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31 15:21 수정 : 2014.04.03 15:23

문학적 향수에 달달한 로맨스를 덧입힌 〈다운튼 애비〉는 특히 여성 시청자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영국의 귀족 가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대극 〈다운튼 애비〉의 한 장면(위쪽). 의학드라마 〈하우스〉의 주인공 하우스는 셜록 홈스를 모델로 삼았다. 100년 전의 탐정 캐릭터를 복합적이고 현대적인 인물로 변신시켰다는 호평을 받는다(아래쪽).
지난 1월1일은 갑오년의 첫날, 그리고 많은 드라마 팬들에게는 또 다른 경사의 날이었다. 이날 영국 에서 화제의 드라마 시리즈 <셜록>의 세 번째 시즌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어 1월5일 밤에는 KBS 2TV에서 그 첫 편을 방영했다. 한국인들은 아시아 최초이자 미국보다 빨리 부활한 셜록을 만난 셈이다. 공교롭게도 <셜록> 시즌1이 한국에 정식 소개된 것은 영국 방영 후 넉 달 뒤, 시즌2는 4주 뒤, 그리고 시즌3는 4일 뒤였다. 그만큼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져왔다는 것이다. 더불어 영국 드라마(영드)에 특별한 애호를 표시하는 한국인이 부쩍 늘었다.

한국 시청자들은 이미 넘칠 듯 많은 외국 드라마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케이블 TV 채널을 경쟁적으로 채우고 있는 작품들에다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합법·비합법의 것까지 따지면 그 폭은 더욱 넓어진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가까운 일본의 드라마들이 큰 인기를 모았다. 인종적으로 큰 이질감이 없고, 생활 환경이나 문화적 정서가 비슷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본즈> <프리즌 브레이크> 등 수사·미스터리 장르를 중심으로 미국 드라마(미드)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졌다. 극장판 영화에 뒤지지 않는 스케일, 공들인 영상과 특수효과, 탄탄한 각본과 연기 등을 통해 질이 높아진 것도 있지만, 워낙 다채로운 장르와 소재로 사람들의 입맛을 잡아당겼다. 실제 미드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확실히 21세기 스토리텔링의 패권은 할리우드 영화, 일본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미드 시리즈가 움켜쥐고 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뭔가 뉘앙스가 다른 드라마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킨스> <프라이미벌> <와이어 인 더 블러드>…. 거기에는 어두침침하고 거칠고, 그러면서 묘하게 마음을 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엇보다 전형적인 선을 벗어나는 예측 불가능의 재미가 있었다. 이게 뭘까? 처음에는 배우들이 영어로 말하니까 미국의 군소 제작사에서 만든 드라마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영국식 억양을 구분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막으로만 감상하는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 미드가 아니라 영드였다.

이제 분명한 자각 속에 일부러 영국제를 찾아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물론 어느 나라에서 만들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하지만 분명히 궁금증이 생긴다. 미드는 압도적으로 양이 많다. 30여 개 채널에서 시즌마다 드라마를 쏟아내고, 각각의 에피소드도 10편을 훌쩍 넘긴다. 하지만 영국은 <채널4> 등 불과 몇 개 채널에서만 드라마를 방영하고, 시즌별 에피소드도 6편 내외다. 최고 인기작인 <셜록>도 시즌별로 겨우 3편씩만 내놓고 있다. 이처럼 강력한 미드의 물량 공세 속에서 어떻게 영드가 해외에서도 독자적인 팬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미드와 영드로 분명히 나뉘는 대중의 선호도는 어디에서 나올까? 그들은 각자 어떤 장점으로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을까?

고전 원작의 달달한 로맨스는 ‘영드’의 힘

미드는 워낙 방대하게 다양한 소재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니 수가 적은 영드의 특이성을 통해 양쪽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용이해 보인다.

먼저 우리가 가장 쉽게 보아온 것은 애거사 크리스티나 코넌 도일 원작의 추리 드라마다. <미스 마플> <명탐정 포와로> <셜록 홈스> 시리즈는 심심찮게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영되고 있다. 하나 이들은 오래전에 제작된 것으로, 최근의 영드 열풍과 연결시키기엔 어려워 보인다.

더 중요한 부류는 영국의 가 만들고 한국의 EBS가 주로 소개하는 고전문학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들이다. <오만과 편견> <폭풍의 언덕> <센스 앤드 센서빌러티> <더버빌가의 테스> 등 누구나 제목 정도는 들어본 소설들을 정통파의 솜씨로 재현해 보여준다. 이 중에는 로맨스 장르가 많은데, 아무래도 TV 드라마의 주요 시청자가 여성이라는 측면이 작용하는 것 같다. 제인 오스틴 풍의 고전 로맨틱 코미디는 영국 문화의 질리지 않는 히트 상품이다. <오만과 편견> 시리즈의 다아시 캐릭터로 인기를 모은 배우 콜린 퍼스는 그 이미지 그대로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출연해 국제적인 사랑을 받기도 했다.

이런 경향의 작품 중에는 마치 고전문학을 소재로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리지널 대본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있다. <채널4>의 <데블스 호어>는 청교도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 로맨스이고, 의 <다운튼 애비>는 20세기 초반 요크셔 지방의 귀족 가문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다운튼 애비>는 영드에 비교적 냉담한 미국에서도 문학적 향수를 자아내며 여성 시청자의 큰 사랑을 받고 있고 국내에서도 상당수 팬을 만들고 있다.

사실 고전 로맨스만이 아니다. 지금 세계 대중문화의 씨실과 날실을 엮고 있는 수많은 ‘장르’의 원형은 19세기 중·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영국에서 만들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애거사 크리스티와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 희대의 살인범 잭 더 리퍼의 전설, 허버트 웰스가 창조해낸 <우주전쟁> <투명인간> <타임머신> 등의 공상과학소설(SF),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모험 액션과 심리 스릴러…. 할리우드 영화와 미드를 통해 전세계에 보급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영국 소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니 영국인은 그 모든 장르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지킬> <셜록> 등 최근의 작품을 통해 그것을 가장 세련되게 현대화할 수 있는 것도 자신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압도적인 힘으로 그 모든 걸 자기식으로 바꿀 수 있다. 스스로를 ‘월드’라고 부르며 어떤 작품이든 미국 도시를 배경으로 미국식 주인공이 등장해 미국식 결말을 맺게 한다. <셜록 홈스>를 미국식으로 바꾸어놓은 <엘리멘트리>는 섹시한 여배우 루시 리우를 왓슨 캐릭터에 집어넣기도 한다. 미드는 많은 우여곡절을 펼쳐내지만 되도록 깔끔하게 정의를 실현한다. 시청자가 찜찜한 마음으로 TV를 끄는 걸 원치 않는다. 이를 두고 ‘디즈니식 결말’이라고 말하며 미드를 폄훼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식 재해석이 예전처럼 스테레오타입으로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진단의학과를 배경으로 한 의학 드라마 <하우스>의 주인공은 자기도취에 빠진 약물중독의 천재다. 제작진이 공공연히 말하듯, 모든 사람을 깔보는 이 잘난 인간의 모델은 셜록 홈스다. 의 <셜록> 이전에 100년 전의 구닥다리 탐정을 복합적이면서도 깊이를 갖춘 현대적 캐릭터로 변신시킨 게 바로 미드였다. 물론 그 역할을 영국 출신 배우인 휴 로리가 맡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고전 원작의 드라마는 확실히 영국이 주도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완전한 오리지널인 현대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는 어떤 차이를 보일까? 특히 영드를 원작으로 미국판이 만들어진 <오피스> <라이프 온 마스>를 비교해보면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난다.

세트부터 컴퓨터 그래픽까지… 화려한 볼거리 ‘미드’

미드와 영드는 비주얼에서부터 확연히 차이가 난다. 미드에서는 어쨌든 슈퍼모델급 배우들이 줄줄이 나온다. 처럼 무대 자체가 미끈한 수영복의 미녀들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경우만이 아니다. <프리즌 브레이크>처럼 범죄자가 득시글거리는 드라마에서도 여러 인종을 대표하는 쫙 빠진 배우들이 등장한다. 반면 영드는 좋게 말해 현실감 넘치는 얼굴들로 가득하다. 드라마를 한참 보다가도 ‘그래서 과연 주인공은 언제 나와?’ 싶은 경우가 많다. 달리 말하면 외모보다는 연기력에 중점을 둔다. 영국이 자랑하는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들이 탁월한 연기로 그 캐릭터에 빠져들게 한다. 비교적 짧은 시즌 길이도 좋은 배우들이 쉽게 출연하는 요소가 된다.

배경이나 장면 묘사에서도 미드의 때깔이 훨씬 눈부시다. 화려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각본 단계에서부터 애쓰고, 완벽한 세트에 공들인 컴퓨터 그래픽을 더한다. 이들의 진정한 상대는 다른 나라의 드라마가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드는 어딘가 답답하고 구질구질하다 싶을 때도 많다. 영드를 대표하는 초장기 연재 시리즈 <닥터 후>는 명색이 SF인데 최근작의 특수효과 수준이 1960년대 정도로 여겨진다. 애초에 공중전화 부스를 통해 시공을 여행한다는 콘셉트 자체가 B급의 냄새를 풍기는데, 이런 걸 독특한 코미디 감각으로 버무려놓는다.

드라마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해진다. 미국의 10대 드라마를 보면 <비버리힐스 아이들> <디 오 시> <가십걸>까지 상류층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분명히 되바라진 아이들이고 어른 못지않은 연애 행각을 보여주지만, 그 전체가 바비인형들이 살아가는 판타지 동화 같다. 하지만 영국 10대 드라마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스킨스>는 10대들의 성장 드라마이지만 한국 드라마 <반올림> 같은 걸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정말 적나라하게 부모와의 사별, 동성애, 짝사랑, 자살 같은 10대의 문제들을 그리고 있다. <미스핏츠>는 문제 청소년이 초능력을 가지면서 벌이는 사건을 다루는데, 그 상상력의 과격함은 미드에서는 절대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영국 배우 이드리스 엘바는 <와이어>(), <루터>()의 주연을 맡아 두 나라의 드라마 제작 환경을 깊이 체험했다. 그에게 <월스트리트저널>의 블로그 ‘스피크이지’가 영국과 미국 범죄 드라마의 차이에 대해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우리(영국)는 범죄를 묘사하는 데 훨씬 폭력적이고 본능적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주인공은 전혀 틀에 박혀 있지 않고, 악역은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미국에서는 좀더 스테레오타입에 얽매어 있다. 크고 못되게 보이는 남자는 크고 못됐고, 마약상은 보통 흑인이다. 내 생각에 영국의 범죄 드라마는 훨씬 심리적이다.” 주검들이 그의 말을 돕는다. 영국 수사 드라마 <화이트채플>의 주검들은 고어 영화처럼 적나라하고 역겹다. 시리즈가 핼러윈 장난감처럼, <덱스터>가 잘 손질된 정육처럼 주검을 보여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미드는 영드보다 훨씬 강력한 경쟁 속에 놓여 있다. 중간중간 광고가 많이 삽입되기 때문에 여차하면 채널이 돌아갈 위기에 처한다. 그래서 더 자극적일 것 같지만 평균적인 시청자의 구미, 예측 가능한 정도를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반면 는 상업광고 자체가 없다. 그래서 공영성이 강조되는 제작 환경이지만, 세부 묘사는 훨씬 자유롭게 열려 있다. 다른 상업채널은 이보다 더 큰 자유 속에서 욕설과 폭력 장면을 내보낸다. 그리고 시청자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기묘한 상황으로 이끌고 간다. 어쩌면 영드의 미학은 멘털 붕괴에 있고, 그걸 버티는 자만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잘난체 ‘미드’ vs 인간 천착 ‘영드’, 당신의 선택은?

미드냐 영드냐? 이제 당신의 취향이 중요하다. 미드는 어떻게든 정의를 실현하려고 한다. <콜드 케이스> <로 앤드 오더> 등의 범죄 드라마를 보면 가끔 사법제도의 한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정의와 불의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보여준다. 영국의 수사 드라마는 그 결말에 주인공 형사가 인간 존재가 처해 있는 근본적 비극,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문제에 대해 독백하며 끝내는 경우가 많다. 미국인은 어떻게든 삶을 극복하겠다는 오래된 아메리칸드림을 여전히 꾸고 있다. 영국인은 어떻게 되든지 삶은 굴러간다는 자조 속에서, 기네스 맥주와 축구 경기를 보며 산다. 미국인은 어쨌든 자신들의 잘남을 뻐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인이나 인도인보다 영국인을 더 싫어한다. 그것은 스스로가 강력한 멘털을 가지고 있음을 자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대중문화가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 영국은 거의 예외적으로 독자적인 파워를 형성하고 있다. 대중음악, 영화, 패션은 물론이고 TV 드라마에서도 그 세력은 분명히 느껴진다. 여기에는 영국이 영어를 쓰고 있기에 미국 주도의 세계 문화 패권에 쉽게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스페인·프랑스·독일·러시아의 드라마가 단지 언어적 장벽 때문에 대외적 영향력을 펼치지 못한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라면 한국 드라마가 다른 형태의 지표가 될 수 있다. 일본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가진 나라를 양쪽에 두고서도, 오히려 드라마를 열렬히 수출하며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나? 영국과 한국은 드라마의 강소국으로 지구의 한쪽씩을 나눠 가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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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명석 대중문화비평가. KBS 라디오 <문화공감>의 ‘대중문화 엿보기’ 코너를 맡고 있고, <한겨레21>에 TV 비평 ‘TV, 이것 봐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어느 날 갑자기 살아남아버렸다>(궁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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