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1 15:35 수정 : 2014.05.02 15:39

나는 희망버스의 최고 베테랑 기사다. 평소 관광지를 찾아다니던 버스는 ‘희망버스’가 되는 순간 진짜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희망버스가 많은 사회는 절대 좋은 사회가 아니다. 희망버스의 손님들이 편히 관광을 즐길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운전대를 잡고 지친 손님들을 실어나른다.한겨레 박승화
저 멀리 노란 조끼를 입은 경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은 한산한 토요일 아침, 서울시청 앞 대한문이 점점 가까워진다. 일렬로 늘어선 경찰버스 뒤에 내 버스도 나란히 줄을 섰다. 버스 한켠에 ‘11호차, 밥과 예술 버스’라고 적힌 자그마한 초록색 플래카드를 붙였다. 나는 40년차 버스 운전기사다. 희망버스 기사 중에서도 최고 베테랑이다. 벌써 스무 번도 넘게 희망버스를 운전했다. 처음부터 원해서 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한번 이어진 인연은 그렇게 계속됐다.

벌써 스무 번도 넘은 인연

9시40분. 싸늘한 날씨 탓인지 대한문 앞에는 드문드문 관광객들만 보였다. 구석에는 작은 테이블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쌍용차 해고자 복직 서명운동’을 독려하는 이들이다. 10시에 출발한다는 안내가 들리자, 버스 주변에 조금씩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이내 여기저기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항상 1호차에만 오르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희망버스 기획단의 송경동 시인은 잠을 이루지 못한 듯 푸석한 얼굴이다. 그의 얼굴엔 근심과 안도감이 동시에 드리워져 있었다.

10시5분. 버스마다 지정된 차장들이 타기 시작하더니 제각각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차에 오른다. 시끌벅적했던 대한문 앞은 다시 깨끗하게 비워졌다.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자 11호차의 차장은 경쾌한 음성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사람들은 마이크를 넘겨가며 희망버스에 오른 각자의 이유를 말한다. 시위를 하러 간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10시30분. 차장이 버스 탑승객에게 ‘베테랑 기사님’을 소개하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나이에 비해 꽤 동안이라는 사실도 살짝 귀띔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마이크를 빼들었다. “이 버스 이름이 희망버스인데, 여러분들이 희망에 동참해주셔서 기쁘다”는 인사말을 건넸다. 박수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희망버스를 처음 운전했을 땐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직업이니 잘 모셔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운전을 거듭할수록, 참가자들의 결의를 마주할수록 그 안에서 사람들의 연대의식을 발견했다. 나는 사명감을 가지고 ‘손님’을 모셨다. 나름대로 보람 있는 일이라 여겼다.

12시40분. 잠깐의 휴식을 위해 휴게소에 들러 담배를 빼어 물었다. 꼬리가 아직 차가운 바람결에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의 기억이 스쳤다. 억수 같은 비가 내리던 날 부산 영도대교를 건너가지 못하고 가교에 드러누운 사람들, 비를 맞으며 3km가량 걸어 내려오던 운전기사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현장에 참여하지 않지만 늘 현장에 있던 나는 비를 맞으며 농성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애잔한 얼굴을 기억한다. 왠지 빚을 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부터다. 이걸 도와줘야겠다고 다짐한 것이. 돕는 건 별거 없었다. 그저 ‘현장을 보자’는 생각으로 다녔다. 그게 벌써 3년째, 전국의 철탑이란 철탑은 다 다녀본 것 같았다.

13시28분. 이정훈 전국금속노조 유성기업 영동지회장이 154일간의 농성을 벌이고 있는 충북 옥천의 철탑 근처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여전히 서늘한 흰색의 차벽이었다. 진입로부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 여러 지역의 버스 참가자들이 합류했다. 관광지만 다니면 이처럼 힘들고 어려운 현장이 있다는 것도 알기 어렵다. 희망을 나르는 현장은 늘 내 가슴을 아프게 하지만, 이런 곳에 올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색색의 깃발을 들고 철탑을 향해 행진하는 동안 나는 또 버스를 돌려야 했다.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얘기는 ‘힘내라’뿐이다.

14시58분. 농성을 마치고 차에 탑승하는 사람들이 종종 인사를 건넸다. 모두 현장을 오고 가며 익힌 얼굴들이다. 동생처럼 수다도 떨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저들은 편하게 누리기만 하며 살 수 없을까. 어려운, 넉넉지도 못한 사람들이 제 돈까지 써가며 참여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에 아직 이런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상도 잠시, 서둘러 유성기업이 있는 충남 아산 공장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손님’보다 경험이 많은 나는 항상 질문의 대상이다. 화장실은 있는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어느 길로 가는지, 경험 없이는 절대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17시10분. 공장에서 400m 정도 떨어진 비포장도로에 버스가 거친 엔진 소리를 내뿜으며 멈춰섰다. 이제 ‘손님’들은 걸어서 그곳까지 가야 한다. 마이크를 잡고 짧게 한마디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습니다.” 그들이 작은 위안과 희망을 안고 공장으로 향하기를 바란다. 나는 곧 이 아픈 현장을 떠나야 한다.

17시30분. 수많은 현장을 다녀왔지만 유성기업은 특히 더 신경이 쓰이는 곳이다. 이전에 4번 정도 왔었다. 지난하게 이어진 3년 동안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지만, 유성기업은 너무 오래 걸린다는 생각이 든다. 얼른 타결됐으면 하는 마음은 어쩌면 같은 노동자로서 당연한 바람이다. 동료 기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갈 때마다 기사들은 매번 바뀌지만 열심히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많이 다녀서가 아니라 보통의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게 그렇다. 기사들 중에서 이 일을 꺼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모두 자기 직업에 대한 긍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관광이 화려한 장면만 보는 것이라면, 이 버스는 ‘진짜’ 세상을 보여준다. 기사들을 통솔하는 베테랑 운전사인 나는 동료 운전사에게 항상 강조한다. “‘손님’들을 절대 불편하게 하지 말자. 이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내가 멈춰야 희망의 세상이 온다

희망버스는 말 그대로 희망버스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마음을 묶어서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는 건 좋지만, 희망버스는 희망버스로 끝나야 한다. 희망버스가 많은 사회는 절대 좋은 사회가 아니다. 한편으론 여기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게 어느 시간, 어느 시기에 굉장히 큰 사회적 파동을 일으킬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운전기사인 동시에 노동자인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다. 희망버스가 현장에 오는 것보다 모든 사업장에서 문제가 원만히 해결돼,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 희망버스 기사인 나는 그래서 더 이상 희망버스 운전을 원치 않는다. 내일이면 나의 ‘손님’들은 오늘보다 지친 몸으로 버스에 오를 것이다. ‘손님’들을 더 편히 모시기 위해 노곤해진 내 몸을 이제 옮겨야 한다. 저녁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다.

글 이지희 인턴기자 amour.fat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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