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6:10 수정 : 2014.03.04 17:27

포크음악의 거장이자 반전운동에 앞장섰던 피트 시거는 미국의 ‘프로테스트포크’를 발전시킨 전설적인 인물이다. 2011년 구순을 넘긴 나이에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집회에 참가하는 등 행동하는 뮤지션이었다.뉴시스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 아무리 아쉬워도/ 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 제각기 모두 제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 혹 그 언제인가/ 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 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 밤처럼/ 서로 속삭일 것이다/ 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 어느 한 가슴에도/ 메아리의 먼 여운조차/ 남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시인 김남주는 유고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1995년)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느꼈던 시절, 펜 대신 칼을 쥐고 주저 없이 재벌집 담벼락을 넘은 그다. 그 일로 17년형을 선고받고, 옹근 9년3개월을 갇혀 지냈다. 그 세월에 얻은 병마가 풀려난 몸뚱이를 갉아먹었다. 생의 막바지에, 시인은 심연의 고독을 느꼈던가?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이 있다. 그러니 희망을 놓지 말 일이다. 별도, 노래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 존재다. 시인의 20주기를 맞아 그가 남기고 간 시 519편이 전집으로 묶여나온 것을 바라보면서, 치열하게 살다 간 또 한 명의 ‘노래꾼’을 떠올리는 이유다. 삶 자체가 역사였으니, 그 또한 홀연히 떠난 시인을 닮아 있다. 다만 그는, 세상을 바꾸는 ‘노래의 힘’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지난 1월27일 밤 미국 뉴욕주 장로교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든 채로 세상을 등진 전설적인 포크 가수 피트 시거 말이다. 향년 94.

노동운동과 운동권 가수의 길

피트 시거는 1919년 5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찰스 시거는 음악학자 겸 작곡가였고, 어머니 콘스탄스 에드슨은 콘서트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가 노래를 부른 것은 집안 내력이었던 셈이다. 막내 피트가 태어날 무렵 젊은 음악가 부부는 틈날 때마다 방방곡곡으로 공연을 다녔다. 이른바 ‘트레일링 악단’이다.

찰스 시거는 시골 사람들에게 베토벤이나 바흐 같은 ‘좋은 음악’을 선물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자동차를 직접 ‘캠핑트럭’으로 개조했다. 그 덕분에 어린 삼형제 찰스, 존, 피트도 부모를 따라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야영을 했다. 부부는 피트 시거가 8살 때인 1927년 이혼에 합의했다. 콘스탄스 시거는 연주자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지 못했고, 그게 부부 사이의 유일한 문제였다.

그 무렵 피트 시거는 처음으로 우쿨렐레를 손에 쥐었다. 10대에 접어들어서도 피트는 종종 아버지를 따라 곳곳에서 벌어지는 지역 음악회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1936년 여름 노스캐롤라이나주 서부 애슈빌에서 열린 ‘마운틴 댄스·포크 페스티벌’에서 그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만들어낸 5현 악기 밴조다. 그의 밴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이 연장은 증오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낸다.”

그해 하버드대학에 진학한 피트 시거는 사회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다. 파시즘의 광기가 유럽에서 배회하던 때다. 시거는 청년공산주의자연합(YCL)에 가입했다. 대학 쪽에선 장학금 지급을 중단했다. 강의실 대신 집회장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그는 입학 2년 만인 1938년 학업을 중단했다. 그 무렵 공산당에도 입당했다. 그는 “난 인종차별에 반대했다. 공산당도 그랬다. 난 노동조합을 지지했다. 공산당도 그랬다”고 설명했다.

20세기 들어 중산층을 중심으로 전세계적으로 포크송 바람이 불었다. 포크송 음반 제작도 봇물을 이뤘다. 그렇게 제작된 음반은 도서관으로 보내져 대중과 만났다. 이 무렵 음악학자 존 로맥스는 음반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포크송에 접근했다. 미국 전역에서 채록한 포크송을 모아 <아메리칸 발라드와 포크송>이란 제목의 책으로 묶어냈다.

1930년대 말 로맥스는 앨런과 함께 미 의회도서관에서 포크송 채록·녹음 작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피트 시거도 그 작업에 동참할 기회를 얻었다. 그가 우디 거스리를 비롯한 당대의 포크송 권위자들과 친분을 나누게 된 계기였다. 그는 이내 거스리를 따라 화물열차에 몸을 싣고 미국 전역을 돌며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죽을 때까지 노조에 남겠다>(I’m sticking to the union till the day I die) 같은 노래를 즐겨 부르던 때다.

두 사람은 내친김에 노동운동가를 모은 책까지 냈다. <고난받는 이들의 애창곡>(Hard hitting songs for hard hit people)이란 제목이 붙었다. 책 출간을 계기로 그들은 동료 노동가수들과 함께 ‘알마낵 싱어스’(Almanac Singers)란 밴드를 결성하고, 전국의 파업 현장을 돌며 직업 ‘운동권 가수’의 길로 본격 접어든다. 시거는 알마낵 싱어스 시절에 대해 “노래로 노동운동을 하고 싶던 시절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룹 위버스의 히트와 매카시즘 광기

1941년 12월7일 이른 아침, 일본군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나라 전체가 들썩였다. 전쟁은 기정사실이 됐다. 반파시즘 투쟁을 노래해온 알마낵 싱어스가 처음으로 전국 단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것도 그때였다. 출연 요청이 빗발쳤다. 공연 가능한 노래 제목을 알파벳 순서로 정리해달라는 요청까지 들어왔다. 그런 일을 누가 할까? 한 여성팬이 “내가 해주마”고 나섰다. 그의 이름은 토시 얼라인 오타였다.

토시 오타는 1922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타카시 오타는 일본인 망명객이었고, 어머니 버지니아 하퍼 베리는 워싱턴 출신의 미국인이었다. 타카시 오타의 아버지, 그러니까 토시 오타의 할아버지는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을 일본어로 처음 번역한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가 ‘국외 유배형’에 처해졌을 때, 아들은 기꺼이 형벌을 대신 짊어졌다. 당시 일본법이 허용하던 바다. 토시 오타는 생후 6개월 만에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자랐다. 그는 1940년 맨해튼 음악·예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토시와 피트 두 사람은 1939년 말 포크 공연장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1942년 피트 시거가 육군에 입대했을 때, 토시는 “기다리겠다”는 말을 전했다. 쉼없이 편지가 오고 갔다. 1년여 뒤 첫 휴가를 받아 뉴욕으로 돌아온 피트 시거는, 무턱대고 연인에게 청혼했다. 두 사람은 1943년 7월 결혼식을 올렸다.

피트 시거는 사이판에서 군 복무를 했다. 애초 훈련받은 주특기는 전투기 엔진 점검이었지만, 이내 문선대 쪽으로 옮겨갔다. 병사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고, 노래 경연대회도 진행했다.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피트 시거는 노동가요를 부르는 이들의 전국 조직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민중의 노래’(The people’s song)다.

1945년 8월 전쟁은 끝났다. 미국 사회의 분위기는 급속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쟁이 또 다른 전쟁을 낳고 있었다. 냉전의 막이 올랐다. “유일하게 좋은 공산주의자는 죽은 공산주의자”란 구호가 유행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빨갱이’(Commie) 색출에 열을 올렸고, ‘민중의 노래’ 사무실도 어김없이 사찰 대상이 됐다.

노동조합 활동을 대폭 제한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이른바 ‘태프트-하틀리 법’(1947년 연방노사관계법)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지금껏 살아남아 위력을 떨치고 있는 이 법의 뼈대를 시거는 이렇게 짚었다. “노조 활동은 얼마든지 보장한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좌파세력을 척결하라. 결국 최고의 조직가들이 모두 쫓겨났고, 노동조합운동은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1948년 피트 시거는 알마낵 싱어스에서 함께 활동했던 리 헤이스와 새 밴드를 결성했다. 탁월한 알토 가수 로니 길버트와 기타를 능숙하게 치는 바리톤 가수 프레드 헬러먼을 그렇게 만났다. 전설적인 4인조 포크 그룹 ‘위버스’의 탄생이다. 그러곤 삽시간이었다.

젊은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노래한 유대계 포크송 <첸너 첸너 첸너>(Tzena, Tzena, Tzena)가 빌보드 차트 2위에 오르자, 디스크자키들이 위버스의 음반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서정적인 노랫말과 가락으로 1950년대 미국 최고의 인기곡 반열에 오른 <잘 자요, 아이린>(Good nignt, Irene)에 힘입어, 위버스는 음반을 내놓은 지 한 달 만에 판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피트 시거가 단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상업적 성공’이었다.

저항가수가 하루아침에 ‘아이돌’이 된 형국이다. 할리우드에서 라스베이거스로, 시카고의 파머하우스와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까지. 인기 나이트클럽마다 위버스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시거는 평생 담배와 술을 멀리했다. 나이트클럽 공연이 즐겁지만은 않았을 터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1952년, 위버스는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는 주간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의 진행을 제안받았다. ‘정상’에 걸맞은 대우도 보장했다. 바로 그때였다. ‘음악계에 잠입한 빨갱이 명단’이 공개됐다. 방송사는 갑작스레 출연 요청을 거뒀다. 광고주가 두 손을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최고의 인기 밴드는 하루아침에 ‘사악한 빨갱이 집단’으로 몰렸다. 위버스는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밥 딜런, 조앤 바에즈… 포크계 전설을 키우다

탄압은 1952~53년 극에 달했다. 매카시즘의 광기를 상징하는 미 하원 ‘반국가행위자 조사위원회’(HUAC)가 피트 시거와 리 헤이스에게 출석명령을 내렸다. 의회에선 집요하게 ‘정치적 성향’을 물었다. 헤이스는 ‘수정헌법 제5조’(묵비권 보장)를 내세웠다. 시거는 ‘수정헌법 제1조’(표현의 자유)를 앞세웠다. 그는 “누구에게 투표하든, 어떤 종교를 믿든, 그건 전적으로 내 개인의 문제”라며 답변을 거부했다. 그는 신념에 반한다는 이유로, 의회가 요청한 ‘국기에 대한 맹세’(충성 서약)도 거부했다. 1955년 미 연방법원은 의회모독죄로 기소된 피트 시거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판결이 뒤집히기까지는 옹근 7년 세월이 걸렸다.

활동 중단 3년여 만에 위버스가 다시 뭉친 것은 1955년 12월이다. 공연장은 뉴욕의 카네기홀, 공연일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일종의 도박이었던 것인데, 뜻밖에도 객석이 가득 찼다. 공연 실황은 뱅가드레코드가 음반으로 제작했다. 위버스는 다시 바빠졌다. 광고 섭외도 들어왔다. 담배회사 광고였다. 피트 시거는 탐탁지 않았다. 다들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시거는 “그 정도로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맞받았다. 그는 1958년 4월 위버스를 탈퇴했다.

그 무렵에도 FBI는 집요하게 시거의 주변을 배회했다. 그가 노래를 부르거나 가르칠 수 있도록 허용된 유일한 대상은 어린이였다. ‘초등학생한테 포크송을 가르친다고 문제가 될 게 있겠어?’ FBI는 쉽게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노래 몇 곡에 아이들이 반정부운동에 뛰어들었을까? 물론 그런 건 아니었다. 아이들은 그저, 자라났다. 여름방학 캠프에서 시거의 노래를 들었던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 밴조 동아리를 만들었다. 그러곤 시거를 불러 콘서트를 열었다. 1960년대 대학가에서 피트 시거 열풍이 분 이유다.

그 무렵 항소심에서 의회모독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은 시거는 세계일주를 계획한다. 1년 일정으로 가족 모두가 떠났다. 그가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한국을 찾아 대표적인 포크송 <아리랑>을 채록한 것도 이때였다. 1963년 시거 가족이 귀국했을 때, 미국은 ‘포크 전성시대’로 완연히 접어들었다. 시거가 주도해 1959년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서 첫선을 보인 ‘포크 페스티벌’은 벌써 4년째로 접어들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해마다 그곳으로 순례를 왔다. 밥 깁슨, 밥 딜런, 조앤 바에즈 같은 포크계 전설들이 그곳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언젠가는. 오, 가슴 깊이 나는 믿네. 언젠가, 우리 기필코 승리할 것이라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목사이자 작곡가인 찰스 앨버트 틴들리가 1930년대에 지은 이 노래를, 피트 시거는 ‘민중의 노래’ 시절인 1948년 9월 노랫말을 다듬어 세상에 알렸다. 민권운동의 바람을 타고, 1960년대 들어 <우리 승리하리라>는 미국판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떠올랐다. 시거는 그 시절을 이렇게 돌이켰다.

“역사상 미국 민권운동 시절보다 더 많은 노래가 불려진 때가 있었을까? 노래는, 그저 삶을 조금 더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다. 어떤 노래는 사는 게 왜 그렇게 힘든지 그 원인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또 어떤 노래는 그 어려움의 원인을 뿌리 뽑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바야흐로 피트 시거 인생의 ‘세 번째 전쟁’이 불을 뿜고 있었다. 그는 <내게 만약 해머가 있다면>(If I had a hammer), <그 많은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등 반전 노래를 잇따라 내놨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보던 시거의 시선이 한 장의 사진에 박혔다. 허리까지 차오른 진창을 헤집고, 베트남의 메콩강 유역을 거슬러 올라가는 미군 병사의 모습이다. 구호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허리 깊숙이 진창에 빠졌는데, 저 바보는 오로지 전진하라 하네.’

“소대장이 죽자, 선임하사가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지휘관이다. 그러곤 무조건 전진하란다. …목까지 차오르면 그만하라 할 텐가, 머리까지 파묻혀야 그만하라 할 텐가? 대체 언제까지 전쟁을 할 텐가. 이 깊숙한 진창에서.” 베트남전 반대운동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빅 머디>(Big Muddy)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2년 피트와 토시 시거는 북베트남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았다. 시거 부부는 변호사와 상의도 하고 친지·동료들의 의견도 구한 끝에 베트남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야 했다. 그리고 보여주고 싶었다. 베트남은 아름다운 땅이고, 거기엔 좋은 사람들이 산다는 것을. 살해 협박이 끊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 여정의 끝에서 나온 노래가 <브링 뎀 홈>(Bring them home)이다.

구순에도 ‘오큐파이’ 참가한 ‘불편한 예술가’

“정말 미국을 사랑한다면, 장병들을 데려오세요. 데려오세요. 베트남의 장병들을 지지한다면, 데려오세요. 집으로 데려오세요. 장군들은 슬퍼하겠죠, 잘 압니다. 데려오세요, 그들을 집으로. 적들과 싸우고 싶겠죠, 무기를 시험하고 싶겠죠. 그냥 집으로 데려오세요. …조국을 사랑한다면, 베트남의 장병들을 아낀다면, 그들을 어서 집으로 데려오세요.”

전쟁은 계속됐다. 정부는 완고했다. 그 완고한 마음을 돌린 것은 시민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해 나섰다.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노래였다. 시위를 벌이고, 행진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더러는 매를 맞고 붙잡혀가기도 했다. 전쟁은 그러고서야 끝이 났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시거의 관심은 차츰 환경 분야로까지 넓어졌다. 그의 고향인 뉴욕주의 젖줄 허드슨강이 그 무렵 산업폐수와 생활하수로 죽어가고 있었다. ‘허드슨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던 때다. 시거는 강을 되살리기로 했다. 3년여에 걸쳐 커다란 외돛배 한 척을 건조했다. ‘클리어워터’호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 함께 배에 올라타고 노래를 불렀다. 상류에서 하류로, 다시 강을 거슬러 오르기를 되풀이했다. 강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거 부부가 주축이 돼 환경단체 ‘클리어워터’도 만들어졌다. 해마다 6월이면 허드슨 강변에서 ‘그레이트 허드슨 리버 리바이벌’이란 축제도 열었다. 함께 나눠 먹고, 노래 부르고, 춤을 췄다. 첫해 수백 명으로 시작한 축제는 40년 넘게 이어지면서 수만 명 규모로까지 불어났다.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강물도 눈에 띄게 되살아났다.

“피트 시거는 ‘불편한 예술가’다.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을 노래했다. 그로 인해 고난을 당했다. 방송 출연도 금지됐다. …어떤 가수는 음악사에 한 획을 남긴다. 피트 시거는 노래로 역사를 만들었다.” 1994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그에게 예술가에게 주는 최고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를 탄압하던 미국 정부의 마음까지 돌려놓을 정도로 세월이 많이 흐른 게다. “세상 모든 일에는 순리가 있고, 때가 있다.” 그가 1950년대 말 내놓은 <턴 턴 턴>(Turn, turn, turn)의 노랫말 그대로였다.

팔순을 넘긴 뒤에도 피트 시거는 이라크전쟁 반대집회에서 노래를 했다. 구순을 넘기고서도 ‘오큐파이 월스트리트’(월가를 점령하라) 집회에서 행진을 했다. 아내 토시 시거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곁을 지켰다. 사람들은 토시에 대해 ‘피트 시거가 피트 시거로 살 수 있게 해준 사람’이라고 말했다.

2013년 7월9일 토시 시거는 부부가 오랜 세월 함께한 뉴욕주 비콘의 통나무집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 향년 91. 부부의 결혼 70주년 기념일을 9일 앞둔 날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6개월 남짓 만에 피트 시거가 세상을 등졌다. 두 사람은 애초부터 떨어져 살 수 없는 존재였던 게다.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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