빠가 꼭 밝힐게. 그 억울한 거 꼭 풀어줄게.” 아버지는 설악산 울산바위 밑,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딸을 뿌렸다. 유미의 나이 스물셋, 아버지 황상기의 나이 쉰두 살 때다.

2011년 6월23일 폭우가 쏟아지던 서울 서초동 서울행정법원 203호. “백혈병과 그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 판사의 말이 끝나자, 이곳저곳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아버지도 가슴이 먹먹했다. “유미야.” 평범한 택시노동자 황상기는 대기업 삼성에 맞서 끈질긴 투쟁으로 법원에서 딸의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유미의 죽음이 삼성 탓이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린 셈이다. 반도체 산업에서 암이 산재로 인정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항소심을 준비 중인 황상기는 유미뿐만 아니라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며 오늘도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성에서 일하다 병에 걸렸다는 피해자는 계속 나오고, 삼성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누구 탓인가? 아버지의 의문

산업재해 역사의 한 획을 긋고 있는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는 딸을 잃은 아버지의 의문에서 시작됐다. 딸의 죽음은 누구 탓인가? 유미는 속초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3년 10월 학교 동기생 10여 명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 입사했다. 돈을 벌어 남동생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착한 딸이었다. 유미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기흥공장 3라인에서 일했다. 화학물질 혼합액에 반도체의 원판인 웨이퍼를 손으로 담갔다 뺐다 반복하면서 웨이퍼에 입힌 막질을 세척하는 일명 ‘퐁당퐁당’ 작업을 했다. 기계 한 대에 두 사람씩 붙어서 일을 했다. 3라인은 노후했고, 천마스크는 방독 기능이 없는 등 안전장치는 미흡했다. 유미의 몸은 점점 이상해졌다. 2005년 5월 몸에 멍이 자주 들고, 먹으면 토했다. 쉽게 피로했고 어지럼증 증세가 보였다. 한 달 뒤 찾아간 병원에서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친척 중 백혈병에 걸린 사람은 전혀 없었고, 유미는 고등학교 3년 개근상을 탈 정도로 건강했다. 아버지는 이상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린 사람이 유미 말고도 4명 더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특히 유미와 같은 조에서 일했던 이숙영이 백혈병으로 치료받다가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버지는 산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딸의 병도 감당하기 힘든데, ‘최고 기업’이라 믿었던 삼성의 태도에 아버지는 상처를 받았다. “삼성 쪽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한 번도 유미에 대해 묻지 않았어요. 유미나 우리 가족을 위로하는 말도 하지 않았고요. 합의를 요구하거나 입 막기 위한 얘기뿐이었습니다. 사표를 쓰기 전에는 개인적인 질병에 왜 회사 탓을 하느냐 했고, 사표를 쓴 다음에는 삼성 사람도 아닌데 왜 회사를 못살게 구느냐고 윽박질렀어요.”1

삼성은 유미의 병을 개인 탓이라 몰아붙이며 산재 처리를 외면했다. 아버지는 유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정당과 방송사 등을 정신없이 찾아다녔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어렵게 2007년 4월 ‘건강한 노동세상’ 장안석 활동가의 도움과 월간 <말>의 취재로 유미 사건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유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말>에 실린 기사를 부여잡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참을 울었다. 아버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딸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다산인권센터’와 연락이 닿아, 이종란 노무사를 만나게 됐다. 이 노무사는 삼성 백혈병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린 핵심적인 인물이다.

지난 3월7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사무실에서 이종란(38) 노무사를 만났다. 얼굴은 피곤해 보였고, 입술은 갈라지고 퉁퉁 부어 있었다. 도보행진, 시민선전전, 문화제 등 일주일 동안 유미의 7주기 추모 행사를 치르고 난 흔적이다. “벌써 7년이 됐네요.” 7년 전 여름, 유미가 숨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노무사는 아버지 황상기를 처음 만났다. “아버님이 서울 지리를 잘 몰라, 동서울터미널 다방에서 처음 뵈었어요. 아버님은 쉼없이 얘기했어요. ‘딸이 백혈병에 걸려 죽었다. 피해자가 더 있고, 삼성이 거짓말을 했다. 산재로 인정받아야 한다. 삼성에 노조가 있었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이 노무사는 아버지의 첫인상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기억했다.

반도체 산업의 산재 문제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이었지만, 이 노무사는 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면서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노무사가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삼성 백혈병 얘기에 공감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살아온 삶이 큰 역할을 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이 노무사는 학과 내에 노사관계분과 활동을 하면서 노동문제를 접했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 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노동이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점을 알게 된다. 졸업하고 하루 10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책에만 있던 노동법의 내용이 생생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친구가 노무사 자격증 얘기를 해줬어요. 뭔가 가치 있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부하게 됐죠.” 노무사가 되고 공부할 때 만난 사람의 추천으로 민주노총 경기지역일반노조에 취업하게 됐다. 당시 노무사가 노조에 ‘입사’한 건 이례적인 일이다. 법규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이 노무사는 많은 노동자들을 만나게 된다. 2004년 초 이마트 용인수지점 계산대 직원들이 “노조를 만들고 싶다”며 찾아왔다. 이마트는 신세계 계열사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이 이뤄지는 곳이다. 노조 설립이 가까워지자, 여성노동자들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언니들이 혼자 힘으로 힘들 것 같다며 노조가 도와주기를 원했어요.” 이 노무사는 2004년 8월 이마트에 원서를 내고 직접 취업했다. 일은 만만치 않았다. “정말 힘들었어요. 줄은 쭉 서 있지, 초보니까 손은 느리지 손님들이 짜증을 내는데 기절할 것 같았어요. 별별 손님이 다 있어 감정노동을 제대로 경험했죠.” 일도 힘든데 인력은 부족했고 월급은 적었다. 현장에서 일해보니, 노조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2004년 12월 드디어 노조를 만들었다. 조합원은 23명. 회사는 발칵 뒤집혔다. 조합원들은 이마트 지하에 있는 계산원 대기실로 끌려갔다. “면담을 명분으로 노조 탈퇴를 강요했어요.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집에 보내주지 않았어요. 검은색 옷을 입은 경비원들이 문을 막고 있어 맘대로 나갈 수도 없었죠. 사실상 감금을 한 거죠. 112로 신고까지 했어요.” 조합원들이 노조 탈퇴를 하지 않자, 회사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왔다. 조합원들 가족을 찾아갔고, 친·인척 중에 삼성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면 압력을 넣었다. 이 노무사는 일하다가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사지가 들려 밖으로 끌려나오기도 했다. 화장실을 갈 때도 직원들이 따라왔고, 움직일 때마다 무전기로 연락을 취했다. 회사는 때때로 자취방까지 미행했다. “집에서 잠을 자면 갇히는 꿈도 꾸고, 공포가 컸어요.” 이 노무사를 포함해 핵심간부 4명은 해고당했고, 나머지 조합원들은 노조에서 탈퇴했다.

이마트에 처음 세워진 노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세월이 한참 흐른 2013년 2월, 이마트가 노조 설립을 막기 위해 일상적으로 전 직원을 불법 사찰했다는 내부 문건이 폭로됐다. 이 문건에는 2004년 노조가 무너지고 이마트를 떠난 이 노무사 등 간부들의 동향을 최근까지도 파악해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삼성의 ‘노조 혐오’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마트 노조 설립은 실패했고, 이 노무사는 다시 민주노총에서 일했다. 이마트에서의 경험으로 삼성과 관련된 상담이 들어오면 대부분 그의 몫이 됐다. 삼성 피해자들은 공통점이 있다. 납치나 미행, 도청 등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이다. 일반 사람들이 보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노무사는 달랐다. “제가 겪어봤기 때문에 삼성의 인권유린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유미의 아버지 황상기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삼성에 당한 아버지의 상황을 공감할 수 있었고, 같이 분노했다.

삼성을 향해 쏘아올린 ‘난쟁이들의 작은 공’

2007년 11월20일 삼성전자 기흥공장 정문에서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다산인권센터, 민주노총 경기본부 등 19개 단체가 결합했다. 대책위를 만들긴 했지만, 솔직히 처음엔 막막했다. “첫 회의를 하는데, 문서에 뭘 써야 할지 아무런 내용이 없었어요. 삼성엔 노조도 없어서 반도체 산업이 뭔지도 몰랐으니까요.” 두 번째 회의에 산업의학 전문의 출신 공유정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이 결합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공유정옥 연구원은 미국 실리콘밸리 IBM 반도체 노동자들이 암에 걸려 소송까지 갔던 사례를 찾아왔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할 것만 같던 반도체 산업이 노동자에게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는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6명, 13명, 18명…. 천금 같던 제보도 들어왔다. 대책위는 2008년 2월부터 삼성을 뛰어넘어 모든 전자산업 노동자를 아우르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으로 이름을 바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2007년 6월 유미에 이어 2008년 4월 황민웅(2005년 사망), 이숙영(2006년 사망), 김옥이, 박지연과 12월 송창호 등 삼성전자 반도체 피해자들이 근로복지공단에 잇따라 산재 신청을 했다. 1년 넘게 역학조사를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2009년 5월15일 산재 여부를 최종 결정하기 위한 근로복지공단 자문의사협의회가 열렸다. 백혈병에 걸린 김옥이는 최후진술에서 절규했다.

“제가 의사 선생님들께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10년 전 제가 일했던 환경이나 자료에 대해 다 보셨는지요? 제가 일했던 현장에 한 번이라도 가보셨는지요? 피해자인 저에게 사전에 질문 하나라도 하셨는지요? 그러고도 이 자리에서 승인 여부를 판단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박지연씨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하나입니다. 살고 싶다는 거, 치료비가 없어서 치료 못 받고 죽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이런 마음, 이런 현실을 여러분들은 아시나요? 그런데 제가 더 분하고 화가 나는 건 지금 앞에 계신 의사 선생님들의 몇 글자에 저의 모든 걸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승인은 저에게, 지연씨에게 죽으라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심정 짐작이나 하시겠습니까?”2

공단은 6명 모두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산재 불승인이 결정됐다. 피해자들은 죽음이라는 극한과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종란 노무사는 절망했다. “공단이 절대 인정해주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닥치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피해자나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까 눈도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래도 다 이해해주시고….” 이들은 공단의 결정을 인정할 수 없다며 행정소송에 들어갔다. 세계적으로 반도체·전자산업 직업병이 법정에서 인정된 사례는 없다. 판결에서 이기려면, 노동자들이 걸린 질병과 공장 환경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혀내야 한다. 과학·의학·법률적 지식이 정교하게 뒷받침돼야 가능한 일이다. 2009년 7월부터 노무사, 변호사, 의사, 활동가, 피해자들이 만나 6개월 동안 세미나를 하며 ‘증거’를 만들어갔다. 피해자들은 현장을 이야기했고, 전문가들은 ‘지식의 언어’로 정리했다. 재판을 준비하며 쌓인 노하우는 2010년 10월 ‘전자산업노동자건강연구회’ 구성까지 이어진다. 연구회 전문가들은 제보자들의 피해 조사, 재해경위서 작성, 연구 등 좀더 체계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소송을 한창 준비하고 있을 때인 2010년 3월, 유미의 죽음 뒤 첫 제보자였던 박지연이 백혈병으로 숨을 거뒀다. 겨우 24살이었다. 반올림 식구들은 지연의 투병 과정을 지켜봤고, 그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노무사도 많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얼마나 억울할까. 한창 꽃피어날 나이에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죽음은 견디기 힘든 아픔인 것 같아요.” 지연의 죽음은 여론을 흔들었다. 언론은 앞다퉈 그의 얘기를 보도했다. 제보도 이어졌다. 삼성은 긴장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을 기자들에게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참관 시간은 짧았고, 병에 걸린 노동자들이 일했던 과거 공장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쇼’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어쨌든 2007년부터 침묵으로 버티던 삼성이 공개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2010년 7월 억대의 빚을 지고 있던 지연의 어머니는 삼성에서 보상금을 받고 산재 신청을 취소했다. 식당 일용직을 하던 어머니도 살아야 하는데, 그 선택에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산재 인정 역사를 새롭게 쓰다

2011년 6월 긴 시간을 숨차게 달려왔던 1심 판결에선 고 황유미, 고 이숙영은 승소했지만 고 황민웅, 김옥이, 송창호는 패소했다. 모두 울었다. 기쁨과 슬픔, 아쉬움이 뒤엉킨 울음이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에서 처음 산재가 인정됐다는 점에서 모두 한마음으로 기뻐했고 감동했다. 평범했던 그들이 이뤄낸 값진 성과에 서로를 축하해줬다. 이 노무사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솔직히 기쁨보다는 슬픔이 컸어요. 애정(고 황민웅의 아내)씨 등 얼굴을 볼 수가 없었어요. ‘최선을 다했는데, 이렇게 해도 지는구나. 산재 인정받기 정말 힘들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기쁨도 잠시, 반올림 식구들은 또다시 분노로 몸을 떨어야 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를 인정받은 황유미와 이숙영에 대해 항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반올림은 항소 포기를 요구하며 공단에서 열흘 넘게 농성을 했다. 울면서 매달리고, 밖으로 쫓겨나기도 하고, 차가운 바닥에 자면서 그들은 외쳤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공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항소했다. 이 노무사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민다. “산재 인정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정부가 노동자에게 해준 것도 없으면서 4년 만에 겨우 이겼는데 항소라니, 피도 눈물도 없는 거잖아요.” 공단이 항소하던 날, 삼성전자의 의뢰로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발암물질 노출 정도와 백혈병 발병 사이의 관계를 조사해온 미국 인바이런이 “상관관계가 없다”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인바이런은 미국에서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고 크롬과 간접흡연의 유해성을 반박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하는 등 대표적인 ‘고용과학’ 기관으로 꼽힌다. 삼성은 돈으로 모든 것을 감추려 했다.

또 하나의 ‘반올림’들

단일한 노동문제로 이처럼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작품이 나온 사례는 거의 없다. 삼성전자 반도체 산업재해는 책·만화책·연극·영화·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 문화예술인의 관심은 삼성 백혈병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리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지난 2월6일 개봉했다. 이 영화는 <인사동 스캔들> <용의자 X> 등의 각본을 쓴 김태윤 감독이 만들었다. 김 감독이 ‘영화화’를 결심한 건 서울행정법원에서 유미가 산재를 인정받은 2011년 6월이다. 산재 인정 기사를 봤는데, 그 자체가 감동이고 극적이어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영화 제작 과정은 험난했다. 박철민·윤유선·김규리 등 유명 배우들이 선뜻 출연을 결정했지만 투자자를 찾지 못해 애먹었다. 결국 개인 투자자와 후원자 1만여 명에게서 10억원이 넘는 제작비 전액을 마련했다. 영화는 3월12일까지 누적 관객 수 49만3573명을 기록했다.

지난 3월6일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탐욕의 제국>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노동자들과 가족이 실명 그대로 등장한다. 첫 장편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홍리경 감독이 ‘반도체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 지킴이, 반올림’에서 직접 활동하며 촬영과 연출, 편집까지 맡았다. 앞서 2010년 12월에는 연극 <반도체 소녀>가 공연됐다. 이 작품은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들의 산업재해와 비정규직 등 사회 전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책도 여러 권 나왔다. 처음 책은 작가인 박일환씨가 2010년 1월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이라는 제목으로 썼다. 반올림 활동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2011년 11월 기록노동자 희정씨는 반올림의 기획으로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희정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노동자들과 가족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다. 번역서 <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는 반도체 신화에 가려진 노동자의 현실과 환경문제를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공유정옥 산업의학 전문의와 반올림 활동가들이 번역했다.

만화가들도 나섰다. 2012년 4월 만화가 김성희씨는 삼성전자 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고 황민웅씨의 아내 정애정씨의 시선으로 제대로 공개된 적 없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세밀한 부분을 <먼지 없는 방>에 담았다. 김수박씨는 유미와 아버지 황상기씨의 이야기로 <사람냄새>를 그렸다. 김수박 만화가는 작가의 말에서 “삼성은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기업이다. 하지만 그네들이 만든 제품을 ‘사람’에게 팔고 싶다면 ‘사람’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삼성과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지만, 반올림의 저항은 사회를 변화시켰다. 단단한 벽처럼 보였던 곳에서 균열이 시작됐다. 이 변화 앞에는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2012년 2월 반도체 사업장의 작업 공정에서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 발암물질이 나온다는 사실이 공공연구기관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반도체 산업은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은폐된 진실은 무너졌다. 이 결과는 노동자들의 삶을 바꿔놨다. 2012년 4월10일 근로복지공단은 암에 걸린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에 대해 처음으로 산재를 인정했다. 공단은 “삼성전자 반도체 조립 공정에서 5년5개월 동안 일한 37살 김아무개씨의 ‘재생불량성 빈혈’을 산재”라고 결정했다. 이 노동자는 몇 년씩 걸리는 법정 공방 없이 산재를 인정받아, 돈 걱정 하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게 됐다. 같은 해 12월14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방암이 산재로 인정됐다. 공단은 1995년부터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 임플란트 공정 등에서 4년9개월 동안 근무한 뒤 유방암에 걸려 숨진 여성노동자 김아무개(36)씨에 대해 산재라고 결정했다.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암의 종류까지 확대된 셈이다.

변화는 더 큰 파도를 만들어냈다. 1963년 산재보험법이 만들어진 뒤 50년 만에 직업성 암의 인정 기준도 개선됐다. 2013년 7월 직업성 암을 일으키는 원인 물질이 9개에서 23개로 확대되는 등 암에 걸렸을 때 산재로 인정받기 쉬워진 것이다. ‘아픈 몸’이 증거라며 거리로 나왔던 노동자들과 반올림이 큰 영향을 끼쳤다. 대화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지만 2013년 3월부터 반올림은 삼성과 처음으로 교섭을 시작했다.

무수한 성과에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시간도 촉박하다. 산재를 인정받는 길은 여전히 멀고 험한데, 그사이 병에 걸린 피해자들은 죽어가고 있다. 지난 3월 반올림이 집계한 제보자 자료를 보면, 병에 걸린 반도체·전자 산업 노동자가 243명이고 이 가운데 92명이 사망했다. 제보되지 않은 피해자까지 감안하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모든 정보가 회사에 있는데 병에 걸린 노동자더러 산재를 입증하라고 하는 지금의 제도는 반드시 개선돼야 합니다. 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10년 전에 무슨 물질을 썼는지 증명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지금 위험 여부가 명확하지 않으면 그건 위험하다고 생각해야 예방할 수 있어요. 목숨이 걸린 문제잖아요. 이런 관점으로 산재보험법, 산업안전법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해요.” 이 노무사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노조를 허용하지 않고, 노동자를 소모품처럼 여겨 생산효율 이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으로 취급되면 위험은 사라지지 않아요. 삼성만의 문제는 아니죠. 이윤보다 사람이 먼저예요. 우린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고 사는 거예요.”

이 노무사의 말을 듣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그의 결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후원으로 살림을 꾸리는 탓에 반올림에는 상근활동가가 이 노무사와 권영은 활동가 등 고작 2명이다. 42기 사법연수생 등이 마련한 ‘낭만펀드’의 도움으로 임자운 변호사가 결합해 큰 힘이 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반올림 후원 회원에 가입했다. 반올림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그들의 저항을 기록하고, 후원 회원이 되는 것 말고는 달리 보답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글 김소연 <한겨레> 경제부 기자 dandy@hani.co.kr

1 ‘영화보다 실제는 더 심했어요’, <한겨레21> 2014년 2월24일치 기사.

2 <삼성반도체와 백혈병>, 박일환·반올림, 91쪽 인용.

■ 참고 문헌

<삼성반도체와 백혈병>, 박일환·반올림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희정

<사람냄새>, 김수박

<먼지 없는 방>, 김성희

‘삼성백혈병의 지식정치: 노동보건운동과 현장 중심의 과학’, 김종영·김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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